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39> 순교는 천국을 보장하는가-②

세계 종교 탐구 <39>
발행일 발행호수 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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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자발적 순교자도 천국에 가는가

순교라 하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라는 그 정의처럼 불가피하게 죽음을 불사하는 드물고 특수한 경우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순교라는 표현은 ‘전쟁과 전투, 우발적 살인, 집단 학살’ 등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다. 즉, 본인의 의지로 죽은 것이 아니더라도 종교를 이유로 희생된 경우 순교라 표현하는 것이다.

<자료7> 가자지구 사망자를 순교자라 표현하는 하마스
작년 10월 31일, 이스라엘이 사이렌 없이 가자 난민촌을 연이틀 폭격해 전쟁 범죄 논란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 하마스 대변인은 “우리는 순교자의 나라라고 불린다. 우리는 순교자의 희생이 자랑스럽다.”며 항전 의지를 밝혔다. 약 2주 뒤인 11월 16일, 이스라엘군 1명이 숨지고 5명이 다치는 총격전이 벌어졌고, 하마스는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면서 “가자지구 순교자들이 흘린 피에 대한 복수”라고 밝혔다. (출처: MBC뉴스, SBS뉴스 유튜브)

예를 들어 이슬람 국가인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 보건부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사망자 수를 발표할 때, ‘순교자 수’라고 표현한다. 하마스는 “가자지구 순교자들이 흘린 피에 대한 복수”라며 이스라엘 군을 총격하기도 했다.<자료7> 이들에 따르면 현재까지 3만 1500명 이상이 순교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가리켜 ‘순교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번 전쟁 이전부터 사용돼 왔으며, 이슬람 국가들의 기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반유대주의의 광풍에 휩쓸려 행하지 않은 일로 누명을 쓰거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순교라는 표현을 사용해왔다. 예를 들면 14세기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퍼져 유럽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적이 있었다. 이때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 흑사병이 생겨난 것이란 악의적인 소문이 돌았고, 유대인들은 전 유럽적으로 혐오와 비난,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는데,
<자료8> 유대인들은 이를 순교라 표현했다. 반유대주의자들의 분노에 유대인들은 어차피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중세 기록자는 독일 노르트하우젠에서 일어난 유대인들의 집단 죽음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자료8> 1349년 흑사병 유행 당시 유대인을 불에 태워 죽이는 모습을 묘사한 삽화
14세기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퍼져 유럽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자,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 흑사병이 생겨난 것이란 악의적인 소문이 돌았다. 이에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혐오와 비난, 학살의 대상이 되며 살해되었는데, 유대인들은 이를 순교라 표현했다. (출처: jewish women’s archive)

“유대인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순교를 준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기뻐하며 기독교인들이 파놓은 공동묘지 앞에 정렬했다. 하나님이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하나둘 무덤으로 뛰어들었고, 모두 들어가자 주민들은 무덤 안의 목조 뼈대에 불을 질렀다. 이들은 모두 함께 죽었다.”

그런데 종교들은 자신의 종교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야 할 것 같은데, 왜 오히려 순교라는 표현을 남발하는 것일까?

<자료9>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
홀로코스트는 성경에 나오는 ‘번제’의 영문명으로, 그 단어에 ‘종교적 희생’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택하신 백성을 어떻게 이렇게 죽어가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했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끊임없이 모색한 끝에, 자신들의 집단적 죽음은 새로운 구속(救贖)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일종의 희생제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자신들이 겪은 참사를 단순한 희생으로 묘사하는 것보다는 인류의 구속을 위한 영웅적 순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20세기에는 더 잔인한 학살인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자료9> 유대인들은 이 또한 순교라 칭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본래 성경에 나오는 ‘번제(燔祭, 희생 제물을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의 영문명으로, 번제라는 단어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종교적 희생’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유대인 사상가들은 홀로코스트가 야훼 하나님의 체면을 돌이킬 수 없이 손상시켜 놓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정의(正義)를 의심스럽게 만들었고 성서가 말하는 선택이 경멸스럽게 왜곡되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택하신 백성을 어떻게 이렇게 죽어가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했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끊임없이 모색한 끝에 학살 속에는 분명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자신들의 집단적 죽음은 새로운 구속(救贖)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일종의 희생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겪은 참사를 단순한 희생으로 묘사하는 것보다는 인류의 구속을 위한 영웅적 순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순교라는 표현은 억울하기만 할 수 있었던 죽음의 가치를 높여주었고, 이 순교를 다른 종교에서 가로채는 사건도 생긴다. 유대인 출신의 한 수녀가 홀로코스트의 순교자로서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건이다. 수녀 에디스 슈타인(Edith Stein)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지만 유대인 태생인 이유로 학살 대상에 포함되었고, 네덜란드로 도피를 시도하다 1942년에 체포돼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유대인들은 가톨릭교회가 그녀를 자신들의 성녀로 칭송하는 것을 속상해했다. 에디스 슈타인을 가톨릭의 복자(성인의 전 단계)로 추대하는 의식에 참석했던 그녀의 조카딸은 “에디스 슈타인이 개종했던 그리스도교는 우리(유대교)를 박해했던 자들의 종교였다.”며 거북함을 토로했다. 그 거북함은 ‘가톨릭인들이 홀로코스트에서 자신들도 유대인과 같은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슈타인을 상징물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에서도 비롯되었다.

<자료10> 에디스 슈타인의 그림과 사진
수녀 에디스 슈타인은 홀로코스트의 순교자로서 가톨릭 성인이 되었다.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지만 유대인 태생인 이유로 학살 대상에 포함되었고, 네덜란드로 도피를 시도하다 1942년에 체포돼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난데없는 에디스 슈타인의 가톨릭 순교자 추대는 논란이 되었지만, 그녀의 시복 시성 절차는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교황의 죄』의 저자 게리 윌스는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죄를 어느 정도 덜어내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수난을 기독교인의 수난으로 일부 가로챌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출처: https://www.berakaartigos.com.br/edithstein, 위키피디아)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도 난데없는 에디스 슈타인의 가톨릭 순교자 추대는 논란거리였다. 그녀에게 순교의 의지가 있었다고 하기에는, 도망가려 했으나 실패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며, 그녀가 죽임을 당한 이유는 유대인이기 때문이었지 가톨릭 신앙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복 시성 절차는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시성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의 순교는 유럽사의 극적인 상징이자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잇는 화해의 가교”라고 말했다. 현재 그녀는 십자가의 성녀로 불리고 있으며, 유럽의 수호성인 중 하나이다.<자료10>

이 상황에 대해『교황의 죄』의 저자 게리 윌스는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죄를 어느 정도 덜어내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수난을 기독교인의 수난으로 일부 가로챌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에디스 슈타인을 비롯해 위 소개된 이들이 과연 순교자라 할 수 있으며, 순교자라면 이들도 천국에 가는 것일까?

▣ 순교라 믿으면 천국에 가는가

순교는 믿음에 기반하여 존재하는 단어다. 순교는 자신이 속한 단체를 위해 죽는 이타심과 희생정신으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간다는 것에 궁극적 의미가 있다. 그런데 천국이란 개념은 믿음의 영역이다. 믿음이 없는 일반인에게 순교는 다른 의미를 가지며, 이에 따라 다른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

황금전설을 읽은 한 철학박사는 혹독한 고문을 고통이 아닌 쾌락으로 여기고, 고통이 심할수록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을 느끼는 순교자라는 자들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아가타의 젖가슴을 쇠젓가락으로 절단하는 자들이 사악하고 잔인한 압제자들일까? 아니면 그런 고통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도록 어린 소녀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자들이 잔인하고 사악한 자들일까? 서로 먼저 고문당하고 참수되겠다고 앞을 다투는 모습이야말로 광기 중의 광기 아닌가? 고통을 쾌락이라고 한다면 순교야말로 포르노며 광기 아닌가?”

황금전설에서는 모범적 순교의 모습을 제시한 것이었지만, 비종교인의 입장에선 ‘종교에 정신을 지배당한 광신 행위’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순교가 입장 차이에 따라 상대적 가치를 가진다면 신자들의 믿음에 비신자들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실례인 것일까?

순교라는 단어가 믿음에 기반하여 존재하는 단어라면, 그 믿음이 진실한지 판단할 필요성이 있다. 믿음과 사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의 원인은 어린 시절부터 옳다고 지목된 것을 당신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그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데 있다.”라고 얘기했다. 즉, 믿음은 틀릴 수 있다. 믿음의 진실성을 가려내면, 그 믿음은 사실과 거짓으로 구분된다.

순교의 가치가 천국의 보장에 있다면, 천국에 보내줄 수 없는 종교는 순교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 그들의 권유는 ‘사기 행위’, ‘자살 및 살인 교사’, 살아 있는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과 다름없다.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들은 감히 천국을 논할 수 없다’는 명제는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는 천국을 보내줄 수 없는 종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방증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다양한 사례들을 비롯해, 종교들이 행해온 역사적 자료들, 현재 종교들의 소식을 알려주는 뉴스 기사들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사실을 분석해 본다면, 전쟁을 일삼는 종교가 어디인지, 범죄를 저지르는 종교가 어디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보람이나 가치가 없는 죽음’을 ‘개죽음’이라고 한다. 최고의 가치를 얻기 위해 순교하는 것인데, 거짓에 속은 것이라면, 그들의 ‘믿음’은 숭고했겠으나, 개죽음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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