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들의 배반(3)

기성교회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와
발행일 발행호수 2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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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참 생명의 맛을 본 신도들은 거짓 목자의 정체를 알고 기성교회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와

1955년 7월 하순경에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하나님의 천막집회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각 교회에는 소위 ‘예배모범’이란 것을 배부하여 모처럼 천막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 중에도 위축되어 주저앉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은혜를 받은 기성교회 목사들 중에는 `박태선 장로의 운동이 사람이 하는 일이면 방임하여도 자연 소멸될 것이며 만일 참된 성령의 역사라면 이 일을 제지하는 자가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 하여 주저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한기련(韓基聯)을 중심한 교회 지도자들은 단호한 태도로 나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막집회는 계속되어 1955년 9월 18일부터 인천집회, 9월 30일부터 대구집회, 10월 16일부터 부산집회, 10월 25일부터 서울 제2운동장집회, 11월 초순 원주집회, 11월 25일부터 광주 공설운동장집회, 12월 8일부터 순천집회, 12월 중순에 목포집회로 이어졌다. 처음 남산집회를 가진 이후 만 8 개월 만에 10개 도시에서 15회의 경이적인 대집회를 가졌던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반 전도관 운동도 점차 강화되어 갔다. 그들은 1956년 3월 15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경기임시노회를 소집하여 박태선 장로님을 이단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목사들은 말하기를 `박태선 장로 집회에 교인들을 가지 못하게 해야지 가기만 하면 무슨 ‘요술’을 쓰는지 전부 그를 따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설교 2집, 23p)

은혜 받으라고 집회 참석을 권유하던 목사들이 이단이라며 하나님의 집회 참석을 가로막자 양떼들은 동요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참 생명의 맛을 본 신도들은 거짓목자의 정체를 간파하고 정든 교회를 미련 없이 끊어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때의 사정을 설교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애써 찾았던 은혜의 줄을 무참하게 짓밟힌 저들은 아우성 치며 헤매였다. 그러나 참 생명의 길을 찾은 그들은 정든 교회를 박차고 과감히 이동했던 것이다.` (설교 2집, 20p)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한다.

`그날 오후에 제가 다니는 왕십리장로교회의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지금 박태선 장로님께서 집회 인도를 하시는데, 성신의 역사가 불 일 듯하여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며 장님이 눈을 뜬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반가워서 그 자리에서 ‘그래요? 저도 갈게요.’하고 얼른 대답하였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왕십리교회에 갔는데, 목사가 설교하기를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살지 밥을 제쳐 놓고 사탕이나 과자만 먹고는 못 산다. 박태선 장로는 사탕이나 과자와 같고, 나는 밥과 같다. 이제부터 박태선 장로의 집회에 가는 사람은 재적에서 제명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저희 집에 직접 찾아와서 하나님 집회에 참석하라고 했던 목사가 이제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십리교회 교인 중 하나님의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과 만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한 끝에 왕십리교회에 나가지 않기로 하고 하나님께서 집회하시는 곳을 찾아 다니자고 의견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집회에 참석을 하였고, 그 후 전도관이 세워져 1956년 원효로 구제단에 다녔습니다.` (조온순 승사, 기장신앙촌)

`1955년 어느 날 제삼장로교회에 갔더니 한승직 목사님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박태선 장로님께서 오늘 동산중학교 광장에서 집회를 하시는데, 그분의 집회에서는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을 하는 등 기사이적이 기가 막히게 일어난다.’고 하며, 저녁 때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전부터 박 장로님의 집회에 대해 소문을 듣고 꼭 한 번 참석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저녁 목사님, 전도부인과 함께 집회가 열리는 동산 중학교 광장으로 갔습니다.

동산중학교 집회 후, 저는 박 장로님께서 본 교회(다니던 교회)를 잘 지키라고 말씀하신 대로 제삼장로교회의 새벽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열심히 다녔고, 얼마 후에는 박 장로님 집회에서 은혜 받고 모인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짠지 공장(단무지를 만드는 공장) 이층으로도 예배를 드리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희 집에 한승직 목사님이 오셔서 박 장로님이 이단이니 짠지 공장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박 장로님의 집회에 가서 여러 가지 기사이적을 보고 또 직접 제 병이 나았는데 박 장로님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목사님의 말을 신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는 병자들이 낫고 기사이적을 볼 수 있다고 집회에 가자고 하더니 이제는 이단이라니요? 목사님도 회개하시고 박 장로님 믿어야 구원 받아요.’라고 하니 목사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제삼장로교회는 나가지 않고 짠지 공장으로만 예배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김경제 前 교역자, 기장신앙촌)

`당시 제가 다니던 보린 교회에는 피난민들이 많이 모여들자 교회를 크게 지으려는 계획을 하였지만, 교인의 대부분이 피난민이라 형편상 신축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신축 헌금을 모으기 위해 부흥 강사를 모셔와 여러 번 집회를 하였으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지 않아 교회를 지을 만한 헌금이 마련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교회 신축 문제로 고민하던 중, 제직회를 열어 회의를 한 결과 그때 당시 유명하신 박태선 장로님을 모셔와 집회를 하기로 결정 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직회에 참석하기 얼마 전에 박 장로님의 남산 집회에 다녀오신 교회 분들로부터 그 분의 집회에서는 ‘이슬이 내리고 향취가 나며 불같은 성신이 임한다.’는 얘기를 듣고, 박 장로님이 인도하시는 집회에 꼭 한 번 참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은혜를 많이 내리시는 분을 모셔 온다는 결정에 무척 기뻐하며 박 장로님이 인도하시는 집회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장로교 노회에서 전도관을 자신들의 임의 대로 이단이라고 규정하자, 그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집회에 다녀와 이슬은혜가 내린다고 증거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모두 가 보라고 하고, 또 하나님께 안찰을 받고 병이 나았다고 외치기도 하였던 목사들이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단에서 하나님을 이단이라고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보린교회 목사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여러 집회에 참석하며 은혜를 받은 보린 교회 교인들은 하나 둘 보린 교회를 나와 50여명 정도가 원효로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승운표 前 교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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