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2>고통에 찬 실종자 가족, 그들 눈으로 보는 혐의자

심층취재 <2> 검은 도시에서 파멸된 영혼
발행일 발행호수 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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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1일 이탈리아 바티칸에서 한 중년 남성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36년 전 사라진 엠마누엘라 오를란디(실종 당시 15세)의 오빠 피에트로 오를란디였다. 그날은 여동생이 묻혀 있을 거라고 추정됐던 바티칸 무덤을 발굴하는 날이었고 피에트로는 그 현장을 직접 참관했다. 동생의 유골이라도 찾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무덤은 완전히 비어 있었고, 피에트로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은 그에게 심경을 물었다.
그는 “많은 이들이 내게 ‘동생을 이젠 놔주라, 네 인생을 즐겨라.’고 한다. 하지만 난 놔줄 수가 없다.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영원히 평안해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오를란디 실종은 이탈리아 역사상 최장기 미제 사건이자 바티칸과 범죄 조직이 얽히고설킨 사건이다. 오를란디의 오빠와 가족들은 바티칸에서 사라진 오를란디를 찾아 40년 가까이 헤매고 있으나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2편에서는 오를란디 가족의 시각으로 사건을 재구성해 본다.

오를란디의 집에 찾아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앞의 안경 낀 아이가 엠마누엘라 오를란디 이다.

오를란디와 형제들은 인구 400명 남짓한 도시 바티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바티칸은 교황이 입법과 사법, 행정의 모든 권력을 가진 치외법권 지역이고 오를란디 가족은 바티칸 시민권자였다.

아버지 에르콜레 오를란디는 바티칸 행정부에서 일하며 20년 넘게 바오로 6세(1978년 8월 사망), 요한 바오로 1세(1978년 9월 사망), 요한 바오로 2세(2005년 4월 사망)까지 세 명의 교황을 섬겼다. 아버지는 그들의 신망을 받았고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를란디 집으로 자주 찾아왔다. 어릴 때부터 눈에 띄는 미모를 소유했던 오를란디는 모든 사람의 호감을 받는 아이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애정 어린 미소를 보냈다.

사건이 일어난 1983년 6월 22일, 15세였던 오를란디는 플룻 레슨을 받기 위해 음악학교가 있는 산타폴리나레 성당으로 갔다. 렛슨을 마친 후 엠마누엘라는 약속이 있다며 버스 정류장에서 친구들과 헤어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가족들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오를란디 얼굴이 실린 전단지를 로마 전체에 붙이고 다녔다. 그때까지 단순 실종으로 생각했던 가족들은 오를란디가 길을 잃었거나 다쳤을 거라고 걱정했다. 그런데 실종 10일째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베드로성당 발코니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이 사건을 언급한 것이다.

“오를란디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책임자가 일말의 인간성을 유지하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발언은 오를란디 가족을 충격에 빠뜨렸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업무상 오를란디 아버지를 매일 만나면서도 오를란디 납치 10일이 지나도록 일언반구도 없다가 갑자기 대중 앞에서 공개 발언을 한 것이었다. 특히 오빠인 피에트로는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를란디가 납치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가?’ 하며 혼란스러워졌다.

그로부터 3일 후 납치범이 오를란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와 오를란디 목소리를 잠깐 들려줬다. 아버지가 납치범에게 원하는 것을 묻자 “바티칸이 당신에게 연락할 것”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며칠 후 가족들이 언론을 통해 들은 것은 오를란디의 비명소리가 남긴 녹음이었다. 오를란디는 신음과 비명 속에 “피가 나요! 오 하느님! 정말 아프다. 제발! 이제 자도 되나요?” 하며 절규하고 있었다. 나중에 피에트로는 정보기관(SISDE)으로부터 녹음 원본을 받게 되는데 거기에 남자 목소리가 나온다. 정보 분석관 톰 안은 오를란디가 성폭행당했을 거라고 분석하면서도 범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녹음이 공개되고 얼마 되지 않아 납치범이 협상을 원한다고 연락해 왔다. 그런데 납치범은 경찰이 아니라 바티칸 국무장관 에미넨즈 까사롤리 추기경과의 협상을 원했고, 납치범과 추기경은 바티칸 전화로 통화를 했다. 그러나 납치범이 왜 추기경과의 통화를 원했는지, 통화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다급해진 오를란디 아버지는 방송에 출연해 납치범에게 공개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끝없는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내 딸이 살아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만약 죽었다면 내 딸이 있는 곳을 알려 주어 우리가 가까이 있게 해 주십시오.” 생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오를란디 가족에게 큰 고통이었다.

엠마누엘라 오를란디의 어린시절.

실종 6개월째인 12월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오를란디 가족을 깜짝 방문해 이런 발언을 했다. “테러에는 국내 테러와 국제 테러 두 가지가 있는데, 오를란디 사건은 국제적인 테러에 속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서 오를란디를 돌아오게 하겠다.” 오를란디 부모는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끝없이 감사했고 가족들 모두 오를란디가 살아오리라는 희망을 갖게 됐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20년 넘게 오를란디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를란디의 오빠 피에트로는 고통스럽게 자문했다. “그때 요한 바오로 2세는 왜 테러를 이야기했는가?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고 비밀로 했던 것은 무엇인가?”

오를란디 사건은 범인도 시체도 찾지 못한 채 영구 미제로 굳어져 갔다. 오를란디의 아버지는 매일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면서도 딸의 실종에 대해 묻지 못했다. 그것이 교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평생을 바티칸에 바치고 교황을 위해 일했던 아버지는 2004년 임종 직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섬겨온 사람들에게 사기당했다.” 딸을 잃고 비통에 찬 아버지는 편히 눈감을 수가 없었다.

이듬해인 2005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숨을 거뒀다. 그와 함께 그가 가진 비밀도 묻히는 듯했다. 그리고 그해에 대중의 관심이 오를란디에게 다시 집중되는 일이 있었다. 9월 12일 익명의 남자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와 납치 사건에 전혀 새로운 국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린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를란디 사건을 해결하고 싶으면 산타폴리나레 성당에 누가 묻혀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엔리코 데 페디스가 폴레티 추기경에게 어떤 호의를 베풀었는지 알아보세요.”

제보 내용은 엔리코 데 페디스라는 사람이 산타폴리나레 성당에 묻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오를란디의 오빠 피에트로는 혼란스러워졌다. 엔리코 데 페디스는 악명 높은 갱단의 두목인데 그가 어떻게 거룩한 성당에 묻힐 수 있는가? 폴레티 추기경은 명성 높은 로마교구의 총대리 주교인데 그가 어떻게 갱단 두목과 연관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동생의 실종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피에트로는 산타폴리나레 성당의 무덤을 열어 달라고 3년간 끈질기게 요청했으나 바티칸은 거절했다. 온갖 방송사와 인터뷰하며 해명을 요구했으나 바티칸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로부터 다시 3년이 지난 2008년, 피에트로는 사건의 결정적인 퍼즐 한 조각을 찾게 됐다. 사건 당일, 여동생을 납치하는 데 일조한 사람의 진술이었다.

그 사람은 엔리코 데 페디스의 여자 친구였던 사브리나 미나르디였다. 그녀는 경찰에서 목격자 진술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엔리코 데 페디스의 부탁으로 오를란디를 차에 태워 약속된 장소에 데려다주었다. 가는 동안 오를란디는 계속 오빠를 찾으면서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데 페디스가 가르쳐 준 장소에는 사제복을 입은 사람이 검은 리무진을 타고 나왔고 차량은 바티칸 번호판을 달고 있었다.”

갱단 두목과 바티칸, 그리고 실종된 여동생과의 연결고리가 처음으로 잡힌 단서였다. 그때 피에트로는 불현듯 떠오르는 몽타주가 있었다. 오를란디가 실종된 날 교통경찰이 오를란디가 한 남자와 함께 있었다고 진술했고, 그 목격 진술에 따라 만들어 놓은 남자의 몽타주였다. 그 남자는 유력한 혐의자였다. 피에트로는 25년 만에 그 몽타주를 꺼내 갱단 두목 엔리코 데 페디스의 사진과 나란히 놓았다. 동일한 사람이었다.

그즈음부터 언론이 나서서 오를란디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했고 2012년 이탈리아 안사(ANSA) 통신은 갱단 두목과 추기경 사이에 무덤 거래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갱단 두목이 10억 리라의 거금을 추기경에게 건넸던 것이다. 더욱이 산타폴리나레 성당에 묻히기 위해서는 교황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끓어오르자 바티칸은 마지못해 결국 갱단 두목의 무덤을 공개했다. 그런데 한 명만 안치되어야 하는 유골함에서 이름 모를 수십 개의 유골이 쏟아져 나오자 여론은 암매장된 사람들의 신원을 밝히라며 들끓었다. 거기에 오를란디의 유골은 없었지만 갱단 두목의 무덤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납치범과 바티칸이 은밀히 손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2013년에는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전격적으로 사임한 것이다. 종신직인 교황이 살아 있을 때 스스로 물러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가톨릭에 만연한 범죄와 부정부패를 잡아 보려다 절망에 빠져 자진 사임하면서 “신이 주무시는 것 같았다.”는 말을 남겼다.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의 권한을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었던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오를란디 실종 사건이었다.

그리고 2013년 3월 19일, 새로운 교황 프란치스코가 취임하던 날이었다. 교황과 직접 대면하는 자리에서 오를란디의 오빠는 교황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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