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천막집회와 군산 전도관 개관

군산 천막집회와 군산 전도관 개관
발행일 발행호수 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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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56년 4월엔 군산서 집회가 있었다. 16일 밤부터 21일 아침까지 열린 군산의 천막집회는 또 하나의 일화를 남겼다.15일 천막을 치기 위해 미리 갔던 선발대는 이곳서 기적을 체험했던 것이다. 산등성에 천막을 가설할 때 마침 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기둥이 꺾어지고 천막이 찢어지는 바람에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해야 했다.
그러자 이를 주시하던 기성교회 목사 한 사람이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 “군산은 바람 마귀 역사가 센 곳이지. 어디 성신의 권능으로 물리쳐 보시지.”
그 목사의 입가에 득의에 찬 웃음이 감도는 것을 본 선발대원들은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기어코 바람이 자도록 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그러자 이윽고 바람이 멎는 것이었다.
그 후에 천막이 쉽게 가설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때가 16일 정오 무렵이었다. 그런데 이 시각은 하나님과 그 일행이 군산에 도착하는 때이기도 했다. 몇몇 선발대원은 하나님을 마중하러 역전으로 뛰어갔다. 만면에 웃음을 담뿍 머금고 차에서 내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선발대원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던졌다. “바람이 세차서 천막 치기에 곤경을 겪었지. 그러나 바람이 멎고 천막을 칠 수 있었을 거야.” “네, 그렇습니다. 말씀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아셨느냐는 질문이었다. “내가 차 안에서 했지.” <신앙신보 1975. 2. 3>

군산 천막집회가 열리던 당시의 분위기를 볼 수 있는 회고 기사이다. 군산집회 당시 직접 천막을 가설했던  장세호 제2신앙촌 안내대장은 1975년 1월 6일자 신앙신보에 실은 신앙체험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발대로 내려간 내가 천막을 치는데 심한 바닷 바람에 천막이 갈기갈기 찢기어 애먹었는데 이를 주시해 보던 목사들이 ‘미친 놈들, 산꼭대기에 어떻게 천막을 친담’하고 조소하는 것을 보고 나는 ‘좋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보여 주겠다’고 결심, 기도를 한 후 천막을 치는데 마침 바람이 멈추어 감사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른 곳과 다르지 않다. 군산 천막집회가 열린 자리는 개복동 야산으로 지금은 그 자리에 영광중학교와 영광여고가 있다. 지금도 경사진 언덕을 올라 교사가 있는데 학교 바로 옆에 골목을 사이에 두고 개복동교회가 있다.

박진자 권사(85.기장신앙촌)는 당시에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군산 천막집회 안내 광고지를 받아들고 무슨 귀중한 보물은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꼭 그 집회에 참석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집회 날짜를 기다렸다고 했다.

집회 날짜가 가까운 어느날 개복동교회에서 회의가 있다고 참석하라는 광고를 듣고 찾아갔더니 군산 시내의 여러 교회에서 목사, 전도사, 교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 “박태선 장로 집회에 가면 미친다”며 집회 불참을 유도하는 회의를 하더라고 했다. 그러나 박권사는 “개의치 않고 집회가 열리는 날 저녁 그 장소를 찾아갔더니 기성교회에서 하나님의 집회에 참석 못하게 하려는 노력과는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집회에 모여들었습니다.”고 했다.

기성교회가 비방하는 종류도 다양하여 심지어 하나님께서 최면을 건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했다. 문정순 승사(90.군산교회)는 “집회가 시작된지 3일 째 되는 날 저녁에 집회장을 찾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어 앞쪽 단상 옆에 섰는데 집회장에 가면 최면을 건다고 하는 교회 사람들 말이 생각나 단에 서 계신 하나님만 뚫어져라 쳐다봤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부인이 와서 내가 최면을 거는지 안 거는지 보려고 나만 쳐다보고 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어요.”

또한 기성교회 방언파들이 몰려와 훼방을 놓았다고 오성민(78) 전직관장은 “기성교회 방언파들이 많이 몰려와 방언하느라 거품을 내뿜으며 오랑캐같이 알아듣지 못할 말로 지껄이자 단상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참신은 나비와 같아서 향기 나는 꽃에 붙고, 더러운 음란 마귀는 똥파리 같아 몸 안에 죄가 않은 방언파 속에 들어가 저렇게 되니 미혹받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고 회고했다.

문정순 승사는 자신이 살던 집(당시 한일은행 사택)을 군산기도처로 내놓고 군산전도관의 시초를 마련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그 집은 일제 시대때 지어진 다다미 방 집인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한국 전도관 부흥협회 군산 기도처’라고 간판을 달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6조 다다미방(다다미가 6개 깔리는 방)에서 쌀 2가마 들어가는 뒤주에 하얀 보를 씌어 단상으로 삼고 예배를 드렸지요. 기도처라고 쓰인 간판을 보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북 출신의 안장로는 여수 천막집회(1956.4.2-7) 때 작정한 헌금 70만원을 들고 오기도 했었어요.”
이후 영화동에 군산 전도관을 마련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개관집회(1957.1.28-2.2.)를 하게 된다.
“영화동에 있던 창고를 빌려서 전도관을 개관했지요. 그 앞에 빈해원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는데…”
동행했던 문 승사는 기도처 자리는  27년을 살았다며 금방 찾았는데 첫 번째 전도관 자리를 찾을 때는 빈해원이란 중국집이 이정표가 되었다. 지금도 그 자리에서 영업을 계속하는 빈해원이 있어 첫 번째 전도관 자리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음력 정월 초하루에 집회를 했다고 기억하는 문승사의 말대로 군산 전도관 개관집회는 1957년 1월 28일부터 2월 2일까지 있었다. 이때 참석했던 김영환 승사(95.기장신앙촌)는 “생명물 축복을 받은 후 예배를 드리는데, 3일간 계속 단상에 이슬성신이 내리는 것을 봤습니다.”고 했다.

또한 전주집회에 난동의 주동자였다가 후에 전도관으로 돌아온 정영곤은 그의 회개담(1966.5.23. 신앙신보)에서 “그 때 말씀 중에 기성교회 목사들은 전부가 모자를 거꾸로 쓰고 나혼자만 바로 썼더니 나보고 거꾸로 썼다고 비웃는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고 했다.
송혜영기자news-song@theweek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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