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가신 길, 생명길
1967년 전국 순회 전도 집회이슬성신 은혜를 베푸시다
한 생명이라도 더 건지려는
애타는 심정으로 방방곡곡을
다니시며 순회 집회를 하셔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 전도
1966년 덕소신앙촌 제단이 완공된 후 하나님께서는 전국 전도관을 순회하며 집회를 인도하셨다. 광주를 시작으로 1967년 한 해 동안 서울 경기 지역과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도심부터 산골 마을까지 방방곡곡을 다니시는 한편으로 매일 덕소신앙촌에 돌아와 새벽예배를 인도하시는 일정이었다.
1970년대 기장신앙촌이 완공된 후에는 매주 서울의 8개 중앙과 인천, 소사·덕소신앙촌까지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달려 예배를 인도해 주셨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 가신 길은 그대로 생명길이요, 뭇 심령에게 이슬성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여정이었다.
1967년 전국 순회 전도 집회
1966년 12월 13일, 하나님께서는 DC-3형 프로펠라 비행기편으로 광주 비행장에 도착하셨다. 당시 김포와 광주를 오갔던 프로펠라 비행기는 1일 1회만 운항하며 기상 상황에 따라 운항 시간조차 일정치 않은 열악한 교통편이었다.
하나님께서 전국 순회의 첫 번째 장소로 광주를 택하신 이유는 괄목할 만한 전도의 결실 때문이었다. 광주전도관은 단 4개월 만에 1,400여 명을 전도했던 것이다. 1967년 3월 두 번째 광주 집회를 앞두고는 건물을 2층까지 증축했는데 집회 당일 일찍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450여 평 교회에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에 당도하시자마자 3시간 반 동안 설교를 계속하셨다. “한 생명이라도 더 건지시려는 애타는 심정으로 불을 뿜는 듯 장장 세 시간 반에 걸쳐 구원의 근본을 논하셨다.”고 신앙신보는 그 모습을 전하고 있다.
설교를 마치신 후에는 안찰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안찰로써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광주에서는 그 수가 1,100여 명에 이르렀다. 순회 집회를 하시는 곳마다 먼저 죄의 종류를 지적하고 사하시는 권능을 설명하신 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쉼 없이 안찰을 해 주셨다.
1967년 4월 공주집회 때는 “안찰을 받아 보고 죄가 드러나면 믿겠습니다.”라고 단언했던 기성교회 장로가 안찰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지적하시는 권능을 깨닫고 그길로 전도관에 나오게 된 일이 있었다. 군내에서 모자(母子) 전도사로 유명했던 기성교회 전도사도 공주전도관으로 나오는 등 기성교인만 400여 명이 전도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설교와 안찰을 마치신 후 다시 밤길을 달려 통행금지 전에 덕소신앙촌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계속하셨다. “한번 집회에 가시는 길이란 가깝지가 않다. 보통 군산, 이리, 목포, 여수 등지는 왕복 천 수백리의 자동차길- 쉬지 않고 달려 열다섯 시간 이상씩이다. 그것도 아스팔트도 아닌 돌짝길, 높은 산과 가파른 골짜기… 부산집회는 이틀을 계속하여 항공편으로 네 번이나 왕복하셨다. 덕소신앙촌 새벽예배를 비우실 수 없는 연고였다.”는 신앙신보 기사는 숨 가쁜 여정을 엿보게 한다.
하나님께서 순회 집회를 하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도되는 한편으로 기성교회의 방해 또한 끊임이 없었다. 강원도에서는 목사들이 3인조씩 길목을 지키며 하나님 집회에 참석하는 기성교인들을 막아서기도 하고, 안동에서는 하나님 집회 시간에 맞춰 윷놀이를 벌이는 것으로 집회 참석을 막아보려고 했다. 이때만큼은 기성교회의 단결이 이루어져 전주에서 하나님 집회가 열리자 부산에 있는 목사 15명이 전주 기성교회를 지원하고자 달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신앙신보는 이렇게 적고 있다. “거짓과 모략은 어느 땐가는 꼭 그 진실이 밝혀지기 마련이어서 그 모략이 거짓임이 판명될 때는 오히려 더 큰 진실의 수확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보면 기성교회의 모략은 오히려 전도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전국적으로 각지를 순회하시면서 집회를 열고 계신다. 진실한 믿음을 갈망하는 자라면 이 기회에 참과 거짓을 분간하고 깨달아 죄를 벗고 구원의 자리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