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교황이 히틀러에게 비밀 백채널을 제공하다 (*백채널: 비공식 루트)
1939년 8월, 폴란드 침공 계획을 마무리 짓고 있던 아돌프 히틀러는 교황 비오 12세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는데, 교황청 주재 독일 대사조차 이를 알지 못할 정도로 미묘했습니다. 이러한 회담의 존재는 비오 12세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도록 바티칸이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했던 비밀이었습니다. 1981년에 완성된 12권의 제2차 세계대전 관련 교황청 문서에는 협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들에 대한 지식은 최근 바티칸에 비오 12세 비밀문서고(Vatican Secret Archive)가 열리면서 이제서야 밝혀졌습니다.
교회 역사나 제2차 세계대전 역사에서 히틀러나 그의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공개 비판을 피하고 홀로코스트 앞에서 공개적으로 침묵을 지키겠다는 비오 12세의 결정만큼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 보수주의자들은 비오를 히틀러와 파시즘의 단호하고 용기 있는 적으로 묘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나치의 침략 전쟁과 유럽의 모든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히틀러의 노력을 비난하지 않았다며 그를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1943년 10월 16일 나치 친위대가 1,000명이 넘는 유대인을 로마에서 체포했을 때에도 교황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를 거부했습니다. 바티칸 성벽 근처의 단지에서 이틀 동안 억류된 유대인들은 그 후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에 태워졌습니다.
국무원장이었던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이 비오 12세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제 히틀러는 바티칸과의 관계를 개선하거나 어떤 경우에든 새 교황이 자신의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보았습니다. 그는 교황과의 비밀중개자로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사위인 필리프 폰 헤센(36) 왕자를 선택했습니다. 파첼리가 선출된 직후, 히틀러는 폰 헤센을 그의 본부로 소환했습니다. 나치 정권과 바티칸의 불안정한 관계를 개선하려는 새 교황의 분명한 열망을 고려하여, 히틀러는 협상의 가능성을 타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폰 헤센은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교황과의 비밀회의 일정을 잡을 수 있는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폰 헤센과 교황 사이의 대화는 비공식 루트를 통해 준비되어야 했습니다.
1939년 5월 11일, 교황은 처음으로 히틀러의 특사를 만났습니다.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교황은 바티칸 국무원장인 루이지 마글리오네 추기경의 아파트에서 회의를 갖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두 사람은 독일어로 대화했는데, 교황은 독일에서 12년 동안 교황대사로 활동했기 때문에 독일어에 능통했습니다. 바티칸 비밀문서고에는 그들의 대화에 대한 독일어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교황은 독일인 고위 성직자를 숨겨 두어 왕자의 눈을 피해 대화 내용 전체를 받아 적었습니다. 최근 발견된 그 대화록들은 대화 내용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이 첫 번째 회의에서 교황은 히틀러에게 자신의 교황 선출에 대한 총통의 축복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자신이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꺼냈습니다. 그는 왕자에게 자신은 히틀러와 합의에 이르고 싶어 하며 자신의 양심이 허용하는 한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폰 헤센은 교황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교회의 약속을 문서화 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비오 12세는 질문을 회피하면서 문제는 정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를 들어, 젊은이들의 종교 교육을 정치적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다음 폰 헤센은 바티칸과 독일 제국의 관계에서 또 다른 골칫거리였던 독일 사제들의 “도덕” 재판에 대해 널리 알려진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수백 명이 아동 학대를 포함한 성범죄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교황은 “이러한 실수는 어디에서나 발생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부는 비밀로 남아 있고 일부는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례가 알려질 때마다 우리는 즉시 개입합니다.” 당시 파첼리 추기경의 지시하에 국무원장이 실제로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전년도 사무국 파일의 폴더에는 “비엔나: 수도사와 신부의 부도덕한 사건에 관한 모든 기록 자료를 불태우라는 명령”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가들은 나치 독일의 성직자 성적 학대에 대한 경찰 조사를 나치 정권의 반가톨릭주의와 동성애 혐오의 증거로 대체로 일축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러한 다양한 협박에 그토록 취약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만남 내내 폰 헤센은 그 말이 새어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확언했습니다. “저의 가까운 동료들조차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폰 헤센과 비오 12세와의 다음 비밀 만남은 8월 26일 카스텔 간돌포에서 열렸습니다. 이 만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새로 공개한 바티칸 사무국 비밀문서고에서 발견된 독일어 기록의 형태로 나옵니다. 이 회의는 히틀러가 독일군을 폴란드에 파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열렸습니다. 교황은 먼저 히틀러의 따뜻한 인사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 역시 교회가 제국의 종교적 평화를 보장하는 명예로운 합의에 도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독일 성직자들의 정치 활동에 대한 히틀러의 우려에 관해서는, 교회가 당파 정치에 참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걱정할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폰 헤센과의 대화에서 교황은 나치의 반유대주의 운동에 대해 어떤 우려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오 12세와 히틀러 사이의 합의를 방해하려는 사람들의 “적대적 간섭”을 방지하려면 모든 일이 계속해서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황은 라틴어로 “비밀(The secretum)은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회의는 1939년 10월 24일에 열렸습니다. 이제 잔혹한 폴란드 정복을 마친 히틀러는 교황에게 비밀 협상을 재개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교황과 필리프 폰 헤센이 나눈 독일어 대화의 기록을 보면, 침공과 대규모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교황은 히틀러와 대화를 주고받길 열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황은 회의를 마치기 위해 일어섰을 때, 왕자에게 그의 방문이 얼마나 감사한지 얘기하고 히틀러에게 따뜻한 인사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치의 외무장관 폰 리벤트로프는 히틀러가 이러한 개선을 이끌어내는 데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금융 및 성범죄 혐의로 기소된 가톨릭 성직자 7,000명 이상의 기소를 기각했으며, 매년 가톨릭교회에 막대한 재정보조금을 제공하는 나치 정부의 정책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폰 리벤트로프는 교황이 히틀러에게 감사할 것이 참으로 많다고 말했습니다.
비오 12세와 아돌프 히틀러가 이러한 회담을 시작하는 데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교황은 제3제국(=히틀러 치하의 독일 제국)과 그것이 정복한 지역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박해를 종식시키기 위해 나치 정권과 협상을 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히틀러는 전임 교황 치하에서 그토록 짜증나게 했던 교황의 비판을 끝낼 기회를 잡았습니다. 폰 헤센 왕자가 교황에게 말했듯이 히틀러로서는 합의에 도달하는 데 방해되는 것은 “인종 문제”와 가톨릭 성직자들이 독일 정치에 참여하는 것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성직자와 주교들은 나치 정책에 대해 어떤 비판도 해서는 안 됩니다.
교황이 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캠페인을 문제로 제기한 적이 있다는 징후는 없었습니다. (그 문제에 있어서 당시 교황은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한 무솔리니의 “인종법”에 대해 어떤 반대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의 두 번째 우려에 관해서, 교황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정치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거듭 부인했습니다.
비오 12세에게는 다른 우선순위가 있었습니다. 대규모 국제 조직의 수장으로서, 히틀러의 사절과의 협상에서 그의 최우선 목표는 제3제국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도적 자원과 특권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일한 목표가 교회의 복지를 보호하는 것이라면 그의 노력은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황직을 도덕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도자의 위치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비오 12세가 히틀러와 비밀리에 협상했다는 사실의 폭로는 극심한 실망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공포 속에서도 비오 12세는 히틀러 정권과 그 정권이 유럽의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비난하라는 큰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버텼습니다.
<출처: www.theAtlanti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