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세계사 <14>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홀로코스트의 진범(眞犯)은 누구인가? (上)

다시 쓰는 세계사<14>
발행일 발행호수 2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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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의 가스실 벽에 남은 유대인들의 손톱 자국.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고통과 처절했던 절규의 흔적이
생생하다. (출처: 위키미디어)
<자료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미조츠에서 집단 처형 당한 알몸의 여성들을 확인사살하고 있는 독일 나치 군인의 모습. (출처: 프랑스 파리 홀로코스트 기념관)
<자료3> 1945년 4월 16일 연합군이 촬영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들. 그들의 모습은 “살아 있는 죽은 자”로 묘사되었다. (출처: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
<자료4> 1945년 4월 촬영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의 시체 소각장
(출처:https://www.history.com/news/nazi-twin-experiments
-mengele-eugenics)
<자료5> 1945년 5월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시체 소각을 재연하는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홀로코스트란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용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들으면 강제 수용소에서 착취당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유대인의 모습이나,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의 텅 빈 눈동자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만큼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영상과 사진, 각종 문헌을 통해 생생히 알려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료1,2,3,4,5>
그러나 홀로코스트에 대해 아직 베일에 싸인 듯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있는데, 홀로코스트의 뜻이 “불에 의한 파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나치가 유대인을 불에 태워 ‘소각’하면서 세상을 정화시킨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랜 세월 세상을 지배해 온 집단이
‘악을 처리하는 방식’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이 집단은 유대인을 향해 ‘예수를 살해한 종족이자 악의 근원’이라고 지목해 왔을 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유대인을 학살한 전범(戰犯)들을 법의 심판을 피해 안락한 삶을 누리도록 보호하고 은닉해 주었다. 이에 기획기사에서는,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알지 못하는 홀로코스트의 진범
(眞犯)에 대해서 두 편에 나누어 조명해 본다.

먼저 홀로코스트라고 하면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떠올리는 것은 히틀러가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힌 독재자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격렬한 제스처와 함께 “유대인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외치는 히틀러의 모습이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돼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히틀러가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자서전에서도, 히틀러의 생애를 탐구한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힐 만한 근거나 경험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이렇게 적었다.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처음으로 특별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이 언제였는지 말하기란 곤란하다. (…) 나는 중세의 유대인 박해를 생각하면 기가 죽는다. 이것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자서전에서 밝히기를, 심경에 일대 반전이 일어나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고 술회하면서도 정작 변하게 된 명료한 근거나 경험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했다. 히틀러 연구자인 이언 커쇼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히틀러가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유대인 학살에 집착했는지 모르고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도 모른다.”라고 했다.(이언 커쇼, <히틀러1>, 교양인. 2012년, p.118.)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유럽을 정복하겠다는 야망과 광기에 사로잡힌 것은 각종 사료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유대인 말살에 집착한 것은 그 계기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히틀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독일 작가이자 역사가 브리지트 하만)

<자료6> 뮌헨의 대주교 폰 바오로하버
폰 바오로하버는 제국종교협약 조인에 대해 “교황과 히틀러간의 협약은 헤아릴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예수여! 히틀러를 보호하소서.”라며 감격스러워했다. (출처:https://www.welt.de/geschichte/article193122289/Kirche-im-Dritten-Reich-Weihbischof-war-Spitzel-der-Gestapo.html)

그렇다면 히틀러와 나치가 처음으로 정권을 잡았던 1933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본다면 유대인 말살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33년 4월, 히틀러 정부는 가톨릭 교황청과 ‘제국종교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비밀리에 교섭을 시작했다. 이 협약은 교황청이 히틀러 정부의 정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지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으로, 정치권의 아웃사이더로 평가받으며 지지 기반이 약했던 나치와 히틀러에게 이 조약을 성사시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히틀러와 교황청이 맺은 이 조약은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자마자 전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 최초로 맺은 조약이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사활을 걸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 정부가 교황청과 교섭을 시작하던 4월, 나치당원들은 범국가적인 유대인 차별 운동에 돌입해 유대인의 가게를 불태우기 시작했고, 히틀러 정부는 ‘사법시험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켜 유대인 변호사들의 활동을 금지했는데 이는 유대인을 차별하는 첫 번째 법률이었다. 이때부터 4월 한 달에만 유대인의 교사와 판사 활동 금지, 유대인 참전 용사와 그 가족의 연금 차단 등의 정책이 계속해서 발효되었다.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률이 시행되자 ‘누가 유대인이고, 누가 가톨릭 신자인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때 가톨릭 사제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결혼 증명서와 세례식 증서를 나치당에 넘겨 주었고, 나치는 이를 사용해 유대인을 색출하고 차별하는 근거로 삼았다.
나치가 반유대 정책을 대대적으로 파급시키는 동안 가톨릭 교황청은 히틀러 정부와 성의 있게 교섭에 응했고, 마침내 7월 20일 33개 조항으로 구성된 제국종교협약에 조인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추기경 폰 바오로하버는 “교황과 히틀러간의 협약은 헤아릴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예수여! 히틀러를 보호하소서.”라고 감격스러워했으며, 나치 또한 로마가톨릭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정치적 지배권을 강화시켰다는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자료6>

<자료7> 1935년, 히틀러 정부가 제정한 ‘독일의 혈통과 명예 보호법’을 보여주는 차트.
이 법에 따르면 유대인은 가톨릭 신도와 결혼할 수 없다. 이는 306년 엘비라 종교회의에서 결의된 법과 내용이 같다. (출처: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

이후에도 히틀러 정부는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률을 계속해서 제정해 유대인은 가톨릭 신도와 결혼할 수 없고(독일의 혈통과 명예 보호법) 공무원이 될 수 없으며
(직업공무재건법), 대학교의 학위를 받을 수 없도록 했는데(독일 학교 및 대학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법), 이와 판박이 같은 선례가 로마가톨릭교회에 있었다. 가톨릭 교회법에 따르면 유대인은 가톨릭 신도와 결혼할 수 없고(306년 엘비라 종교회의) 공무원이 될 수 없으며(535년 클레르몽 종교회의), 대학교의 학위를 받을 수 없었던 것(1434년 바젤 평의회)이다. <자료7>
이처럼 교회법이 시행된 시점을 보면, 유대인 차별은 4세기부터 유구한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4세기는 로마가톨릭이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받아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던 때인데, 흥미로운 것은 가톨릭이 이런 힘을 갖기 전까지 로마제국에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률이 없었고 로마시민들과 법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아 유대인이 로마인과 결혼할 수도 있고 로마의 공직을 얻을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보면 로마가톨릭 교회가 정치적인 세력을 갖게 되면서부터 유대인 차별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로마가톨릭을 시작점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창궐해 혼란과 공포가 극심하던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 있다.
당시 로마가톨릭은 순식간에 죽음을 몰고 오는 흑사병이 타락한 인간을 향한 신의 회초리라고 했고, 이에 따라 대규모 참회 집회가 늘어났지만 가톨릭교회에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흑사병은 도리어 더 빨리 퍼졌다. 신의 분노를 풀겠다며 스스로를 채찍으로 때리는 ‘채찍질 고행단’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자 병균은 더욱 빨리 전염되었다. <자료8>

<자료8> 14세기 유럽, 흑사병이 유행하자 신의 분노를 풀겠다며 스스로를 채찍으로 때리며 행진했던 가톨릭 ‘채찍질 고행단’, 그러나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병균은 더욱 빨리 전염되었다. (출처: http://www.udimagen.org/flagellants/)

온갖 대책에도 떼죽음이 멈추지 않자 채찍질 고행단을 비롯한 가톨릭 신도들은 유대인을 ‘이 모든 악의 근원’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고, 유대인을 감금하고 끔찍한 고문으로 자백을 이끌어냈다. 유대인들 입에서 “악마의 사주를 받아 우물에 병균을 퍼뜨렸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고, 고통을 이기지 못한 유대인이 시키는 대로 자백하면 유대인을 남녀노소 구별 없이 시나고그(유대인 회당)에 가두고 불을 붙여 몰살시켰다. <자료9>

<자료9> 14세기 흑사병이 유행하자 채찍질 고행단을 비롯한 가톨릭 신도들은 끔찍한 고문을 통해 “유대인이 악마의 사주를 받아 우물에 병균을 퍼뜨렸다”고 자백하게 하고, 자백을 하면 모조리 화형시켜 유대인을 몰살시켰다. (출처: 위키미디어)

이 같은 학살이 1348부터 2년간 유대인 공동체 1000곳 이상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는 ‘불에 의한 파괴’이며 이는 인간이 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 악의 근원을 불태워 죽이는 것을 어원으로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세의 사건이 홀로코스트의 진정한 발화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연구한 역사가 라울 힐베르크는 ‘유대인 학살은 정신의 문제이자 공감의 문제’라고 분석했다. 행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유대인 전체를 학살한다는 계획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는 일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치는 기괴할 만큼 극단적인 효율성으로 학살을 수행했는데 이 효율성은 유대인을 파괴해야 한다는 정신과 공감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치의 SS대원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극단적인 효율성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유대인의 재산 몰수와 수송을 책임지고 있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1942년 나치 고위급 회의에 참석한 후 유럽 전역에서 ‘최종 해결’ 해야 하는 유대인의 숫자를 표로 기록했다. 최종 해결이란 곧 대량학살을 의미했고 그 목표 숫자는 1,100만 명에 달했다. <자료10>

<자료10> 아돌프 아이히만이 기록한 유럽 각 나라별 유대인 학살 목표 숫자 총 1,100만명. 그는 이를 ‘최종 해결’ 해야하는 유대인의 숫자라고 표현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자료11> 1944년 추방된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로 수송하는 기차 (출처: https://www.lutheranworld.org/blog/asking-forgiveness-deportation-hungarys-holocaust-victims)

아이히만은 독가스실이 운영되는 ‘절멸 수용소’를 향해 기차 노선을 운행하고 유대인을 어떻게 수송할 것인지 계획을 작성했는데, 전쟁 막바지에 기차로 끊임없이 군수 물자를 운송하는 속에서도 극도의 효율성을 발휘해 유대인이 기차를 타고 신속하게 독가스실로 직행하도록 했다. <자료11>
그는 자신이 기차에 태운 유대인의 숫자가 수백 만에 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전쟁이 끝난 후 나치 전범(戰犯)들은 뉘렌베르크 재판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범죄에 대한 재판을 받았지만 아이히만은 처벌과 추적을 피해 교묘하고도 치밀하게 종적을 감췄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60년, 아이히만은 유대인 정보기관이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됐는데, 이 가공할 범죄자의 탈출과 은닉을 실행한 세력이 로마가톨릭 교회라는 사실이 그때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이히만 은닉에 주도적인 임무와 책임을 부여 받은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알로이스 후달이라는 주교와 신분 세탁을 위해 서류를 만든 안톤 베버라는 신부였다. 서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히만은 주세페 시리 대주교가 관할하는 제노아의 수도원에서 은밀하게 생활하며 완벽한 보호를 받았다. 아이히만은 1960년 체포된 후 심문을 받았을 때 “아르헨티나로 가는 동안 가톨릭 사제들이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계속해서 도와주었다.”고 증언했다. <자료12,13>

<자료12> 1961년 이스라엘에서 열린 재판에 참석한 아돌프 아이히만. 헤드폰으로 통역을 들으며 암살 방지 방탄 유리 부스에 앉아있다. 유대인 말살의 실무 책임자였던 그는 알로이스 후달 주교, 안톤 베버 신부, 주세페 시리 대주교 등 가톨릭의 도움을 받아 도주와 은닉에 성공했다. 1960년 체포된 후 심문을 받았을 때 “아르헨티나로 가는 동안 가톨릭 사제들이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계속해서 도와주었다.”고 증언했다. (출처: 브리태니커)
<자료13> 알로이스 후달 주교. 그는 대표적인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 프란즈 스탕글, 발터 라우프 등을 은닉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출처: 위키미디어)

<자료14> 적십자사에서 만들어 준 아돌프 아이히만의 위조 여권.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출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

아이히만은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국제 적십자사가 발행한 여권을 소지했는데, 이는 교황청의 난민 지원 위원회가 난민들의 이민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적십자사를 통해 여권을 발급해 준 덕분이었고, 이것이 신분 세탁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자료14>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후 15년간 가족들과 안락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것은 안전한 은닉을 가능하게 해 준 로마가톨릭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힘입은 것이었다.
로마가톨릭에서 구출한(?) 사람은 아이히만뿐만이 아니었다. 악명 높은 소비보르와 트레브린카의 절멸 수용소 지휘관으로 1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프란즈 스탕글도 로마가톨릭의 손길에 숨겨진 인물이었다. 패전의 기운이 짙어지자 폴란드 국경을 넘어 도망치던 스탕글은 아이히만과 마찬가지로 후달 주교를 만나 안전한 은닉처를 찾았을 뿐 아니라 후달 주교가 두 손을 들어 스탕글을 환영했다고 하니 얼마나 큰 위로를 주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료15>
또한 나치의 SS 연대장이었던 발터 라우프는 움직이는 가스 차량을 이용해 9만 7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자였는데 역시 후달 주교의 도움으로 추적자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고, 교황청 직속의 수녀원(convents of the Holy See – 발터 라우프는 1963년 칠레 대법원 증언에서 가톨릭 사제의 도움을 받아 약 18개월 동안 “교황청 직속 수녀원”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에 은신하다가 결국 시리아로 도망쳐 1984년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료16>

<자료16> 1945년 1월 21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호텔 레지나에서 체포되는 발터 라우프.
그는 움직이는 가스 차량을 이용해 9만 7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자였는데, 그 역시 후달 주교의 도움으로 추적자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고, 교황청 직속의 수녀원에 은신하다가 시리아로 도망쳐 1984년까지 살았다. (출처: https://www.nzz.ch/walter_rauff_ns_bnd_chile_deutschland-1.12685021?reduced=true)

요컨대 로마가톨릭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홀로코스트의 설계자와 실행자를 구원한 것이었고, 그 손길로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다른 나라에 세워진 독재 정권의 정치적 고문 역할을 하면서 또다른 홀로코스트의 발화점이 된 인물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후술하기로 한다.

최근 미국 가톨릭 주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사형 집행에 반대하며 “우리는 죽음을 야기해서는 안 되며 생명을 수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형은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예수의 부르심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미국이 사람을 죽이는 시대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집니다.”라고 호소했다.
나치가 갈고리 십자가를 앞세우고 학살을 했던 시대처럼 사람을 죽이는 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의 생명조차 존중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은 듣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지만, 역사상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진범이라면 그 정도 사형수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용서를 베풀어 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들의 호소와 용서는 섬뜩할 뿐이다. <자료17>

<자료17> 트럼프 행정부에 사형 집행 반대를 촉구하는 폰 코클리 대주교
2020년 12월 10일 CBS뉴스 인터뷰에서 미국 오클라호마시티의 대주교 폴 코클리가 갱단원 사형수 브랜든 버나드의 사형을 앞두고, 트럼프 행정부에 사형 집행 반대를 촉구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최근 미국 가톨릭 주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사형 집행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의 생명조차 존중해야 한다고 호소하는것은 듣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출처: CBS News 유튜브 캡처, https://youtu.be/XGKqNyyCJ9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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