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세계사 <9>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악랄한 범죄자인가, 용서의 구원자인가?
다시 쓰는세계사 <9>◈ 일본 학자 눈에 비친 고해성사
1620년, 일본 학자 후칸사이 하비안(1565년~1621년)은 로마 가톨릭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저서를 집필했다.<자료1> 제목부터 ‘가톨릭의 신을 파괴하다.’라는 뜻의 『하데우스(破提宇子)』인 이 저서는 가톨릭의 가장 큰 문제가 고해성사라고 지적했다. <자료2>
‘고해성사는 말로 고백만 하면 죄가 소멸된다는 것으로 이는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살인과 같은 중범죄도 가톨릭 신부에게 말만 하면 죄가 소멸된다니 가톨릭 신부는 살인범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후칸사이 하비안, 『하데우스』 – 야마모토 시치헤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재인용)
이처럼 고해성사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은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한다. 일본인 중에서 처음으로 가톨릭 신도가 된 야지로(彌次郞)라는 인물은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었고, 그의 스승은 가톨릭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1506년~1552년)였다. 야지로가 가톨릭을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서였다.<자료3>
◈ 양심을 마비시키는 마음의 평안
1546년, 가고시마의 상인(또는 사무라이)이었던 야지로는 살인을 저지르고 쫓기다가 체포 직전에 야미카와항 부근에 내항해 있던 포르투갈 무역선에 올라탔다. 사람을 죽인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야지로는 무역선 선장이자 가톨릭 신도였던 조지 알바레스에게 심경을 털어 놓았고, 알바레스는 야지로를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로 도피시켜 주면서 거기서 활동 중인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면 면죄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야지로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1547년 12월 야지로는 말라카 언덕에 있는 성모성당에서 하비에르를 만나자마자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매달렸다. 하비에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하나이다.”라는 말을 읊어 주고 죄를 모두 용서했다고 선언하자 야지로는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이는 고해성사의 작용이었다. 가톨릭에 따르면, 이제 야지로는 우주 만물을 심판하는 절대자에게 용서를 받았으니 사람을 죽였어도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야지로는 마음의 평안을 찾게 해 준 가톨릭을 용서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일본인 최초의 가톨릭 신도가 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고해성사가 행해진 것은 1593년 임진왜란 때였다. 스페인 출신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1551년~1611년)가 경상남도 진해에서 2,000명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는데 그들은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이었다. 세스페데스는 일본의 종군 신부로서 조선에 온 것이었다.<자료4>
세스페데스가 속한 제1군은 잔혹한 살상 능력으로 악명 높았다. 임진왜란의 선봉에 섰던 제1군은 부산진성에서 평양성까지 진격하는 동안 조선 사람 수만 명을 난도질하며 개와 고양이까지 모조리 베어 버린 군대였다. 제1군을 지휘한 장수들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해 열렬한 기리시탄(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종군 신부에게 고해성사하는 것을 거룩하게 여겼다. 고해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사함 받은 기리시탄 일본군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었고, 전쟁에 짓밟힌 조선인들이 절규하며 일본군을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괴로울 것이 없었다.
서두에 소개한 하비안의 지적대로, 말만 하면 손쉽게 용서받는다는 개념은 사람들에게 어떤 죄를 저질러도 괴롭지 않은 상태, 즉 죄책감과 양심이 마비된 상태를 가져다주었다. 지금도 전 세계 가톨릭 신부들은 고해성사를 베풀어 무슨 죄든지 용서해 주고 있다. 고해성사는 지금부터 1700년 전, 가톨릭 역사의 초기부터 등장한 이래로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
◈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가?
처음 고해성사가 등장한 계기는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이 질문은 종말론과 연관이 있는데,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지탄을 받는 종말론은 사실 예수와 가톨릭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예수 자신이 당대에 재림할 것이라 분명하게 선언하고 그때가 세상의 종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가톨릭은 세례만 받으면 모든 죄가 해결되고 곧 세상이 끝나 천국에 갈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신도들은 죄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박했다던 예수의 재림이 계속 지연되고 아무리 기다려도 세상의 종말이 도래하지 않자 신도들 사이에 여러 가지 의심과 질문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세례 받은 후에 지은 죄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였다. 궁지에 몰린 가톨릭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했고, 가톨릭 학자 암브로시우스(340년~397년)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사제가 나를 용서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할 수 있다.’는 방법을 처음으로 제시했다.(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자료5>
이후 고해성사 이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파리 학파 출신 페트루스 롬바르두스(1096년경 ~1160년)였다.<자료6> 그는 죄를 고백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명제를 확립했고 고해성사의 기본 개념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했다. 이러한 이론은 아우구스티누스(354년~430년)의 논문을 근거로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 교리의 기초를 세운 유명한 신학자이자 최고 권위자였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고해성사의 근거라고 제시했던 아우구스티누스 논문이 사실은 위조된 허위 논문이라는 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 동안 한 번도 고해성사를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논문은 완벽한 위조이자 허위였다. 이를 근거로 만든 날조된 이론이었지만 고해성사는 12세기부터 가톨릭의 교리로 정착되어 갔다.
◈ 신도들을 옭아매는 감시와 규제
뿐만 아니라 121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고해성사에 높은 권위를 부여했다. 고해성사를 모든 가톨릭 신도의 의무로 강제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교회 출입을 금지한다고 강력하게 규정한 것이다.<자료7>
고해성사가 강제되면서 가톨릭 신부는 모든 신도의 내밀한 사생활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가톨릭이 정한 규율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죄’로 고백해야 하는데 당시 가톨릭은 신도의 세세한 생활 양식까지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하면 사생활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료8>
예를 들어 가톨릭은 부부간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날과 허용하는 날을 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를 어긴 경우는 고해성사를 해야 했고, 고해 신부는 어긴 이유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며 갖가지 질문을 던졌다. 13세기 고해 신부들의 질문이 총망라된 『고해 신부 대전(Summae Confessorum)』이라는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성(性) 문제’에 대한 질문이다.<자료9> 가톨릭이 정한 절차와 규율이 그만큼 까다롭고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해성사에 대해 독일 학자 에두아르트 푹스(1870~1940)는 통렬한 묘사를 남겼다. “호색적인 고해 신부들은 아리따운 여인의 성생활을 꼬치꼬치 캐물으며 내밀한 자백을 듣는 재미에 탐닉했다. 그러나 고백석에서 즐긴 것은 단지 공상만이 아니었다. 고해성사에서 여자들이 육체의 정조를 잃었고, 고해 신부는 자신의 육욕의 희생자들에게 죄악도 미덕이 될 수 있다고 속였다.”(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 생각을 지배하는 간악한 힘
죄악을 미덕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가톨릭이 고해 신부에게 부여한 막강한 권한이었다. 고해성사 이론에 따르면, 고해 신부는 가톨릭의 신과 같은 위치에서 인간의 죄를 사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간악한 힘이 되었다.
일례로 1960년대 미국 볼티모어에서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된 범죄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근래 발생한 볼티모어 사건을 통해 범죄자의 의식 구조를 알 수 있다.
볼티모어는 미국 건국 당시인 1700년대 미국 최초의 대교구와 대성당이 설립된 곳으로, 모든 동네에 가톨릭 교구가 설치된 철저한 가톨릭 도시였다. 볼티모어 가톨릭 교구가 설립한 키어 고등학교에서 고해성사로 촉발된 사건이 있었다. <자료10>
키어 고등학교는 학교에 고해소가 설치되어 고해 신부가 상주하는 곳이었다. 1967년 1학년 여학생 진 하르개던 웨넌은 고해소에 들어가 어린 시절 당했던 성 학대 사실을 신부에게 털어놓았다.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던 진은 죄를 용서받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고백할 용기를 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고해 신부 닐 매그너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둘 사이에 가려진 칸막이를 열어 진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자위를 했다. 자위는 가톨릭에서 죄로 규정한 것인데 신부가 왜 그런 행위를 했을까.
2주 후 고해 신부가 진을 다시 불렀을 때 비로소 그가 가진 생각이 드러났다. 고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용서 받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너를 성령으로 채울 수 있고 내 정액은 성령이니 삼켜야 한다.” 그의 생각은 자신이 죄악을 미덕으로 바꿀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는 성령을 베푸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여기에 상담 신부 조셉 메스켈이 가담하면서 그들은 거침없는 언동으로 자신들의 의식 구조를 명확히 드러냈다. 메스켈 신부는 진을 강간할 때 라틴어로 “성령을 받으라”고 기도했고, “예수께서 내 몸에 흐르는 성령을 네가 받길 원하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시간이 끝나고 돌아가는 진을 문까지 배웅하며 축복을 내리거나, 때로는 “네가 빨리 정화되지 않아 내가 몹시 힘들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자료11>
진은 구역질 나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끝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했다. 신부가 가톨릭의 신을 대리해 죄를 용서해 준다는 생각은 어릴 적부터 세뇌당한 것이었고 진은 여전히 그 의식에 지배당했다. 매번 그 시간이 끝날 때마다 진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로부터 53년이 지난 지금, 70대 할머니가 된 진은 가해 집단에 용기 있게 맞서서 소송을 하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가톨릭 볼티모어 교구 측은 진이 2~3년간 상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진은 “가톨릭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진은 지금도 가톨릭 건물 근처에 가는 것이 역겹고 힘들다고 한다.
가해 집단은 악랄한 범죄자와 용서의 구원자라는 1인 2역을 능수능란하게 병행해 왔다. 그러나 용기 있는 피해자들의 발언으로 그 집단의 민낯과 의식 구조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이 결여된 반사회적 인격장애, 한마디로 사이코패스 범죄 집단이라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섬뜩한 것은 오늘도 전 세계에서 계속되는 고해성사다. 고통에 찬 피해자가 절규해도 가해자는 고해성사로 깨끗하게 용서받고 세상 앞에 당당해지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고해성사를 하고 나면 자유롭고 당당”해진다고 했다.<자료12> 고해성사가 계속되는 한 그 집단의 당당함도 여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