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귀한 말씀 기도의 제목이 되다

발행일 발행호수 2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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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아뢰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의(義)를 위하여 간절히 구하고 기도할 때, 그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하늘의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가 드리는 기도의 제목은 다르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고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와 관련된 체험기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기도 속에 담긴 간절한 소망을 다시금 돌아봅니다.

“진실로 구하면 그 음성을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하나님의 귀는 먼 곳에 있지 아니하고 가까이에서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제가 다니는 중앙교회에서 하나님의 부흥집회가 있다고 하여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찬송 인도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어디서 타는 냄새가 한참 나다가 그 냄새가 없어지더니 백합꽃 향기 같은 아주 좋은 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일러 주시기를, 밥 타는 냄새 같은 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를 태워 주신다는 증거이고, 어느 정도 죄가 사해지면 향취를 맡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께서 죄를 태워 주시는지 안 태워 주시는지 알 수 있었겠나! 그저 교회만 다니면 천국에 가는 줄 알았는데…….’
저 자신이 은혜를 몸소 체험하고 또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니 마음이 얼마나 기쁘던지 눈물이 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다음 설교를 하시는데,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을 해 주시니 기도를 하세요.” 하시며 모든 죄를 씻어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 종일 예배를 드리고 늦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황의숙 권사/천호교회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속에 거하여 내가 의로움을 입을 수 있는 그 조건을 구하는 것이다.”

1963년 어느 날, 우연히 조 권사님 집에 신문을 보러 갔다가 주문진 전도관에서 오신 전도사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평소 조 권사님은 함께 교회에 다니자고 했지만, 저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그날 전도사님도 전도관에 나오라고 권하셨지만, 저는 역시 거절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무심코 찬송가를 펼쳤는데, 이런 찬송 가사가 있었습니다.
‘어둡던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신이여’
그 찬송가의 구절구절이 어쩌면 그렇게 마음 깊이 와닿는지, ‘내가 세상을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곧장 조 권사님 집으로 가서 “일요일에 교회 나가겠습니다” 하고 돌아왔습니다.

일요일이 되어 혼자 길을 물어 전도관을 찾아갔습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제단에 도착했을 때 몸은 지쳐 있었지만, 제일 앞자리에 앉아 오직 한 가지 기도만 드렸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마라톤 선수가 되게 해 주세요.’
다른 어떤 소망을 빌었던 것이 아니고 오직 인내로써 꾸준히 신앙의 길을 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늘 전쟁 때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 잠을 못 이루다가 그날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서부터는 너무나 편안하게 깊은 잠을 잤습니다. 또한 몸이 가뿐하고 마음도 평안해지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관에 다니면서부터 예전에 괴롭고 힘들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기쁨으로 바뀌니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안확실 권사/동작교회

“죄 가운데 떨어진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하는 것 이상 귀한 것이 없다.”

저와 어머니는 인천의 한 짠지 공장에 마련된 예배실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예배실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예배를 드린 후, 늦게까지 남아 철야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참 기도에 집중하고 있는데 과거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하던 때의 기억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먹을 것이 없어 모두가 굶주리고 있던 때에 미군들이 배에 구호 물품을 싣고 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구호 물품 나눠주는 곳에 가보니 넓은 바닥에 강냉이, 수수 가루 등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가져가게 했습니다. 당시 열다섯이었던 저는 커다란 보자기에 강냉이 가루를 가득 퍼담았고,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다시 가서 한 번 더 퍼왔습니다. 저는 그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뒷사람은 생각도 않고 너무 욕심껏 퍼왔던 제 행동이 부끄럽고 후회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려웠던 그 시절에 큰 수레에 장작을 가득 싣고 가는 사람 뒤를 따라가다가 몰래 장작 한 개비를 뽑아 달아난 뒤 저잣거리에 가서 돈이나 떡으로 바꾼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그때는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 말에 위로받고 잘못을 애써 외면해 왔습니다. 하지만 철야기도를 드렸던 그날은 너무나 추하고 더러웠던 과거의 죄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고 오랫동안 울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박래숙 권사/소사동교회

“하나님은 중심과 진심으로 향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은혜를 허락하는 것이다.”

1968년 덕소신앙촌에 들어가 건설대로 일했습니다. 덕소신앙촌 건설이 많이 진행된 시기에 들어갔기 때문에 건물은 대부분 지어져 있었지만, 슬레이트 지붕 설치, 자갈 운반 등 제가 할 일이 많이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들보다 늦게 신앙촌에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급하고 안타까워서 잠들기 전에 은혜를 많이 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자는 날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안찰해 주시는 꿈을 꿨는데, 안찰을 받으니 겪어본 적 없는 큰 기쁨이 마음에 넘쳐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난 이후에도 정신이 맑고, 꿈에서 받았던 마음의 기쁨이 유지되어서 너무나 신기하게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낙원에 가신 이후의 일이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집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지더니 잠시 후에는 몸 전체가 포근하게 감싸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마음이 너무나 평온해져서 머릿속에 다른 잡념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하는 찬송가 가사와도 같은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홍순호 권사/덕소교회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기도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시간을 아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시간은 자기의 소유가 되어 가장 귀한 것을 얻는 것이다.”

1966년 덕소신앙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짐을 싸 들고 간 첫날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신앙촌에 들어온 사람들을 안찰해 주신다고 해서 제일 마지막에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제 차례가 되자 하나님께서 “세상이 재미있는데 왜 신앙촌에 왔는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앙촌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후에도 친구가 좋고 세상이 재미있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들여다본 듯 말씀하시니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안찰을 받으려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다시 “세상이 좋은데 왜 신앙촌에 왔는가?” 하고 물으셔서 “이제부터 신앙촌에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안찰을 받은 후 훌훌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오면서 각오를 새롭게 다졌습니다. 과거의 생활을 버리고 귀한 은혜 주시는 길을 열심히 따라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덕소신앙촌에서 지내며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세상 재미를 좇아 사는 동안 신앙촌에서 은혜받고 맑게 살아온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일하는 것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열심히 일하며 은혜 주시기를 기도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부터 허투루 낭비하는 시간 없이 집중하며 일하고자 했습니다. 그 후 기장신앙촌 양말 공장에서 일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기도문을 하라고 말씀하셔서 마음속으로 계속 기도문을 하며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기도문을 하며 작업 자리에 앉았는데 근무가 시작되는 8시가 되자 형언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머리 위에서 퍼붓는 것처럼 강하게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기도문을 계속했더니 향취 또한 하루 종일 진하게 맡아져서 심지어 화장실을 갔을 때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침 8시부터 향취가 진동했습니다. 하루 내내 향취가 계속 연결돼서 맡아지니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침 8시부터 은혜를 보내 준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일하고 기도하는 것이 귀한 은혜 받는 길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순일 권사/기장신앙촌

“찬송가에 ‘내 기도하는 한 시간 그 시간이 가장 즐겁다’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속삭이는 시간, 그 모든 것을 들어주시는 순간, 은혜가 허락될 때에 얻어지는 환희와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다.”

인천제단에 다니기 전, 미국에서 생활할 때였습니다. 살면서 큰 불편함은 없었지만, 주변에 제단이 없다 보니 하나님께 은혜받고 제단에 나가 예배드리던 때가 몹시 그리웠습니다. 길가에 다니며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하는 찬송을 부르다가 돌을 주워 들고는 ‘하나님, 여기도 한국과 똑같이 돌도 있고 민들레도 있고 다 있어요’ 하며 울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 L.A.제단의 관장님이 어떻게 연락처를 아셨는지 저희 집으로 신앙신보를 보내 주셨고, 가끔 전화를 주셔서 말씀도 해 주시고 하나님 소식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언제 하나님 앞에 가서 손뼉을 세게 치고 찬송을 실컷 불러 볼까?’ 하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그 후 1983년, 이민 가서 처음으로 한국에 나와 기장 축복일에 참석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미주 교인들은 특별히 하나님과 식사를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식사를 마칠 때쯤 하나님께서 어느 관장님 성함을 부르시면서 하나님 앞에 마이크를 갖다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마이크를 설치하고 나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한테 와서 손뼉도 세게 치고 찬송을 불러 보겠다고 했는데 찬송 많이들 하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말씀하시는 것에 눈물이 터져 나와 찬송도 못 부르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한문옥 권사/인천교회

“겸손할 대로 겸손하고 낮아질 대로 낮아지는 이 심정이 하나님이 주는 심정이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솟아나면서,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된다.”

언젠가 덕소신앙촌 시절에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구원 얻을 자격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밤잠을 못 자고 근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장사를 다니다가도 ‘제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 편지 올릴 기회가 생겨, ‘저같이 부족한 사람도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하는 고민을 편지에 그대로 적었습니다. 그 후 백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분이 저를 부르셔서 갔더니 하나님께서 저에 관해 말씀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단에 다닌 일을 소상히 이야기하시며 “유 집사가 그동안 많이 울었는데 앞으로 열심히 살면 된다고 꼭 전해 줘라”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편지에 적지 않은 일까지 다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구나!’ 하면서, 제 마음을 다 아시고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말씀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힘을 얻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자 노력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유도순 권사/덕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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