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사건(8.끝)

하나님 역사 부인하는 사람들과도 합법적 투쟁을 '종교인의 물리적 시위는 유감된 일'
발행일 발행호수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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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①동아일보 사건을 보도한 1960년 12월 11자 한국일보 이라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② 정규용승사 ③양성일퇴임관장

동아일보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사람들의 옥중 체험기를 계속하여 들어 본다.

“1960년 12월 10일부터 두 달간 저는 동아일보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살이를 했습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동아일보사건이란, 하나님 집회 때 나타난 축복 사진을 보고 인위적인 조작이라고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것을 보고, 사실을 오도하는 기사를 정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뜻에서 찾아간 우리를 경비원과 경찰들이 곤봉으로 무차별 내리쳤습니다. 이 때에 야기된 사건을 난동으로 몰아 투옥시켰던 것입니다.
저도 그날 투옥 당해 두 달간 옥고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우리 식구가 감방에 분산되어 있을 때 하나님께선 영으로 강하게 축복해 주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녁 7시가 되면 하나님께서 저희를 위해 축복하시는 시간이었기에 우리는 그 시간을 예배시간으로 정하고 작은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부르던 찬송가 가사가 생각납니다.‘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하고 목메어 울부짖을 때 방안엔 향취가 진동하고 같이 있던 죄수들도 감화되어 찬송가를 같이 따라 불렀습니다. 그때 우리는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셨던 하나님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두 달 후에 출옥하여 학교에 돌아오니 전과자 취급하며 복직이 안된다 하여 휴직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족생활이 어렵게 되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아시고 쌀 한 가마니를 보내 주셨던 은혜를 생각하면 지금도 잊을 수 없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정규용승사, 88. 기장신앙촌)
“하나님 집회에 은혜가 내리는 것이 사진에 수없이 찍혔는데, 그 축복 사진을 동아일보는 사진 조작이라고 허위보도를 하였습니다. 그 일이 1960년 12월경이었는데, 그동안 갖은 모략과 중상으로 비방을 하여도 참고 참아 왔던 교인들이 분연히 일어나 항의하다 사건이 악화되어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습니다. 저도 그때 투옥되어 약 3개월 동안 서울 서대문형무소 감옥 8사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시기는 추운 겨울철이라 동상으로 발이 퉁퉁 붓고 귀가 얼어 뻘겋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감방 복도에서나 실내에는 늘 향취가 진동하며 하나님께서 같이하신다는 확인을 해 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도 감옥 3사에 계셨는데, 하루는 투옥된 교인들이 재판을 받으려고 하나님께서 계시는 3사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포승으로 묶인 채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니,“힘을 내라!”고 하시며 “쉭! 쉭!”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당한 고통이 크시거늘 불안해할지 모를 저희들을 위해 활짝 웃으시며 축복해 주셨던 그 모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양성일 퇴임관장, 77. 소사신앙촌)
한편 동아일보와의 대화의 주역으로 나섰던 시온대학생회의 천희문씨는 당시 모 방송국에 취직하여 아나운서로 근무하고 있었다. 1960년 12월 10일, 아나운서실의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듣고 천희문씨는 자기 귀를 의심하였다. 각 방송사들은 긴급뉴스를 통해 “박장로교‘광신도들’이 동아일보사를 습격했다”고 일제히 보도하면서, 주동자는 천 아무개인데 체포되지 않아 전국에 수배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뉴스를 듣던 주위의 직원과 동료들이 “당신 이름과 같다. 혹시 당신 아닌가?”하면서 이상한 듯이 천희문씨를 힐끔 힐끔 쳐다 보는 것이었다. 천희문씨는 “그럴 리가 있나. 아마 동명이인(同名異人)일 것”이라고 급히 둘러댔다.
그때 같은 방송실에 근무하는 음악담당 여자 아나운서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콜록콜록 하면서 방으로 들어서더니,“박장로교‘광신도들’이 동아일보를 습격하는 바람에 출근길에 차를 타지 못해 광화문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 최루탄 냄새가 어찌 지독한지 숨도 쉴 수 없었다”고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천희문씨는 결국 그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도망치듯 뛰쳐나와 시골 친척집 다락방으로 가서 숨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몇 년후 천희문씨는 동아일보사와 또 한번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아일보사 기자시험에 합격한 천희문씨가 면접장에서 시온대학생회 시절 상대했던 김영상국장과 딱 마주치게 된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김국장이,“당신 동아일보사건 때 신앙촌 대표로 나왔던 천아무개가 아니냐?”하며 천희문씨를 면접장에서 쫓아낸 것이었다. 동아일보사건으로 182명이 기소되어 그중 2명에게 소요, 특수폭행치상, 특수건조물침입죄 등의 죄명으로 징역 1년 6월, 5명에게 집행유예의 형이 언도되는 시련을 겪으며 사건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신도들이 허위보도를 항의하다가 우발적으로 일어난 동아일보사건은 하나님께 더 큰 부담을 지워 드린 결과가 되었다.
동아일보사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종교인으로서 기물에 손을 대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부인하는 자들과 투쟁하는 합법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 사건으로 축복에 대한 현장검증 차 1960년 12월 23일 소사신앙촌을 찾아온 참의원(參議員) 조사단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 사진은 조작될 수 없으며, 국과수의 감정결과가 반드시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고 축복 사진의 실재(實在)에 관해 답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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