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람나무 하나님 증거에 앞장 선 젊은이들, 특전대”

1950~60년 대 전도-특전대와 무더기 심방
발행일 발행호수 2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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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왼쪽위부터 차례로)하나님의 강연회를 알리는 특전대의 관악 연주/1958. 10. 31. 서울 명동 시공관(現 명동예술극장), 집회 및 심방을 다니시는 하나님 모습, 1956년 경 서울에서의 무더기 심방 모습, 1959년 11월 특전대 밴드부의 청주 시내 행진, 무더기 심방을 하시는 하나님 모습, 1958년 5월 인천 시내에서 연주하며 인천전도관 집회를 알리는 모습.

2015년 전도의 해를 맞아 천부교 초창기부터 시대 별 전도 활동에 대해 알아본다.
교단 초창기였던 1950년~60년 대에는 하나님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전하기 위해 선봉장으로 나선 조직이 있었다. 1957년 서울 중앙 전도관(이만제단)이 준공된 후, 청년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특별 전도대(특전대)가 그것이다. 또 교인들과 임원들은 하나님을 따라 ‘무더기 심방’을 다니며 전도에 힘을 쏟았다.

이만제단 특전대가 결성된 때는 하나님의 천막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이슬성신을 증거 했던 기성교회 목사들이 일제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단이라고 몰아치기 시작할 때였다. 이슬성신이 성경에 기록된 동방의 의인, 감람나무가 부어주는 은혜임을 증거 하자 온 세상이 핍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감람나무 하나님을 증거 하는 선봉장으로 특전대 젊은이들이 나섰다.

특전대는 기성교회를 찾아가 목사들과 성경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지방 순회에 앞서 순회 예정 도시에 가서 밴드대가 북을 치며 노방전도를 했다. 밤에는 특전대 영사반이 영사기를 돌려 신앙촌의 건설상과 전도관 소식이 담긴 전도용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그 중 1958년 8월, 이 기획 제작한 칼라 장편 기록영화 ‘신앙촌 소식’과 ‘노구산의 영광’은 신앙촌 건설상, 입주자들의 생활상, 신앙촌 오만제단 부지에서 열린 하기 심령 대부흥회, 전국 전도관 대항 체육대회의 생생한 모습들이 담겨 있어 특전대 지방 순회 때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서울 중앙 전도관 특별전도대 조직
“작년(1957년) 5월 9일에 역사적 조직을 본 서울 특별전도대는 만 1개월 동안에 무려 20여 개의 제단 개척, 영화를 통한 전도 등 매우 놀랄 만한 공적을 이룩하였다. 이들 전도대원은 믿음으로 무장코 썩어 가는 일부 기성교회와 불신계를 위해 희망적인 방부제 역할을 했으며, 1주년을 맞아 전도책 수립을 가일층 강화한 바 앞으로의 활동이 크게 기대되고 있다.” (신앙신보 1958년 5월 12일 자)

당시 기성교회를 찾아가 목사들과 성경토론을 벌인 특전대원들 중에는 폭력배에게 폭행을 당한 이들도 많았다. 특전대와 토론을 벌이던 기성교회 목사가 말문이 막히자 교인들에게 창피를 당하고, 교인들이 대거 전도관으로 옮겨 가게 되자 급기야 폭력배를 동원하여 폭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기성교회를 찾아가 교인들 앞에서 목사들을 벙어리로 만드니 처음에 어떻게 하나하고 염려했던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을 얻어 하루라도 목사들을 만나 토론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 했습니다. 반대로 기성 교단에서는 비상이 걸려 각 교회에 공문을 내려 보내고 ‘전도관 학생과 청년들이 오면 절대로 만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토론에서 밀리게 되자 목사들은 점차 폭력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신보 2159호/ 김원태 전직 관장)

“이만제단에 ‘특별전도대’가 생기면서 특전대원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전도관을 전혀 모르시는 부모님과 친척들이 항상 안타까웠던 저는 특전대원 한 명과 같이 고향에 내려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원래 말이 없었던 제가 친척 어른 분에게 감람나무와 전도관에 대해 차근차근 말씀드렸더니, 저희 언니는 ‘네가 언제 이렇게 말을 잘하게 됐니?’하며 놀라워했습니다.
전도를 할 때면 저도 모르게 용기가 솟아나며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특전대원들은 밴드대를 앞세우고 노방 전도를 자주 했는데, 서울 시내를 다니며 ‘감람나무 이겼네~’ 하는 찬송을 신나게 불렀던 때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신앙체험기 395회 박금석 권사/소사신앙촌)

기성교, 특전대 활동에 폭력까지 휘둘러
“1960년 3월 하나님께서 안성제단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안성제단에 달려가 보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제단이 터져 나갈 것 같았습니다. 저희 일행은 단상 바로 옆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갑자기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깥에서 기성교인들이 예배를 방해하려고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왜 남의 잔칫집에 와서 저러는가.’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얼마 전에 이만제단 특전대가 안성제단에 와서 전도관 건설 영화를 보여 주었을 때는 기성교회에서 깡패를 동원해 예배실에서 난동을 부리고 영사기까지 부셔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날도 기성교인들이 돌을 던지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찬송을 부르며 아주 좋은 향기가 온몸을 감싸는 것처럼 진동하는 것을 느끼면서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신앙체험기 429회 안진옥 /기장신앙촌)

특전대, 체계적인 전도 활동의 중추
특전대는 지방 전도관의 부흥 발전과 개척 전도를 목적으로 1958년부터 전국 순회 부흥 전도에 나서기도 했다. 전라도, 강원도 등 전국 지역을 순회하여 전도 활동을 했던 특전대원들의 활동에 대해 1960년 8월 8일 자 신앙신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혹서에 간혹 폭우가 여정을 방해한 때도 있었지만 조금도 구애받음 없이 일행은 주야 상관없이 불꽃처럼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영화를 통해서 또는 격동하는 말씀을 가지고 담대하게 증거했던 바 벽촌에서 혹은 누항에서 운집한 군중들은 왜곡된 관념을 일소하고 감격과 숨김없는 찬양으로 기꺼이 신앙 가운데 호응하는 무리가 속출하여 전례 드문 부흥상을 보여주었다.”
서울 중앙 전도관 특전대는 이후 신앙촌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방 및 전도관에서도 조직되어 체계적인 전도 활동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된다.

1959년 7월 10일 발족된 신앙촌 특전대는 영사반만 따로 전국 각 제단을 돌며 단독 순회를 하기도 했고, 또 20대 청년 신앙촌 특전대원들은 영화 상영 장치, 자가 발전기, 이동식 의자가 갖추어진 특전대 전용 버스(경기 자444호)를 직접 만들어 영사반, 밴드부와 함께 전도활동과 농어촌 계몽 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특전대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전도의 열기는 한층 더 뜨거웠다. 특전대원이 노방 전도나 지방 순회를 하고 오면 하나님께서 안수 안찰을 많이 해 주셨다. 특전대원들도 감람나무 하나님을 증거하는 전도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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