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옷 입은 책, 기록으로 본 왕실의 위엄

우리 역사를 품은 공간 - 국립중앙박물관을 가다
발행일 발행호수 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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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서고
어진 세상을 꿈꾸다

<사진1> ‘왕의 서고’의 도입부 공간

왕의 기록, 그 찬란한 문을 열며

왕의 서고가 활짝 열렸다. 한 나라의 역사는 글로 남고, 글은 책으로 모여 지혜의 탑을 이룬다. 그 가운데 가장 고귀한 지식이 머물렀던 곳이 ‘왕의 서고’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마련한 이번 전시는 ‘외규장각 의궤’만을 위한 첫 전용 공간으로, 왕실의 정제된 기록문화를 마주할 수 있는 자리이다. 이곳에서 왕의 서고로 들어서는 생생한 체험을 경험한다. 도입부에 들어서면 다양한 의궤 표지들이 서고에 꽂힌 형태로 관람객을 맞는다.

의궤를 전시하는 공간은 실제 외규장각 내부와 비슷한 규모로, 내부에 기둥과 문살을 설치하고, 초록 비단으로 만든 ‘책의(冊衣·책이 입는 옷)’를 디지털로 구현해 실제 왕의 서고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사진1>

의궤는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치른 과정을 후대가 참고할 수 있도록 세세하게 기록한 책으로, 조선왕조 내내 꾸준히 만들어졌다. 조선왕조의 독창적인 기록문화이자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국가유산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외규장각 의궤는 정조(재위 1776~1800)의 명으로 별도로 보관되던 귀중본이다.

되찾은 기록, 박병선 박사의 의궤 발견 이야기

이 서적들은 병인양요(1866년)때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군함에 약탈 당한 사실만 전해올 뿐 정확한 행방을 모르던 중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1929~2011) 박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서울대를 졸업한 박병선 박사는 1955년 프랑스 유학을 떠나기 전 스승인 사학자 이병도 교수에게 인사를 갔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고서들을 약탈해갔다는데 그 행방을 알 수 없으니 프랑스에 가거든 한번 찾아보라” 이 말을 가슴에 간직한 그녀는 박사 학위를 딴 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사서로 취직하여 틈날 때마다 도서관과 박물관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국립도서관의 베르사이유 별관의 파손된 고서 보관소에서 의궤들을 발견했고, 1978년 한국에 알렸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일반인 자격으로 날마다 도서관을 찾아 의궤 297책의 목차와 내용을 정리했다.

박사의 헌신과 대한민국 정부와 시민단체의 지속적인 환수 노력 끝에 2010년 11월 서울 G20 정상회담을 계기로 프랑스 국내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5년마다 갱신하는 영구대여 형식을 빌려 사실상 한국에 반환했다.

약 145년 만에 돌려받은 의궤였다.

그 치밀한 기록, 왕실의 경사와 애도

조선 왕조의 의례는 그 성격에 따라 명확히 구분된다. 왕실의 경사스러운 의식은 가례(嘉禮), 국왕을 비롯한 왕실 주요 인물의 장례 의식은 흉례(凶禮)라 부른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한 명칭의 차이가 아니라, 왕실이라는 국가의 중심이 수행한 의례의 성격과 질서를 반영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왕실의 행사는 위엄을 드러내는 동시에 백성들의 유교적 생활에 모범이 되어야 했다. 왕실에서는 중요한 행사를 치른 뒤, 어김없이 의궤를 만들었고 형식과 절차에서 잘못을 줄이기 위해 행사의 내용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왕실 혼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가례도감의궤>는 왕비 간택부터 가례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기록한 자료이다. 혼례에 쓰일 물품의 준비, 행사 진행에 필요한 문서, 의식의 절차와 형식까지 정밀하게 기술되어 있어, 조선 왕실의 혼례가 얼마나 정교하게 운영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왕실의 장례인 흉례는 그 기간이 길고 절차가 복잡하여 하나의 책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국장도감의궤>, <빈전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로 나누어 기록되었다. 이 세 권의 의궤는 조선 왕조의 장례 의식, 즉 흉례의 전 과정을 충실하게 담아내며, 왕실이 죽음을 어떻게 마주하고, 어떤 예식으로 품격 있게 마무리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이다. <사진2>

<사진2> 조선 왕조의 가례와 흉례의 전체 과정을 담은 의궤의 전시 장면

비단옷을 입은 기록, 어람용 의궤

조선시대에는 귀한 책의 표지를 직물로 한 번 더 감쌌다. 그래서 직물로 만든 표지를 책이 입은 옷이라고 하여 ‘책의’라고 불렀다.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초록색 비단으로 된 귀한 옷을 입고 있다. 그 이유는 국왕이 보던 단 하나의 의궤인 ‘어람御覽’용 의궤였기 때문이다.

어람용 의궤는 아름다운 무늬로 짠 비단 표지, 황동으로 반짝이는 변철(邊鐵)과 장식, 매끄러운 종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쓴 글씨와 손으로 그려 채색한 그림까지, 책이라는 형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동안 표지가 손상되어 1970년대 대부분 현대 직물로 교체되었다. 그때 떼어낸 원표지들은 그대로 보관되다가 2011년 외규장각 의궤와 함께 돌아왔다. 표지 위에 붙은 둥근 스티커는 한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 도서로 분류하며 붙인 것으로, 외규장각 의궤가 겪은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픈 기록이다. <사진3>

외규장각 의궤 297책 중 291책이 어람용 의궤이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본 의궤 29책이 있다.

<사진3> 어람용 의궤의 전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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