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문화와 종교를 ‘이단’으로 말살한 범죄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을 찾아서...
발행일 발행호수 2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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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모습 (출처 : 위키백과)
테노치티틀란은 텍스코코 호수 한복판에 세워진 수상 도시로, 인구 25만 명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였다. 내부가 질서 정연하게 구획되고 완벽한 배수 시설을 갖춘 문명 도시였다. 이 도시는 1521년 가톨릭 탐험가 코르테스의 공격으로 철저히 파괴당했으며 폐허가 된 도시 위에 현재의 멕시코시티가 건설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사건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전무후무한 재앙이었다. 콜럼버스는 유럽에 있는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공할 수 있도록 바닷길을 열어 주었고 그 길을 따라 일확천금의 탐욕을 품은 침입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콜럼버스의 후예들은 탐험이라는 미명 하에 아메리카 곳곳을 누비며 약탈과 노략질을 계속했다.

이 탐험대가 원주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탐욕과 무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십자가를 높이 세운 탐험대는 원주민의 종교가 곧 악마 숭배이기 때문에 이를 파괴하고 예수를 믿게 해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종교 집단은 원주민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일상과 생각을 감시하며 예수 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낌새가 발각되면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어 무참히 살해하는 파국을 가져왔다.

지금부터 500년 전인 1519년, 가톨릭 탐험대가 아메리카 원주민 통치자를 만나는 사건이 있었다. 탐험대의 우두머리는 스페인 출신의 코르테스였고, 원주민 통치자는 아스텍을 다스리는 목테수마 2세였다. 아스텍은 호수 위에 도시를 건설할 만큼 수준 높은 문명 국가였으며 도시의 중심부에는 전통 신을 섬기는 거대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자료1> 아스텍 원주민들은 종교와 삶을 하나로 이해했기 때문에 종교는 그 자체로 뿌리 깊은 생활 규범이었다.

<자료2> 1520년 5월 21일 가톨릭 탐험대에게 학살 당하는 아스텍 원주민 (출처:i.pinimg. com/) 아스텍을 점령 중이던 가톨릭 탐험대는 전통 신전에 난입해 종교 행사로 춤추며 축제를 벌이는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신전 바닥에는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튀어나온 창자들이 떠다녔다.

아스텍의 왕 목테수마는 코르테스 일행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높이 50미터에 달하는 피라미드 신전에 데리고 올라가 신전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코르테스는 이 설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에게 가톨릭 이외의 종교는 무엇이든 악마 숭배였고 아스텍 신전은 끔찍한 악마의 소굴일 뿐이었다. 코르테스는 이 신전에 십자가와 마리아 상을 세우고 악마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목테수마는 자신의 종교를 모독하는 발언에 “우리가 섬기는 신도 좋은 신이고 당신이 섬기는 신도 좋은 신입니다.”라며 점잖게 응수했다. 그는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을 베풀었으나 코르테스는 자신의 종교를 폭력으로 관철시켜 나갔다. <자료2>

코르테스는 스페인에서 병력을 지원받아 목테수마를 무참히 살해했으며 아스텍 제국을 강탈하자마자 제일 먼저 원주민의 신전을 파괴했다. 그리고 군사적 정복에 이어 원주민의 영혼과 정신을 정복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가톨릭 수도사들을 불러들였다.

1524년 열두 명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예수의 열두 제자를 떠올리게 하는 의도적인 숫자였다.<자료3> 그들은 원주민의 면전에 대고 “우리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는 진리요, 당신들이 섬기는 신들은 악마의 사신이오.”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파괴된 아스텍 신전을 지키던 원주민 제사장들은 정중한 어조로 “우리가 오래 전부터 신을 섬겨온 방식은 존중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항변했지만 가톨릭 수도사에게 먹혀들 리가 만무했다. 그들은 원주민 땅에서 악마를 쓸어 버리고 가톨릭의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도사들은 아스텍 원주민의 종교를 철저히 말살하는 작업에 나섰다. 원주민의 정신적 뿌리이자 생활 규범인 종교를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가톨릭 수도사들은 잔인한 효율성으로 성공시켜 나갔다. 그 핵심은 강제 개종과 이단 심문이라는 양면 작전이었다.

<자료3>
1524년 아메리카에서 이단을 박멸하고 지상천국을 세우기 위해 찾아온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12명(출처 : 위키미디어)

수도사들은 한 번에 수천 명씩 세례를 주며 원주민을 집단적으로 개종시킨 후 원주민이 우이칠로포치틀리(아스텍의 수호신)나 틀랄록(물과 비의 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낌새가 발각되면 곧장 이단 심문소로 끌고 와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 예수 외의 다른 신을 섬겼다는 이유로 이단이라는 죄목을 덮어씌운 것이었다.

이단 심문소는 공개 화형도 불사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불에 태우는 것은 아스텍 원주민들이 일찍이 보지 못한 잔혹한 살해 행위였고, 이에 경악한 아스텍의 예언자 마르틴 오셀로틀은 가톨릭 수도사들이야말로 말세에 찾아온 악마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전통 신을 숭배하는 것은 원주민의 생활 곳곳에 스며 있는 문화였기 때문에 이런 ‘이단 행위’를 색출해 내기 위해 가톨릭은 원주민을 철저히 감시했다. 또 원주민 자녀들을 교육시켜 물샐 틈 없는 감시망을 구축해 나갔다.


<자료4>
아스텍의 전통 신전을 파괴한 자리에 건립된 가톨릭 대성당(출처 : 위키백과)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위치한 대성당은 멕시코에서 가장 큰 가톨릭 성당이다. 가톨릭 탐험대는 전통 신전을 파괴하고 그 석재를 이용해 성당을 건립했으며, 이후 이 성당을 확장 신축해 1813년에 완공되었다.

수도사들은 원주민 자녀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교육시킨다는 명분 아래 철저한 가톨릭 교리를 주입시켰다. 너희 조상이 악마를 숭배한 죗값으로 활활 타는 지옥 불에서 고통 당한다고 세뇌하면서 만약 부모가 이단 행위를 저지르면 즉각 고발하도록 부추겼다. 실제로 크리스토발이라는 아스텍 원주민 아이가 전통 신을 숭배하던 아버지를 이단으로 고발하고 아버지는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 끝내 숨을 거두었다.

원주민 가정 내에서 이단 행위를 색출하면서 부모와 자녀 세대는 분열과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상형 문자로 기록된 원주민의 종교 서적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모조리 불태우면서 전통 문화는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폐허가 된 전통 신전 자리에 십자가를 높이 올린 성당이 새롭게 건립되자 가톨릭 수도사들은 감격에 벅차 예수에게 감사를 올렸다. 그들이 염원하던 이단 박멸이 완성된 것이었다.<자료4>

<자료5> 알비파의 거점이었던 남프랑스 지역 (출처 : www.ancient.eu)

이단을 박멸하는 것은 가톨릭 2,000년 역사의 숙원 사업이었다. 자신과 다른 것은 모조리 ‘이단’으로 낙인 찍어 남김없이 숙청하는 것은 가톨릭 역사에서 무한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 역사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가톨릭도 태생부터 이단이었다는 점이었다. 가톨릭은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유대교 경전을 구약 성경으로 사용했으나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를 구세주로 믿음으로써 유대교로부터 이단으로 낙인 찍혔다. 서기 85년경 유대교 회당은 “이단인 나사렛 사람들(가톨릭 교인들)이 신속하게 파괴되고 제거되기를 기도하나이다.”라는 문구를 걸고 이단 가톨릭을 철저하게 배척했다.

<자료6>
1209년 7월 프랑스 베지에에서 이단 알비파를 학살하는 가톨릭 십자군
(출처 : http://promenadeenfrance.fr)

뿐만 아니라 가톨릭 내부에서도 서로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저속한 욕설이 난무했다. 누가 정통인지 누가 이단인지 확립되지 않은 채로 서로가 서로를 악마라고 저주를 퍼붓는 혼란이 200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 후 3세기 후반에 이른바 정통 교리가 확립되자 가톨릭은 이단과의 전면전에 나섰다. 이단을 완전히 말살해 버리는 가톨릭의 잔혹사,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이단 박멸 사례는 12세기 알비파를 짓밟은 사건이었다. 알비파(Albi-派)는 프랑스 남부의 알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가톨릭의 한 종파를 뜻했다. <자료5>

예수가 신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알비파는 가톨릭 사제들의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난하며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179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알비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알비파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을 지시했고, 120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한층 더 강화된 이단 박멸을 위해 십자군에게 알비파를 숙청하라고 명령했다. 십자군은 알비파의 주 근거지였던 남프랑스의 도시를 차례차례 점령하며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했다.

알비파의 거점인 베지에를 점령할 당시 한 병사가 무고한 사람까지 죽일 것을 염려해 “어떻게 알비파를 알아봅니까?”하고 물었을 때 교황 특사인 아르노 아모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 죽여라. 예수께서 가려내실 것이다.(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이단이든 아니든 모두 죽이고 나면 그 판별은 저 세상에서 예수가 해 준다는 말이었고, 그 명령에 충성스러운 십자군들은 베지에의 주민 2만 명을 남김없이 도륙했다. <자료6>

<자료7>
1243년 3월 프랑스의 몽세구르에서 가톨릭 십자군이 이단 알비파를 화형에 처하는 모습
(출처 : www.catharcastles.info)

십자군은 알비파의 마지막 거점인 몽세귀르의 요새를 탈환했을 때 알비파 200명을 전부 산 채로 불태워 버렸다.<자료7> 살 타는 냄새와 비명 소리가 지옥을 방불케 했고 풍요롭던 마을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다. 이처럼 100년이 넘는 혈전을 치르고 1330년 이후에는 더 이상 이단 심문소에 알비파가 잡혀 오지 않게 되었다. 이단 알비파가 프랑스에서 완전히 박멸된 것이었다.

프랑스가 알비파를 숙청한 후에는 스페인이 이단 집단인 유대인을 대대적으로 섬멸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이단 심문소는 악랄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2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 중에서 유대인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자료8>

<자료8>
스페인 이단 심문소에서 이단자를 고문하는 모습(출처: wikiwand.com)

일찍이 유대인들로부터 이단이라고 배척당했던 가톨릭이 다시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유대인을 죽였으니 결국 ‘이단’이란 상대방이 멸절할 때까지 무한 반복되는 아이러니였다. <자료9>

가톨릭은 이단 심문소를 통해 신속하게 반대파를 숙청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이 잔인한 기술은 유럽을 정복한 다음 아메리카까지 전파되었다.

예수를 알지도 못했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어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정신까지 말살해 버렸으니 한층 업그레이드 된 악이 세계로 전파된 셈이었다.

이처럼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범죄 집단은 다른 문화뿐 아니라 무고한 생명도 가만두지 않았다. 다음 기획기사에서는 이 집단이 아메리카에서 벌였던 종족 학살(프런티어 제노사이드)에 대해 알아본다.

<자료9> 스페인 이단 심문소에서 이단자 유대인을 화형시키는 모습(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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