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①
“수백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검은 배에 사들여,
수족을 쇠사슬로 묶고 배 밑바닥에
몰아넣으니, 지옥의 형벌보다 더하였다.”
이 광경은 마치 지난 호에서 살펴본 노예선의 참상, 아프리카 흑인들이 짐짝처럼 실려 갔던 그 죽음의 항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의 배경은 아프리카가 아니다. 이는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기관 오무라 유코가 남긴『규슈 원정기(九州御動座記)』의 기록으로,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포르투갈 무역선에 짐승처럼 묶여 팔려나가던 상황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가톨릭이 축복한 노예무역의 영향은 대서양에만 머물지 않고, 일본을 비롯해 명나라, 그리고 우리나라 조선의 역사 속에도 깊이 파고들었다. 이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가톨릭 국가들의 노예무역이 동아시아 국가들에 어떻게 확산되었으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실제 사료와 연구 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예수회, 총·화약과 노예매매로 일본에 세력을 넓히다
1543년, 일본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 해안에 배 한 척이 도착한다. 배에서 내린 이들은 낯선 외모를 하고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었다. 유럽인을 처음 본 일본인들은 그들을 남쪽에서 온 오랑캐라 하여 ‘남만인(南蠻人)’이라 불렀고, 남만인들이 타고 온 배는 남만선(南蠻船)이라 불렀다. 남만선에는 일본의 운명을 바꾸게 되는 물건이 실려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조총과 화약이었다.
당시 일본은 천황(天皇,てんのう)과 무로마치 막부 등의 중앙 권력이 무너지고, 전국 각지의 다이묘(영주)들이 영토와 패권을 놓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전국(戰國)시대였다. 각 다이묘들은 사실상 독립된 군주처럼 군대를 거느렸는데,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은 곧 조총의 군사적 가치를 알아보았고, 다네가시마에서 들여온 조총과 총포 제작 기술은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남만 무역망을 따라 일본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예수회 가톨릭 선교사들은 다이묘들의 최우선 관심사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조총과 화약’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에 선교사들은 포르투갈 상인과 일본 다이묘들 사이에서 통역과 중재를 맡는 무역 브로커 역할을 하며, 다이묘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것을 포교 수단으로 삼았다. 다이묘들 역시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군사 물품과 해외 물자를 구하는 데 유리했기에, 선교를 허용하거나 교회·신학교·사제관·서양식 병원의 건립과 국제무역항의 조성을 지원하며 선교사들을 도왔다. 덕분에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바탕을 효과적으로 조성할 수 있었다.<자료1>

<자료1> 가노 나이젠 作《남만병풍》. 남만무역 병풍화에는 남만무역의 가톨릭 선교적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남만병풍’이란 특정 작품의 제목이 아니라 ‘남만무역을 묘사한 병풍화’라는 하나의 그림 장르를 말한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중반 사이 90건 이상의 남만병풍이 제작되었으며, 주로 남만선의 입항과 하역, 상인·선교사·일본인들의 왕래 장면들을 그린다. 남만병풍은 당시 시대상을 잘 고증하고 있는데, 일례로 위 그림에서 배의 색이 검은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서양 무역선은 목조 선체의 부식 방지를 위해 타르 같은 검은 방수재를 발랐고, 일본인들은 이를 흑선(검은 배)라 불렀다. 일본 문화청은 특히 가노 나이젠의 작품을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실제 서양식 범선의 형태를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 그림의 배를 보면, 뱃머리 대 끝에는 장식된 십자가 조각이 우뚝 세워져 있으며, 배 상단의 깃발에는 십자가를 든 성인이나 천사 같은 기독교 성화가 그려져 있고, 그 배 위에는 상인과 함께 가톨릭 선교사들이 타고 있다. 남만병풍에는 대부분 검은 수도복을 입은 예수회 선교사들만 등장하며, 나이젠의 작품에는 회색 로브를 입고 허리에 밧줄 띠를 두른 맨발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도 그려져 있다. 당시 무역항 주변에는 기독교관이 많이 세워졌는데, 그림 오른쪽 위에도 교회당 안에서 동양풍 예수 성화가 놓인 제단을 향해 동그란 성체를 들어 올리는 미사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남만병풍의 장면들에는 남만 무역의 가톨릭 선교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일본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장면은 그려져 있지 않지만, 대신 대부분의 남만병풍이 그렇듯 포르투갈 상인들이 흑인들에게 양산을 들거나 짐을 옮기게 하는 등 노예처럼 부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이 시기, 가톨릭 선교사 세력과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손을 잡은 인물은 바로 오와리의 영주 오다 노부나가였다. 노부나가는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들과 그들을 돕고 있던 상인들을 통해 서양의 대포를 알게 되는데, 그는 곧 그것이 전투에서 매우 유용할 것임을 깨닫고 다른 다이묘들보다 앞서 철포부대를 조직하고 전술을 개발했다. 그가 만든 철포부대는 전국시대 전투 양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노부나가는 마침내 교토를 장악하며 천하 통일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선교사들은 노부나가의 강력한 비호 아래 신학교를 세우는 등 일본 중심부에서 교세를 폭발적으로 늘려나갔고, 노부나가는 계속해서 서양 무기와 화약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훗날 파우스트적인 거래로 평가받는다. 거래의 대가로 자국민들을 팔아넘기는 반인륜적 범죄가 자행됐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 사이에서는 교황의 허가 아래 노예무역이 횡행하고 있었다. 16~17세기 동양인 노예매매는 극히 수익성 높은 사업이었고, 포르투갈은 이미 명나라와 교역을 시작한 바 있다. 명나라 관리들은 허가 없이 무단으로 거래하려는 포르투갈인들을 ‘바다의 악마’라 부르며 분노했지만, 가톨릭 국가였던 포르투갈은 그들 신의 대리인인 교황에게 이교도의 땅과 재산을 매매할 권한을 받았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포르투갈은 중국에서 많은 노예를 사들였는데, 그중 상당수는 어린이였다. 부모는 자식을 팔고, 남의 자식을 납치해 팔기도 하는 등 많은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갔고, 이에 중국의 공식 역사서《명사(明史)》에는 포르투갈인들이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잡아먹었다(掠小兒為食)”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일본 다이묘들이 유럽 국가의 방식을 따라 노예무역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노예매매의 비극이 일본에까지 번지게 된다.
짐짝처럼 팔려 간 일본인들은 포르투갈의 아시아 거점이었던 마카오를 비롯해 인도, 필리핀은 물론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와 유럽 본토까지 전 세계로 끌려갔다. 16세기 말 포르투갈 리스본에 거주했던 이탈리아 상인 필리포 사세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리스본의 거대한 노예촌에는 아프리카 흑인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중국인 노예도 다수 존재했다. 심지어 포르투갈인의 노예를 넘어 흑인 노예의 하수인으로 부리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수많은 어린 소녀들이 성노예로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1555년 포르투갈 교회의 기록에는 일본인 소녀들을 매입해 창녀로 부릴 목적으로 유럽까지 데려갔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포르투갈의 역사학자 루시우 드 소우자의 저서『포르투갈의 근세 일본 노예무역: 상인, 예수회, 그리고 일본인·중국인·조선인 노예들』에 따르면, 이 노예무역에서 예수회는 노예 협상, 구매, 합법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례로 예수회는 인신매매를 합법화해 주는 ‘허가증 발급 시스템’을 직접 운영했다. 상인들이 노예를 데려와 세례를 받게 하면 거래를 승인해 주었는데, 이는 도덕적으로 논란이 있는 매매 상황에서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은 ‘노예에게 행해지는 선행’이기 때문에 합법이 된다는 논리였다. 나아가 예수회 스스로도 많은 노예를 거느린 노예 소유주였다. 그들은 문서를 작성할 때 ‘포로(cativo)’나 ‘노예(escravo)’라는 단어 대신 ‘사역 청년(moço)’이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노예 소유 사실을 은폐하려 했지만, 사역 청년은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들이 거느리던 노예는 수백 명에 달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한동안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수많은 일본인 남녀가 짐승처럼 쇠사슬에 묶여 포르투갈 무역선에 팔려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심각성을 인지하게 된다. 히데요시의 서기관 오무라 유코가 규슈 원정에 동행하며 남긴『규슈 원정기』에는 당시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여 더욱더 그 종교를 번성시킬 계략을 꾸몄다. 이미 고토, 히라도, 나가사키 등지에서는 포르투갈 무역선이 들어올 때마다 영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일본에 자리 잡고 있던 여러 종교를 자기들의 사악한 법(邪法, 사악한 가르침)으로 개종시켰다. 그뿐 아니라 일본인 수백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검은 배에 사들여, 수족을 쇠사슬로 묶고 배 밑바닥에 몰아넣으니, 지옥의 형벌보다 더하였다. (…) 지금 이 세상에서 이미 축생도(짐승의 세계)의 참상이 눈앞에 펼쳐진 것과 다름없었다. 이를 보고 따라 배운 그 근처의 일본인들 모두 그 모습을 본받아, 자식을 팔고 부모를 팔고 아내를 판다고 하니, 이를 전해 들으시고 깊이 헤아리셨다. 이 종교를 그대로 허용한다면 순식간에 일본이 외도(外道, 그릇된 길)에 빠질 것이 자명했다. 그리되면 기존 종교와 국가 질서가 모두 무너질 것이라 탄식하시며, 선교사들을 일본에서 추방하라는 명을 내리셨다.(今度伴天連等能き時分と思候て、いよいよ一宗繁盛の計略を廻らして、すでに五島、平戸、長崎などにて、南蛮舟つきごとに完備して、その国の国主を傾け、諸宗をわが邪法に引き入れ、それのみならず日本人を数百男女によらず、黒船へ買取、手足に鎖を付け、船底へ追入れ、地獄の呵責にもすぐれ、(…) ただ今世より畜生道の有様、目前之様に相聞候。見るを見まねに、その近所の日本人、いずれもその姿を学び、子を売り親を売り妻女を売り候よし、つくづく聞しめし及ばれ、右之一宗御許容あらば、忽日本外道之法に成る可き事、案の中に候。然らば仏法も王法も、相捨つる可き事を歎思召され、即伴天連の坊主、本朝追払之由仰出候。)”
위와 같은 이유로 히데요시는 1587년, 일본 전역에 ‘바테렌(伴天連, 포르투갈어 신부 padre의 음차 표기, 즉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지만, 기이(奇異)하게도 포르투갈과의 무역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자국민이 노예무역으로 받는 고통을 알면서도, 이제 포르투갈이 공급하는 초석과 총포는 포기할 수 없는 자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추방령에 포르투갈 상선은 무역을 위한 것이니 외국 상인들은 계속 일본에 드나들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두었다. 그러나 이는 곧 선교사들의 잔류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겠다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선교사를 전면 추방하면 상인들까지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추방령을 엄격하게 집행하지 않았다. 대다수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 남았지만, 무역을 지속하고 싶었던 히데요시는 이를 묵인했다. 연구자들은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령은 선교사를 추방하려는 목적보다는 포르투갈 무역은 유지하면서 선교사와 기리시탄 다이묘들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 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그런 히데요시를 바라보는 예수회의 시선은 뜻밖이었다. 예수회의 기록들을 보면, 히데요시를 가톨릭의 의인(義人)이자 그들 신의 성스러운 검(聖劍)이라 칭송하고 있었다. 어째서 히데요시는 그런 평가를 당한 것일까?
▣ 예수회, “임진왜란으로 조선인들이 구원받았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실권 기간: 1582~1598년)
일본인들이 포르투갈선에 노예로 팔려가는 참상을 알고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으나, 초석과 총포, 무역을 포기할 수 없어 선교사들의 잔류를 묵인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정복하고자 조선 침략을 강행하기 전이었던 1586년 5월 4일, 재일본예수회 준관구장 가스팔 코엘료 신부 일행 30여 명이 도요토미와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중무장한 포르투갈선 2척의 구입과 항해사 고용을 주선해 달라고 코엘료 신부에게 요청한다. 이에 코엘료 신부는 환영하며 요청받은 포르투갈 선박 두 척뿐 아니라, 히데요시가 요구하지도 않은 추가적인 포르투갈 군사 지원까지 제안했고,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을 히데요시 편으로 결집시켜 적대 세력이었던 시마즈 가문과 싸우게 하겠다고도 약속했다. 코엘료 신부가 전쟁 지원에 이토록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히데요시가 중국을 정복하면 중국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교에 귀의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예수회는 이런 히데요시를 의인으로 묘사했다. 예수회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가 1592년에 작성한 보고서에는 히데요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하여 조선부터 정복에 착수했다. … 그리고 포교에 종사하고 있는 사제, 그 밖의 성직자의 수와 신용은 크게 증대하였으며 자기 자신이 복음의 포교 활동을 위하여 한층 적합한 손발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한편 도요토미는 많은 가톨릭교도를 중요한 영주로 중용하고, 우리 성스러운 가르침을 확대하기 위한 방향에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 주 하느님은 그것이 조선과 명나라에서 포교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도록 뜻하신 것이리라.” 다른 논문에서는 이를 보다 간략하게 “히데요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은 그를 조선에도 복음의 문을 여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고 정리했다.
또한 일본에서 30여 년간 활동한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도 일본 선교의 역사를 정리한 저서『일본사』에서 “우리 주 하느님은 이 사람, 곧 관백 히데요시를 일본에 있어서의 성스러운 검과 채찍으로 선택하셨던 것이다.”라며 히데요시를 하느님의 성검(聖劍)으로 묘사했다. 이것이 한반도를 초토화하고 수많은 조선인의 목숨을 앗아간 침략전쟁의 총책임자를 바라보는 예수회의 시선이었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왜장들 중 가장 잔인했다고 알려진 인물로, 전쟁의 선봉에 서서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학살하고 관청과 민가에 불을 질렀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다. (출처: 위키피디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예수회는 조선 전쟁을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열어준 선교의 기회로 여겼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회가 기독교인의 모든 희망이 달려있다고 한 인물이 또 있다. 임진왜란 왜장들 중 가장 잔인했다고 알려진 인물, 전쟁의 선봉에 서서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학살하고 관청과 민가에 불을 지른 기리시탄 다이묘 ‘아우구스티누스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전쟁터에 나가는 부대 깃발에 항상 십자가를 새겼으며, 임진왜란 당시 자신과 기리시탄 장병들의 미사와 고해성사를 위해 종군 신부를 요청해 세스페데스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게 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원정을 가기 전 천주교도들은 가능하면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성체를 받고서 나서려 했다.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고 성사를 담당할 사제를 파견해 줄 것을 일본의 부관구장에게 청원했다. 이들 천주교 신자 전원이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 모이게 된 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섭리이며, 고니시 유키나가의 간청에 답하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으로 특파되었다. 세스페데스는 조선에서 고해를 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는 천주교도 수가 점차 늘어났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주요 기리시탄 다이묘들도 자신을 찾아왔으며, 자신이 고해성사를 해 줌으로써 천주교도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하느님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국립진주박물관,『프로이스의「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서출판 부키, 2003.)
프로이스를 비롯해 유럽 선교사들은 섭리주의(攝理主義, Providentialism), 즉 일본 기독교인들의 운명이 신의 섭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믿음을 유키나가와 연관지었다. 일본사 연구자 유르기스 엘리소나스에 따르면,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조선 침략의 전면에 나서면서 이 전쟁은 일본과 그리스도교 세력이 결합한 기묘한 십자군 원정의 분위기를 띠었는데,(the prominence of Christian daimyo gave an air of somewhat strange crusades to the Japanese-Christian enterprise in Korea) 이때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 유키나가가 조선 선교의 문을 열어줄 것이란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1599년 포르투갈어로 작성된 예수회의 조선전쟁 보고서는 “이 모든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고니시 유키나가의 세례명)와 함께 있던 기독교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가장 자비로운 섭리 덕분이었다.(o que não foi sem a piedosíssima providência de Deus que quis salvar aqueles tonos cristãos que estavam com Agustinho)”라고 임진왜란을 기록했다. 또한 유키나가 덕분에 기독교인들은 아시아, 특히 조선에서 기독교 전파의 새로운 길이 열렸다며, “전쟁으로 인한 두 번째 이익은 많은 조선인들이 구원(救援)받았다는 것이었다.(O segundo bem e proveito que Nosso Senhor tirou de estos males da guerra foi o grande número de coreias que por esta via se salvou.)”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가톨릭 선교사들의 상상대로 신의 섭리가 인도한 성스러운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은 조선인을 구원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