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천막집회와 전주 전도관 개관

전주 천막집회와 전주 전도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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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56년 3월 19일부터 24일까지 전주 태평동 전매청 광장에서는 천막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앞서 전주 시내 곳곳에는 집회를 알리는 벽보가 나붙고, 집회 이틀 전 전매청 광장에는 천막이 가설된다. 한편 전주시내 기성교회 목사들은 하나님의 집회에 참석하려는 교인들의 발걸음을 막고자 사방팔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성신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집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천막을 증설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집회 참가자들은 비가 오는 중에도 자리를 뜰 줄 몰랐으며 집회는 24시간 계속되었다.

1. 전주 태평동 전매청 광장 천막집회(1956. 3. 19~24)

마산에서 있었던 천막집회(1956.3.5~12)를 기성교계가 방해할 목적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무료 상영 하고 이름난 부흥사를 초청해 부흥회를 여는 등의 일을 벌였으나 오히려 수많은 교인들을 하나님의 집회장으로 몰아주는 격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마산집회를 마치고 일주일 뒤 전주시 태평동 전매청 광장에서 가진 하나님의 천막집회에도 기성교단의 방해는 극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 30만 명이라는 인파가 집회에 몰렸고, 집회 기간 동안 1,600여 명의 환자가 은혜를 받고 병 고침을 받았다.

전주서도 기성교회의 극심한 반대
온갖 공작 불구 연 30만 명 집회에 참석

지난 4월 11일 50년 전 집회가 있었던 전주의 전매청 광장을 찾아갔다. 전매청인 현대식 건물은 철거 공사 중이었다. 전주시에서는 전매청을 철거 하고 그 앞의 광장 자리까지 약 3만 여 평에 아파트 단지를 세울 것이라고 한다. 철거가 진행 중이어서 아파트 단지 예정 부지에는 철판으로 현장 가리개용 담이 설치되어 있어서 현장 관계자의 허락을 받고서야 그 안으로 들어 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전매청은 분명히 콘크리트 현대식 건물이었다. 50년 전에 전매청 광장이라고 했으니 그 때도 전매청이 있었을 텐데 싶어서 현장 관계자에게 저 건물이 언제 지어진 것이냐고 물었더니 “박통(박정희대통령) 시절에 지은 거고, 저 앞의 빨간 건물이 6·25 때도 있던 건물이라 총알 자국도 있다”며 앞의 빨간 벽돌 건물을 가르킨다. 앞에 있는 빨간 벽돌 건물 곧, 50년 전 전매청 건물은 얼마 전까지 웨딩홀로 쓰였는데 지금은 그나마도 운영을 하지 않고 관리만 하고 있다고 했다.
50년 전 전매청과 현대의 전매청 건물 사이에 지금은 잔디가 잘 가꾸어진 운동장이 있었다. 집회가 열렸던 ‘전매청 광장’ 그 자리였다.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제 그나마도 그 광활한 광장의 느낌은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50년 전 당시에 다니던 남문 장로교회 목사의 안내광고로 집회에 참석했었다는 전주교회의 김종래 권사가 동행하였다. 김 권사는 그 때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미음이나 겨우 먹던 사람이 완전히 건강해졌다고 했다.

2. 전주 전도관 개관집회(1956. 6. 11~16)

전매청 광장 천막집회에서 성신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집회가 끝나자 각자가 다니던 교회로 돌아갔으나, 집회에 참석하라고 권면하던 목사가 일주일 만에 돌변하여 하나님을 비방하고 교회에 가도 맨송맨송 받아지는 은혜가 없게되자 자연스럽게 은혜 받은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천막집회가 끝나고 3개월 뒤에 중노송동에 부지를 마련하고 비록 천막으로 시작했지만 ‘전주전도관’이 개관을 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모시고 개관집회(1956.6.11~16)를 열게 된다.

천막집회 후 3달 만에 전주 전도관 개관집회
고성모 목사가 폭력단 이끌고 집회를 방해
그러나 풍성한 이슬성신의 은혜 막을 자 없어

하나님의 집회가 개최된다는 것을 알게 된 기성교회에서는 집회 방해를 위해 조직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집회 방해를 위한 난동의 주동자였던 당시 전북기독교학생연합회 부회장 정영곤은 양심의 가책을 받은 끝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그 당시의 상황을 고백하였다.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가 광고하기를 ‘이번에 박 장로 집회에 한 사람도 절대로 참석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총회와 노회에서 박 장로가 꼼짝 못하도록 성경에 지식이 많은 사람과 신학생, 학생연합회 임원들, 전북 노회에 속한 목사, 장로, 여러 교인들이 모두 동부교회에 모여 연합예배를 보고 우리 다 같이 가서 성경으로 토론하여 박 장로를 꺾어 버리고 전주만큼은 박 장로가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박 장로님이 전주에 와서 집회를 여는 날인 6월 11일에는 본 교회에 와서 기도들 많이 하시고 마음도 준비하시고 성경도 많이 보고 질문할 성경 제목도 많이 연구들 하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집회는 예정대로 시작되었고, 집회를 방해하려는 난동자들도 집회장으로 모여 들었다. 집회 이틀째 되는 날 그들은 동부교회 고성모 목사의 신호를 시작으로 돌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준비해온 막대를 휘두르며 집회를 방해했다. 그러는 가운데 단상에 서신 하나님을 향해 마이크 대를 들어 치려는 순간 마이크 대가 뚝 부러지며 떨어져나가는 것을 수많은 사람이 목격했다. 그들의 소란은 경찰의 출동으로 제지가 되었고, 경찰이 집회장 주변을 지키는 가운데 집회는 계속 되었다.
그 당시 논산에 살던 허삼임 권사는 늑막염에다 폐까지 안 좋아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할대로 해보아도 차도가 없고 앞으로 한두 달 넘기기 힘들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상태에서 마지막 희망을 안고 전주의 집회장을 찾았다. 예배를 드리던 중 뽀얀 이슬 같은 것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목격했고 그것이 허 권사의 입으로 들어오면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7년 동안 갖은 방법을 써도 낫지 않던 병이 사라져 아픈 것을 참아가며 겨우 앉아있던 허권사는 완전이 딴사람이 되어 힘차게 찬송을 불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첫 번째 전주전도관이 섰던 자리는 중노송동 현재 까르푸가 있는 자리이다.

3. 전주 전도관 신축 낙성

전주 전도관 개관집회는 기성교회의 극심한 방해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다. 그 후 천막 전도관에서는 기성교인들이 또 쳐들어 와서 난동을 부릴까봐 교인들이 번갈아가며 교회를 지켰다. 그러다가 3개월 후 대동 88번지에 공장 건물을 사서 전주전도관이 새롭게 개관을 하게 된다. 천막 전도관을 지켰던 사람 중에 한 명인 김종래 권사는 대동 전도관 개관집회에서 하나님께 안수를 받고 집사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전주교회 교인 분들 중에 아쉽게도 그 때 장소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1959년에는 중노송동 야산 넓은 땅을 매입하여 전주교회를 신축 하게 된다. 산을 깎아 흙벽돌을 찍어가며 교인들이 합심하여 지은 교회는 지금도 그 때 모습을 간직하고 우뚝 솟아 전주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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