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방하시고 기도해 주시며 안찰해 주신 1957년대 무더기 심방

발행일 발행호수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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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서대문 심방 집회의 광경을 보도한 1957년 7월8일자 신앙신보.

“이 무더기 심방에 참가한 인원수를 보면 보통이 3백명 내외였으며 종로의 420명과 영등포의 380여 명은 몇 만명씩 모이는 집회에 비해서는 극히 적은 수이나 이것이 단순한 심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일반교회의 예배 참가 인원과 견주어 볼 때 가히 그 진수를 이해할 것이다.”(신앙신보 1956. 3. 11)

심방이라고 하면 보통 믿는 가정, 혹은 믿기를 바라는 가정을 찾아가서 더 나은 신앙을 권면하는 일이다. 요즘은 보통 구역별로 그 구역에 해당하는 교인들이 교역자와 교회 임원들과 함께 심방을 다닌다.

그런데 천부교 초창기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한 번 심방을 하신다 하면 3,4백명이 무더기로 따라 나섰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니 심방은 심방이로되 ‘무더기 심방’이라고 했던 것이다. 신앙신보 1956년 3월 11일자 “서울 일역 집단 심방”이란 기사에 보면 ‘일명 무더기 심방이라는 이 심방은~’이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무더기 심방이란 말은 그 이전부터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 일역의 중심지를 심방하고 교우들의 가정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한편 많은 이에게 안찰을 함으로써 성신의 역사를 역력히 나타내었다.

동 심방에서 특이한 것은 심방하는 당일 아침에 그 구역장에게만 통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 시작 수 분 후에 보면 불신자도 많이 섞여서 좁은 집합소에 물밀듯 닥쳐와 한 교회 같은 성황을 이루었는데…”(신앙신보 1956. 3. 11)

그렇게 사람이 모여 들어 심방은 ‘심방 집회’로 연결된다. 1957년 4월 16일부터 3일간 서울전도관 예하 각 구역별로 ‘심방 집회’를 하셨다고 한다.

하루에 두 지역씩 집회를 열었는데 16일 오전 11시에는 성북구 돈암동 기도처에서 오후 3시에는 청량리 역 뒤에서, 17일 오전 11시에는 성동구 단국대학 뒤에서 오후 3시에는 중구 영락교회 앞에서, 18일 오전 11시에는 종로구 계동에서 오후 3시에는 서대문구에서 대 심방 집회를 하신다.
당시를 살았던 분들에 의하면 ‘무더기 심방’은 ‘영적 수도 공사’라고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석

조 교장(시온고등학교)은 “1956년 11월 경 하나님께서 ‘영적 수도 공사’를 하신다며 서울 시내 전 교인의 가정을 심방하셨습니다”며 자신의 집에서 하나님께 축복 받은 이야기를 신앙 체험기에서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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