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참된 알곡이 되기를 오늘도 기도드립니다

참된 알곡이 되기를 오늘도 기도드립니다

“추수한 바 모든 알곡 천국 창에 들인 후 주가 베푼 연회석에 우리 들어가겠네” 수백만이 체험한 은혜를 가짜라니… 1960년 12월은 동아일보 사건이 있었던 때입니다. 전도관과 신앙촌에 대한 비방 보도를 일삼던 동아일보가 급기야 이슬성신이 찍힌 사진이 조작됐다는 어처구니없는 기사를 신문에 실은 것입니다. 저도 그렇고 이슬성신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수백만인데 그것을 가짜라고 하니 그저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동아일보사에 정정보도를 요구하고 항의를 하러 간다기에 소사신앙촌 주민들과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동아일보사 앞에 모여 있는데 갑자기 신문사 문이 열리더니 뒤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얼떨결에 3층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경찰들이 따라 올라오더니 저희들을 한곳으로 몰아세워 놓고 아래로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2층으로 떠밀려 가던 중 경찰들이 우리 교인들을 들어서 창밖으로 내던지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는데 말릴 새도 없이 1층으로 다시 떠밀려 가니 최루탄 냄새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코와 입을 틀어막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때 경찰들이 소사신앙촌에 데려다준다며 바로 트럭에 태웠는데, 차를 타고 가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트럭이 멈춰서 보니 소사신앙촌이 아니라 서대문 경찰서였습니다. 한 명씩 조사를 받을 때 저에게 주동자가 누군지 물어보기에 “누가 주동해서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은혜 내리는 게 사실인데 그걸 찍은 사진이 조작됐다고 하니 너무 억울해서 찾아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열흘 정도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소사신앙촌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그때 정작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거짓을 보도한 언론이며, 진짜를 가짜로 둔갑시키는 억울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시련은 연이어 찾아왔습니다. 불과 한 달 후인 1961년 1월 하나님께서 또다시 영어의 몸이 되셨습니다. 1차 옥고 때와 마찬가지로 일부 정치권과 특정 종교계가 터무니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옥고를 치르실 당시 부정선거를 도와 그 대가로 사면을 받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해하려고 모진 옥고까지 치르게 했던 정권에 협조할 리 만무한데, 없는 죄도 만들어 내는 세상이구나 하며 울분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1차 옥고 당시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1959년 2월 20일에 있었던 재판이었습니다. 방청권 없이는 법정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는데 우연히 법정 앞에서 교인 분을 만나 방청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법정에 들어서신 하나님께서는 평안하신 얼굴로 저희가 있는 방청석을 유심히 바라보시며 앞자리로 걸어가시는데 저는 왜 이런 일을 당하셔야 하는지 원통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이 시작되고는 더 가관이었습니다. 법정에서 법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종교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판사가 증인석에 있던 유호준 목사에게 “박 장로가 어떻게 해서 이단인가 말해 보시오.” 하고 질문했습니다. 유호준 목사는 자신 있는 태도로 “박태선 장로는 아무리 보아도 사람인데,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고 하니 이단입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또 유 목사는 이슬성신과 향취 등에 대해서도 “박 장로가 영적인 사실을 오관(五官)의 대상이 되는 물체로 설명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종교 재판도 아닌데 왜 법정에서 이단 운운하는 말을 들어야 하며, 저도 직접 보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체험한 은혜를 두고 말이 안 된다고 비방하니 억울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 목사 앞으로 가시더니 준엄하신 음성으로 “요한복음 20장 22절을 아십니까?” 하시며 “성신을 받으라, 성신을 받으면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지고 정하면 정하여지리라 했지요?” 하시니 유 목사는 우물쭈물하며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 하겠지요?” 하시자 유호준 목사는 도망치듯 법정을 나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곳에서도 내가 예배를 인도하면 성신이 내립니다.” 하셨습니다. 하나님 함께해 주신 시간이 마음속에 남아 이듬해인 1962년 영어에서 돌아오신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경기도 덕소에 두 번째 덕소신앙촌 건설을 지휘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수많은 핍박과 방해 속에서도 이 역사는 백절불굴의 강인함으로 지속된다는 것을 그때 알 수 있었습니다. 덕소신앙촌 건설을 위해 소사신앙촌의 주택 건설대원들이 7월 10일 무렵에 1차로 떠났고, 열흘 후에는 소사신앙촌 제단 건설대가 가게 되었습니다. 제단 건설대였던 저도 친구 6명과 함께 덕소신앙촌에 도착해 보니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안찰해 주시며 은혜를 부어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공장 건물을 짓기 위해 8인치 콘크리트 블록을 한 단씩 쌓아 올렸는데, 하루는 A, B반으로 나뉘어 블록 옮기기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합심해서 서로 도우며 최선을 다하다 보니 동작이 느리고 굼뜬 저도 뛰어다니며 바쁘게 일하게 되었고 저희 팀이 이겼을 때는 얼마나 기쁜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전 뛸 줄을 모르고 느림보였던 제가 선의의 경쟁 속에서 바쁘게 달리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그때 처음 알게 됐습니다. 공장 건물 2층을 쌓을 때는 블록을 옮겨 놓을 곳이 협소해서 지나다닐 공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블록을 가져다 놓은 후 조심하며 1층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 따로 오던 건설대 언니가 저에게 “빨리 내려가!” 하며 호통치듯 말을 했습니다. 언니 보기에는 느릿느릿 걷는 제가 답답했던 모양인데, 나름대로 부지런히 걷던 저는 속이 상해 “지게꾼이 지게꾼 사정을 모르면 어떻게 해!” 하고 퉁명스럽게 말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블록을 가지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더니 하나님께서 언제 올라와 계셨는지 저를 보시고 부드러우신 음성으로 “내가 다 안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을 다 아시고 말씀해 주시니 부끄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운전해 주시는 배를 타고 건설대원들과 함께 한강을 건너 모래를 가지러 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송을 불러주셔서 저희도 따라 불렀습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강물과 그 위에 퍼지던 찬송 소리가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납니다. 또 콘크리트 작업을 하기 위해 땅 파기를 할 때는 하나님과 함께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죄 짐을 지셨네’라는 찬송을 부르며 일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한 시간들은 제 마음속에 보석으로 남아 지금도 그 찬송을 부를 때면 그때 광경이 뭉클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한번은 모래를 건설 현장으로 운반할 때였습니다. 비가 온 뒤라 땅이 미끄러울 것 같아 모래를 지고 조심히 가려는데 저 멀리 계시던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에 젖은 땅 위를 마른 모래로 덮어 단단히 다져주고 계셨습니다. 저희들 넘어지지 말라고 염려해주시는 마음만으로 감사할 따름인데 누구보다 먼저 길을 정돈해 주고 계시니 너무나도 황송해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시멘트 반죽을 만드는 담당자에게 얼마의 비율대로 만들고 있는지 자세히 물어보셨습니다. 시멘트 반죽을 만들려면 모래와 시멘트와 물을 1:1:1의 비율로 잘 배합해야 하는데, 당시는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라 담당자들이 으레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현장 책임자들도 비율을 확인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공장과 주택, 학교와 교회까지 하나의 도시라고 할 만큼 큰 규모의 신앙촌 건설을 진두지휘하시면서도 건설의 기본이 되는 시멘트 배합까지 세밀히 살피시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습니다. 강변 쪽 아파트를 지을 때 저는 방바닥에 넓고 납작한 돌을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기술자들이 그 위에 황토를 깔고 시멘트로 굳혀서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좋은 재료로 무척 튼튼하게 지어진 아파트를 보면서 저도 어머니를 모시고 이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졌습니다. 당시 소사신앙촌 때보다 월급이 인상되어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있던 저는 아파트가 완공된 후에 한 채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도 덕소신앙촌에 들어오셔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단풍이 물들어가는 산과 한강 줄기가 어우러져 일품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덕소신앙촌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없는 은혜를 주셨던 추수감사절 주택 지대의 건물을 올릴 때 즈음 덕소신앙촌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크고 웅장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드릴 생각에 기쁘게 일했습니다. 교회가 완공되고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을 때는 새벽예배를 마친 후 하나님께서 아주 커다란 인절미를 신앙촌 주민 모두에게 나눠 주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서울 지역 전도관에서 추수감사절 예배를 인도하신 후 덕소신앙촌으로 돌아오셔서 다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추수한 바 모든 알곡 천국 창에 들인 후 주가 베푼 연회석에 우리 들어가겠네’ 하는 추수 찬송을 인도하셨는데, 찬송가 뜻을 생각하며 따라 부르던 저는 ‘나도 알곡이 되어 영원한 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알곡이 되고 싶은 소망으로 뜨겁고 간절했던 그날 예배는 지금도 제 마음에 남아 힘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신앙체험기 특집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

올해 추수감사절 사진전시실에는 1958년 소사신앙촌 농장에서 무를 수확하는 사진이 전시되었습니다. 소사신앙촌 농장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양한 신앙체험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 어떻게 이런 곳에 심나? 1957년에 소사에서 여청 총무로 일을 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정문 밖에 배추를 심으라.” 하셔서 나가 살펴보니, 완전히 자갈밭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심나?’ 하고 당혹스러웠지만, ‘심으라 하셨으니 심자.’ 하고 배추, 무, 고구마 등을 심었습니다. 거의 돌을 들고 그 밑에 씨를 놓아 둔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가을에 그 자갈밭에서 하나에 1관이 넘는 고구마, 배추, 그리고 손으로 뽑기 힘들 정도의 무를 수확했습니다. 그 다음 1959년에도 심었는데, 그때는 배추가 3포기쯤 나오다가 말라 죽고, 고구마는 씨도 못 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금년에도 많이 뽑아 먹었느냐?”고 물으셔서 사실대로 말씀드리자, 축복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하려고 그러신 거라고 하셨습니다. 김도삼 승사/기장신앙촌 ■ 하루하루가 기쁘고 감사해 저는 1962년경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여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촌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신앙인의 마을이었습니다. 노구산 정상에는 오만제단이 있었고 학교와 주택, 공장까지 갖춰져 있었습니다. 늘 그리던 신앙촌에서 살게 되니 하루하루가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지게를 져도 하나도 무겁지 않아서 훌훌 날듯이 뛰어다니며 ‘지게가 아니라 날개구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과수원에서 일했던 저는 농장에서 하는 일이 익숙했지만 신앙촌에서 하는 일은 의미가 달랐습니다. 이 일을 하며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의 어떤 일보다 소중하게 느껴졌으며, 남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일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무거운 지게를 먼저 지려고 하고 힘든 일을 서로 하려고 했습니다. 안진옥 권사/기장신앙촌 어딜 가나 찬송 소리가 울리는 신앙촌에서 직원들은 찬송을 부르며 힘차게 일해 자갈밭에 배추를 심으라 하셔서 돌 밑에 작물 씨를 놓아뒀는데 그해 가을 엄청난 수확을 거둬 이듬해에는 작물이 말라 죽어서 사실대로 말씀드렸더니 하나님의 축복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이라 하셔 ■ 찬송을 부르며 힘차게 일해 1957년 당시는 전국 방방곡곡에 전도관이 개관되던 때로, 제가 살고 있는 평택에도 전도관이 세워져 저는 아이들과 함께 평택전도관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늘 소망하던 소사신앙촌에 입주해 농장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농장은 농작물 재배, 양계장과 양어장 운영 등 다양한 일을 하며 농작물만 해도 각종 곡류와 채소, 과일까지 재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땅에서 뽑기 힘들 정도의 튼실한 무와 배추, 팔뚝보다 굵은 고구마 등 보기 드문 대풍을 이루어, 신앙신보에 “대풍 이룬 농작물”이라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찬송 소리가 울리는 신앙촌에서 농장 직원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힘차게 괭이질을 했습니다. 가을날 잘 익은 벼 이삭을 바라볼 때면 만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가슴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이지수 집사/기장신앙촌 소사신앙촌 농장은 규모도 크고, 보기 드물 정도의 풍작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농장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다음은 과거 본지에 실렸던 소사신앙촌 농장에 관한 인터뷰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 어른 머리보다도 더 큰 고구마 수확 건설대에 들어가려고 함평에서 소사신앙촌에 왔는데 인원이 다 차서 저는 농장으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그게 1958년 4월이었어요. 그때 참 재밌게 일했어요. 한 반에 20여 명씩 7반까지 있었는데 저는 2반 반장을 했어요. 우리 반이 워낙 일을 잘 해서 일손이 더 필요하면 다른 반에서 우리 반을 보내달라고 할 정도였어요. 1958년에는 고구마가 잘되어 두 개면 한 관, 4킬로그램이 나갈 정도였어요. 그런데 우리 밭 바로 옆에 있는 사회 사람 밭은 흉작이 들었어요. 바로 옆이니까 다 보이죠. 어른 머리보다도 더 큰 고구마를 하나님께서 들고 이만제단 단에 서셔서 이게 뭐냐고 물으시면 다들 호박이라고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성덕례 권사/기장신앙촌 ■ 거름지게를 져도 향취가 진동 제가 시온농장에 간 것은 1957년 5월 7일입니다. 그날이 바로 제 생일이어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만제단에서 저하고 10명이 함께 갔습니다. 우리가 가기 열흘 전쯤에 소사교회에서 한 10명이 먼저 일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시온농장에 오셨는데요. 인천교회 단에 서시고 가시는 길에 꼭 들르셔서 축복을 해주셨어요. 처음에 갔을 땐 적산가옥 한 채만 있어서 그곳에서 함께 합숙을 했는데 거기에 있는 우물에 축복을 주셔서 저희는 매일 그 우물에서 생명물을 먹었습니다. 초기에는 큰 통이 장착된 차로 인분을 가져다가 거름으로 만들어 농사를 지었어요. 밭에 뿌릴 때도 거름을 직접 퍼서 뿌렸는데요. 당시에는 거름을 져도 향취가 진동을 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참 행복합니다. 그렇게 수확한 배추는 한 포기에 4관이나 나갔어요. 4관이면 16킬로그램이에요. 배추 한 포기가 한아름 되었습니다. 고구마가 엄청 크게 수확되어 하나님께서 단에서 소개하셨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최춘길 권사/기장신앙촌 ■ 농사가 잘되어 교인들이 구경와 배추 농사가 잘 되어서 이만제단 교인들이 구경온다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배추 한 포기가 한아름이나 되어서 ‘나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배추같이 알찬 열매가 되고 싶다’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수확된 무가 어찌나 크고 길고 연하던지 무밭에서 무를 뽑다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었어요. 아깝잖아요. 부러져서 땅에 있는 것을 먹었는데 놀랐어요. 배보다도 더 달고 시원했거든요. 주채경 권사/기장신앙촌 신앙신보에 실린 소사신앙촌 탐방기 1960년 8월 22일자부터 10월 24일자 신앙신보에는 총 8회에 걸쳐 소사신앙촌 탐방 기사가 연재되어 당시 생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 1960년 10월 17일자 신앙신보에는 소사신앙촌 탐방기 농장편이 다음과 같이 실렸습니다. “「시온농장」―전답 합해 6만여 평의 광대한 지역에서 수확되는 양곡은 신앙촌 주민들의 급식이 되고 있는바 사실상 신앙촌 건설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1957년 2월경 처음 신앙촌 농장으로 화한 후 기계적인 특수재배 등 종전과는 현저한 수확을 보았는데 특히 포도원의 소득 양은 크다 하며 충해나 자연적인 피해 같은 것은 극히 적다고 한다. 다년간 농업에 종사하여 조예가 깊은 도일경(都日敬=중국인) 집사의 인솔하에 남녀 70여 명의 종업원이 종사하고 있는 바 황소가 세 마리, 그 외에 기계화한 농구가 갖추어져 있다. 또한 농원 한쪽에는 양어장이 있는데, 순 금붕어만 해서 현재 2만여 마리를 기르고 있다. 약 5백 평의 논을 적당히 파 가지고 여러 종류의 고기를 따로 따로 분배해 놓았다. 3년 전에 처음 시작할 때는 겨우 200마리를 구해다 놓았었다고 하는데 그간 고충도 많았으나 지금은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어 어장 안의 고기들을 시가로 따지면 상당한 액수가 되리라고 한다. 이 농장에서는 또한 신앙촌 내 2구 제3직매소를 경영하고 있는데, 소위 신앙촌 안에서는 백화점이라는 곳으로 모든 농작물이 다 진열되어 있다. 장소는 다르지만 괴안리 산비탈에는 약 천여 평의 양계장이 있다. 신앙촌 공장에서 사용되는 달걀을 공급해 주고 있는 이 양계장에는 산란을 목적으로 하여 주로「레구옹」만 2000수를 기르고 있다. 앞으로 신앙촌이 확장됨에 따라 이 농장의 발전은 더욱 기대되고 있다 하는데 주민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지를 확보하는 것이 선결 문제로 현재 집약 농업에 있어 최대의 수확을 목표로 실험 연구한 바가 많다고 하는 바 내다보이는 경인 간의 넓은 평야를 바라볼 때 농장의 발전이 더욱 기대된다.”

선하고 진실한 마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신앙체험기 특집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마음이 백합화같이 피어나 따뜻하고 온유해지며, 말과 표정에도 그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또한 자유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선한 행실을 갖추게 됩니다. 이번 신앙체험기 특집은 은혜를 받은 사람의 마음과 행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희 가족은 6·25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다니면서 재산을 많이 잃게 되었고, 인천 경동에 정착했을 때는 빈손이나 다름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생계가 막막했던 그때, 다행히 […]

The power of the Water of Life, the water filled with the Holy Dew Spirit

Testimonials of Faith by Theme: Special Edition

Since the very beginning God has blessed the Water of Life, revealing the vast and amazing power of the Holy Dew Spirit. Through the Water of Life we have learned about the unchanging eternal world of Heaven and understood the power that purifies the sins of mankind. Because of space restrictions we have selected a […]

이슬성신이 담긴 물, 생명물의 권능

신앙체험기 특집

하나님께서는 초창기부터 생명물을 축복해 주시며 크고 놀라우신 이슬성신의 권능을 보여 주셨습니다. 생명물을 통해 변치 않는 영원한 하늘세계를 알게 되었고 인간의 죄를 씻어 맑히시는 권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생명물의 체험담 중에서 지면상 몇 가지를 간추려 보았습니다. 1956년 용산구 청암동에 이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만제단을 짓게 되었는데, 남편(故 장세호 집사)이 건설 현장의 책임을 맡게 되어 저희 […]

“이 땅에 오셔서 한없는 은혜 베풀어주신 하나님”

이순덕 권사(2)/기장신앙촌

아름다운 소사신앙촌 모습은 놀라워 이만제단 특전대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을 건설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많은 청년들이 건설대원으로 지원하게 되었고, 저 또한 은혜 받는 일에 참여하고 싶어 꼭 건설대에 들어가기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57년 11월 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고 저는 1958년 6월에 소사신앙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 나이 스무 살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많은 […]

“길가에 떨어진 못이라도 집에 가져가 박지 마세요”

신앙체험기 특집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는 법 ‘자유율법’ 천부교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자유율법입니다. 자유율법은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는 하나님의 법을 말합니다. 천부교인들은 이 법을 준수함으로써 의로움과 선함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천부교가 행함의 종교로도 불리는 이유입니다. 이번 신앙체험기 특집은 자유율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죄를 지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1945년 해방 후 저희 가족은 전 […]

“은혜를 통한 깨달음, 변화를 이끌고 새 삶을 허락하시니”

이순덕 권사(1)/기장신앙촌

저는 1939년 경남 양산군 물금읍 서부리에서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돌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故 윤성조 권사) 슬하에서 자랐는데, 어머니는 목화 농사를 하며 집안을 보살피느라 힘겨우셨을 텐데도 그런 내색 없이 저희들을 사랑으로 대해주셨고 막내였던 저는 특히 아껴주셨습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라는 제가 안쓰러우셨는지 늘 곁에 두셨고 이웃의 전도로 장로교회 다니신 후로는 예배마다 […]

하나님 말씀이 담긴 신문 ‘신앙신보’

신앙신보 in 신앙체험기

신앙신보는 하나님 말씀과 더불어 천부교회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앙신보를 읽고 천부교에 관심을 갖게 되거나, 하나님 말씀과 은혜를 새롭게 깨닫게 된 분들이 있습니다. 1961년,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박양희라는 친구가 쉬는 시간마다 신문을 열심히 보기에 무슨 신문인지 궁금해서 보여 달라 했습니다. 친구는 전도관에서 나오는 신앙신보라며 박태선 장로님의 설교 말씀이 실려 있다 했습니다. 신문을 받아 들고 말씀이 […]

삶의 의미를 찾게 해준 ‘신앙촌 소비조합’

신앙체험기 특집

1950년대 6‧25 전쟁이 끝나고 피폐한 상황이었던 그 시절, 신앙촌 소비조합은 신앙촌 기업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며 경제 자립은 물론 올바른 신념을 가진 신앙인의 자세로 고객들에게 신용을 쌓아 왔습니다. 65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신앙촌 소비조합은 그 오랜 역사만큼 다양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중 일하는 기쁨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된 신앙촌 소비조합의 이야기들을 모아 신앙체험기 특집으로 엮었습니다. […]

“은혜를 주시는 감람나무가 하나님이시구나!”

박개동 권사/기장신앙촌

1940년 강원도 삼척시 하정면에서 태어난 저는 스무 살에 결혼하여 3남 4녀를 두었습니다. 결혼 후 독립해 가정을 꾸려 살아간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광산촌에서 일하는 남편은 몸이 자주 아팠고, 저는 농사를 지어 아이들을 키웠지만 살림살이는 늘 빠듯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매번 턱걸이 넘듯 겨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가끔 장로교회 […]

구원을 몰랐던 성경의 인물들과 구원을 가로막은 예수의 정체를 밝히시다

신앙체험기 특집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이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가 구원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존재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한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성경의 98%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을 밝혀 주셨습니다. 가르치시고 깨우치시며 진리의 길을 눈앞에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번 테마로 보는 신앙체험기는 그 놀라우신 말씀을 깨닫게 되는 순간의 기록들을 모아 엮었습니다. 예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