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이 함께해 주셔야 가능한 전도

발행일 발행호수 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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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나 가족의 진심 어린 권유로, 때론 신앙촌 물건이나 신앙신보를 통해 천부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뭇사람의 심령을 움직여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끄는 전도는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직접 감람나무 가지 한사람 한사람을 이끌어 주시며 전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초창기 때 하루에 3,000리가 넘는 길을 달려 집회를 열어 주시며, 집회 기간 동안 쉴 사이 없이 오직 많은 사람들이 의의 길에 서기만을 바라시면서 설교와 안수, 안찰에 혼신의 힘을 쏟으셨습니다. 감람나무 가지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땀과 눈물로 맺어진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가장 보람되고 가치 있는 전도. 이번 체험기 특집에서는 하나님께서 해주신 전도에 관한 말씀과 전도의 방법, 전도를 하면서 깨닫게 된 이야기 등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00만이라는 수는 내 은혜를 받은 사람이며,
내 눈물이고 땀으로 맺어진 열매입니다.
전도관 식구 하나하나가 내 눈물로 이뤄진 것입니다.

■ 지면으로도 전도하라

제가 전도관에 다니며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보니 기성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저희 친정 식구들이 생각나 당시 경주에 살고 계셨던 어머니께 여러 번 편지를 하였습니다. 서울 운동장 집회에 가서 은혜받고 제 병이 나은 얘기와, 또 제단에 다니면서 은혜받은 얘기를 쓰며 꼭 한 번 서울에 올라오시라고 당부를 드렸습니다.

몇 번의 편지를 보낸 끝에, 1956년 겨울 어느 토요일 어머니께서 동생 둘을 데리고 저희 집에 오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하나님께 안수 받게 하고 싶어 그날 원효로 구제단으로 갔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가시고 안 계셨는데, 저희 외에도 하나님께 축복을 받기 위해 여러 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녁때 돌아오신 하나님께서 제 옆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가리키시며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제 편지를 보고 가족들이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내일 일요일 예배 시간에 함께 예배드리러 오라고 하시며 저희에게 모두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이만제단으로 주일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때는 이만제단이 지어지기 전이어서 제단 터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 따님의 간절한 편지를 받고 오신 분이 있다고 하시며 그분은 일어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이 일어나니,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는 편지를 보내 전도를 하려는 사람에게도 은혜가 갈 것이며, 그 편지를 받는 사람에게도 은혜를 보내 줄 것이니 지면으로라도 전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그때부터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또한 경주 장산 장로교회의 전도사로 계시던 아버지께서도 제가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읽어보시고,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과 하나님의 부산 집회에 참석하셨습니다.

집회에서 은혜를 받으신 아버지는 장로교회의 전도사 일을 그만두고 집회에 같이 참석했던 분들과 함께 임시로 천막을 치고 전도관을 세워 예배를 드리다가, 나중에는 경주 월성 전도관을 신축하셨습니다.

<신앙체험기 5권 오창택 권사>

■ 전도관 권사님을 통해 전도되어 은혜를 체험해

1974년, 제 나이 서른여덟 살 무렵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했을 때였습니다.

“거기는 찬송이 들리는 집이에요”

소사리 큰길 가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사리전도관이라는 곳이 바로 위에 있어서 새벽마다 부르는 찬송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린다고 했습니다. 과연 새벽부터 찬송이 들리는데 왠지 듣기 좋았습니다. 그 전도관에 가게 된 것은 매일 집에 들르시던 전도관 권사님 때문이었습니다. 함대덕 권사님은 신앙촌 메리야스와 속치마를 판매하셨는데 시중에 파는 물건보다 훨씬 좋아서 애용하게 됐습니다. 신앙촌 간장도 맛있어서 제가 이웃들한테 다니며 대신 팔아 드리니 자연히 권사님이 저희 집에 자주 오셨습니다. 권사님이 전도관에 같이 가 보자 하셔도 “저는 신앙촌 물건만 팔아 드릴게요. 전도는 하지 마세요” 하며 가지 않았는데, 일요일 아침 일찍 찾아오셨을 때 따라나선 것이 전도관에 나간 계기였습니다. 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예배실 가득히 모여 있었고, 다들 반갑게 맞아 주는 것이 좋아서 새벽예배와 수요일예배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수요일예배에 갔을 때였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아…” 하는 찬송을 부르는데 처음 듣는 찬송가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서 한참 울고 나니 입고 있던 치마 한 폭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울고 나니 그동안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이 눈물에 씻겨 간 것처럼 속이 후련하고 편안해졌습니다. 그때까지 예배실에 앉아 있다 오는 정도였지만 그 후로는 누가 뭐라지 않아도 예배에 안 빠지게 됐습니다.

<475회 신앙체험기 김병화 권사>

전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보내 주게 된다.
나무의 원체와 가지 사이에 진액이 연결되듯이
감람나무 원체와 가지 사이에 생명의 은혜가 연결되면
전도를 하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하나님 말씀 제7부 제1장 49절>

■ 시신이 피는 것을 통해 전도돼

1957년 3월 어머니께서 일흔두 살을 일기로 운명하시게 되었습니다. 입관하는 날 광주전도관 관장님과 교인 분들이 오셔서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는데, 시신의 피부가 뽀얗게 피어나고 조글조글하던 주름살이 펴졌을 뿐 아니라, 입술과 양 볼에 발그스름한 핏기가 감돌아 참으로 예쁘고 고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일흔두 살의 할머니 입술이 젊은 사람 입술보다 더 빨갛고 예쁘다며 놀라워했습니다. 입관을 마친 후 아름답게 핀 시신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광주전도관에는 김정희(現 기장신앙촌 소속)라는 여고생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단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정희의 큰오빠가 “아버지 말씀대로 전도관이 어떤 곳인지 직접 가서 알아봐야겠다” 하며 광주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저희 집에 장례가 났다는 광고를 하며 교인들에게 가 보라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정희의 큰오빠는 ‘기왕 알아보러 온 것이니 거기까지 가 보자’ 하며 교인들을 따라 저희 집에 와서 시신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약사였던 그분은 ‘어떻게 죽은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나?’ 하며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고, 그때부터 ‘전도관은 진실하게 믿는 곳’이라며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아버지가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정희에게 들으면서, 시신이 피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많은 사람들이 확실하게 알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그 후 같은 동네 사람들 중에 나인혜라는 분이 광주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희 어머님이 예쁘게 핀 모습을 보고 전도되었다면서, 저에게 “나는 당신 어머님의 열매예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368회 신앙체험기 주채경 권사>

특전대 모습

■ 전도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

경남 창원군 천가면 가덕도(현 부산시 강서구 천가동) 섬에 전도관이 세워져 1958년 8월 16일에 개관집회가 열렸습니다. 저도 이웃집 청년을 데리고 그 집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타신 배에 같이 타게 되었습니다.

가덕도에 도착하여 이튿날 새벽, 산비탈에 있는 제단에 가서 새벽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찬송을 부르고 있던 중에, 제단 안에 갑자기 굵은 비가 드문드문 섞인 가랑비가 쏟아졌습니다. 창문 쪽으로 눈을 돌려 바깥을 보니 산꼭대기에 해가 빨갛게 걸려 있고 비가 오지는 않는 것 같았는데, 제단 안에는 아무리 눈을 닦고 봐도 여전히 가랑비가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였습니다. 웬일일까 궁금해하다가 옆에 앉은 분께, “아주머니, 제단 안에 지금 비 쏟아지는 것이 보입니까?” 하고 여쭈니, 그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이웃집 청년에게도 물어보니 못 봤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그냥 신기한 일이라고만 생각하였는데, 그 후 전도관에 계속 다니면서 제가 체험했던 것이 바로 이슬 은혜 체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덕도 집회에 다녀오고부터는 마음속에서 기쁨이 솟아 넘치는데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필요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은 허다한 죄를 다 감해 준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제 마음속 깊이 와닿았고, 또한 은혜를 받고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데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길만 보고 다니고 누구하고 얘기도 잘 안 하던 저였지만, 이제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전도관에 가 보자고 권유하며 기쁜 마음으로 전도를 하였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내려오셔서 대신동제단에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는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콩나물시루에 콩나물이 박혀 있는 정도로 제단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빈틈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참 동안 찬송 인도를 하신 다음 단상 아래로 내려다보시면서, 전도를 두 사람 이상 한 사람은 손들라고 하시며 그 사람들은 특별 기도를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제가 제단으로 인도한 사람들 중에 다섯 명 정도가 열심히 제단에 나오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손을 번쩍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제 쪽으로 내려다보시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불덩어리가 하나님이 서 계신 곳에서부터 떨어져 내려오더니 제 가슴에 와서 팍 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제 가슴속에서는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뚝 하고 떨어졌습니다. 온몸이 불덩어리가 된 것처럼 뜨거워지면서 땀이 계속 흘러내렸습니다. 왜 그럴까 궁금해하면서도 아무한테도 말을 하지 않고 내내 지냈는데, 그날 불덩이가 가슴으로 떨어진 체험을 받고 난 후부터는 저를 그렇게 괴롭혀 오던 가슴앓이 증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앙체험기 6권 유금녀 승사>

■ 전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의 심령이 살아 있어야 돼

1965년 9월 15일 저는 하나님을 더 잘 믿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사람과 어린아이를 데리고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였습니다.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여 반사, 청년회 전도부장, 성가대원에 가입하며 신앙생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유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유율법을 지키려고 하니까 참 힘들었고 잘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때는 젊었기에 양심의 법을 지키는 것이 상당히 부담이 되었고 못 지키다 보니 양심의 가책과 ‘내 힘으로 지켜지지 않는 법을 꼭 지켜야 하나?’하는 생각에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으로 죄를 짓게 되었고, 불평불만, 원망, 불신 등으로 마음에 병이 들자 나태해지며 갑자기 기침이 나기 시작하는데 하루에 수천 번도 더 콜록거렸습니다. 심한 기침에 음식도 먹지 못해 기진맥진하여 거의 죽게 될 지경이 되어서야 어찌할 수 없어 병원 문을 찾게 되었습니다. 찾아간 곳은 남대문에 있는 김경희 내과였는데, 거기서 진단한 결과 특별한 병명은 나오지 않았고 그 후 2개월 동안 의사의 처방에 따라 주사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기침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다시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으나 낫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기침이 나왔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전도를 해서 용서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하나님께서 7중앙, 9중앙, 5중앙, 4중앙을 순회하시면서 예배를 인도하셨는데, 그때 저도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는 순서대로 따라 옮겨 다니며 전도활동을 할 계획을 세우고 기도하며 열심히 매달려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 전도란 말로 되지 않고 먼저 나 자신의 심령이 살아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성신이 함께 하시어야 말씀을 전할 때 상대를 감화시킬 수 있고, 열매가 맺혀진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기침을 하며 열심히 찾아다니고 교회까지 인도하여 전도한 숫자는 늘었으나, 참열매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고 오직 성신으로만 된다” 말씀하신 뜻을 알게 되어, 나 자신의 구원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며 지은 죄를 눈물 흘리며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또한 죄씻음 받는 길이라 믿으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시 은혜가 연결되고 생명물을 마시는 것으로 차차 기침은 그쳐갔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전도를 받은 사람도 자기를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만나면 진심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나누며 반가워했습니다. 그러나 전도된 사람들이 교회에 안 오면 ‘내가 잘못했나?’생각하며 기도하게 되었고, 사람 한명이 더 늘어나면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1980년 4월, 그때까지 수고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상을 주셨습니다. 저도 전도를 많이 했다고 하여 하나님의 존함이 적힌 전도상을 관장님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나 자신과 나에게 전도 받은 사람들 중에 구원받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하는 생각에, 내 신앙의 산 교훈으로 삼고 싶어 지금까지 그 상장을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신앙체험기 5권 이차봉 권사>

■ 나의 생각으로 전도를 가로막은 것은 아닌가?

1972년 5월 저는 서천군 판교면에 있는 판교전도관 전도사로 처음 교역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판교전도관은 공석 제단으로 교인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건물 관리가 잘 안된 곳이 있어서 제단 수리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언덕 위에 있던 건물 주변에 담장을 두르는 것부터 시작해 출입문과 외벽 도색을 마치고 예배실도 아늑하게 꾸며 두었습니다. 일요일이 되어 제단에 온 교인들이 깨끗하게 단장된 교회를 보고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판교면 시내에는 큰 규모의 장로교회가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장로교회는 여름방학 때가 되면 신앙교육에 수백 명의 청년이 참석해 연수 교육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대대적인 심방도 했습니다. 그러니 판교 대부분의 사람이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을 것만 같았고, ̒전도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 내 생각으로 ̒전도가 어렵겠다’며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전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일요일에는 예배를 드리는 중에 학생들이 스스로 찾아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웠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귀한 학생들이라는 생각에 집회에서 은혜받은 이야기며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의 권능에 대해 더욱더 힘차게 전했습니다. 차츰 학생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그것을 보면서 내가 아닌 성신이 함께해 주셔야 전도가 되는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487회 신앙체험기 진영섭 전직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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