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의 역사 속에서 깨달은 은혜와 확신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장일천 퇴임관장(1)
발행일 발행호수 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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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36년 전북 전주시 우아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장로교회에 나가다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출판에 관계되는 일을 보면서 여러 부흥집회에 다녀봤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굳은 확신이 서지 않아 늘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때 교계에서는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를 통해 성신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저는 귀가 번쩍 뜨이면서, 장로님을 직접 만나 뵈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으며 서둘러 서울로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수소문 끝에 원효로에 큰 집회 장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원효로에 가보니 바닥이 마루로 된 큼직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원효로 구제단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안찰부터 받으라 하셨습니다. 눈 안찰 후 배 안찰을 받을 때 하나님의 손이 배에 닿는 순간 뱃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시원한 물이 뱃속에서 계속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희한한 체험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음은 한없이 편안해졌으며 기쁨은 물밀듯 넘쳤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성신의 역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곳을 떠나면 안 되겠다고 생각되어 전주로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계속 서울에 있으면서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서울 용산구 청암동에 세워진 서울중앙전도관(1957년 이만제단)

당시 예배 시간에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몰려왔던지 제단 안에는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어서 밖에서 예배 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안 되겠구나. 우리도 더욱 큰 제단을 짓자.’ 그렇게 해서 용산구 청암동,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새로 이만제단을 짓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로 하고 생수빵(생명물로 만든 빵)을 공급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힘든 줄 몰랐으며 입에서는 하루 종일 찬송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 힘이 솟고 또 솟았습니다.

이만제단이 완공되는 시점에 저는 주일학교 반사와 특별전도대원으로 있으면서 전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따라 ‘무더기 심방’도 하고 북을 치며 노방전도도 하였습니다. 당시 이만제단에는 어찌나 많은 사람이 모였던지 일요일 대예배 때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전도관’ 하면 서울에 사는 사람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붕에는 ‘서울중앙전도관’이라는 대형 간판이 밤새 번쩍였으며,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형 음악종이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습니다. 새벽이면 강 건너 영등포 구로동까지, 강북에서는 북악산까지 들리는 정도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음악 소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감동을 주었는데, 심지어 한강에 자살하러 나왔던 사람이 그 종소리를 듣고 마음을 돌이킨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1957년 11월 3일, 저는 경북 경산에 개척 전도사로 발령받았습니다. 당시 개척 전도사라고 하면 교인 한 사람도 없는 곳에 발령받기가 일쑤였습니다. 의지할 곳도 기댈 데도 없는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 믿고 움직이다 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제단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경산 역시 제단 건물이 없고 임시로 천막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제단에 하나님께서 한 달에 한 번씩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 중에는 난치병인 나병으로 고생하던 과수원집 남매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임시로 지은 제단에 나와 은혜를 받고 부산 대신동 집회, 밀양제단 집회 등을 따라다니며 하나님께 안수와 안찰을 받은 후, 나병이 완전히 나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신기한 기적을 본 마을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제단으로 몰려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자초지종을 묻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제단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경산 장로교회 김무생 목사와 그의 딸 김신희(초등학교 교사), 그리고 그녀의 친구 이은경 선생은 제단에 열심히 나오는 분이었습니다. 김 목사의 딸과 이은경 선생은 당시 폐결핵 3기였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순회집회 때 안찰을 받고 씻은 듯이 나아 온 동네가 다시 한번 떠들썩했습니다. 이런 기적이 잇따르자 70평 되는 천막 제단이 좁을 정도로 사람들이 불어났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경산에도 새 제단이 번듯하게 지어졌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전도관 소식을 전했던 특전대원들(1950년대 후반)

당시 이런 기적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따르는 수가 수백만도 넘었습니다. 생명물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안수 한 번이라도 받은 사람들까지 수를 헤아리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제단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다 보니 사람들의 화제는 온통 ‘전도관’이었고, 심지어 기성교회 교인들이 다니고 있던 교회에는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전도관으로 몰려오자 그들은 교인이 없어 할 수 없이 교회 문을 닫는 일도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전도관,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관 사람들, 세상은 온통 전도관 천지인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소사신앙촌이 건설되어 전국 각지에서 은혜받은 사람들이 속속 입주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기성교회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이단이라고 매도하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일을 연결시켜 모략과 중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문과 방송들도 사실에 대한 확인도 없이 일방적인 보도만 계속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기성교단과 밀착되어 있던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급기야 하나님을 영어의 몸이 되게 하였습니다.

(1997. 8. 17. 신앙신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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