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56>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사기다①

발행일 발행호수 2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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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는 예수의 처형 사건에 대한 1세기 역사 기록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들을 살펴보았다. 1세기 초, 성경의 주장대로 추종자들을 대거 거느렸던 영향력 있는 신흥 종교 지도자가 반역죄 판결을 받고 공개 처형되었다면, 이는 분명 특기(特記)되었어야 할 사건이다. 그러나 반란 사건을 비롯해 일개 범죄자의 재판과 처형까지 기록으로 남겼던 당시 로마 당국, 역사가, 저술가들의 기록에서, 예수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형이 기독교의 독자적인 주장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처형에 대한 침묵을 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1세기 기독교의 내부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무엇이며 어떤 내용이 담겨있던 것일까?

▣ 밀수하려던 고대 유물에서 예수 제자의 기록이 발견되다

2000년 튀르키예 지중해 연안, 밀수 단속 작전 중이던 경찰에 의해 한 ‘고대 유물 밀수 조직’이 검거되었다. 밀수 조직은 불법 발굴, 유물 밀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그들이 어딘가에 반출하려던 유물들은 당국에 압수되었다. 그런데 압수된 유물 중에는 낡은 가죽으로 된 고서 한 권이 포함돼 있었다.<자료1>

<자료1> 튀르키예에서 발견된 1500~2000년 전 바르나바 복음서
1세기 예수의 제자 바르나바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내용 등이 기록돼 있다. (출처: nationalturk.com)

세월의 흔적으로 검게 변색된 가죽 위에 금박 문자가 새겨진 이 문서는 ‘예수가 사용했던 언어’인 ‘아람어’로 쓰여진 ‘고대 성경 사본’이었다. 튀르키예 경찰은 법정 심리에서 이 책이 약 1500년에서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증언했으며, 조사 결과 예수의 제자 바르나바가 썼다고 알려진 ‘바르나바 복음서’로 확인됐다. 그러나 해당 문서는 재판 증거물로서 앙카라 법원 보관소에 보관되며 외부 접근이 제한되었고, 이 책의 존재는 조용히 묻힌 채 수년이 흐른다. 그러던 2012년, 역사의 흔적과 당시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보존된 이 고서는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로 인정되었고, 법원의 명령에 따라 앙카라 민속 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하던 현지 언론들을 통해 ‘바르나바 복음서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고대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바르나바 복음서의 저자 바르나바는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기 교회의 핵심 인물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 선교하는 등 1세기 중반까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또한 유대인이었던 그는 예루살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예수가 처형됐다던 시기 이전부터 이미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인물이었다. 즉, 바르나바라는 인물은 예수와 동시대를 살면서 예수를 홍보했던 예수의 제자이자 초대교회의 사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르나바 복음서의 내용은 기독교인에게 다소 충격적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기독교의 근간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증언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에 기독교에서는 바르나바 복음서를 ‘성경 속 유명 인물의 이름만 빌려 위조한 거짓 성경’, 즉 ‘위경(僞經)’이라 취급해왔다. 지금까지 발견된 다른 필사본들은 모두 16세기 이후에 기록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후대에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찰의 밀수 단속으로 우연히 발견된 이번 필사본의 등장은, 이전의 모든 추정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해당 사본에 대해 전문가들과 종교 단체들 모두 ‘1세기 원본의 필사본’이라는 데 동의한 것이다. 이는 바르나바 복음서의 내용이 후대에 위조된 것이라는 후대 위조설을 일축하는 동시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1세기 내부 기록이 존재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 바르나바의 기록을 의도적으로 지우려하다

바르나바 복음서는 또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진리를 왜곡한 것’이라 비판하는데, 이번에 발견된 책에서는 바울을 노골적으로 ‘사기꾼(The Impostor)’이라 명시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전파한, 다시 말해 오늘날 기독교 교리의 핵심 구조를 확립한 인물이다. 타자의 기록인 사도행전에서는 바울과 같이 예수와 기독교를 홍보했다던 바르나바가 자신의 기록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바울은 사기꾼이다.’라고 증언한 것은 기독교 초기, 예수의 실종을 둘러싸고 기독교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기독교는 현재 27권의 신약 성경만을 ‘정통’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기독교 초기에는 수많은 복음서와 문서들이 존재했으며, 각자 권위있는 경전으로서 유통되고 있었다. 그러나 313년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기독교는 ‘예수를 따르는 불온하고 미신적인 집단’이란 평가를 잠재울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기독교를 하나의 질서 있는 종교 체계로 정비하기로 한다. 그 체계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의 신성을 규정하는 일이었다. 예수는 단순한 예언자나 스승이 아니라, 반드시 신적 존재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십자가형과 부활이라는 서사가 필요했다. 그렇게 가톨릭교회는 4세기 초반, ‘정통’ 경전과 아닌 것을 선별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고, 결과적으로 367년, 예수의 죽음과 부활 중심의 교리로 구성된, 현재와 동일한 신약 27권의 목록이 확정된다. 이때 정경에 포함되지 못한 경전들은 폐기되거나 이단이 쓴 위경이라며 교회 내에서 배제되었다.

이번 1세기 필사본의 발견으로, 지금까지 바르나바 복음서의 필사본이 왜 발견되기 힘들었는지, 위경으로 배제된 이유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 가능해졌다. 바르나바의 문서에 근거한다면, 바르나바는 예수의 십자가형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고, 십자가 처형을 주장하는 바울은 명백한 ‘사기꾼’이다. 이는 기독교가 원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중심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현대에 와서 정통교회의 검열을 피해 숨겨놨던 초기 경전들이 발견되곤 한다. 일례로 1945년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들이 있다. 367년, 정경 목록이 확정되면서 그 목록에서 제외된 많은 문서들이 파괴되었고, 나그함마디 근처의 수도사들은 정경을 제외한 모든 이단 문서를 불태우라는 교회의 방침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서들을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었다. 이렇게 보존된 나그함마디 문서에서도 『베드로 묵시록』, 『위대한 셋의 두 번째 글』 등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내용의 경전들이 발견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번 발견으로 바르나바 복음서도 1세기의 기록임이 확인되면서, 기독교 초기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전하는 경전이 훨씬 더 많이 존재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2012년, 튀르키예에서 발견된 이 바르나바 복음서의 존재가 알려지자 바티칸은 즉각 반응을 보였다. 당시 튀르키예 문화관광부 장관 에르투룰 귀나이는 당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해당 문서에 대한 조사 허가를 공식 요청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해당 요청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바티칸이 형식적 요청에 그친 것인지 튀르키예 측이 거부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바티칸이 진정으로 검증 의지가 있었다면 튀르키예에 조사단을 파견해서라도 실체를 명확히 규명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신들 교리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문헌 앞에서, 바티칸은 어떠한 발표도 하지 않은 채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형과 부활’이라는 특정 교리를 ‘정통’으로 채택하면서, 정통이 아닌 기록들은 철저히 배척하고 지워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점은, 정통으로 선포한다고 해서 그 교리가 갑자기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의 십자가형과 부활을 중심 교리로 확정한 이후에도, 그 교리의 진실성, 역사성에 대한 논쟁과 검증 요구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계속되는 날카로운 비판은 뼈아픈 약점을 파고들며 내내 기독교를 압박해왔다. 하지만 이에 대해 기독교는 증거와 논리로 대응하지 못했다. 대신 비판자들을 이단으로 선포하고, 책을 불태우고, 십자군을 보내고, 종교재판을 열고, 주동자를 화형시키고 고문하는 등 폭력적인 탄압으로 입을 틀어막아 왔다.

기독교가 상대를 납득시키는 대신, 이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자행한 원인은 교리를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 세기 동안 ‘십자가형과 부활’을 명확히 입증하는 동시대 외부 문헌은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반박과 검증 압박에 시달리던 기독교로서는 예수의 처형과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이고 가시적인 물증의 확보가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절실함에 응답이라도 하듯, 예수가 사라진지 1300년 이상 지난 시점인 1354년, 느닷없이 ‘예수의 시체를 감쌌던 수의’가 발견됐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수의가 발견된 장소는 예수가 죽었다던 예루살렘이 아닌 프랑스 변방의 작은 시골 마을 리레(Lirey)였다. 리레의 영주 제프루아 드 샤르니가 자신이 ‘예수의 수의’를 입수했다며 전시를 연 것이다. 그런데 실제 예수의 수의가 존재했다면 예루살렘에서부터 가장 먼저 보존되고 증언되었을 것인데, 샤르니의 주장 전까지 13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어떤 기록이나 언급이 없었다. 또한 샤르니가 프랑스까지 수의를 입수해 온 경로를 전혀 설명하지 못함으로써 ‘수의가 위조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 갑작스럽게 생겨난 예수의 수의, 사기 행각을 고발하다

리레에서 발견된 수의는 현재 ‘토리노 수의’라 불리는 것으로, 1578년 이탈리아 토리노 성당으로 옮겨진 이후, 계속 그곳에서 보관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토리노 수의는 기독교에서 ‘예수 처형과 부활의 증거’라 주장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기독교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의 무덤에 가보니 예수가 수의만 남긴 채 사라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토리노 수의가 예수의 처형과 부활의 물증이라는 그들의 논리였다.

토리노 수의는 길이 약 4.4미터, 너비 1.1미터의 낡은 아마포 천이다. 육안으로 보면 세월에 바랜 누런색 천 위에 희미한 갈색 얼룩들이 번져 있을 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남성의 앞모습과 뒷모습이 머리를 맞댄 채 천 전체에 걸쳐 그려져 있다.<자료2> 명암을 반전시킨 음화 사진으로 보면 더욱 선명하게 손을 모은 채 누워있는 장발 남성의 모습이 드러난다. 가톨릭교회는 이것이 진짜 예수의 형상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해 왔지만, 묘사가 지나치게 이상적인 탓에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중동 사람인 예수가 유럽 종교화 속 서양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상처나 핏자국까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2> 토리노 수의 원본(위)과 음화 처리 사진(아래)
토리노 수의는 기독교에서 ‘예수의 시체를 감쌌던 천’이라 주장하는, 길이 4.4미터, 너비 1.1미터의 낡은 아마포 천이다. 누런색 천 위의 희미한 갈색 자국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남성의 앞·뒷모습이 머리를 맞댄 채 천 전체에 걸쳐 그려져 있다. 명암을 반전시킨 음화 사진으로 보면 더욱 선명하게 손을 모은 채 누워있는 장발 남성의 모습이 드러난다. 가톨릭교회는 이것이 진짜 예수의 형상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해 왔지만, 묘사가 지나치게 이상적인 탓에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중동 사람인 예수가 유럽 종교화 속 서양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상처나 핏자국까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Shroudphotos)

토리노 수의가 ‘사기 목적의 위조품’이라는 고발은 1354년 수의가 처음 등장한 시대부터 이미 제기돼왔다. 1389년 프랑스의 피에르 다르시 주교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공식 고발장을 보냈다. 리레 성당에서 ‘예수의 수의’라며 전시하고 있는 천에 대한 고발이었다. 다르시 주교는 “이것은 순례객과 헌금을 끌어모으기 위한 사기극이다.”, “전임 주교 앙리 드 푸아티에가 이미 조사를 실시했는데, 실제 제작자인 화가를 찾아냈고, 그 화가가 직접 자신이 그렸다고 자백했다.”라는 사실을 알리며, “이 사기 행위를 즉각 중단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결국 “이것을 예수의 진짜 수의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더라도, 신자들의 경건을 위한 그림 또는 표상으로서의 전시는 허용한다”는 타협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 위조 사기극의 전모는 1899년, 중세 역사가 율리세 슈발리에가 파리 국립도서관 고문서 보관실에 소장돼 있던 관련 문서들을 연구 및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00년에는 추가 자료를 보강하여『리레-샹베리-토리노 수의의 기원에 대한 비판적 연구(Étude critique sur l’origine du saint suaire de Lirey-Chambéry-Turin)』라는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토리노 수의 진위 논란에서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다르시 주교의 고발 이전에 활동했던 당대 저명한 프랑스 철학자 니콜 오레스메(1325년~1382년)도 약 1370년경 토리노 수의를 “파렴치한 성직자들이 조작한 사기”라고 단언한 저술이 존재했다고 한다. 2025년 8월 중세사 저널에 발표된 논문『니콜 오레스메의 저서, 토리노 성의 출현에 관한 새로운 문헌: 14세기의 거짓 유물과 허위 소문에 맞서 싸우다(A New Document on the Appearance of the Shroud of Turin from Nicole Oresme: Fighting False Relics and False Rumours in the Fourteenth Century)』에 따르면, 오레스메는 “성직자들이 특정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기적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믿을 필요가 없다. 많은 성직자들이 교회 헌금을 모으기 위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이다. 샹파뉴 지방의 한 교회에서 예수의 수의가 있다고 주장한 사건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그런 물건들을 위조한 무수한 사례들이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고 적었다. 이는 수의가 등장한 초반에 이미 위조품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추가적인 역사적 증거를 제공한다.

이처럼 다르시 주교의 고발장과 오레스메의 저서는 수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이미 토리노 수의를 명백한 사기로 인식하고 강력히 고발하는 목소리가 존재해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교회는 이 600년 전의 초기 고발을 인정하거나 공개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도 토리노 수의를 예수의 유물로 홍보하며 계속해서 믿음을 요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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