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핀 시신을 정치적 제물이 되게 할 수는 없었죠’

당시 예배 인도했던 관장들의 이야기
발행일 발행호수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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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환동이는 축복일에 갈 때면 버스에서 노래를 잘 불러 교인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었던 재간둥이었지요.” 조환동 군의 잘 핀 시신을 데모대에게 내 줄 수 없어 끝까지 지켜냈던 관장들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이제 데모대에게 맞아 죽는구나”라고 각오했었다고 했다.

시위대는 노제를 지내며 운집한 군중을 선동 하려고 발인 예배를 마친 조환동 군의 관을 빨리 내놓으라고 불같이 독촉을 했고 예배를 인도하는 관장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려고 했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병원 밖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입관 예배를 드리는 중에도 빨리 끝내라는 쪽지가 계속해서 왔지만 예정 대로 10시가 되어 예배를 마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핀 시신을 다 보여 준 후 관뚜껑을 닫고 ‘우리 식구들은 관 주위로 모이세요’ 하고는 ‘저 문 닫아라’ 하고 외쳤습니다. 순식간이었어요. 전날 미리 답사를 하며 어떻게 하면 될까 잠을 못 자며 고민을 했습니다. 장례 위원회에서 결정된 대로 시신을 넘겨주기는 해야하는데 어떻든 최대한 시간을 끌 작정이었습니다. 시신이 데모대의 제물이 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영안실 문이 닫히자 문 밖에선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문을 부수려고 했고, 안에서는 교인들이 의자며 책상이며 막을 수 있는 것은 총동원해서 바리케이트를 쌓으면서 대치했다. 시위대는 마지막에는 산소 용접기까지 동원해 철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 무더운 여름날 병원을 에워싼 시위대와 2시간 가까이 대치하다 결국 12시쯤 시신을 내주게 되었다.

그러나 시신을 일찍 넘겨받지 못한 군중들은 이미 많은 수가 흩어진 뒤였다. 덕분에 조환동 군의 시신은 ‘소년 열사’로 묻히는 대신 가족들의 품에 안겨 평안히 잠들 수가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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