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전도관 개관집회
인천전도관 개관집회<1955년 천막집회의 현장을 가다> 연재를 마치자 그 다음 하나님의 집회 현장도 찾아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이 빗발쳤다. 신앙신보사는 우선 1956년 집회 현장부터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1956년에는 천막집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전도관 교회가 신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56년에는 천막집회와 함께 전국에서 전도관이 개관되면서 며칠씩 개관집회가 열리게 된다.
그 첫 번째 개관집회가 있었던 곳이 인천이다. 인천 전동 19번지(20번지란 기록도 있다), 짠지공장 2층에서 인천전도관이 시작된다. 그 개관집회가 열렸던 때가 1956년 1월 12일부터 14일까지이다.
1955년 12월 25일에 원효로 하나님 자택에서 구제단이 시작되고 바로 다음해 1월 12일이니 해는 바뀌었어도 날짜로는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이다.
50년 전 그 짠지공장 자리를 찾아갔다. 우리말로 짠지 일본말로 다꾸앙, 일제시대 때부터 그걸 만드는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 공장 자리, 신앙신보 1956년 1월 18일자에 실린 사진과 3월 28일자 ‘인천소식’란에 2층 벽돌건물이라며 소개되었는데 그 벽돌건물이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포장재 만드는 공장이 되어있었다. 번지수가 분화되어 19-30번지가 되어있었다. 1956년부터 바로 그 짠지공장 2층의 인천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는 임순덕권사(75.인천교회)는 그 당시의 이야기를 소상히 해주었다.
“다락같이 2층이 있었고 바닥이 마루였어요. 중간에 불이 나서 그 2층은 다 탔지요.” 공장 내부를 들여다보니 그 때 불에 탄 흔적도 남아있었고 벽은 30센티는 족히 될 정도로 두터웠다. 공장 관계자는 나와서 “일제시대 때 지었다고 그래요. 굉장히 튼튼하게 지었나 봐요.”하며 사진을 예쁘게 찍어가라고 했다.
인천전도관의 개관예배는 굉장했었던 듯하다. 당시의 정황을 1956년 1월 18일자 신앙신보에서는 “부흥전도관 개관식 성대, 인천 각 교파 신도의 요망으로/ 인천항도에 부흥열 최고조”란 제목으로 전하고 있다. “사십만 시민을 포용하고 있는 수도의 관문인 인천시내 60여 각 교파의 신도들의 열성적인 요망으로 드디어 부흥전도관이 개관되었다.” 집회 기간 중 마지막 날 하나님의 설교 말씀에 이어 “윤치영선생, 최창순선생, 인천시장 김정렬씨 등의 열렬한 축사가 있어 많은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며 인천시장과 윤치영 선생의 축사 사진이 각각 실려있다.
인천전도관의 개관 이후 주일이면 하나님께서는 서울전도관에서 오전 11시 30분에 인천전도관에서는 오후 3시부터 집회를 인도하셨다고 신앙신보는 전하고 있다. 그리고 매주 ‘인천 소식’이라고 인천전도관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영하 16도의 날씨에 유리창이 하나님 서신 단상부터 다음다음으로 차차 녹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있어 난방장치가 필요 없겠다는 기사(1956.2.17)나 신경통 전신불수로 4년이나 고생하던 조형순군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아 교우들에게 더욱 신앙심을 북돋우는 계기가 되었다는 기사(1956.4.20)등이 계속하여 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내동에 살던 탁연옥권사(67.인천교회)는 인천전도관 개관집회를 알리는 포스터를 보고 길 하나 건너면 전동인 바로 그 집회장을 찾게 된다.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유리창의 하얀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 기운에 녹나?’ 생각하기도 했었고 고무 타는 듯한 지독한 냄새도 맡고, 향취도 맡았다고 했다. 그리고 주일이면 본 교회에 나가라는 말씀을 듣고 오전에 다니던 제일교회를 갔었는데 그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어린 나이에도 가슴을 치며 ‘내가 여기에 왜 왔노’ 후회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지 말아야 할 데를 왔구나’란 깨달음과 함께 그 후로는 누가 가라고 떠밀어도 안 가게 되었다며 하나님께서 그 은혜의 차이를 깨닫게 해주시려고 그러신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인천전도관이 시작했던 그 자리 바로 옆(전동 19-19)에 천부교 동인천교회가 있다.인천교인들의 남다른 신앙의 열기는 그해 12월에 커다란 교회를 새로 짓고 신축 낙성식을 갖게 된다. 마포에 있던 2만제단과 규모나 모습이나 거의 비슷한 인천전도관이 숭의동에 개관하게 된 것이다.
“제단의 건설은 그 면모와 위용! 외국의 원조 없이는 호흡조차 못할 정도의 기성교회에 비해 너무나 웅대한 믿음의 위력이요 은혜의 소치인 것이다. 지난 28일 웅비 그대로의 인천전도관 낙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세인의 이목은 다시 한 번 경악된 바 있다.”고 신앙신보 1957년 1월 5일자는 전하고 있다.
송혜영기자news-song@theweek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