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집회 방해 난동사건(4. 끝)

폭력 난동의 주동자 회개하고 돌아와 전주집회 방해의 배후를 폭로
발행일 발행호수 2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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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 천부교 전주교회의 모습

1956년 6월 12일 고성모 목사, 김지세 목사 등의 진두 지휘하에 하나님의 전주집회를 방해하는 폭력난동을 일으켰던 청년들의 우두머리는 당시 전북기독학생연합회 부회장이던 정영곤이었다. 목사들의 사주를 받아 폭력 난동에 앞장섰던 그는 나중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다.

그는 자신이 주도한 집회방해 난동장면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고백하였다.“박 장로님께서 전주에 오신 6월12일 집회방해를 위해 ‘출정’하기전 밤 7시경에 장로교회를 비롯하여 전주의 모든 교파의 목사와 장로 그리고 권사들과 학생들이 동부교회에 모여 단합예배를 보았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박 장로 집회장소에 쳐들어갈 때 찬송가 371장 3절 이 땅에 마귀 꽉 차서 성도를 삼키려 하나…를 부르며 시작하자’고 지휘부에서 지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기등등하게 천막집회 장소에 가 보니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는데 기성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외치시자 고성모 목사가 지팡이를 들고 강단을 가리키며 ‘저것 집어치워라’하고 고함을 치자 우리는 일제히 단상을 향하여 뛰어들었습니다.

저는 항상 목사를 뒤따라 다녔는데 집회 참석자들이 고성모 목사가 떠들지 못하도록 붙들어 앉히는 것을 보고 고 목사를 중심으로 곁에 앉아 있는 전도관 교인들에게 뛰어들어 발로 사정없이 밟아버렸습니다. 그리고서 곧장 박 장로님을 해치려고 단상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전도관 식구들이 ‘이 땅에 마귀 꽉 차서 성도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싸워라 진리로 이기리로다.’하고 손뼉을 치면서 있는 힘을 다 하여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니 우리가 부르려고 한 찬송을 자기들이 부르네’하고 비웃었습니다.
수라장이 된 집회 장소는 깜깜하게 불이 꺼졌으며, 재빨리 단상에 뛰어 올라간 전도관 권사님들은 박 장로님을 둘러싸고, 단상으로 진입하려는 난동자들의 돌에 맞으면서도 찬송을 부르면서 방어를 하고 있었습니다. 강단 밑에 있는 교인들도 더욱 우렁차게 찬송을 불렀는데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마치 폭포소리같이 들렸습니다.

난동자들은 단상에서 하나님을 에워싸고 있는 여자 교인들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높은 단상에서 끌어내리려 하였으며 남자 교인들에게는 무차별 폭행을 가하였으나 그들은 찬송을 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단상으로 올라가려고 하면 권사님들이 밀어내니 분통이 나서 권사님들 발이나 손이나 옷이나 잡히는 대로 끌어 잡아당겨 땅으로 떨어뜨렸고, 그래도 시원치 않아서 마이크를 집어던졌는가 하면 돌멩이, 보따리, 나무 조각 등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단상에다가 던졌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뒤로 돌아 나와 저희 목사인 김지세 목사를 쳐다보니 그는 양팔을 끼고 신학생 몇 사람과 같이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문득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목사가 순진한 학생들을 동원시켜 연약한 여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예배를 방해하고 그 광경을 보면서 만족을 느낄 수가 있을까? 나쁘구나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박 장로님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투가 계속되는 동안 경찰 30여명이 출동했습니다. 경찰들은 큰소리로 진압하려 했으나 우리들은 고함을 지르면서 폭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최후에는 경찰이 학생들 몇몇을 연행해 가니 이때부터 난동은 진정되기 시작했고 나는 집으로 달아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서운 광경이었습니다. 악독과 살기가 충천하여 날뛰던 우리들의 꼴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이 난동사건이 있은 후에도 각 교회에서는 박 장로님에 대한 악선전을 계속하였으며 목사들은 전도관에 대한 욕을 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하였습니다.”(신앙신보 1966. 5. 16. 기사)

`사람이 아무리 방해하여도 하나님의 역사는 막을 수 없어`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놀라운 것이어서 난동의 주동자로서 전도관 핍박에 앞장섰던 정영곤은 양심의 가책을 받은 끝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던 것이다. 정영곤은 본지에 기고한 글에서, 무저항 비폭력의 천막집회를 짓밟은 목사들의 사악한 음모를 그가 어떻게 하여 혐오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찾아 전도관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저는 집으로 돌아가 폭력 난동이 믿노라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었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후에 들은 말이지만 난동자들 중에도 이끌어 내야 할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여전히 집회를 계속하셨다는 것을 듣고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후 목사들이 전도관을 욕하면 욕할수록 오히려 나는 전도관에 대한 호기심이 솟아났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성교회 목사들이 저렇게 기를 쓰고 반대를 하며 무엇이 있길래 그 핍박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집회장으로 몰려가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알아보지도 않고 내가 왜 무조건 전도관을 반대했던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전도관으로 찾아가 보기로 결심 하고 전주전도관 수요일 예배 시간에 나갔습니다. 누가 나를 6개월 전에 있었던 난동사건의 주동자라고 알아볼까봐 두려운 마음으로 맨 뒷줄 구석에 머리를 수그리고 앉아서 설교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전도사님께 몇 가지 질문을 했더니, ‘며칠 후에  군산에서 박 장로님의 집회가 있으니 그때 가보세요’하고 알려 주었습니다.

1957년 1월 28일 군산전도관 개관집회에 참석하여 말씀에 감화를 받고 안찰도 받게 되었습니다. 박 장로님의 설교말씀 마디마디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고 새로움이 있었으며 나의 마음을 찌르고 나의 심장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박 장로님은 성경을 떠나서 설교한다고 들었는데, 듣는 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끝까지 앉아 들었으나 더 듣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도관에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들을 때마다 설교의 말씀은 나를 감화시키고 마침내 나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신앙신보 1957. 9. 23.기사)

1957년 3월 10일 서울 2만제단의 수많은 교인들 앞에서 전주집회 방해 난동의 주동자 정영곤은 자기가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하여 회개하고 돌아와 은혜를 받게 되었는가를 눈물로 증거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이 가로막을 수 없으며 성신의 역사는 기성교회가 방해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불 붙는다는 것을 이 미련한 인간은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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