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제단’, 천부교 첫번째 교회(1)

그래도 6개월을 기다리신 하나님
발행일 발행호수 2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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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목사들의 ‘전도관은 이단’ 설교로 흩어진 양떼, 그래도 6개월을 기다리신 하나님

1955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슬성신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남산집회를 비롯한 천막집회에서 연인원 수백만 명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기성교회 목사 2,000여 명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슬성신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회의 기세에 경악한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는 이 운동을 이단이라고 규정을 짓게 되고 이를 계기로, 자기 교회 신도들에게 하나님의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은혜 받기를 권유했던 목사들이 이제는 교인들에게 절대로 하나님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나섰다.

은혜의 맛을 보고 물밀 듯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목사들의 끈질긴 ‘이단 설교’로 흩어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목사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으시고 저들도 은혜의 맛을 보았으니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눈물로 기도하시며 6개월 동안을 기다리셨다. 그러나 저들은 종내 돌아오지 않고, 은혜의 줄을 놓친 수많은 양떼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에 다니기도 싫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갈급하게 은혜를 찾는 양떼들에게 예배를 드릴 장소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원효로전도관 혹은 ‘구 제단’이 세워진 것이다. ‘구 제단’은 바로 하나님이 경영하시던 공장이 있던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박태선 장로님이 예배를 드린다는 소문을 들은 양떼들은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하나님이 계시던 원효로 3가에는 주택과 공장이 같이 있는 큰 건물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충무로 4가에서 대한정밀기계공업사라는  공장을 경영하시다가 장소가 비좁아 1954년에 이곳 넓은 공장을 사서 이사를 하셨던 것이다.

`건물의 정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이 공장, 왼쪽이 자택이었습니다. 공장 쪽 건물에는 사무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곳에 기도실을 마련하시고 매일 아침 20여명의 종업원과 함께 예배를 드린 후 일을 시작하시곤 하셨습니다.` (조남준 권사. 82세. 기장신앙촌)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 곳을 수소문 하다가 소문을 듣고 몰려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처음부터 전도관이라는 명칭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집회에 간다, 부흥회에 간다 하며 원효로 전차 종점 가까이 위치해 있는 하나님의 자택을 찾았는데, 처음에는 기도실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몰려드니 그 공간에서는 더 이상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뒷마당 쪽에 긴 예배실을 마련하게 되었다.` (시온인 81권)

처음에 공장 기도실에서 시작된 예배였지만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공장 건물과 미나리꽝 사이의 마당에 교회 건물을 짓고 예배를 드렸다. 천부교 첫번째 교회인 셈이다.

`그때가 1955년 12월 25일이었는데, ‘원효로 전도관’이 개관된 날이면서 ‘전도관’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날이다. 천부교의 첫 교회인 ‘원효로 전도관’은 이렇게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시온인 81권)

`남산 집회를 마친 후 박 장로님을 다시 만나 뵙고 싶었지만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 없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전에 다니던 충무로 성결교회에 몇 번 나가 보았으나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여 다니지 않고, 박 장로님이 계시는 곳을 알아보던 중에 저희 아이들이 어디서 듣고 왔는지 박 장로님이 원효로에 사시면서 철공장을 하신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박 장로님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저희가 찾아간 아침 시간에 조그마한 방에서 20명 정도 되는 분들이 박 장로님 인도 하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안홍욱 승사. 89세. 샌프란시스코교회)

`그 당시 아침 일찍 등굣길에 전차를 타고 지나다가 보게 되었는데, 검정색 지프들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곳이 원효로 구 제단이었으며, 부유한 사람들이나 높은 분들이 병을 고치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석기 집사. 65세. 기장신앙촌)

`서울 제 2운동장 집회에 다녀온 후, 일요일이 되어 저는 다니던 성결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같이 몸과 마음이 불편하여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밖으로 나온 저는 그 길로 원효로 구 제단으로 찾아가 예배를 드렸고, 그때부터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오창택 전직 관장. 81세. 기장신앙촌)

`그 후부터 사방에서 더 몰려 왔다. 정릉, 미아리, 불광동, 청량리, 홍릉, 종로, 돈암동 등 각처에서 몰려왔다. 그 먼 곳에서 모두들 새벽에도 다 걸어서 새벽예배를 다녔다. 새벽예배 끝나고 집에 가서 당하는 핍박은 끝이 없었으나,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핍박의 매도 아프지 않고 머리를 뜯겨도 아프지 않았다. 구 제단에서 새벽예배 시작하면 4~5시간씩 계속 100일간 ‘불의 사자 동방의 1인’을 외치셨다. 우리는 이단이라도 좋고, 9단이라도 좋았다. 이제는 살 길을 찾았고, 참 목자를 만났으니 정신없이 따랐다. 썩은 죄를 도려내고 영적인 새 살이 나오도록 수술을 하시는 하늘의 의사를 만난 것이다.` (맹경순 ‘신앙체험기’)

`저에게는 병자가 일어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죄를 회개하여 죄가 빠져 나가면 성신이 담긴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제 가슴속에 절실히 와 닿아, 평생 동안 기성교회에 다녔어도 죄에 대한 것도 모르고 눈물이 메말라 있었던 제가 하나님을 뵙고는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 죄 덩어리인 제 모습이 느껴지면서 눈물만 흐를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새사람이 될 수 있을까?’, ‘성신이 담길 수 있도록 깨끗하게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그 후 1956년 1월 1일부터 전도관 교인으로 정식 등록을 하고 원효로 구 제단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선우혜국 승사. 88세. 기장신앙촌 )

`1956년 어느 날 신기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끔 저희 집에 와서 굿을 해 주던 무당의 남동생이 벙어리였는데 군포에 있는 어느 장로교회 목사가 그 벙어리를 데리고 박태선 장로님의 한강 모래사장 집회에 참석한 후 3일째 되는 날 말문이 트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저는, ‘나도 혹시 병이 나을 수 없을까?’ 하는 기대가 생겨, 동네 사람들에게 박태선 장로님이 있는 곳을 물어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찾아간 곳이 원효로에 있는 하나님 자택 구 제단이었습니다.` (최안순 권사. 79세. 기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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