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촌 건설을 함께한 사람들, 건설대원

기장신앙촌 '건설 51주년'
발행일 발행호수 2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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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기장신앙촌 건설 모습.

기장신앙촌의 건설
1970년 2월 28일,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일원의 드넓은 대지에 정지(整地) 작업을 필두로 기장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다.

건설 현장은 하천이 흐르고 논과 산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땅이 갯벌로 이루어져 건설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울타리인 소사신앙촌도 원래 뱀골이라 불리던 황폐하고 메마른 땅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함께하시니 아름다운 소사신앙촌으로 건설되었던 것처럼, 기장신앙촌에서도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건설대원들은 난공사를 돌파해 나갈 수 있었다.

당시 건설대는 공사 순서대로 기초반, 콘크리트반, 벽돌반, 목수반 등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당시 용접기술자로 콘크리트 작업도 했던 이단우 권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단우 권사/기장신앙촌
저는 기장신앙촌 건설 선발대로 1동 건물 공사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갯벌 지대를 메워야 하는 난공사였지만 9m까지 땅을 파 내려가 기초를 튼튼히 하고 콘크리트 작업을 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덕소신앙촌에 계시면서 매일 비행기로 출퇴근하시는 강행군을 하셨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시니 우리도 신이 나서 우리가 살 터전을 닦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제가 작업했던 건물이 지금 대예배실이 있는 1동 건물입니다. 그곳에서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와 같은 작업복을 입으시고 함께 일하셨던 하나님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건설대원들은 기장신앙촌 건물 중에서 1동 건물을 가장 어려웠던 공사로 꼽는다. 현재 대예배실이 위치해 있는 1동은 원래 갯벌이었던 곳이라 흙을 메워도 계속해서 물이 솟아나고 공사 기간에 폭우까지 쏟아져 기초 작업에서부터 난항을 거듭했다. 당시 상황을 인중애 권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인중애 권사/기장신앙촌
땅도 질퍽한데 비까지 내리니 하루에 기초를 2개 파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땅을 팔수록 물이 솟아올라 기초 하나에 보통 4~5시간씩 물을 퍼내는데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물을 퍼내셨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작업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동이 틀 무렵 오셨는데, 한참 일을 하다가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나서 얼른 고개를 들어 보면 하나님께서 정문에서부터 웃으시며 손을 흔들고 걸어오시는 겁니다. 그러면 저희들은 얼른 물을 길어와 밥을 짓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는 저희와 함께 식사를 하시고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콘크리트 작업을 하려면 자갈이 필요한데, 사들여 온 자갈이 모래와 진흙투성이여서 도저히 그냥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경 15cm 정도 되는 호스를 직접 잡으시고 물을 뿌려 자갈을 씻기 시작하셨습니다. 가장 힘든 자리인 맨 앞에서 호스를 잡으시고 작업을 진두지휘하셨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덕소로 돌아가신 후 제가 그 호스를 잡아 봤는데 수압이 워낙 센 데다 호스는 물렁물렁해서 잡자마자 호스를 놓치고 뒤로 넘어갈 정도였습니다. 저는 힘이 세어서 동료들이 황소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된 작업을 종일토록 하셨는지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 내내 하나님께서 직접 자갈 씻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기장신앙촌 어디에도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기둥 하나, 담 하나, 벽돌 하나, 이 모든 곳에 하나님의 땀이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흘리신 땀의 무게를 어떻게 다 헤아리겠습니까. 늦은 밤까지 저희와 함께 일하시며 구슬 같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셨던 하나님, 쏟아지는 비를 다 맞으며 작업을 진두지휘하시던 하나님. 그 와중에도 다친 사람과 아픈 사람에게 축복의 손길을 허락하시며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기장신앙촌의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이 그리워집니다.

건설대 B반 반장이었던 인중애 권사. (맨 오른쪽)

기장신앙촌 건설에 참여했던 대원 중에는 앞서 소사와 덕소 신앙촌 건설을 경험한 고참 대원뿐 아니라 처음으로 신앙촌 건설에 참여하는 신입 대원도 있었다. 신입 여자 대원이었던 김정희 권사는 이런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정희 권사/기장신앙촌
기장신앙촌 건설 당시 건설대로 덕소신앙촌 공장에서 뽑혀 왔습니다. 기장에 오니까 건설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고, 공장 출신들은 고참 건설대원들과 따로 일했습니다.

고참 건설대들은 능숙하게 일도 잘하는데 우리는 쩔쩔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을 잘 못 하니까 몸도 마음도 힘들어하던 어느 날, 다섯 명이 건설자재를 들고 1동 2층까지 올라가서 내려놓고 돌아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시더니 “야, 너희들이 이걸 들고 왔니. 장하구나!” 하시며 칭찬을 하시는 거였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내려왔습니다.

기장신앙촌을 건설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일 덕소에서 왕래하셨는데 밤 8시쯤 되면 가셨다가 다음날 새벽예배를 인도하시고 아침 8시도 되기 전에 기장에 오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무시긴 하셨을까’ 싶은 정도의 강행군을 계속하셨던 것입니다.

어느 날 제가 지각을 하게 되어 늦게 현장에 나갔더니 하나님께서 이미 나와 계신 것을 보고 얼마나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얼른 뛰어가는데 하나님께서 부드러우신 음성으로 “여기 못이 많은데 그렇게 뛰다가 다친다. 조심해야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많이 납니다. 우리를 살피시고 귀하게 여겨 주시니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장신앙촌 건설 당시에 건설대원뿐 아니라 경비와 행정 사무를 위해 1차적으로 덕소신앙촌의 인원이 선발되어 내려갔는데 서로 먼저 선발되려는 경쟁이 치열했고 먼저 선발된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의 일화를 김덕웅 권사가 들려주었다.

김덕웅 권사/기장신앙촌
저는 1970년 덕소신앙촌 안내부(지금의 경비실)에서 일했습니다. 기장신앙촌 건설 당시 필요한 인원들이 덕소신앙촌에서 선발되어 갔는데, 모두들 먼저 뽑혀 가기를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안내부 중 세 사람이 선발돼 기장신앙촌에 가게 되자 뽑히지 않은 사람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크게 낙심했는데 얼마 후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세 사람을 다시 뽑아 주셨는데 거기에 제가 뽑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못 뽑혔다고 낙심하던 저를 잡아 주신 것 같아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해서 기장신앙촌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기장신앙촌에는 1동 건물이 골조 작업까지 되어 있고, 3동은 건물 터를 닦고 있었습니다. 임시 가건물인 숙소에서 자다가 날씨가 추워 잠에서 일찍 깨었습니다.

초소에서 연탄불이나 쬘까 하여 한 안내원이 근무하고 있던 임시 초소로 나가니, 안내원이 “하나님께서 건설대원들과 작업 현장에 아침 일찍 나오시니 주의해서 잘 보라.” 하며 화장실에 갔습니다. 불을 쬐고 있자니 ‘덕소는 스팀도 잘 들어오고 시설도 잘되어 있는데 나중에 올 걸 잘못했다.’라며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30m 정도 떨어진 곳에 작업복에 마스크를 쓴 어떤 분이 목수들과 함께 서서 제 쪽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화장실을 갔다 오던 근무자가 깍듯이 그분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작업복 차림으로 나와 계셨던 것이었는데 저는 그동안 양복 입으시고 단상에 서신 모습만 생각하다가 미처 못 알아본 것이었습니다. ‘아차!’ 하고 뒤늦게야 인사를 드리니 하나님께서 옆으로 오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어제 내려온 사람인가? 춥지?” 하고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하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덕소 조금 더 있다가 올래? 덕소는 스팀도 잘 나오고 시설도 좋잖아.” 하시며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웃으시며 “조금만 참으면 곧 보일러 시설을 잘 해서 따끈하게 해 주겠다.” 말씀하시고는 가셨습니다. 제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시고 지적하신 것이었습니다.

또 한번은 급히 벽돌 공장을 지어야 하는데 건설대원들이 일손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안내원들까지 공장을 지을 터에 있는 나무를 뽑는 작업에 주야간으로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현장에 나오셔서 손수 나무를 휘어잡으시고 톱질하라 하시며 저희들과 함께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작업하는 중에 한번은 저희들을 데리고 공장 지대가 보이는 높은 곳까지 올라가셔서, 저희들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아래를 내려다보시며 “앞으로 공장은 이렇게 짓고 불을 환하게 켜면 좋겠지.” 하고 말씀하시는데 마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대하듯 다정하신 그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건설 당시 사용된 덤프 트럭과 포클레인 작업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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