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지배하는 도시, 영토 강탈로 시작해 완전 범죄로 이어지다

심층취재 <3, 끝> 완전 범죄의 도시, 그 시작과 현재
발행일 발행호수 2571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2013.3.19. 교황 프란치스코가 취임식에서 피에트로 오를란디를 만난 모습.

바티칸 암매장 사건은 36년 전 실종된 소녀(엠마누엘라 오를란디, 실종 당시 15세)가 바티칸 교황청 내부에 암매장됐다는 의혹을 말한다. 본지는 피해자 시신도 찾지 못한 채 미궁을 헤매는 사건을 연재하면서 사건의 경과를 2편에 걸쳐 실었다. 완결편인 이번 호에서는 실종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와 완전 범죄를 꾀하는 세력이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까지 왔는지 짚어 본다.
2013년 3월 19일, 새로운 교황 프란치스코의 취임 날이었다. 이날 프란치스코가 거리에서 시민들을 직접 대면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실종 소녀의 오빠 피에트로 오를란디도 교황을 만났다. 그때 측근이 프란치스코에게 실종 소녀의 오빠임을 귀띔하자, 프란치스코는 “네 동생은 하늘나라에 있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오를란디는 실종 이후 살아 있다는 증거도, 죽었다는 증거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동생이 살았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던 피에트로는 충격에 빠졌다.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동생의 죽음을 알고 있는가?’ 이를 묻기 위해 면담을 요청했지만 교황 프란치스코는 응하지 않았다.
이후 피에트로는 교황청을 향해 여동생의 실종 관련 정보를 공개하라고 계속 요청하고 있다. 동생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오빠가 끈질기게 교황청을 지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를란디가 실종됐던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난 피에트로 오를란디.

오를란디가 실종되고 6개월이 지난 1983년 12월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를란디 가족을 방문해 깜짝 제안을 했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피에트로에게 바티칸 은행의 일자리를 준 것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 덕분에 별다른 경력이 없었던 피에트로는 바티칸 은행에 채용됐다. 당시 피에트로는 바티칸 은행의 실체를 알지 못했지만 20년도 더 지난 후 비로소 검은 속내를 알게 됐다.

그것은 범죄 조직의 돈세탁이었다. 바티칸은 이탈리아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이었고 바티칸 은행은 회계 감사는 물론 모든 검열로부터 자유로운 곳이었다. 범죄 조직에게 이보다 훌륭한 돈세탁 조건은 없었다. 바티칸 은행은 갱단이 마약 밀매와 매춘, 도박으로 벌어들인 불법 자금을 합법적으로 위장해 줬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이윤을 취했다. 교황청과 범죄 조직을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바티칸 은행이었던 것이다.

2008년에는 바티칸 은행이 오를란디 실종과 연관돼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바티칸 은행에 거액을 맡기고 깊이 연루돼 있던 갱단 두목이 교황청의 사주로 오를란디를 납치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오를란디의 오빠 피에트로는 경악했다.

피에트로는 자문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왜 나를 바티칸 은행에 두고 싶어 했을까. 동생의 실종이 교황청과 연관돼 있다는 것을 파헤치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서였을까.” 범죄 조직과 교황의 관계를 파고들던 피에트로는 2009년 바티칸 은행에서 해고당했다. 그는 ‘진실에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피에트로는 여동생을 찾아 헤매며 그녀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수없이 들었다. 납치범이 전해준 테이프에는 성폭행당하는 동생의 목소리가 녹음돼 있었다. 2012년에는 오를란디가 교황청 섹스파티에 끌려가 희생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신임을 받았던 가브리엘 아모르라는 신부였다. 그는 교황청 섹스파티를 위해 소녀를 납치하는 팀이 존재한다며 오를란디가 거기에 납치돼 희생됐으며 바티칸 내부 문서에 이 사실이 기록돼 있을 거라고 했다.

피에트로는 그의 변호사 라우라 스그로와 함께 계속해서 바티칸 문서 공개를 요청하고 있지만 바티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오를란디의 실종 이후 바티칸과 연관된 의혹이 수차례 제기됐지만 바티칸은 철옹성 같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설사 교황이 납치와 암매장 혐의를 받는다 할지라도 이탈리아의 수사기관은 바티칸 문서에 접근할 수 없고 교황청의 무덤을 열 수 없다. 바티칸은 치외법권 지역으로 이탈리아 법의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피에트로가 진실에 다가서려고 할 때마다 가로막는 큰 벽이 바로 ‘치외법권 바티칸’이었다. 치외법권은 무려 1,000년 넘게 이어져 온 교황의 특권이었다.

8세기경 프랑크 왕국 지도.

교황이 세속의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근거는 315년에 작성됐다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문서(Donatio Constantin>였다. 이 문서는 콘스탄티누스가 서유럽 세계 전체를 교황에게 양도했다는 내용으로 결국 교황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8세기 프랑크의 왕 피핀은 자신이 정복한 땅을 교황 스테파누스 2세(752년~757년)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문서는 위조된 것이었다. 1440년 이탈리아의 인문학자 로렌초 발라는 문서에 쓰인 언어와 지명을 면밀히 조사한 후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허위 문서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교황은 허위 문서로 프랑크 왕의 영토를 강탈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교황은 여전히 ‘로마와 전체 세계의 주인’임을 고집했지만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급변해 갔다.

1815년은 유럽에 계몽주의가 전파되며 구습을 타파해 가던 시점이었는데, 교황 비오 7세(1800년~1823년)는 구시대의 악명 높은 종교 재판소를 이탈리아에 부활시켰다. 가톨릭에 반대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던 살인기관을 100년 만에 되살리자 민중의 분노는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시대착오적인 것은 1831년 교황직에 오른 그레고리오 16세(1831년~1846년)였다. 1839년 나폴리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전역에 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했는데 그레고리오 16세는 철도가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며 교황령에 철도를 건설하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이미 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체득하고 있던 민중은 교황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마음껏 조롱했다.

1870년 영토를 몰수당하고 세속지배권을 상실한 교황을 죽은 돼지로 묘사한 캐리커쳐. 돼지를 땅에 묻는 모습이다.

이탈리아의 장군 주세페 가리발디 (1807~1882)

특히 교황 제도를 혐오했던 이탈리아의 가리발디 장군은 1860년 나폴리 선언을 비롯해 여러 연설에서 교황령을 비판하면서 ‘모든 악의 근원인 교황의 영토는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1870년 교황의 영토는 전부 이탈리아에 합병되었다. 교황이 위조 문서로 강탈했던 영토가 1,000년 만에 주인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교황이 정부 연금을 받는 신세로 전락하자 당시 캐리커쳐는 교황을 죽은 돼지로 묘사하며 그의 몰락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이후 교황들은 바티칸 담장 안에 갇혀 살면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교황의 거처인 라테란 궁전에 쥐가 돌아다니고 바티칸 전체가 폐허화 되었다. 이때 ‘라테란조약’을 맺어 교황을 구원해 준 것은 독재자 무솔리니였다. 1929년 라테란조약에 따라 무솔리니는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교황에게 건넸고 그에 대한 대가로 교황이 내민 것은 정치적인 지원이었다. 비록 교황이 민심을 잃고 경제난에 허덕이긴 했지만 가톨릭의 정치 세력인 기독교 민주당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정치적 기반이 절실하던 무솔리니를 지원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1883~1945)

반대자를 무차별 처형하는 광기로 이탈리아를 지배해 가던 무솔리니는 이단자를 몰살시키고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려는 종교 집단의 우두머리와 손잡게 됐다. 또 무솔리니는 교황에게 바티칸의 영토뿐 아니라 치외법권의 특권까지 주었다. 교황 비오 11세(1922년~1939년)는 무솔리니를 두고 가톨릭에서 숭배하는 신이 보내 준 인물이라며 칭송해 마지않았다. 또한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을 때 바티칸은 비자금으로 전쟁 무기를 공급하며 상부상조했다. 광기 어린 독재자의 힘으로 교황은 영토를 갖게 된 것이다.

실종 소녀의 오빠 피에트로는 바티칸에서 자라는 동안 안전한 도시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400명 남짓한 바티칸의 시민권자들을 특별히 생각했고 가정을 자주 방문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가 애정 어린 눈길을 보냈던 여동생이 사라지면서 바티칸은 생지옥이 되었다.

여동생이 강간과 살해, 암매장당했다는 의혹 속에 유해라도 찾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결국 찾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에트로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며 그가 남긴 자필 메모 공개를 10년 넘게 요구했지만 교황청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러던 올해 4월, 교황청이 처음으로 피에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인 일이 있었다. 여동생이 묻혀 있다는 교황청 내부의 무덤을 공개하도록 허가한 것이었다. 이곳은 원래 독일 공주의 무덤이었는데 오를란디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제보가 계속되었고, 특히 한 익명의 편지는 사진까지 첨부해 무덤을 알려온 것이었다.

실종 소녀 오를란디가 암매장됐다는 제보가 있었던 교황청의 독일 공주 무덤(테우토니코 묘지)

피에트로와 그의 변호사 라우라 스그로는 무덤 공개를 앞두고 한 방송에 나와 무덤 공개는 교황 프란치스코가 직접 지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무덤에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고 예상하면서 설사 그럴지라도 우리는 계속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드디어 7월 11일 공개된 무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실종 소녀의 유해도 없었고 심지어 무덤의 원래 주인이었던 독일 공주의 유해도 완전히 인멸돼 버렸다. 실종된 오를란디의 아버지가 내 딸의 유해라도 찾게 해 주어 가까이 있게 해 달라고 절규한 지 36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실종 소녀의 유골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피에트로는 고통스럽게 생각했다. ‘내 동생에게 잘못이 있다면 가톨릭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피에트로에게 잘못이 있다면 동생을 찾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동생이 암매장된 독일 공주 무덤을 공개하게 만든 것은 피에트로였다. 그 무덤이 공개되면 원래 무덤에 있던 공주의 유해를 훼손하고 오를란디 시신을 암매장한 범죄가 모두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덤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동생을 죽인 세력은 적어도 동생의 유해는 손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덤이 공개되는 바람에 동생의 유해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결국 무덤을 열었을 때 모든 증거가 인멸되고 텅 비어 있었던 것은 피에트로가 싸우는 세력이 얼마나 악랄하고 집요한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그들은 완전 범죄를 노리고 있다. 동생을 찾으려는 노력이 결국 동생을 두 번 죽였다는 자책이 피에트로를 괴롭힐 것이다.

그래도 피에트로는 한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교황청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가 동생의 운명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나와 동생을 위해 진실을 밝힐 것이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