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천막집회와 여수 전도관 개관
여수 천막집회와 여수전도관 개관목사 감시 피하려고 복면까지 하고 집회에 참석
1956년 3월의 마산집회를 시작으로 재개된 하나님의 천막집회는 기성교계의 극심한 방해 속에서 진행되었다. 3월 5일부터 12일까지 있었던 마산집회나 3월 19일부터 24일까지 있었던 전주 전매청 광장집회때에도 기성교회 목사들의 방해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극심한 방해 속에서도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집회장을 가득 메웠는데 4월 2일부터 7일까지 열렸던 여수집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50년 전 여수집회가 열렸던 곳은 ‘여수 서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여수시 서교동에 위치하며 1911년에 개교한 여수 서초등학교는 여수시내에 지금도 가장 크게 상권이 발달한 서시장 근처, 여수 시내 노른자위에 있다.
1956년이면 이미 기성교계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천막집회와 종교 활동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반대를 하던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받은 은혜가 분명하니 하나님의 집회를 각 도시에 유치하고자 노력을 펴게 되는데 여수도 마찬가지였다.
여수에서 하나님의 집회가 열리게 된 데는 당시 여수 서초등학교의 임병철 교장의 공이 컸던 듯하다. 임교장은 신앙신보에 실린 회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6년 3월 초였다. 현재 한국에서 부흥강사로 유명한 박태선 장로님이 각 도, 시에서 천막집회를 열고 대 부흥회를 하는데 우리 여수에서도 한번 모시고 대 부흥회를 하여 보자는 권유와, 또 장소에 대하여 여러 곳을 말하다가 모교인 서 초등학교 운동장을 제공하여 주었으면 하고 청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끝에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은혜가 되고 큰 부흥이 된다면 운동장을 제공하겠다고 쾌히 승낙을 하였던 것이다. 부흥집회 기일은 봄 방학인 3월 말로 정하였다. 그러나 협회 사정으로 3월 말에 못하고 4월 2일부터 1주일간 여수 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박장로님이 인도하시는 천막 대부흥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감시조 배치, 적발시 출교 등 온갖 협박도
하나님 권능의 철장 앞에서 물거품이 되고
여수의 모든 기성교인이 집회장에 몰려나와
여수집회에 참석했던 차삼순 퇴임관장(78, 기장신앙촌)은 당시 여수 시내와 기성교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여수 시가지에서 밴드부들이 아침 저녁으로 연주를 하며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이 여수에 오셔서 집회를 하신다’는 소식을 알렸습니다. 또 거리 곳곳에는 서교동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박장로님의 집회가 열린다는 포스터가 나붙었습니다. 그때 당시 여수에 사는 사람들도 남산집회, 한강집회 등 서울에서 열렸던 박장로님 집회에 많이 참석하였고, 또한 기성교회 목사, 권사들도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병이 나았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그 소문을 듣고 박장로님 집회에 꼭 한 번 참석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박장로님의 집회가 열린다니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박장로님의 집회가 열리기 며칠 전, 여수 제일교회에서 총 제직회가 있다고 하여 성광장로교회 집사였던 저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의의 중요 안건은 ‘박장로님 집회에 참석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각 교회 장로들을 집회장에 배치시켜, 참석한 것이 적발되는 사람은 파문을 시키겠다고 엄포까지 놓았습니다. 그리고 박장로님 집회에 가지 않을 사람은 거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해 11월에 발행한 하나님의 설교집(권2)의 협회 창간 1주년 기념사에 보면 여수집회 방해를 위해서 여수 시내 교회 지도자 6인의 연서로 현지 노회의 명령이라고 집회 취소서를 서울로 발송해 왔다고 했다. “집회 취소서를 접수하고 중지할 줄 알았더니 예정대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여수에서는 노회를 중심으로 제직회를 조직하고 수 삼일씩 숙의한 결과 한 사람의 교인도 그 집회에 참석할 자가 없다고까지 할만치 철통같은 방어진을 쳐놓고 박장로가 집회가 안 되어 회개하고 돌아갈 것이라고 낙관 기대하고 있었다.
박장로는 전주집회를 끝마친 다음 선발대를 보내어 4월 2일부터의 집회 준비에 착수했는데 누구 하나 협력하는 자가 없었다. 개회 날은 당도하였다. 저들은 요처요처에 감시원을 배치하고 있었으나 원근 각지에서 기차와 선편과 버스로 모여드는 인파는 첫날부터 대성황이었다.”
집회 일시가 처음에는 3월 28일 밤부터 31일 아침까지로 광고가 나간다. 그러나 3월 28일자 신앙신보에는 ‘마산집회가 그곳 교우들의 특청으로 연장되어 예정보다 길어지게 되어 부득이 여수집회를 연기하게 된다’는 광고와 함께 여수집회 날짜가 4월 2일 밤부터 7일 아침까지로 변동되었음을 알린다.
여수집회에는 멀리 일본에서도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1956년 4월 20일자 신앙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일본 고베시의 마순애(31.여)씨는 일본서 폐병으로 5년간이나 신음타가 백약이 무효라 죽을 것만 바라고 절망 가운데 쌓였던 중 한국에 있는 그의 오빠에게서 박태선 장로의 소문을 듣고 죽어도 고국서 죽고자 내한 하였는데 여수 집회가 연기되는 바람에 못 견디어 입원하였던바 그는 거기서 거의 죽은 사람이 되어 버렸으며 의사의 진단은 많이 살아야 이틀 살리라고 하였다한다.
그러나 마씨와 마씨의 오빠는 죽어도 박장로님이나 만나보고 죽겠다 하면서 거의 시체가 된 마씨의 몸을 들것에 들고 와서 일본서 여기까지 안찰 받으러 왔으니 다 죽게 된 몸 죽어도 좋으니 안찰 한 번 해달라고 눈물의 호소를 하였다한다. 그는 이어 곧 박장로님의 안찰을 받게 되었는데 너무나도 신기하게 일어나 곁의 사람들을 심히 놀라게 하고 말았다고 한다. 마씨는 안찰이 끝나는 즉시로 집회에 참석하였고 얼굴에 불그레한 핏기가 돌았으며 그는 이어 박수와 찬송 철야 등 5일간을 꼬박 앉아 있었고 그는 너무도 감사에 넘쳐 더 집회에 따라다니겠다고 말하면서 또한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을 다하겠다고 하였다.”
이 소문은 좁은 여수시에 퍼져서 “불참을 약속한 저들은 복면하고 나온 자도 있었고 종말에는 전교인이 다 참석하여 저들의 약속은 허사가 되어 후에 저들은 참석한 자에 대한 벌을 주지 않기로 묵과 했던 것이다.” (설교집 권2)
여수집회를 마치고 은혜 받은 사람들끼리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공화동에 전도관을 개관하고 개관집회(1956.11.12~18)를 열게 된다. 이때 수년간 위병으로 고생하며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하여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던 군수부인이 하나님께 안찰 받고 병이 낳았다. 이일을 계기로 군수가 전도 되었고 이 사실은 여수 전역에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전도관에 다니게 되면서 여수 시내의 전도는 불같이 일게 되었던 것이다.
송혜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