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세계사 <4>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을 찾아서…증오의 씨앗을 뿌린 범죄 집단과 그들의 이중 어법

다시쓰는 세계사 <4>
발행일 발행호수 2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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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9일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의 발언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대립하고 있는 국가들을 향해서 분쟁을 대화로 해결해야 된다고 종용했다. 서로 증오심을 자제하고 대화하라는 교황의 발언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권유하는 당사자가 극심한 대립과 증오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라면 어떨까.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양심에 거리껴 공공연하게 대화를 권유하기가 망설여질 것이다. 그러나 이중 어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라도 전혀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이중 어법은 행동과 완전히 분리된 언어이기 때문에 악을 행하면서도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자는 이중 어법을 정신 분열적인 어법이라 평하기도 한다.

따라서 극악한 범죄자가 이중 어법을 사용하면 자신은 선과 사랑을 실천한다고 만천하에 선언할 수 있다. 또 명백하게 해악을 입힌 가해자가 이중 어법을 사용하면 무고한 상대방에게 책임이 있다며 고스란히 떠넘길 수 있다.

이러한 이중 어법 전략을 실제로 사용하는 집단이 있고 이들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오랫동안 이 전략을 구사해 왔다. 두 대륙의 원주민들은 이중 어법을 쓰는 범죄 집단에게 유린당해 처참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과나 보상도 받지 못한 채 현세의 지옥을 살고 있다.

이번 <다시 쓰는 세계사>에서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원주민을 역사상 가장 비참한 피해자로 만든 집단이 어디였는지, 그 원주민의 증오를 불러일으킨 이중 어법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본다.

악을 행하며 선이라 말하는 이중 어법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원주민은
이중 어법을 구사하는 집단에게 유린당해

1985년 3월 6일, 남미인디오평의회(CISA, Consejo indio de Sudamerica)가 선언문을 발표했다. 남미인디오평의회는 과거 스페인에게 침략당하고 지배받았던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단체로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를 지배했던 스페인의 모든 정치 지도자와 가톨릭 지도자들을 사형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정의가 실현된다. 그들에 비하면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범죄는 사소할 뿐이다.”(엔리케 두셀, 『1492년, 타자의 은폐』, 2011, p.205.)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가해자들이 나치와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며 스페인의 정치 지도자와 가톨릭 지도자를 가해자로 지목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지배 초기인 1550년 가톨릭 신학자 세풀베다가 발표한 글을 보면 지배 세력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야만적인 아메리카 원주민은 천성적으로 노예이기 때문에 그들보다 사려 깊고 완전한 사람들의 제국(스페인)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제국의 지배는 첫째로 그들에게 막대한 이익이 될 것이며 … 모두에게 선(善)이 될 것이다. 둘째로 야만적인 이교(異敎)의 위해로부터 원주민들을 구하게 될 것이다.”(스페인의 가톨릭 신학자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전쟁이 정당한 이유』)

<자료1>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ulveda, 1494년~1573년 / 출처 : 위키백과) 스페인의 가톨릭 신학자로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예화를 지지하고 스페인의 아메리카 침략과 정복을 정당화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왕자 시절 가정교사를 맡을 만큼 왕가의 특별한 신뢰를 받았고 펠리페 2세의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인 사실을 보면 아메리카 원주민은 스페인의 침략으로 자신이 주인인 땅에서 노예가 됐으며 조상 대대로 숭배하던 원주민의 신전은 무참히 파괴당했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범죄 행위가 원주민에게 이익을 주고 선(善)이 되었으며 야만적인 종교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고 주장했다. 악을 행하면서 선이라 말하는, 이중 어법의 극치라 할 만한 발언이었다.

이런 주장을 펼친 가톨릭 신학자 세풀베다는 스페인 왕자의 가정교사로 왕자의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왕자는 펠리페 2세로 등극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하게 되었다. <자료1>

또한 세풀베다는 광산에서 착취당하는 원주민 노예에 대해서는 이렇게 가르쳤다. “원주민은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이교(異敎)를 숭배한 그들의 죄가 예수를 진노하게 했기 때문이다.” (장 클로드 카리에르, 『바야돌리드의 논쟁』)

예수를 알지도 못했던 원주민이 예수 외의 다른 신을 섬긴 것이 곧 죄가 된다는 논리는 그 자체로 모순이었으나 이중 어법을 구사하는 집단은 이 논리로 원주민의 착취를 정당화했다. 가해자는 무고한 원주민에게 온갖 해악을 입히면서도 원주민이 치러야 할 당연한 죗값이라는 이중 언어를 구사한 것이었다.

포토시(Potosi, 현재 볼리비아의 도시)는 원래 말발굽까지 은으로 만들 정도로 풍부한 은 매장량을 자랑하는 부유한 도시였다. 스페인은 포토시를 점령한 1545년부터 300년 동안 이곳에서 4만 톤 넘는 은을 채굴해 갔으며 원주민 노예가 은광에서 죽을 때까지 강제 노동을 시켰다. 천연 자원과 인적 자원 모두 강탈한 것이었다. <자료2>

<자료2> 세로 리코의 성모(작자 미상) 출처 : http://blog.daum.net/windada11/8766947 세로 리코(Cerro Rico, 부유한 산)는 볼리비아 포토시의 은광이 위치한 산이다. 1545년 이 은광을 가톨릭 제국 스페인이 강탈해 은을 채굴해 가기 시작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천연 자원의 약탈이었고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의 획득이었다. 이 그림은 부의 획득을 가톨릭의 축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은광이 있는 산을 성모 마리아가 차지하고 그 머리 위에 예수와 그 아버지 하느님이 왕관을 씌워 주는 것으로 표현했다.

스페인 왕실이 파견한 제후들은 포토시 사방 100킬로미터까지 노예를 사냥하러 나갔다. 비옥한 땅에서 농사지으며 풍족하게 살던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은 밤이면 밤마다 공격을 받았고, 결국 원주민들은 전부 미로 같은 은광의 지하 터널로 짐승처럼 끌려갔다.

원주민의 부와 생명을 강탈한 범죄집단
풍요로운 자원과 무고한 생명을 강탈하고
원주민에게 노예와 빈곤의 굴레 씌워

갱 속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면 즉각 살해될 뿐 아니라 할당량만큼 은을 캐내지 못하면 지상으로 나올 수 없었다. 벌레처럼 갱도를 기어 다니던 원주민들이 무너지는 광산에 생매장되는 사고가 다반사로 일어났다. 가혹한 노동과 위험한 사고로 이 광산에서만 800만 명이 넘는 원주민이 학살당했다. <자료3>

<자료3> 포토시(시어도어 드 브리, 1590년) 출처 : http://blog.daum.net/windada11/8766947 16세기 동판화가이자 출판업자인 드 브리가 포토시 광산의 채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아무런 보호 장비 없는 맨몸으로 깊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갱에 들어가 작업했고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림에서는 원주민들이 선 채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갱도를 뚫기 위해서는 파충류처럼 바닥에 배를 깔고 기는 상태로 삽질을 하며 앞을 뚫으면서 동시에 광석들을 파내야 했다.

포토시의 은광이 위치했던 산은 원래 “부유한 산(Cerro Rico)”이라고 불렸으나 지금 원주민들은 이 산을 “사람 잡아먹는 산(El cerro que come hombres)”이라 부르며 풍부한 은을 선사했던 천혜의 자연을 원망하고 있다. 그 은 때문에 가톨릭 제국이 몰려왔고 지칠 줄 모르는 탐욕의 입에 원주민의 부와 생명이 쓸려 갔기 때문이다. 현재 포토시가 속한 볼리비아는 인구의 60%가 빈곤에 허덕이는 세계 최빈국으로 수백 년간 착취 당한 원주민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료4>

<자료4> 포토시의 현재 모습 (출처 http://www.caseyfrenchphotography.com/) 빈민가에 우뚝 서 있는 산이 은광이 위치했던 세로 리코(Cerro Rico, 부유한 산)이다. 스페인의 탐욕스러운 약탈로 1825년에 은 광맥은 이미 고갈되었지만 다른 산업 시설이 빈약한 포토시에서는 아직도 광부들이 주석과 구리 등을 채굴하며 연명하고 있다. 현재 11,000명의 광부가 있으며 그중 1,000명은 12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다. 채굴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성 먼지 때문에 폐 질환이 만연해 있으며 광부들의 평균 수명은 40세에 불과하다.

가해자의 이중 언어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막대한 이익과 선을 주었다고 했지만 원주민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토록 많은 거짓말과 그토록 가증스러운 언동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장 지글러, 『빼앗긴 대지의 꿈』 38p) 가해자의 이중 어법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게 된 또 다른 대륙이 바로 아프리카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자신의 땅에서 노예가 되었다면 아프리카 원주민은 바다 건너 이역만리 남의 땅에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15세기부터 노예로 붙잡힌 아프리카인들은 대서양을 건너는 배 위에서 죽었고, 비참한 노예 농장에서 착취에 시달리다 죽었다. 그렇게 1,500만 명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고 400년간 노예 사냥에 시달리면서 아프리카의 공동체는 산산이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1600년 조선(현재의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 면적과 동일함)의 인구가 940만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가톨릭 제국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강제 노동과 아프리카 원주민의 노예 사냥으로 조선 인구의 2배가 넘는 무고한 생명을 살육한 것이었다.

아프리카인 노예를 처음 실어 나르기 시작한 것은 십자가 돛을 높이 세운 포르투갈 선박이었으며 아프리카인의 노예화를 허가해 준 것은 예수의 대리자인 교황이었다.

<자료5> 교황 니콜라오 5세(출처 : 위키백과) 1450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포르투갈의 국왕 아폰수 5세에게 교서(로마누스 폰티펙스)를 내렸다. 아프리카를 침략하고 거기서 납치한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성스러운 전쟁’이라 명명했으며 이 성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대사를 줌으로써 참전을 독려했다. 교황이 내린 전대사는 무고한 원주민을 납치해 노예로 만드는 악한 행위를 천국 가는 티켓이라고 선언하는 ‘이중 언어’의 극치였다.

1450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아프리카 침략을 진두지휘하는 포르투갈의 국왕 아폰수 5세에게 성스러운 교서(로마누스 폰티펙스, Romanus Pontifex)를 내려 주었다. 아프리카를 침략하고 거기서 납치한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성스러운 전쟁’이라 명명하고 이 성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대사(全大赦)를 주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보통 면죄부가 특정 죄만을 사면해 주는 데 비해 전대사는 모든 죄를 사면해 주었기 때문에 참전을 독려하는 데 이보다 좋은 명분이 없었다. 교황의 전대사는 그 자체로 이중 언어였다. 무고한 원주민을 납치해 노예로 만드는 악한 행위를 천국 가는 티켓이라고 선언한 것은 악을 행하면서도 선이라 말하는 전형적인 이중 언어였다. <자료5>

노예 사냥은 아프리카 경제를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약화시켰다. 노동 인구가 노예로 잡혀가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납치가 계속되니 경제적으로 안정될 수가 없었다. 특히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던 서아프리카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십자가 선박이 찾아오기 전까지 서아프리카는 풍부한 금과 소금 무역으로 부를 쌓았고, 일찍부터 이슬람교가 전파된 지역이었다. 특히 서아프리카의 말리 제국은 9대 왕이었던 만사 무사(Mansa Musa) 때 막대한 부를 쌓은 것으로 유명했다. 현재의 경제 역사가들은 만사 무사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부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정도이다.

<자료6> 아프리카 말리 제국의 왕 만사무사, 1375년에 제작된 카탈루냐 지도 (출처 : https://moneyversed.com/) 말리 제국의 9대 왕이었던 만사 무사는 막대한 부를 쌓은 것으로 유명했다. 지도 속에서 만사 무사는 빛나는 황금 관을 쓰고 황금 공을 들고 있는 당당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당시 카탈루냐(현재의 스페인)를 비롯한 가톨릭 국가들이 가졌던 아프리카 황금 제국에 대한 환상을 보여 준다. 이 환상은 곧 침략과 약탈로 이어졌다.

이슬람 신자였던 만사 무사는 1324년 메카로 순례를 떠났는데 순례 행렬에 1만 2천 명의 수행원과 11톤의 황금을 가져가서 아낌없이 금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만사 무사에 대한 이야기는 수십 년 동안 인구에 회자되었고 이것은 가톨릭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375년 제작된 카탈루냐(현재 스페인 동북부 지방) 지도에서 만사 무사는 당당하게 황금 공을 들고 황금관을 쓴 주인공으로 그려졌으며 다른 백인의 시선이 이 흑인 왕에게 쏠린 것으로 묘사되었다. <자료6>

말리 제국의 수도인 팀북투는 아프리카의 엘도라도(El Dorado, 황금의 도시)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스페인 탐험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엘도라도가 있다는 환상을 품고 약탈과 침략에 나섰던 것처럼 엘도라도 환상은 아프리카에 대한 약탈과 침략을 부추겼다.

설사 엘도라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주인은 아프리카 원주민이었지만 가톨릭 탐험가에게 원래의 소유주는 문제 되지 않았다. 침략을 탐험으로 둔갑시키는 그들의 이중 어법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침략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행위로 정당화되었다.

수백 년간 계속된 약탈과 노예 사냥은 지난날 그토록 부유했던 말리 제국을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게 만들었다. 현재 말리 제국을 포함하는 사헬 지역(아프리카 서부에서 동쪽까지 띠처럼 뻗어 있는 지역) 국가들은 세계 최빈국으로 고통받고 있다. <자료7>

<자료7> 아프리카 사헬지역 (출처 : https://africasecuritynewswire.com/) 사헬이란 사하라 사막의 경계를 뜻하는 말로서, 사하라 사막의 남쪽 주변 지대를 뜻한다. 서쪽의 세네갈부터 동쪽의 수단까지 동서로 띠처럼 뻗어 있다. 가톨릭 제국의 침략을 받기 전에는 부유한 말리 제국이 자리 잡을 정도로 융성한 지역이었으나, 노예 무역을 비롯한 수백 년에 걸친 약탈로 완전히 몰락해 버렸다. 현재 사헬 지역은 절대 빈곤에 시달려 “아프리카의 기아 벨트”라 불린다.

이 와중에도 아프리카를 향한 가해 집단의 이중 언어는 계속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빈곤이 오로지 아프리카의 무능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명백한 해악을 끼쳤음에도 피해자의 책임이라고 떠넘기는 것이다. 이 같은 이중 언어는 아프리카의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박제된 증오가 아니라 현재도 활화산처럼 끓어 오르는 증오다.

이중 어법은 증오의 씨앗 뿌려
원주민의 노예화를 정당화하는 이중 어법
지금도 극심한 대립과 증오를 불러일으켜

이 증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테러 집단이 결속을 다질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원래 시리아에 본거지를 두었던 극단주의 무장단체 IS(이슬람 국가)가 섬멸적인 공격을 받고 와해 직전까지 몰렸다가 2014년 아프리카 사헬 지역을 새로운 본거지로 완벽하게 부활한 것이다. 이제 IS는 세계 곳곳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다.

일례로 2019년 1월 27일 필리핀의 가톨릭 성당에서 미사 도중 연쇄적으로 폭탄이 터져 133명 이상이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는 테러가 일어났다. 그러자 아프리카에 근거지를 둔 IS는 이 테러가 자신들의 공격이라고 선언했다.<자료8, 9>

<자료8> 2019.1.27. 필리핀 홀로섬의 가톨릭 성당이 테러를 당한 직후 주변이 통제된 모습. 이 테러로 13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IS는 자신들의 공격이라고 선언했다. (출처 : AP) / <자료9> 2019.1.29. 필리핀 대통령 두테르테가 테러 공격을 당한 홀로섬의 가톨릭 성당을 방문했을 때 모습이다. (출처 : 한국일보)

앞으로도 아프리카가 IS와 손잡고 가해 집단을 공격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세계의 화약고가 될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첨예한 대립은 결국 가해 집단의 살인과 해악이 만들어 낸 후유증이다. 가해자가 결자해지의 자세로 지금 당장 예수의 대리자라는 옥좌에서 내려와 무릎 꿇고 사죄해도 이 증오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가해 집단은 지금도 대화 운운하며 자신들의 범죄 행위와는 완전히 분리된 채 평온한 이중 언어를 구사해 피해자들의 증오를 부추기고 있다. 그 범죄 집단의 일관된 범죄 행위와 이중 언어가 섬뜩하고 목전에 다가온 전 세계의 위험이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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