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사건(6) – 1960년 12월 10일

허위보도 정정요구에 응하지 않는데 분노, 수천 신도들 동아일보사에서 시위
발행일 발행호수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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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물과 축복 사진에 대한 동아일보사의 거듭된 악의적 허위보도에 대하여 정정과 사과를 요구하는 시온대학생들과의 격론 끝에 동아일보사가 마침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데 대하여는 합의하였으나, 사과와 해명의 형식을 놓고 양측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1면에 정정기사와 함께 사과문을 발표해 달라는 시온대학생들의 주장과 광고란에 해명문(解明文)을 게재해 주겠다는 동아일보사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동안, 동아일보의 소극적 태도에 대한 신도들의 분노는 점차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1960년 12월 10일 동아일보사 앞에는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여서 동아일보사의 사과와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신도들이 이제나 저제나 동아일보사의 성의있는 조치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신도들의 요구에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동아일보사의 태도에 참다못한 한 청년이 동아일보사 3층으로 올라가 동아일보 신문을 아래로 뿌렸다. 그리고 “자유필봉 악용하여 종교자유 침해 말라” “축복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다! 동아일보는 사죄하라” “허위기사 동아일보 만천하에 사과하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동아일보 사옥에 내걸었다.

이 광경을 본 교인들 중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앞에 있는 사람을 밀기 시작하였고 앞에 있던 사람들은 동아일보사 정문 안으로 떼밀려 들어갔다. 이때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은 마구잡이로 곤봉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무방비로 문 쪽으로 들어가던 교인들이 머리에 곤봉 세례를 받고 피를 흘렸고 계단에서 떠밀리고 굴러 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오성민 퇴임관장(72, 기장신앙촌)도 당시에 현장에 있었다.“나도 그때 동아일보사 정문 앞에 서 있었는데 사람들이 뒤에서 미는 바람에 밀려서 저절로 동아일보사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안쪽에서는 경찰들이 할머니와 부녀자들에게 사정없이 곤봉 세례를 퍼붓는가 하면 여자들을 밀쳐 창문 밖으로 떨어뜨리기까지 하였고, 최루탄을 발사하여 신도들을 차고 때리면서 모조리 경찰차에 싣고 있었다.”

이 때 경찰이 어느 여자교인 한 사람을 붙잡아 거칠게 다루면서 경찰차에 실으려 하는 것을 보고 군중 틈에 섞여 있던 석세조 시온고교장(74)은 “어이. 그 사람은 보내 줘라.”라고 ‘지시’를 하였다. 경찰은 잠바 차림의 석교장을 힐끗 쳐다보고서는 경찰간부인 줄 알고 “예. 알겠습니다.”하며 그 여자 교인을 놓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자 동아일보는 1960년 12월 11일자 신문에서 이때다 싶게 ‘감람나무 신도들 폭도화(暴徒化)’‘1024명을 긴급구속’‘주모자(主謀者) 문초’‘신앙촌을 재수사’ 등으로 기사를 대서특필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보복이라도 하듯 ‘문제의 축복 사진 위조’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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