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사건(2) – 동아일보의 허위보도(2)
기획기사에 사설까지 대서특필 보도전무후무한 이슬성신의 역사가 이 땅 위에 일어나자 당시 한국의 신문을 대표하던 동아일보는 이 성신의 역사가 어떠한 역사인지를 미처 알지 못하고 공정한 보도와는 거리가 먼 부정적인 보도행태로 일관하였다.
동아일보는 하루에 여러 면에 걸쳐서 문자 그대로 대문짝같이 신앙촌 비판기사를 내보냈는데 1958년 9월 11일자에는 사설과 5면에 신앙촌에 관한 음해 기사를 게재하였다. ‘소위 박장로 일파의 경우’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동아일보는 신앙촌을 ‘인간의 약점을 노리는 악당들’이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전국에서 모여 온 신도들이 자기 집을 팔고 신앙촌에서 자기가 거주할 주택을 사는 것을 가리켜 “이 일파의 엉뚱한 사주로 가산을 탕진하고 생업을 버림으로써 패가망신한 것”이라고 하여 입주자들이 마치 전 재산을 신앙촌에 헌납하는 양 보도하였다.
또 신앙촌 주민들이 잘 살아보려고 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여 생업을 일으키는 것을 가지고 “소위 이 신앙촌에 모여든 신도들 또한 가산을 통틀어 정리하여 이들에게 바치고 여기 입주한 후로는 노예노동으로 박장로를 비롯한 간부들의 호사에 봉사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는 “대한민국 영내에 있으면서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미쳐도 매우 희박한 이 지역에는 간첩이 출몰할 우려까지 없지 않다”며 당시의 반공주의에 까지 편승하여 신앙촌을 매도하였다. 당시에 가장 무서운 것은 ‘간첩’이라는 낙인이었다. 신앙촌이 얼마나 증오의 대상이었으면 공산주의를 가장 싫어하는 신앙인들을 ‘간첩’이라고 지칭했을까. 동아일보 사설은 그림의 떡을 논하듯 헌법상의 신앙의 자유에 대하여 언급한 후 그러나 ‘사교’에게는 그 자유가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신앙촌을 사교라고 낙인을 찍는데 주저할 아무런 이유가 없겠다.”고 촉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동아일보의 허무맹랑한 사설은 그 후 검찰과 사법부가 신앙촌을 재단하는 이론적 잣대가 되었다.
그들은 또 ‘천년성이란 이단사회 박태선장로의 신앙촌을 가다’라는 신앙촌 특집기사에서 세 번째로 생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3) ‘다만 우물물인 성수(생수)’ 동아일보는 생명물에 대하여도 조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생명물의 신앙적 의미를 무시하고 단순한 우물물일 뿐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신앙촌 정문에서 북쪽으로 약 15미터의 언덕위에 새로 세워진 주택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낡은 집이 하나 있는데 ‘신앙촌’으로 변하기전 농장 관리인이 사용하고 있었다는 그 집이 바로 현재 박장로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 집 부엌 안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속에서 솟아나오는 물이 이른바 1만 2천여 ‘신앙촌’주민(신자)들이 한 방울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애쓰며 ‘생명의 물’같이 아껴먹는 성수의 전부이다. 바로 박장로가 살고 있는 집의 부엌 속에 있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물’이 귀하기 이를 데 없다는 성수의 정체였다.”라고 폄훼(貶毁)하는 기사를 썼다.
“전라도 목포에서 가재도구 일체를 팔아버리고 어린 손녀들과 함께 5인 가족으로 ‘신앙촌’D형 주택에 입주하여 살고 있는 김 노파는 “성수를 먹었기 때문에 삼십여 년간이나 계속 되어왔던 ‘위장병’이 거뜬히 나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천년성 신앙촌’에 와서 ‘만병통치’의 성수라는 것을 마셔본 기자는 잠시나마 그 어떤 야릇한 기분에 젖어도 보았으나 그러나 며칠 계속된 ‘감기기운’이 나을 것 조차 기대해 볼 생각이 정녕 나지 않는 것은 역시 어디서온 ‘속세의 인간’이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동아일보 58. 9. 12. 4면)
생명물의 귀중성을 불신자로서 이해할 수 없다면 모르겠다고 하면 될 일이지 자기가 모른다고 하여 무수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뒷바침되고 있는 생명물의 역사를 모독하는 것은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아니며 더욱이 취재대상을 공정하게 대하여야 하는 기자의 본분을 망각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오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기획기사 네번째로 (4) ‘광신자의 기형집단 철저한 계급사회’ 라는 제목으로, 신앙촌 사람들의 공손하고 겸손한 태도를 ‘계급사회’라는 엉뚱한 시각으로 보도하였다.
“신자가 아닌 기자가 일반사회(그들이 말하는 속세)에서 호흡하는 생리로 표현한다면 ‘이곳 신앙촌은 엄격한 계급주의적인 질서로 유지되고 또 빈부의 차가 심하고 심신의 착취를 당하는 것도 모르는 그야말로 무서운 광신자들의 소굴이다’라고 단언하고 싶을 만치 기형적인 집단이기도 하였다. 기자를 안내하는 ‘문화부’직원에게 거리에서나 생산공장에서나 ‘직공’과 ‘봉사대원’들은 깍듯이 인사를 하며 그(안내하는 문화부직원)가 무어라고 말하면 ‘직공’과 ‘봉사대원’들은 두 손을 잡고 정중한 태도로 ‘네-네-’하며 순응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신앙촌’에는 모든 입주자가 명령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동아일보 58. 9. 13.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