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하나님의 손길과 생명물의 권능에 감사드려

하나님의 손길과 생명물의 권능에 감사드려

1939년 11월생인 저는 전북 임실군 오수면에서 자라며 장로교회를 다니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특별히 신앙심이 깊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1957년 6월 무렵이었습니다.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친구가 고향에 내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문득 제게 “천국이 있다고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확신이 없다고 답하자, 친구는 자신이 전주전도관에 다니며 직접 목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전도관 장례예배에 참석해 밤을 지새우며 지켜보았는데, 돌아가신 분의 모습이 환하게 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박태선 장로님께서 한 달에 한 번 전주전도관에 오셔서 생명물을 축복해 주시는데, 그 물에는 많은 이적이 나타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또 전도관에 가면 그 생명물을 직접 받아올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제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사람의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환하고 평온할 수 있다면, 나도 한번 그 신앙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주까지의 거리가 멀어 당장 찾아갈 수는 없었지만, 그때부터 전도관과 연락이 닿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직장 때문에 남원에 가게 된 또 다른 친구가 주일에 남원전도관을 찾았다가 전도사님께 제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습니다. 전도관에 가보고 싶어 하는 친구가 오수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전도사님은 그길로 친구와 함께 바로 저희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당시에 그 전도사님은 남원 지역에서 개척 전도를 하고 계셨는데, 오수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발걸음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은 자신도 과거에 기성교회 목사였으나, 박 장로님께 은혜를 받고 전도관 전도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생명물은 시간이 지나도 썩지 않으며, 돌아가신 분이 생명물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습도 직접 보았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을수록 과연 어떤 분이시기에 그런 권능을 베푸실까 하는 생각이 들며, 꼭 한번 뵙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박 장로님께서 전주전도관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명물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호리병을 준비해 전주로 향했습니다. 당시 태평동의 한 공장 건물을 임시 예배처로 사용하던 전주전도관에는 이미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군산 집회를 마치시고 다음 날 새벽 단에 서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사람들 틈에 앉아 철야를 했습니다. 마침내 새벽이 되어 박 장로님께서 예배를 시작하시자, 예배실 안은 안개가 낀 듯 자욱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많아 생긴 현상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청년회장이 “오늘 은혜가 많이 내렸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당시에는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안개 같은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였다는 사실은 훗날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박 장로님께서는 안내 봉사를 맡은 학생들에게 안수를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안내를 하지는 않았지만, 염치 불고하고 안수를 받기 위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받기 전부터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고, 죄를 뉘우치는 회개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습니다. 그 순간 박 장로님이 보통 분이 아니시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안수를 해주시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격려하셨고, 그 틈에서 제 차례가 되어 저도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를 마치신 뒤에는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그곳에는 큰 항아리 여러 개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 광경이 신기해 어떻게 하시는지 처음부터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성신께서 함께하시고 성신의 불담으로 지켜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며 물을 향해 축복하셨습니다. 축복이 끝나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생명물을 받기 시작했고, 저도 미리 준비해 간 호리병에 생명물을 받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이후 제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박 장로님께서 전주에 오시는 날이면 어김없이 전주전도관을 찾았고, 평소에는 집에서 약 10리 떨어진 오수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밤길을 걸어 제단으로 가는 길에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다 보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진한 향취 은혜를 자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1958년 초에는 신앙인들이 모여 사는 신앙촌을 건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2차 건설대에 지원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신앙촌에서 약 20리 떨어진 곳에서 벽돌 생산에 필요한 백토 캐는 작업을 맡았는데, 힘들다는 생각보다 신앙촌 건설에 힘을 보탠다는 기쁨이 더 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건설 현장을 자주 찾아오셔서 여러 차례 안찰도 해주셨습니다. 한번은 기와공장에서 작업하던 중 안찰을 해주시러 오셨는데, 저희가 서둘러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다는 죄송함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하루는 안찰을 받으러 갔는데, 이미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준비하고 움직였는데, 하나님께서 제게 “게으르면 내 가지가 아니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신앙생활은 물론 일상에서도 늘 부지런해야 한다는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또 배를 안찰해 주실 때는 하나님의 손이 닿는 순간 몸속에서 무언가가 위로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스르르 가라앉으면 안찰을 마치셨는데, 신기하게도 아픔은 전혀 없었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서 죄를 씻어주신다는 말씀의 뜻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고, 이후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더욱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15m 거리에서 축복하시자 하나님 손끝에서 나온 물줄기가 물통 속으로 들어가 또 한 번은 식당에서 일하던 때였습니다. 오후에 공장을 둘러보시며 축복해 주실 때, 저도 생명물 축복을 받으려고 큰 통에 물을 받아 하나님 쪽으로 가져가던 중이었습니다. 하나님과는 15m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축복해 주시는 순간 손끝에서 뻗어 나온 굵은 물줄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제가 들고 있던 물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저는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크신지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촌에서 생활하다가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치고, 1963년 제대 후 개척 전도사 발령을 받아 전주 마령제단에서 시무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나오던 아주머니가 아픈 딸을 데리고 제단을 찾아왔습니다. 예배를 마친 뒤 아이의 몸에 생명물을 발라 주었더니, 아파서 울며 보채던 아이가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평온하게 잠든 모습을 보고 아주머니도 안심하며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틀 뒤 아이가 깨끗이 나았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무렵 저는 전도된 청년들과 함께 제단 건축에 한창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종각을 쌓는 작업을 하다가 그만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몸을 부딪히며 떨어졌는데 복부 쪽이 심하게 아팠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맹장에 문제가 있다고 했지만 별다른 치료 없이 나왔고, 5~6일이 지난 뒤 안찰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시는 덕소신앙촌으로 향했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하나님 집무실까지 올라가니 하나님께서 문 앞에 나와 계셨습니다. 안찰을 받으러 들어서자 하나님께서는 저를 보시며 웃으시더니 “급성이면 이미 갔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고는 안찰을 해주시며 이제 괜찮다고 다독여 주셨습니다. 아파서 절룩거리며 들어갔던 저는 안찰을 받고 언제 아팠냐는 듯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장례 때 생명물로 굳은 턱이 풀리고 팔다리가 부드럽게 펴져 1965년 오수전도관에 다니시던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덕소신앙촌 축복일 예배에 참석한 뒤 마령제단으로 돌아가던 길에 집에 들렀는데, 어머니께서 위독하신 상태였고 결국 그날 밤 숨을 거두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의 몸은 이미 차갑게 굳어 있었고 턱이 단단히 물려 있었습니다. 저는 축복일에 받아온 생명물을 수저에 떠서 입에 넣어드리려 했으나 대부분 얼굴로 흘러내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흘러내린 생명물로 얼굴을 닦아드리자, 놀랍게도 굳게 다물렸던 턱이 풀리며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습니다. 그제야 저는 생명물을 넉넉히 떠 넣어드리고 얼굴과 손마디, 발끝까지 온몸을 정성껏 닦아드릴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굳어 있던 팔다리가 부드럽게 펴졌고, 어머니의 얼굴은 생전보다 더 환하게 피어났습니다. 얼마 후 찾아온 동료 교역자들도 어머니의 모습이 곱게 잘 피었다고 했습니다. 평소 전도관에 냉소적이던 아버지조차 아름답다고 인정하셨고, 문상을 온 동네 사람들도 신기해하며 놀라워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저는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처음 전도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친구가 말해 주었던 장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돌아가신 분의 모습이 아름답게 핀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을 찾아갔던 제가, 이제는 어머니의 장례를 통해 그 권능을 직접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형편상 교역을 계속할 수는 없었지만, 오수전도관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2009년 전주제단이 새롭게 건축될 때에는 주변 환경을 정비하는 일에 힘을 보탰으며, 경주 천부교추모공원 조성 현장에서도 5개월간 기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 기장신앙촌 축복일에 하나님께 축복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은혜 부어줄까?”라고 물으시며, “죄짓지 말고 그 세계에 같이 가자”라고 다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세월이 흘러도 제 마음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오셔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에 지금도 가슴이 아려옵니다. 앞으로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신앙체험기
“하나님을 뵙고 은혜를 체험한 것은 인생 최고의 복”

“하나님을 뵙고 은혜를 체험한 것은 인생 최고의 복”

1936년생인 제가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세 되던 1955년이었습니다. 전쟁 직후라 공장조차 드물던 시절, 영등포 경성방직에서 기술을 배우던 중 같이 일하던 친구가 다급히 저를 불렀습니다. 지금 서울 남산공원에서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부흥집회를 하시는데,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 지금 가지 않으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결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꼭 가야겠다는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막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터라 열흘이나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으나, 다행히 흔쾌히 허락을 받고 나니 가슴이 더욱 부풀어 올랐습니다. 전차표 한 장 값도 빠듯한 형편이었지만, 그 설렘을 안고 저는 건빵 한 봉지를 손에 든 채 전차에 올랐습니다. 남산공원에 도착하니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집회장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저도 사람들 틈에 앉아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얼마 후 박 장로님이 등단하셔서 예배를 인도하셨는데, 찬송을 부르는 내내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저는 하루이틀이 지나도 집에 갈 생각조차 들지 않아 준비해 간 건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집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집회장에는 내무장관을 지낸 윤치영 씨와 국방부 장관 부인인 홍은혜 여사 등 당대 유명 인사들도 참석해 자신이 받은 은혜를 증거했습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은혜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함께 찬송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집회가 끝난 뒤에는 영등포까지 먼 길을 걸어 돌아오면서도 전혀 힘든 줄 몰랐고,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웠습니다. 남산 집회가 끝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여의도 백사장 근처에서 영등포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말을 못 하던 아가씨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그 쾌락 내 쾌락일세”라는 찬송을 부르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병자들은 일어나라”라고 외치시자, 그 아가씨가 앞으로 나와 서툴지만 분명한 곡조로 찬송을 불렀고, 그 모습을 보며 저 또한 가슴 뭉클했습니다. 훗날 그 장면이 담긴 사진을 보았을 때, 당시 은혜의 현장이 영화 필름처럼 눈앞에 다시 펼쳐지는 듯했습니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7월 초, 한강에서 다시 큰 집회가 열렸습니다. 넓은 백사장의 천막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고, 자리를 놓칠까 봐 며칠씩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면 단을 중심으로 이슬 같은 성신이 뽀얗게 내렸고, 말씀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 때면 세상 어디에서도 맡아보지 못한 향취의 은혜가 진동했습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저는 더욱 힘껏 찬송을 불렀습니다. 집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쉼 없이 이어졌습니다. 밤이면 은혜받은 사람들이 단 앞으로 나와 저마다 체험을 생생하게 증거했고, 아침이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신 후 참석한 사람 모두에게 일일이 안수를 해주셨습니다. 겹겹이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오가시며, 한 명 한 명에게 빠짐없이 축복해 주시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당시 저는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듯 무척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기운이 없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몸이 앞뒤로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셨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시다가 다시 돌아오셔서 제 머리 위에 한참 동안 손을 얹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던 모습과 달리 눈에 띄게 기력을 회복했고, 지금까지 그 은혜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집회에서 말을 못 하던 아가씨가 찬송을 부르고, 생명물로 상처가 아무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 권능을 확신해 무더기 심방 때 안수 받는 순간 기침이 즉시 멈추고, 쇠약했던 몸이 회복되는 은혜를 체험해 집회를 다녀온 뒤 저는 더 이상 성결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처음 집회 소식을 전해주었던 친구는 교회 목사들이 박 장로님을 비방한다며 저에게도 발길을 끊으라고 종용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직접 보고 체험한 저로서는 그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날로 기성교회와의 인연을 끊었습니다. 사실 저는 교회에 다니기 전부터 ‘2000년 전에 죽은 예수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막연한 구원의 길을 찾고 싶어 교회에 나간 것인데 마음 한구석은 늘 답답했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의 형상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에 하나님께서 “예수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이 풀리며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은혜는 예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지난 집회 현장에서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느꼈기 때문에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서울에서 하나님 집회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녔으나, 한동안 소식이 끊겼습니다. 어디서 집회가 열리는지 알 길이 없었던 저는 답답한 마음에 수소문하며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원효로 구제단에서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원효로 구제단을 찾아가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교 말씀이 유난히 귀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세계를 가고자 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고,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저는 조용히 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따뜻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셨는데, 그 인자한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제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서울 시내에서 무더기 심방을 자주 다니셨습니다. 한 집에 10~20명씩 모여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께서 직접 방문하셔서 안수와 안찰을 해주셨는데, 이를 ‘무더기 심방’이라 불렀습니다. 안수 후에는 귀한 말씀도 들려주셨고, 어떤 사람들은 정성껏 음식을 대접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음 집으로 이동하시면 저희도 그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어느 무더기 심방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평소 겨울만 되면 지독한 감기에 걸려 밤새 기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옆 사람에게 미안할 정도로 기침이 심해 전날 밤에도 한숨도 못 자고 심방에 참석했다가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받자마자 거짓말처럼 그 즉시 기침이 멈췄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런 기침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옆집 아이의 다리를 물어 소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라 급한 마음에 생명물을 찾아 상처 부위에 발라주었습니다. 얼마 후 아이어머니가 돌아와 상처를 확인해 보니, 조금 전까지 피가 맺혔던 자리가 어느새 아물어 흔적도 없이 깨끗해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 역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한 어린아이가 숨을 거두었을 때 생명물로 씻기자, 뽀얗게 피어 잠든 듯한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생명물에 담긴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1957년, 저는 이만제단이 세워지면서 그곳으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한강 변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 자리한 이만제단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일요일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언덕을 오르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도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이 앞서가시면 기쁜 마음으로 뒤에서 등을 밀어드리며 그 길을 오르곤 했습니다. 이만제단에서 열린 장로장립식과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전도관 체육대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며,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냥 기쁘고 좋았던 기억들이 여전히 가슴 속에 소중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전하기 위해 의정부, 속초 등 먼 지역까지 찾아다녔습니다. 한번은 포천 송우리에서 전도하던 중, 기성교회 청년회장이 운영하던 타이어 수리점에서 그와 며칠에 걸쳐 성경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과 하나님에 대해 질문했지만, 그는 선뜻 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화가 난 목사가 그를 서울로 보내 6개월간 특별 교육까지 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청년은 두 번째 토론에서도 역시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결국 며칠 뒤 그 목사가 저를 찾아와 “우리 청년회장을 6개월이나 따로 교육해 보냈는데도 답을 하지 못하니,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며 사과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후로도 경찰이나 군인들이 전도를 막으려다 오히려 전도되는 일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전도의 길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수많은 기사이적을 직접 목격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던 일은 제 인생의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그 모든 역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권능이었음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죄를 벗어 그 세계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하시며 의인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귀한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오늘도 죄에서 벗어나 맑게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그 세계에 합당한 자격자가 되어 하나님 뵈옵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생명물의 권능을 체험하며 진정한 구원의 길을 찾아”

<신앙체험기 523회> 전농교회 인부옥 권사

저는 부모님 두 분 모두 감리교 교인인 가정에서 태어나, 1964년 결혼 전까지 왕십리 감리교회를 다녔습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던 제가 전도관 교인이셨던 시어머니를 만나게 된 것은 신앙의 토대가 바뀌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결혼 후 한 달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져 나중에는 […]

“은혜로 함께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

<신앙체험기 521회> 성남교회 장원애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저는 새벽 제단을 쌓기 위해 제단 근처에 사시는 문삼섭 권사님 댁에 머물며 살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권사님의 어린 딸을 등에 업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예배에 나갔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구역장 직분을 맡아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소사신앙촌 1차 건설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제가 지원하겠다고 나서자, 문 권사님께서는 젊은 아가씨가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만류하셨습니다. […]

“향취에 몸이 시원해지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해”

<신앙체험기 521회> 성남교회 장원애 권사 1편

꿈에서 뵌 분을 광주공원 집회에서 만나 안수 받는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은혜를 체험해 지산 전도관에서 집회 30분 전 향취 맡고 앉아 있는지 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워 은혜 체험 거듭되며 마음속에 분명한 확신 자리 잡아 저는 1937년 전남 순천시 주암면 광천리에서 3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제 어린 시절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이 맞물린 격변의 시대라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혹시 모를 위급 […]

“기쁨으로 끝까지 구원의 길 가길 소망해”

<신앙체험기 520회> 기장신앙촌 이영선 권사

저는 1952년 부산 동대신동에서 2남 6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메리야스와 여성복, 군복 등을 만드는 의류 공장 세 곳을 운영하며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직접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머니(故 김용달 권사)로부터 여러 차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제가 3~4살 무렵, 어머니는 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할 만큼 […]

“눈물로 기도드릴 때 맡아지던 향취 은혜,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신앙체험기 519회> 충주교회 김순득 권사

저는 강원도 원주시 귀례면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이사하시면서 세 살 무렵부터 충청북도 충주에서 자랐습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 스물세 살에 첫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가 백일이 되기도 전에 남편이 군대에 갔습니다.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홀로 남겨진 저는 먹고 살기 위해 아이를 업고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해야했습니다. 시장에서 사과도 […]

은혜 안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일할 때 가장 큰 기쁨 느껴

<신앙체험기 518회> 서대구교회 구수웅 권사편

저는 1942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우(牛)시장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마을 장터에서 나물을 팔며 살림을 꾸려가셨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52년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면서 저희 남매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살길이 막막해진 저와 형제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

“은혜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려”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당시 저는 전도관에 있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해서 예배시간이 되기도 전에 예배실에 가 있었습니다. 예배실에 가면 저처럼 먼저 온 사람들끼리 모여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는 예배실 안에 이슬비 또는 소낙비처럼 이슬성신이 내렸습니다. 분명 비처럼 보이는데 바닥은 물론 옷도 전혀 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슬성신이 내리고 얼마 뒤에는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

이슬 같은 은혜를 받으니 그 은혜를 계속 간구하게 돼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1편

예배실에서 기도드리던 중 백합꽃 향기 같으면서도 산뜻하고 시원한 향 맡아져 향취 은혜임을 깨닫게 돼 노구산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할 정도로 이슬 같은 은혜가 집회장에 자욱이 퍼져 반사 활동 당시 예배실에 들어갔는데 박하사탕처럼 시원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고 가슴 속이 시원해지며 처음 맛 보는 기쁨이 솟아나 저는 1941년생으로 경기도 오산에서 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살던 집 바로 옆에는 앞마당이 유난히 넓은 […]

큰 위기가 올 때마다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뉴욕교회 안음전 승사

제가 처음 하나님을 따라 나오게 된 동기는 잊을 수 없는 감사한 기억 때문입니다. 1950년 당시 저희 가족은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살고 있었고 남편은 트럭 2대에 직원 4명을 두고 자그마한 운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6․25 전쟁이 발발했고 저희 가족은 일가친척이 있는 양평에 얼마 동안 피신해 있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살아보려던 중에, 또다시 인민군이 […]

Grateful to God Who Has Protected Me in Every Great Crisis

Ahn Eum-jeon, Seungsa

The reason I first came to follow God was because of an unforgettable and precious experience of gratitude. In 1950, my family lived in Palpan-dong, Jongno-gu, Seoul. My husband owned a small transport business with two trucks and four employees. That year, the Korean War broke out, and our family fled to Yangpyong where relativ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