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정수길 승사
발행일 발행호수 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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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암동 이만제단에서 설교하시는 모습(1957년경)

저는 1939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8․15 해방이 되고 월남한 저희 가족은 6․25전쟁 중에 피난 생활을 하다 서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저는 서울사대부고 2학년 때 휴학을 하고 잠시 부산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부산 영락교회를 스스로 찾아 나갔습니다. 사춘기 시절에 전쟁의 혼란과 고달픈 피난 생활을 겪었던 저는 종교를 통해 심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고 싶었습니다.

부산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길거리를 지나다가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 부흥집회” 포스터가 전신주에 붙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포스터를 보고 호기심이 생긴 저는 집회 장소인 ‘부산전도관’을 찾아갔는데,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장로교회에서 찬송을 부를 때 한 번도 손뼉을 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광경이 너무나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1시간 후면 박태선 장로님께서 도착하신다고 했으나 저는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59년에 저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과 친구인 재환이(故 오재환 권사)는 전도관에 열심히 다니는 학생으로 저와 자주 신앙 토론을 하곤 했습니다. 재환이는 기회가 될 때마다 전도관의 교리를 설명하며 전도하려고 했지만,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가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때 세광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저는 “전도관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이다”, “생수는 박 장로가 손 씻은 물, 발 씻은 물이다”라는 등의 험한 이야기를 많이 들은 데다가, 당시 신문 지상에서 매일같이 전도관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와 토론을 계속하면서 ‘동방의 일인’과 ‘감람나무’ 등의 전도관 교리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친구의 간곡한 권유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당시 저희 과는 수업과 관련해 야외 현장 학습을 자주 다녔는데, 1960년 어느 일요일에 재환이와 함께 관악산으로 지질 조사를 하러 갔습니다. 관악산에서 저는 재환이가 건네준 신앙촌 캐러멜 한 알을 입에 넣고는 산길을 올라갔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아주 향긋하고 좋은 냄새가 풍기는 것이었습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봤지만 꽃도 없고 그런 향기가 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재환이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런 향기를 전혀 맡지 못했다고 하여, 저는 ‘참 이상한 일이군. 분명히 향기가 났는데…….’ 하며 속으로 의아스러웠습니다.

야외 학습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재환이가 청암동에 있는 이만제단으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한강 변 언덕에 우뚝 세워진 이만제단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으며, 그곳에 수만 군중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모여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전도관에 대해 부정적인 소문만 들었던 저는 마음 한편으로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는 처음으로 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박태선 장로님께서 설교하실 때 주의를 기울여 들어 봤지만 그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쉽게 설명하시는 것 같았으나 저는 단지 말소리가 들릴 뿐 내용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고, 모두 말씀에 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저 혼자만 아무런 느낌도 없이 맹숭맹숭했습니다. 그렇게 이만제단 예배에 참석한 후로 재환이는 계속 전도관에 다니자며 더욱 적극적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저는 친구의 권유대로 전도관에 가야 할지, 아니면 다니던 장로교회에 계속 가야 할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세광교회에서 밤새워 기도하는 한편 목사와 장로를 찾아가 저의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그들은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한다”라며 전도관에 휩쓸리지 말고 교회나 열심히 다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덮어놓고 전도관은 나쁜 곳이니 가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더 이상 속 시원한 해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도관에 부정적 편견 있었으나,
전도관에 대해 알면 알수록
기성교회와 언론에서 말하는
전도관과 실제 전도관이
180도 다르다는 것을 느껴

그렇게 고민을 계속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안찰을 받아 보라는 재환이의 권유에 못 이겨 저는 재환이와 함께 중구 갑구 제단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제단에 들어서면서 보니 현관 양옆에 물통들이 줄지어 있는데, 거기서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강하게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향기는 전에 신앙촌 캐러멜을 먹었을 때 맡았던 향기였으며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관에 놓인 그 물은 박 장로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이었습니다. 예배실 안에 들어가서도 좋은 향기가 계속 진동하여 재환이에게 이야기했더니, 재환이는 그 향기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 향기를 두 번이나 맡았으며 친구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관에 대해 험한 소리를 많이 들어서인지 여전히 마음 한구석의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도관에서는 향수를 뿌려 놓고 사람들을 미혹한다던데 혹시 향수를 뿌렸나?’ 하며 예배실을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향수를 뿌린다 한들 그렇게 코에 쏟아붓는 것처럼 진동할 수는 없을 것 같았고, 그 좋은 향기는 여느 향수와는 분명히 차원이 다른 냄새였습니다.

그날 중구 갑구 제단에는 안찰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줄을 서서 한 사람씩 안찰을 받는 가운데 안찰하시는 모습을 살펴보니 박 장로님께서는 사람들의 눈과 배 위에 두 손을 살짝 얹었다가 놓으셨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을 때 박 장로님께서는 안찰하시면서 저의 고집이 센 것을 지적하셨으며 “성경을 지독히 파는군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곁에서 보신 것처럼 다 알고 말씀하시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안찰을 받은 후로 저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 만한 일이 생겨도 속에서 화가 전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저는 재환이와 함께 경기도 부천의 소사신앙촌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신앙촌 전경과 거리를 다니는 신앙촌 사람들의 환하고 밝은 표정,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또한 주인 없는 상점이 운영되는 것을 보면서 ‘이곳이야말로 죄를 멀리하는 생활을 하는 곳이구나’ 하고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전도관에 대해 알면 알수록 기성교회와 언론에서 말하는 전도관과 실제 전도관은 180°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손 씻은 물, 발 씻은 물’ 운운하던 생명물이 실제는 물통을 향해
“쉭! 쉭!” 하고 축복하시는 것임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악의적이고 허무맹랑한 비방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물을 실제로 축복하시는
광경을 직접 보고 나니
전도관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악의적이고 허무맹랑한
비방인지 알게 돼

저는 이만제단 주일예배에 참석하면서 차츰 하나님 설교 말씀을 이해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비롯한 성경 상의 선지자에 대해 풀어 주셨는데, 기성교회에서 들어 보지 못한 그 말씀이 참으로 새롭고 재미있었습니다. 또한 구원을 얻으려면 죄와는 상관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제 마음속에 울렸습니다. 아버님께서 제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아시고 심하게 반대하셨지만 저는 제 뜻을 굽힐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관에 대해 비방하는 말만 들으시는 아버님을 보면서 저의 지난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구원의 참 길을 깨달은 이상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 길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1963년 군에 입대한 저는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받은 후 계속 그곳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병영 생활을 하며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친구 재환이가 보내 주는 신앙신보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매주 신문에 실리는 설교 말씀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은혜 체험담을 읽을 때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예배 시간이 몹시도 그리웠습니다. 그 후 근무지가 27연대로 옮겨지면서 일요일 외출이 허용되어 인근의 금마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단 하루 예배에 참석하는 그 시간이 더할 수 없이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금마전도관은 언덕 위의 자그마한 시골 제단이었는데 하루는 예배드릴 때 향취가 강하게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단을 가득 채우는 듯한 향취 은혜 속에서 이곳 시골 제단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심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하나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니” 하는 찬송가를 그때 절실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저는 졸업 후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으며 매일 도봉제단에서 새벽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교인 분들과 같이 여러 집을 심방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집에 갔더니 환자 분이 오랫동안 거동을 못하여 등에 생긴 욕창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아파하시는 모습을 보고 몹시 안타까웠던 저희는 그때 생명물이나 축복 캐러멜이 없어서 급한 대로 축복 캐러멜 포장지를 욕창 위에 붙여 드렸습니다. 욕창 부위는 피부가 심하게 짓물러 진물이 줄줄 흐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잠시 동안 찬송을 부른 후 욕창을 다시 살펴봤더니, 진물이 어느새 꾸덕꾸덕하게 마르고 정상 피부와 다름없이 되어서 모두들 놀라워했습니다.

1981년 하나님께서는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신 후, 인간의 창조와 천체 운행 등 창조주만이 밝히실 수 있는 말씀을 세밀히 풀어 주셨습니다. 지구과학을 전공한 저에게 우주와 지구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경이로울 뿐이었습니다. 태양 열도나 화산 폭발에 관한 말씀은 학교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내용이었으며, 특히 지구 가열에 관한 말씀이 너무도 인상 깊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화부(火夫) 역할을 하며 지구 내부에서 가열하실 때 암석에 따라 열이 통과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전부 계산하여 가열하게 되며, 지열과 함께 지상의 햇빛과 바람 등 모든 조건을 알맞게 조절하셔서 식물의 뿌리가 마르지도 냉하지도 않게 되어 곡식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뵈었다는 사실은 생각하면 할수록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귀한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경외를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1981년에는 제1회 이슬성신절이 제정되었으며 이후 해마다 축하 음악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 남성 합창단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특히 1986년 이슬성신절 음악 경연 대회에서 1등을 수상했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합창단원들 모두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연습했던 것과 합창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은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습니다. 현재 저는 시온 남성 합창단으로 활동하면서 여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향취와 이슬성신,
시신을 피어나게 하는
생명물의 권능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지난 1999년 교직에서 정년 퇴임한 저는 기장신앙촌에 입주하여 신앙촌 인근 동부리에서 경비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앙촌 상공에 찬란한 빛으로 은혜가 내리는 것을 자주 목격했는데, 경비원들뿐 아니라 신앙촌에 있는 주민들과 도로에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다 함께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밤하늘에 선명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성신을 보면서 저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길을 따르며 시신이 은혜를 받아 아름답게 피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2001년에 72세를 일기로 운명하신 성영순 전직 관장님이셨습니다. 생명물로 씻긴 시신은 피부가 너무나 맑고 뽀얗게 피어나 마치 형광등이 하얗게 빛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저는 고인과 같은 숙소에서 생활하며 생전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살아 계실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운 모습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신이 피는 것을 많이 보았으나 피부가 형광등처럼 빛나는 시신은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입관예배에 참석한 유족들과 교인들 모두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크신 권능에 놀라워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50년 가까이 이 길을 따르는 동안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해 주심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여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면 큰 위로와 평안을 주시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셨습니다.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자유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면서 죄를 멀리하는 생활이 될 것을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 빛 앞에 설 수 있는 가지가 되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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