동아일보 사건(7) – 사건의 파장

`얼마나 당했으면 믿는 사람들이 시위까지...` 시위사건에 일부 여론은 동정적
발행일 발행호수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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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동아일보 사건을 보도한 1960년 12월 11일자 동아일보. 라고 호들갑을 떨었으나 동아일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사유에 대해서는 진실과 동떨어진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1960년 12월 11일자 한국일보는 동아일보사건을 ‘수천 박장로 교도 동아일보사를 습격, 신문사상 최대규모의 테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아침 9시 5분경 일부 신도들이 정문의 셔터를 걷어 올리고 찬송가를 고창하면서 사내로 진입,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비치되어 있는 서류와 신문 등을 밖으로 내던지기 시작했다. 9시 반경 셔터가 완전히 올라가자 밖에 서 있던 수천 명의 신도들이 물밀 듯이 사옥으로 몰려들었는데 경비하고 있던 경찰관들의 최루탄 발사가 더욱 그들의 감정을 격화시킨듯, 안으로 몰려든 그들은 먼저 1층 영업국을 지나 2층 총무국과 중역실, 3층 편집국을 거쳐 일부는 옥상에까지 올라가 나부끼는 동아일보 사기(社旗)를 내리고 그 대신 가지고 온 플래카드를 게양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 피해 거의없어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각 신문 방송의 요란한 대서특필과는 달리 실제로 동아일보의 피해는 신기할 정도로 전무하였다. 동아일보 스스로도 “윤전기는 파괴를 모면하였고 본사 직원 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차량 2대와 활자함이 파손되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원래 동아일보 사건의 본질이 동아일보의 허위보도에 대한 신도들의 순수한 항의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사건과 관련하여 또한가지 신기한 것은 신도들 중에 사망자나 중상자가 1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200여 명의 경찰이 동아일보사에 배치되어 경비에 임하고 있었는데 수적으로 열세이던 이들은 당황한 나머지 양같이 순한 부녀자 신도들에게 상상도 할 수없는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신도들의 얼굴을 향하여 무차별 곤봉으로 가격(加擊)하고 최루탄까지 발사하였으며 손에 잡히는 대로 부녀자들을      2층 혹은 3층 창문을 통해 밑으로 내던졌다. “내가 3층에서 창문 밖으로 떨어지고 내 위로도 여러 명이 떨어졌다”고 이범옥 권사(73, LA교회)는 증언했다. 2층, 3층에서 떨어졌다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누가 안고 떨어지기라도 한 듯 한 사람도 크게 다친 사람이 없었다.
 
`비난아닌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난동’을 보고 ‘여론이 들끓었다’고 보도하면서 ‘무법 무질서를 통탄한다’는 제하의 다음과 같은 사설까지 실었다. “그들이 ‘난동’의 구실로 성화에 관한 보도를 문제 삼았지만 그것은 의식적으로 그들의 신의(信義)를 비판 내지 공격한 것도 아니요 사실대로 보도한데 그치는 것이었다. 물론 신교(信敎)는 자유다. 그들이 어떠한 형식과 내용의 종교를 믿건 법에 위배됨이 없고 혹세무민하지 않는 한 신앙활동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교가 자유인 동시에 비판 또한 자유라는 것이 민주사회의 철칙이 아닌가?”
 
동아일보는 그들이 신앙촌을‘비판’했을 뿐이고 그것은 언론의 자유라고 호도(糊塗)하였다. 그러나 ‘사실의 보도’라는 언론의 정도를 떠나, 동아일보가 수년간에 걸쳐 얼마나 악의적이고 집요하게 신앙촌에 대하여 사실이 아닌 허위보도를 했는가 하는데 대하여는 아무런 설명이나 자성(自省)도 없었다. 진실에 기초한 비판과 허위보도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도 아무 말이 없었다.
 
사실은 나도 그분 존경
 
동아일보사건에 대하여 표면적으로는‘난동’,‘테러’운운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오히려 동정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신앙촌에 대한 동아일보의 횡포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치안국 경비과장 김동순은 “사태의 진압을 위해 동아일보가 사과문을 내달라”고 동아일보의 허위보도를 기정사실화 했으며, 서울지검 김종수 검사장은“성화를 조작할 수 있다는 기사가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폭력은 안된다”고 말하여 동아일보 기사가 객관적으로 허위였음을 우회적으로 표시하였다. 또 시온대학생회 간부들이 당시의 신현돈 내무장관을 방문하여 “동아일보 사건은 동아일보의 계속되는 악의적 허위보도를 보다 못한 일부 교인들이 항의하다가 우발적으로 자제력을 잃고 일으킨 것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대단히 죄송하다”고 사과하였더니, 신장관은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억울해도 실력행사를 해서야 되겠느냐”고 짐짓 엄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동정적인 표정이 되는 것이었다. 방문했던 대학생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 신장관은 “사실은 우리 집사람도 박장로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바 있어 나도 박장로님을 깊이 존경한다.”고 말하면서 신앙촌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음을 비치는 것이었다. (신앙신보 1975. 6. 16.)
 
동아일보 사건으로 교단으로서는 천여 명의 신도들이 구속되는 큰 시련을 겪었으나 대부분 석방되고 182명이 기소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당사자들의 이야기이다.
 
“저도 용산경찰서를 거쳐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함께 해 주셨습니다. 목구멍에서 자꾸 단침이 올라와 화장실에 가든 어딜 가든 계속 연결이 되었으며 감옥 안의 물 항아리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꿈을 꾸기도 하였습니다.”(이승옥권사, 80. 덕소신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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