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역사 그대로 간직한 고대 도시, 폼페이”

발행일 발행호수 2637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여러분은 역사 속에 박제된 도시 폼페이를 아시나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한순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도시 전체를 뒤덮은 화산재로 인해 폼페이는 20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1월 13일부터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시는 2000년 전에 멈춰있는 도시 폼페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선명한 색채의 벽화, 섬세한 조각상은 물론 화산 폭발의 순간을 연출한 미디어 콘텐츠까지 준비되어 폼페이의 평화로운 일상에서부터 멸망의 순간까지 관람객들을 이끌어갑니다.

그럼 폼페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폼페이는 어떤 도시일까

고대 폼페이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가 공존했던 상당한 규모의 도시로 성장하며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민들은 세련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부유층의 휴식 공간만 봐도 얼마나 풍족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식당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연회용 침대와 베개가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손님들이 기대 누워서 식사를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해요. 당시의 모습은 연회에서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시는 데 사용되었던 ‘크라테르’라는 커다란 잔에 그림으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또한 부유층의 응접실에는 커다란 조각상, 벽걸이 장식품, 화려한 프레스코 벽화와 모자이크 작품들로 꾸며져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만큼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등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조각상이 많았습니다. 손님들은 이렇게 고급스럽고 화려한 장식품들에 둘러싸여 휴식을 취했다고 해요. 편안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위해 탁자, 의자, 난로 등이 갖춰져 있었고, 등잔 기름에 에센스 오일을 섞어 이국적인 향기가 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생활상에서 볼 수 있듯이 폼페이는 호사스러움과 쾌락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사치와 향락의 도시, 타락한 도시 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폼페이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만큼이나 타락해서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던 폼페이 최후의 날에 대해 알아봅시다.

화산 폭발, 폼페이 최후의 날

앞서 말했듯이 폼페이는 79년 8월 23일과 24일 사이에 폭발한 베수비오 화산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폭발은 강한 진동과 함께 시작되었어요. 화산 구름이 높게 피어올랐고, 뒤이어 화산 쇄설물이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폼페이는 3m가량 되는 화산재에 뒤덮이게 되었고, 미처 피신하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 당시 나폴리만 건너편에서 화산 분화를 지켜보던 문인이자 정치가인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가 보낸 편지에는 당시의 비극적이고 긴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아직 엄청나게 많은 양은 아니지만 재가 우리 위로 떨어지고 있다. 뒤를 돌아보니 칠흑 같은 어둠이 급류처럼 우리를 뒤쫓아 땅 위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 어둠은 우리를 온통 뒤덮었고, 달이 없고 구름 낀 밤이 아닌 등불이 꺼진 채 문이 닫힌 방 같았다.
암흑 속에서 여자들의 흐느낌과 아기들의 울음소리, 남자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떤 이는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은 가족의 운명을 애통해했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어 신에게 기도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신은 남아있지 않고 마지막이자 영원한 밤이 세상에 왔다고 여겼다.
-소 플리니우스(A.D. 79년)의 편지-

세상 밖으로 드러난 폼페이

화산재에 묻힌 도시 폼페이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다 1748년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우연히 로마 유물을 발견했고, 해당 지역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폼페이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폼페이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는 ‘사람 캐스트’입니다. 캐스트란 원형이 사라지고 틀만 남은 자리에 다른 물질이 들어가 원형의 모습을 복구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고고학자들은 폼페이 발굴 당시 건물이나 도로, 물건의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았는데 사람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던 중 1860년 발굴 책임자였던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흙더미 사이와 건물마다 발견되는 빈 공간에 의문을 가지게 됐고, 빈 공간에 석고를 붓고 굳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파내자 사람의 형상이 드러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유독 가스로 인해 사망한 폼페이 시민의 몸 위에 화산재가 쌓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산재는 단단히 굳어지고 시신은 부패해 사라졌습니다. 시신이 사라진 자리가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석고상은 그 사람이 최후를 맞이했던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폼페이의 발견은 고대 로마의 찬란했던 문화와 역사, 예술을 보여주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하고 있습니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