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세계사<16>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 증오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하여
다시 쓰는 세계사<16>증오 범죄란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이 용어는 1980년대부터 통용됐지만 실제 사례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증오 범죄는 2차 세계대전 중에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던 홀로코스트로, 8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참상과 만행이 연구 논문과 책자, 영화로 기록되어 일반 대중이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로마교회(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을 맞아 홀로코스트가 이 시대에도 재발할 수 있다며 죽음의 길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기억하자고 권유했다. 이 발언이 보도되자 네티즌들은 “역사상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건 나치가 아니라 종교입니다. 당신만 조심하면 세상 평화롭습니다.(닉네임:ㅅㅂ)” “이젠 살인 예고까지 하네.(닉네임:IVN**)” 하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네티즌들은 홀로코스트로 유대인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증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입장에서는 그 참상과 만행이 감쪽같이 잊혀지기를 바라겠지만 피해자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갖게 된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로마 교황청을 향해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비밀 문서 공개를 요청하는 것은 끔찍한 증오 범죄의 기록을 낱낱이 남겨 두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증오 범죄가 자행된 현장을 좇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증오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조명해 본다.
14세기 치명적인 페스트가 전 유럽에 창궐했을 때 이 끔찍한 전염병의 뒤를 이어 증오 범죄의 광풍이 유럽을 휩쓸었다. 그것은 페스트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공포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자료1>
페스트는 99%까지 치솟는 엄청난 치사율로 유럽 인구 1/3의 목숨을 앗아갔다. 다른 전염병은 따뜻한 식사와 깨끗한 목욕으로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었지만 페스트는 건강하고 활동적인 사람도 24시간 안에 싸늘한 주검으로 만들어 버리는 위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로마교회는 환자에게 ‘병자성사’라는 의식을 베풀어 병을 낫게 해 준다고 선전했는데, 로마교회 신부가 페스트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베풀어 이마와 두 손에 성유를 발라 주고 간절히 기도해도 환자는 그 자리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치다 죽고 말았다. 심지어 로마 교황청 추기경 7명을 비롯해 수많은 로마교회 성직자들이 페스트로 죽어 나가자 병자성사를 베풀어 줄 신부마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자료2>
이러한 충격과 공포의 시대, 로마교회의 광신도들은 유대인을 상대로 증오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로마교회에 따르면 전염병은 악이 퍼뜨리는 재앙으로, 일찍이 로마교회의 교리를 세운 아우구스티누스가 “악마와 그 추종자들은 온갖 질병을 일으킨다. 이러한 악을 막으려면 그들을 고문하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가르쳐 온 것이었다. 또한 로마교회는 ‘유대인이 예수를 살해한 종족이자 이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지목해 왔다. <자료3>
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신도들은 악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 나섰는데, 그들이 유대인에게 덮어씌운 혐의는 우물에 독을 풀어 페스트를 전염시켰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도 로마교회 신도들과 같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었고, 심지어 유대인도 페스트에 걸려 수없이 죽어 나갔지만 로마교회 신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혐의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증오를 집중시킬 희생자일 뿐이었다. <자료4>
1348년 여름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량 학살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쾰른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이 화형을 당하거나 살해당했다. 1349년 2월 14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유대인들이 발가벗겨진 채 공동묘지로 끌려갔는데, 마을 전체 주민 1,800명 중 절반인 900명이 그날 하루 만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살해당한 유대인의 숫자가 페스트로 목숨을 잃은 숫자보다 더 많았다. <자료5>
그러나 악의 근원으로 지목한 유대인을 모조리 죽인 뒤에도 페스트는 계속해서 창궐했고, 증오 범죄로는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었다. 그때까지 예수가 환자들의 병을 낫게 해 주었다는 설화를 사실이라고 굳게 믿은 신도들은 왜 페스트는 낫게 해 줄 수 없는지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한번 시작된 의심은 믿음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신도들이 받은 충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헌금의 감소였다. 페스트 이전에 유럽 사람들은 유산의 25%를 로마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페스트 이후에는 로마교회 대신 사적으로 자선 단체를 만들어 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유럽 사람들의 정신과 생활, 경제를 지배했던 로마교회는 페스트 이후로 지배력을 상당 부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페스트의 광풍이 전 유럽을 초토화시켰을 때도 로마교회는 자신들이 전염병을 막아내고 악의 근원을 없애는 정의(正義)라고 자부했지만 결국 그들이 남긴 것은 페스트보다 끔찍한 증오 범죄의 피비린내였다.
페스트로 인한 증오 범죄에서 흥미로운 것은, 시간이 갈수록 가해자의 민낯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과학의 발달로 전염병의 진짜 원인이 악마가 아니라 병균과 바이러스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가해자의 무지가 폭로되고 그들의 악행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또 특기할 만한 것은 한때 가해자였던 집단이 이제는 세계 각지에서 증오 범죄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에서 2019년부터 2020년까지 550건의 증오 범죄가 발생했는데 이는 로마교회 사제에 대한 공격, 로마교회에 대한 방화, 예수상과 마리아상의 파괴 등으로 나타났다. <자료6>
X-mas 트리에 불을 지르거나, 성당 문에 예수를 조롱하는 낙서를 하거나, 미사 시간에 들어와 바지를 내리고 신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비교적 가벼운 범죄에 속하지만, 스페인 마드리드의 가톨릭 교구 건물에 폭발이 일어나 3명이 사망하고 필리핀 말라이발라이에서 가톨릭 신부가 총에 맞아 숨지는 등 범죄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증오 범죄의 원인은 무엇일까? 세계 각지에서 터져 나오는 증오 범죄의 원인을 한마디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것은 뿌리 깊은 악행과 위선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살해당한 필리핀 신부는 이전에 미사를 돕던 어린 소녀를 강간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복수로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수사 기관이 예측하는 것처럼 과거의 악행이 현재의 증오 범죄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료7>
그러나 과거에 아무리 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집단이라 하여도 그 가해 집단과 똑같은 범죄로 복수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정의를 추구하는 의식이 투철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가해 집단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응당한 대가를 받도록 촉구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미국 맨해튼의 미카엘 성당에서 일하던 여성 보안요원 애슐리 곤잘레스는 성당 컴퓨터로 음란물을 보고 있던 신부 조지 루틀러를 발견하고 신고하기 위해 그를 촬영했다. 평소 동성애를 강하게 비판했던 루틀러 신부는 동성애 포르노를 보며 바지에 손을 넣고 자위를 하고 있었는데, 보안 요원을 보고 돌연 그녀에게 달려들어 가슴을 움켜잡고 성폭행을 했다. 보안 요원이 경찰에 신고하자 신부는 신도들에게 편지를 보내 “보안 요원의 주장은 내 명성과 맞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신부의 자위 영상이 증거로 제출된 뒤였다. <자료8>
이전 시대였다면 유명한 대중 연설가이자 30권 이상의 책을 저술한 루틀러 신부의 명성과 힘 때문에 스물두 살 보안요원의 고발은 수사도 시작되지 않은 채 묻혀 버렸겠지만 정의를 지키는 데 투철해진 의식과 발달한 영상 기술 덕분에 범죄자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또 독일에서는 로마교회가 신부들의 아동 성범죄 조사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로마교회 측이 기자들에게 이 보고서를 비밀로 하겠다고 서약하고 절대적으로 침묵할 것을 강요하자, 모든 기자들이 그 제안을 거부한 일이 있었다. 오랜 세월 로마교회의 성범죄를 사회가 조직적으로 은폐해 주었기 때문에 성범죄자들이 위선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최근 들어 정의를 추구하고 위선에 저항하는 언론인들이 늘어나면서 범죄자의 전모가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같은 사례가 있는데, 가톨릭 신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지상파 방송에 나와 범죄 사실을 담담히 증언한 것이었다. 가해자인 한만삼 신부는 정의구현사제단이 내세우는 유명인사였으나 이에 맞서 피해자는 용기를 내어 증언했고 방송사 또한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자료9>
한만삼 신부가 속한 수원교구는 이 보도가 나간 직후 교구장 명의의 서한을 통해 “이번 일을 거울삼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속죄할 것”이라고 사죄의 뜻을 밝혔으나, 같은 날 신도들에게 보낸 단체 문자에서는 “3일만 지나면 잠잠해진다.”며 진짜 속내를 드러낸 바 있었다. <자료10>
가톨릭교회는 이 사건이 시간이 가면 묻히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최근에도 언론에서 한만삼 신부가 속했던 정의구현사제단을 ‘불의구현사제단’이라고 부르며 그 사건을 상기시킨 것을 보면, 시간이 가도 악행은 묻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거짓은 시간에 비례해서 밝혀지고 드러나게 될 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과학이 발달해 ‘전염병의 원인은 악마’라고 했던 주장이 비웃음을 사게 된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정의가 밝혀지는 시대에는 거짓이 시간을 이길 수 없고 불의한 집단이 정의를 독점할 수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