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로 핀 시신을 뺏겨서는 안 된다’

조환동 어린이 시신 사수(死守) 사건
발행일 발행호수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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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때는 1987년 재야 민주화 운동이 절정을 이룰 때였다. 8월 9일, 장마가 끝나고 한여름 더위로 푹푹 찌는 여름날 오후. 청주시 남문로 중앙공원에서는 충북민주화운동협의회(회장.허종현. 성공회신부)주관으로 ‘민주정부수립과 민족통일을 위한 한마당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집회가 무산되자 이 대회에 참석하려던 2백여 명의 청년회원과 대학생들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며 대치했다.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시위대가 분산되던 중 시위대 일부가 음성경찰서 소속 지프차를 발견하고 각목과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쉈다. 당황한 운전자는 앞으로 차를 몰아 빠져나가려다 앞에 정차해있던 두 대의 승용차와 충돌한 후 때마침 자전거를 타고 마주오던 조환동(충주 남한강초6) 군을 치었다. 조 군은 급히 인근의 남궁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시 25분쯤 숨졌다. 조 군은 충주교회 주일학교 학생인 천부교인이었다.

이 때 천부교 청주 서운동교회에는 충주, 제천 등 인근 지역의 주일학생들이 모여 함께 여름신앙학교를 하고 있었고 충주교회에 다니던 조 군도 여름신앙학교에 참석하고 있던 중이었다.
조 군의 죽음에 흥분한 데모대는 조 군을 ‘소년 열사’라고 군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박종철, 이한열에 이어 우리의 막내둥이 조환동이 희생당했다.”며 병원 전체를 현수막으로 덮어버렸다. 이렇게 하여 남궁병원은 데모대가 완전히 접수(?)한 상태가 되었고 병원은 마비되었다. 병원 뿐만 아니라 청주 시내는 ‘해방구’가 되었고 운동권이 장악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조 군의 시체를 메고 거리로 나가 청주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계획을 세웠다.

조환동 군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천부교회 관장들과 신도들은 영안실에 접근하는 것조차 데모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 때 병원에 찾아갔던 관장 가운데 한 사람은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들고 병원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청년들 눈에서는 살기가 뚝뚝 흘렀습니다. 우리는 조환동이가 다니던 교회의 성직자인데 왜 못들어가게 막느냐라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데모대 가운데 한 명이 ‘신부님께 물어봐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데모대 지도자는 가톨릭 신부였고 모든 병원의 출입을 신부가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관 예배 때 조 군의 시신을 씻겼던 청주교회 이광호 권사(68세)는 “장의사에서는 관에다 드라이아이스까지 꽉 채워놨던 상황이었어요. 얼음 같은 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신을 씻기기 시작하는데 잘 피었습니다.” 이 권사는 그 때의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함께 참석했던 당시 제천교회 학생관장이던 김미숙 관장은 문익환 목사가 병원을 점령한 대학생들에게 ‘수고가 많구먼’하며 격려하는 모습을 보고 영안실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시신이 잘 피어서 이슬성신이 콧등에 맺히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천부교 장례 절차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로 시신을 피우고는 그 병원에 진을 치고 있던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기성교인, 천주교인, 불교의 승려들 할 것 없이 다 와서 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병원의 의사들도 와서 시신을 보라고 했다.

시신 앞에서 다들 놀라고 있는 순간 어느 목사의 아들이 “이거 다 가짜다. 이거 다 쇼다.”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때 시신 피우는 모습을 옆에서 계속 지켜봤던 남궁병원 영안실 책임자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야, 미친 놈아. 이걸 네 눈으로 직접 보고도 쇼라고 해.” 하고 외쳤다. 그리고 “내가 이런 시신은 처음 봤다. 너무도 신기해 집안 식구나 친구들한테 말해도 안 믿을 것 같다.”라며 시신 핀 것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원무과 직원들도 내려와 시신을 확인했는데 한 의사에게 “이것이 현대 의학으로 가능한 일입니까?”라고 묻자 “불가능하다.” 라면서 “그럼 이와같이 할 수 있는 무슨 약품이 있는가?”라고 묻자 역시 “그런 것은 없다.”란 답변을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조환동 군의 시신을 놓고 데모대와 천부교의 싸움은 계속 되었다. 데모대는 ‘소년 열사’의 관을 앞세워 선동을 극대화하려고 하였고 천부교 관장들과 식구들은 은혜로 아름답게 핀 조환동 군의 시신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내어 줄 수 없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싸움은 시신을 끝까지 지킨 천부교의 승리로 돌아갔다. 예상과 달리 조환동 군의 시신이 나타나지 않자 김이 빠진 군중들은 하나 둘씩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청주의 치안 책임자들과 고위 공직자 사이에서는 조환동 군의 시체 피는 이야기가 큰 화제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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