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강의하는 78세 현역 선생님

발행일 발행호수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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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시온고등학교 전경

경기도 소사신앙촌에 세워진 시온고등학교가 올해로 개교 50주년을 맞이한다. 개교 당시부터 지금까지 시온고등학교에 몸담고 있는 석세조(石世助.78) 교장을 지난 10일 시온고등학교 교장실에서 만났다.

3일 전부터 설사로 고생하고 있다는 석 교장은 살짝 핼쑥했지만 너무 고운(?)피부에 꼿꼿한 허리와 걸음걸이까지 거기다 소년 같은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시온고등학교 개교 50년을 축하드립니다.
“1958년 초에 옹진학원을 인수했어요. 그 때 인수위원회가 다섯 사람이었는데 그 중 제가 한 사람이었지요.”

-교장 선생님께서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시온고등학교에 계신건가요?
“개교하면서부터 평교사로 2~3년, 학생과장, 교무부장 1년, 교감 1년 여기까지 10년이 걸렸고 1968년 3월 27일에 교장에 부임한 이래 지금까지 입니다. 근무 50년 교장 40년인 셈이지요. 시작도 하나님께서 시켜서 했으니까 힘이 자라는 데까지는 학교에 있어야지. 허허허”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믿기 시작하셨는지요?
“먼저 여동생이 믿었는데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직접 알아보려고 원효로 구제단을 찾았습니다.
당시 육군 중위였던 제 워커를 손수 풀어주며 안내하는 조남준 집사님의 인도로 하나님께서 설교하시는 단상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때 동생들이 ‘박 장로님은 한 번만 쓱 보면 죄 진 거를 다 아신대.’하던 말이 생각 나, 같이 간 하사관을 앞에 앉히고 그 뒤에 숨듯이 앉았습니다. 또 동생들이 ‘단상에서 불이 나오고 향취가 난다.’ 하던 말이 생각 나 무슨 전기 장치 같은 것을 해놓은 것은 없나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장치는 아무 것도 없었고 하나님께서는 광주집회때 기성교인들에게 집회 방해를 받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혼자 속으로 ‘것 참 고약하다. 전라도 가서 손 좀 봐줘야겠는데’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한참 쳐다 보셨습니다. 예배 중에 세 번을 그렇게 쳐다보시는 것이었어요.

-어떤 은혜 체험을 하셨는지?
“안찰 받으면서 죄를 지적 받고 망신 당할 일 있나 싶어서 안찰을 한 번도 받지 않았는데 하루는 꿈에 제가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안찰을 받고 몸이 시원하며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과 같은 기분으로 눈을 뜨니 새벽 1시 15분이었습니다. 너무나 기쁜 가운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하는 찬송이 나오는데 그 찬송을 억제하기가 힘들 정도로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하나님께서 ‘그제 꿈에 안수나 안찰 받은 사람 손 들어 보세요. 1시부터 2시 사이에.’ 하시기에 놀라 번쩍 손을 들고 보니 수십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에 안찰 받은 사람은 의심이 많은 사람,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을 위해 해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때 지금까지 품고 있던 의심이 사라졌고 하나님을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서 살고 있다는 증거를 하셨는데요.
“1963년 12월에 장결핵과 폐결핵이 급성으로 왔는데 입맛이 없어 먹질 못하고 두 달 가니까 제가 다 죽어가고 있다고 소문이 나서 친척들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의사이신 작은 아버지는 젊은 녀석이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는 가지 않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미련한 인간이라고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나만 욕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소리가 들려 해가 바뀌어 새배도 드릴 겸 동생의 부축을 받고 작은 댁에 갔습니다.
그동안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저를 보신 작은 아버지는 그 방면의 권위자이신 김희석 박사님께 저를 데리고 가서 X-ray 사진을 찍게 하셨습니다. 그날 작은 아버지는 ‘이놈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고 앞으로 살아도 1주일 살면 많이 사는 것이고 만약에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박태선 장로님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이다. 의학으로는 안 된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몸이 이 지경이 되자 다른 선생님을 채용하셔서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하나님께 편지를 올렸습니다.
편지를 드린 다음다음날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네 생명은 내 손에 있으니 염려 하지 말라. 내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라.’는 전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전해 듣고 나서 음식을 조금씩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6개월 뒤 하나님께 안찰 받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저를 보시더니 ‘걱정 마, 그까짓 폐병은 문제 없어.’하시면서 저의 가슴을 쳐주셨습니다. 폐병 환자는 의학적으로 안정을 취해야지 가슴을 치면 큰 일 나는 거지요.(웃음) 그리고 계속 해서 스물서너 번이나 가슴을 치는 특별 안찰을 해주시는데 저는 밤송이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는데 하나님께서도 ‘밤송이로 찌르는 것같이 아프지, 내가 다 느껴.’하셨습니다. 안찰을 마치신 후 ‘이젠 됐어. 내일부터 출근해서 마음대로 움직여.’ 하며 웃으셨습니다.

-시온하면 탁구, 탁구하면 시온이죠.
“시온고에 탁구부는 1965년에 창단을 했어요. 팀을 만들고 단체전에서 우승을 한 번도 못하는 팀도 많은데 우리는 지금까지 단체전 우승이 78회입니다. 한번은 춘천에 경기가 있어서 갔는데 기성교회 계열의 학교 교장이 내가 옆에 있는 줄을 모르고 ‘다른 팀에는 다 져도 시온만은 꼭 이겨야 한다.’고 선수들에게 훈시를 하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계속 이겼습니다.
시온고 출신 국가대표인 김경자 선수는 우리나라 선수로는 처음으로 중국팀을 이겨서 대단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1981년 1회 이슬성신절에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 어떠셨어요?
“1957년에 ‘내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 나밖에 몰라. 마귀도 몰라.’ 하시며 그 이야기를 나가서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1981년 ‘내가 하나님이야’라고 발표를 하셨습니다. 제가 아팠을 때도 ‘네 생명은 내 손에 있다’고 하셨으면 벌써 깨달았어야 하는데 그제서야 안 거지요. 다음날 전화로 ‘내가 어제 한 말 어떻게 생각해?’하고 물으셔서 ‘말씀하신 그대로 믿습니다’라고 답변을 했어요. 그런데 ‘그때 말씀하신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고 말씀을 못 드린게 아쉬워요.”

-하나님 앞에는 예, 아니오만 있으셨다구요.
“나도 모르는 것까지 다 알고 말씀하시는데 네, 아니요면 되는거죠. 군대 제대 후에 어느날, 찾으신다기에 갔더니 ‘제대비가 있지? 그거 시멘트 100포 값이니 저기 시골제단 짓는데 연보하라’고 하시길래 ‘네’ 대답하고 집에 와서 세보니 당시 시세로 딱 시멘트 100포 값이었어요.
인간의 머리로는 안 될 일 같지만 하나님께서 시키실 때는 될 일이니까 시키셨다는 것을 일하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교육과 관련된 하나님의 가르침은?
“정식으로 출근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회초리를 들고 가라고 하셨어요. 기합 줄 건 주라는 말씀이셨죠. 그 뒤에는 ‘이제는 아이들 사랑으로 대해주라’는 말씀을 하셔서 또 그대로 하는데 학생들이 말을 잘 들었어요. 요즘 애들에 비하면 그 때 애들은 천사예요.”

-시온의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발표하셨으니까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따라가는 것 그것밖에 없어. 계산 하고 말 것 없고 생활에 실천하는 것밖에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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