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신보로 전도하는 기장신앙촌 박정자승사
신앙신보 창간 50년 인터뷰 - 신앙신보가 나를 전도했어요“신앙신보가 인연이 되서 제가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내심 신앙신보를 읽고 전도되는 사람이 많기를 기대합니다.”
매주 40여명에게 유료로 신앙신보를 발송하는 박정자 승사는 35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지난 1999년에 퇴임을 한 후 지금은 기장 소비조합으로 활동하고 있다.
1964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기성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박승사는 졸업과 동시에 속초 여자중·고등학교로 발령을 받는다. 그 해 여름방학 수학선생이면서 사서업무까지 보던 박선생은 사서교사 연수가 있다고 해서 강릉에 가게 된다. 가서 보니 사서교사 연수가 아니라 교도 연수였던 것, 돌아가려는 박선생에게 ‘기왕에 왔으니 연수를 받고 가라’며 아는 장학사는 학교로 전화까지 해주며 허락을 받아준다. 연수를 마치고 ‘이수증’에 부칠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을 갔는데, 마침 그 때 강릉제단의 관장님이 축복 사진을 인화하려 사진관에 와있었다. 처음 보는 분이지만 ‘그 축복 사진을 살 수 없습니까?’ 말을 건네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관장님은 이사야서의 동방의 의인, 감람나무와 생수에 대해 증거를 했다.
사실 오래 동안 기성교회를 다녔고 속초에서 와서도 기성교회의 관사에서 기거를 하는 박선생은 ‘이렇게 믿어서 구원을 얻겠나?’하던 딜레마에 빠져서 바로 옆에 있는 교회도 가지 않고 있던 시기다.
다음날, 강릉버스터미널에서 그 관장님을 또 만났다. 이제는 구면이니 반갑게 인사를 하고, ‘수일 내 속초에 와서 속초관장님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하면서 그 관장님은 헤어질 때 신문을 한 장 주고 갔다. 평소에 몸이 약해 30분 이상 버스를 타면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되는데, 그날은 속초까지 가면서 멀미도 안하고 그 신문을 한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달고 오묘한 말씀’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렇게 전도가 되었다.
“그 때는 말씀이 한 면 다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말씀이 너무 적어서 아쉽습니다. 그때는 시시콜콜히 풀어주셨는데…”
박승사가 신앙신보를 보내는 사람들은 주로 함께 근무했던 동료교사와 은사님들이다. “지금은 예전같이 편지를 자주 쓰는 시대도 아니니까 나한테 편지 받는다고 생각하라고 하지요. 60년대의 그 편협한 시선들을 버리고 우리 종교에 대한 이해가 많이 깊어졌어요.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구나’ ‘건전한 기업체와 건전한 의식을 갖고 있구나.’ ‘이런 종교 생활도 있구나’ 신문을 받기 전보다 대체로 긍정적 시선을 갖게 되었어요.2002년 1월에 한상복교수 인터뷰가 나왔을 때에는, 공주사대 총장하시던 이화연교수님이 전화를 하셨어요. 신문을 관심 있게 보고 있다며 한교수가 고등학교때 제자였다며 반가워하셨어요. 또 어떤 분은 이사간 주소를 알려주려 먼저 전화해 오기도 합니다.”
아직도 신문을 보낼 때가 많다는 박승사는 “생명물 두부를 납품하시는 분들이 신문도 갖고 가서 전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어요.”라며 신문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