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하나님을 뵙고 은혜를 체험한 것은 인생 최고의 복”

“하나님을 뵙고 은혜를 체험한 것은 인생 최고의 복”

1936년생인 제가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세 되던 1955년이었습니다. 전쟁 직후라 공장조차 드물던 시절, 영등포 경성방직에서 기술을 배우던 중 같이 일하던 친구가 다급히 저를 불렀습니다. 지금 서울 남산공원에서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부흥집회를 하시는데,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 지금 가지 않으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결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꼭 가야겠다는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막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터라 열흘이나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으나, 다행히 흔쾌히 허락을 받고 나니 가슴이 더욱 부풀어 올랐습니다. 전차표 한 장 값도 빠듯한 형편이었지만, 그 설렘을 안고 저는 건빵 한 봉지를 손에 든 채 전차에 올랐습니다. 남산공원에 도착하니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집회장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저도 사람들 틈에 앉아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얼마 후 박 장로님이 등단하셔서 예배를 인도하셨는데, 찬송을 부르는 내내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저는 하루이틀이 지나도 집에 갈 생각조차 들지 않아 준비해 간 건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집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집회장에는 내무장관을 지낸 윤치영 씨와 국방부 장관 부인인 홍은혜 여사 등 당대 유명 인사들도 참석해 자신이 받은 은혜를 증거했습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은혜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함께 찬송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집회가 끝난 뒤에는 영등포까지 먼 길을 걸어 돌아오면서도 전혀 힘든 줄 몰랐고,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웠습니다. 남산 집회가 끝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여의도 백사장 근처에서 영등포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말을 못 하던 아가씨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그 쾌락 내 쾌락일세”라는 찬송을 부르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병자들은 일어나라”라고 외치시자, 그 아가씨가 앞으로 나와 서툴지만 분명한 곡조로 찬송을 불렀고, 그 모습을 보며 저 또한 가슴 뭉클했습니다. 훗날 그 장면이 담긴 사진을 보았을 때, 당시 은혜의 현장이 영화 필름처럼 눈앞에 다시 펼쳐지는 듯했습니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7월 초, 한강에서 다시 큰 집회가 열렸습니다. 넓은 백사장의 천막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고, 자리를 놓칠까 봐 며칠씩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면 단을 중심으로 이슬 같은 성신이 뽀얗게 내렸고, 말씀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 때면 세상 어디에서도 맡아보지 못한 향취의 은혜가 진동했습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저는 더욱 힘껏 찬송을 불렀습니다. 집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쉼 없이 이어졌습니다. 밤이면 은혜받은 사람들이 단 앞으로 나와 저마다 체험을 생생하게 증거했고, 아침이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신 후 참석한 사람 모두에게 일일이 안수를 해주셨습니다. 겹겹이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오가시며, 한 명 한 명에게 빠짐없이 축복해 주시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당시 저는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듯 무척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기운이 없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몸이 앞뒤로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셨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시다가 다시 돌아오셔서 제 머리 위에 한참 동안 손을 얹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던 모습과 달리 눈에 띄게 기력을 회복했고, 지금까지 그 은혜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집회에서 말을 못 하던 아가씨가 찬송을 부르고, 생명물로 상처가 아무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 권능을 확신해 무더기 심방 때 안수 받는 순간 기침이 즉시 멈추고, 쇠약했던 몸이 회복되는 은혜를 체험해 집회를 다녀온 뒤 저는 더 이상 성결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처음 집회 소식을 전해주었던 친구는 교회 목사들이 박 장로님을 비방한다며 저에게도 발길을 끊으라고 종용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직접 보고 체험한 저로서는 그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날로 기성교회와의 인연을 끊었습니다. 사실 저는 교회에 다니기 전부터 ‘2000년 전에 죽은 예수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막연한 구원의 길을 찾고 싶어 교회에 나간 것인데 마음 한구석은 늘 답답했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의 형상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에 하나님께서 “예수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이 풀리며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은혜는 예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지난 집회 현장에서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느꼈기 때문에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서울에서 하나님 집회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녔으나, 한동안 소식이 끊겼습니다. 어디서 집회가 열리는지 알 길이 없었던 저는 답답한 마음에 수소문하며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원효로 구제단에서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원효로 구제단을 찾아가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교 말씀이 유난히 귀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세계를 가고자 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고,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저는 조용히 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따뜻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셨는데, 그 인자한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제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서울 시내에서 무더기 심방을 자주 다니셨습니다. 한 집에 10~20명씩 모여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께서 직접 방문하셔서 안수와 안찰을 해주셨는데, 이를 ‘무더기 심방’이라 불렀습니다. 안수 후에는 귀한 말씀도 들려주셨고, 어떤 사람들은 정성껏 음식을 대접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음 집으로 이동하시면 저희도 그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어느 무더기 심방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평소 겨울만 되면 지독한 감기에 걸려 밤새 기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옆 사람에게 미안할 정도로 기침이 심해 전날 밤에도 한숨도 못 자고 심방에 참석했다가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받자마자 거짓말처럼 그 즉시 기침이 멈췄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런 기침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옆집 아이의 다리를 물어 소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라 급한 마음에 생명물을 찾아 상처 부위에 발라주었습니다. 얼마 후 아이어머니가 돌아와 상처를 확인해 보니, 조금 전까지 피가 맺혔던 자리가 어느새 아물어 흔적도 없이 깨끗해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 역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한 어린아이가 숨을 거두었을 때 생명물로 씻기자, 뽀얗게 피어 잠든 듯한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생명물에 담긴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1957년, 저는 이만제단이 세워지면서 그곳으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한강 변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 자리한 이만제단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일요일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언덕을 오르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도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이 앞서가시면 기쁜 마음으로 뒤에서 등을 밀어드리며 그 길을 오르곤 했습니다. 이만제단에서 열린 장로장립식과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전도관 체육대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며,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냥 기쁘고 좋았던 기억들이 여전히 가슴 속에 소중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전하기 위해 의정부, 속초 등 먼 지역까지 찾아다녔습니다. 한번은 포천 송우리에서 전도하던 중, 기성교회 청년회장이 운영하던 타이어 수리점에서 그와 며칠에 걸쳐 성경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과 하나님에 대해 질문했지만, 그는 선뜻 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화가 난 목사가 그를 서울로 보내 6개월간 특별 교육까지 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청년은 두 번째 토론에서도 역시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결국 며칠 뒤 그 목사가 저를 찾아와 “우리 청년회장을 6개월이나 따로 교육해 보냈는데도 답을 하지 못하니,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며 사과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후로도 경찰이나 군인들이 전도를 막으려다 오히려 전도되는 일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전도의 길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수많은 기사이적을 직접 목격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던 일은 제 인생의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그 모든 역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권능이었음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죄를 벗어 그 세계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하시며 의인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귀한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오늘도 죄에서 벗어나 맑게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그 세계에 합당한 자격자가 되어 하나님 뵈옵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신앙체험기
“은혜로 함께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

“은혜로 함께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

(지난호에 이어) 저는 새벽 제단을 쌓기 위해 제단 근처에 사시는 문삼섭 권사님 댁에 머물며 살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권사님의 어린 딸을 등에 업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예배에 나갔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구역장 직분을 맡아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소사신앙촌 1차 건설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제가 지원하겠다고 나서자, 문 권사님께서는 젊은 아가씨가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만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집회에서 큰 은혜를 체험한 저는 하나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굳게 다짐한 터라 꼭 가고 싶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소사신앙촌에 도착해 보니, 노구산에 오만제단이 세워지기 전 예배를 드리던 구제단은 이미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주택 A·B동은 일부만 완성된 채 한창 건물을 올리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저는 순천, 구례, 광양에서 올라온 언니들을 따라다니며 함께 일했는데, 그 시절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특히 아침저녁으로 안찰을 해 주시면 그 자리에 함께한 저희 모두에게서 향취가 진동했고, 안찰을 받고 돌아설 때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라 마치 천국에서 사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물을 마시자 향취 덩어리가 목으로 넘어가고 기쁨 넘쳐 어느 날은 팀별로 벽돌 찍기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단합이 잘 되는 서울과 인천팀은 앞서 나갔지만, 저희 광주팀 12명은 자꾸 뒤처져 속이 상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희 쪽으로 다가오시더니 축복해 주시겠다 하시며 저에게 물을 떠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변에는 물을 뜰 만한 곳이 없어 저는 건설대를 지휘하시던 장세호 집사님의 오두막까지 급히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적당한 그릇이 눈에 띄지 않아, 다급한 마음에 넓적하고 얕은 옴박지에 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돌아오는데, 혹시나 하나님께서 가버리실까 봐 마음이 몹시 조급했습니다. 한시바삐 가야 한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뛰어오다 보니 물은 자꾸 쏟아지고 옷은 어느새 흠뻑 젖고 말았습니다. 겨우 남은 물을 들고 도착하자 하나님께서는 “오다가 물도 쏟고 옷도 다 젖었구나” 하시며 몇 걸음 다가와 맞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물을 향해 축복해 주시자 진한 향취가 맡아졌고, 한 모금 마실 때는 향취가 덩어리째 목으로 넘어가는 듯했습니다. 저희 팀원 모두가 그 물을 함께 나누어 마시며 기뻐하던 그날의 모습은 지금도 제 마음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건설대에서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체구가 작은 제가 지게를 지고 일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보셨는지, 앞으로는 지게를 지는 일 대신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든 현장을 떠나 다른 일을 하게 되어 아쉬웠지만 이후 수예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어 틈틈이 현장 일을 거들며 신앙촌에서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무렵 저는 하나님께서 안찰하시는 곳을 부지런히 쫓아다녔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의 안찰이 끝난 경우가 많았지만, 은혜를 받고 싶은 마음에 늦게라도 찾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웃으시며 안찰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철없던 저를 따뜻하게 받아 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얼마 후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받은 은혜를 가슴에 간직한 채 더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서울로 나왔습니다. 마포 이만제단과 을구 지관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이어갔지만, 1967년 결혼과 함께 정읍으로 내려가면서 한동안 제단과 발길이 끊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고, 동생의 권유로 성남 제단에 나가면서 소비조합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소비조합원으로 안찰을 받으러 갈 때면, 하나님께서는 늘 “죄짓지 마”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오면 주변에서 제 목소리와 행동이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말할 만큼 제 자신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정성을 다하게 되고, 제가 받은 은혜를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주일에 한 번 노량진교회에 오시는 날이면, 저는 성남의 초등학교 교사 20명과 함께 택시 5대에 나눠 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다녔습니다. 저희가 도착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척 반가워하시며 예배실 2층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때 단에서 “이슬성신이 내리니 여기 온 사람들은 은혜를 받습니다. 아이들도 교회에 데려오면 은혜를 받으니 모두 데리고 오세요”라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1980년,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 제 마음에는 마치 출발 신호를 받은 운동선수처럼 힘껏 달려야겠다는 다짐이 일었습니다. 당시 기성교회의 반대가 거셌지만, 저는 제가 직접 은혜를 받고 겪은 일들이 분명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축복해 주시면 그 물이 썩지 않는 생명물이 되고, 그 물로 고인의 몸을 닦아 드리면 입술이 붉어지고 얼굴이 환하게 피는 모습을 여러 차례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제부(弟夫)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일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소사신앙촌에서 오신 분들이 고인을 생명물로 정성껏 닦아 드리자, 가족들이 모두 놀랄 만큼 생전보다 더 평온하고 환한 모습으로 피었습니다. 이후 덕소신앙촌에서 19년 동안 소비조합 활동을 하던 중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물건을 팔고 청량리에서 막차를 탔다가 깜빡 잠이 들어 덕소를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놀라 급히 내렸지만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산속이었습니다. 적막 속에 개구리 울음소리만 들릴 뿐,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아 순간 겁이 났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안의 신사분이 저를 보고 “귀신이요, 사람이요?” 하고 외쳤습니다. 제가 사람이라고 소리쳤지만 차는 곧 달아나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풀밭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막막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양수리 쪽에서 자동차 불빛이 다시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아까 그 차였습니다. 이번에는 길 한가운데로 나가 차를 막아섰습니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저는 차분히 사정을 설명하며 태워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잠시 망설이다가 저를 차에 태워 주셨습니다. 저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운 마음에 속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덕소 근처에 이르렀을 무렵, 그분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오늘 일은 보통 일이 아니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그날 새 차를 뽑아 가족과 피서를 왔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키가 크고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분이 나타나 “지금 당장 양수리 쪽으로 가라”고 재촉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말렸지만 놀란 마음에 차를 몰고 나왔다가 깜깜한 길에서 겁이 나 돌아갔는데, 차 안에 앉아 있자 같은 분이 또 나타나 “누군가를 만나거든 차에 태워 덕소 정문에 내려주고 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집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오십부장님께 밤사이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이후 전해 들은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갔어. 내가 거기 찾아갔어. 들판에서 짐을 잔뜩 짊어지고 떨고 있길래 사람을 보냈어. 그런데 안 가길래 두 번이나 가서 보냈어.” 그 말씀을 전해 듣는 순간, 저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칠흑 같은 들판에서 홀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다는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하나님께서 낙원에 가신 뒤에도 제 곁에서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체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신앙촌 이불 네 채를 버스에 싣고 노량진에서 성남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한참 오던 중, 이전에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진한 향취가 맡아졌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같이 해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치 ‘늘 곁에 있으니 마음 변치 말고 끝까지 따라와’ 하며 다독여 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진한 향취는 한동안 이어지다가 집 근처 사거리에 이르러서야 사라졌습니다. 이렇듯 소비조합 활동을 하는 동안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시니,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일요일이면 신앙촌 고객분들을 덕소교회 예배에 초대했습니다. 그 가운데 꾸준히 예배에 나오는 분들도 생겼는데, 현재 덕소교회 소비조합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성순 집사님도 그때 인연이 닿아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도되어 은혜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모든 일이 감사하게 느껴졌고, 그 벅찬 기쁨 속에 ‘하나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라는 찬송이 절로 입가에 맴돌곤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몸이 좋지 않아 한동안 축복일에 참석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다시 신앙촌을 찾게 되었는데, 후문 다리를 건너는 순간 코끝을 스치는 진한 향취에 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하나님, 저 왔습니다” 하고 나직이 말씀드리자,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저를 기다려 주신 것만 같은 따스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19살 소녀 시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늘 제 곁에 계셨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밀려왔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길을 열어 주시고, 진실한 마음으로 고할 때 귀 기울여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니 다시금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지켜주시고 낙원 가신 뒤에도 향취 은혜 주시며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려 하늘 세계를 소망 삼아 살아갈 힘을 주시고, 은혜로 함께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에 저는 오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소망은 하나님을 온전히 마음에 모시고, 허락해 주신 건강을 잘 지켜 끝까지 소비조합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제 남은 생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오니, 구원의 손길로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은혜로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신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향취에 몸이 시원해지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해”

<신앙체험기 521회> 성남교회 장원애 권사 1편

꿈에서 뵌 분을 광주공원 집회에서 만나 안수 받는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은혜를 체험해 지산 전도관에서 집회 30분 전 향취 맡고 앉아 있는지 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워 은혜 체험 거듭되며 마음속에 분명한 확신 자리 잡아 저는 1937년 전남 순천시 주암면 광천리에서 3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제 어린 시절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이 맞물린 격변의 시대라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혹시 모를 위급 […]

“기쁨으로 끝까지 구원의 길 가길 소망해”

<신앙체험기 520회> 기장신앙촌 이영선 권사

저는 1952년 부산 동대신동에서 2남 6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메리야스와 여성복, 군복 등을 만드는 의류 공장 세 곳을 운영하며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직접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머니(故 김용달 권사)로부터 여러 차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제가 3~4살 무렵, 어머니는 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할 만큼 […]

“눈물로 기도드릴 때 맡아지던 향취 은혜,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신앙체험기 519회> 충주교회 김순득 권사

저는 강원도 원주시 귀례면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이사하시면서 세 살 무렵부터 충청북도 충주에서 자랐습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 스물세 살에 첫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가 백일이 되기도 전에 남편이 군대에 갔습니다.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홀로 남겨진 저는 먹고 살기 위해 아이를 업고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해야했습니다. 시장에서 사과도 […]

은혜 안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일할 때 가장 큰 기쁨 느껴

<신앙체험기 518회> 서대구교회 구수웅 권사편

저는 1942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우(牛)시장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마을 장터에서 나물을 팔며 살림을 꾸려가셨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52년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면서 저희 남매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살길이 막막해진 저와 형제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

“은혜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려”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당시 저는 전도관에 있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해서 예배시간이 되기도 전에 예배실에 가 있었습니다. 예배실에 가면 저처럼 먼저 온 사람들끼리 모여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는 예배실 안에 이슬비 또는 소낙비처럼 이슬성신이 내렸습니다. 분명 비처럼 보이는데 바닥은 물론 옷도 전혀 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슬성신이 내리고 얼마 뒤에는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

이슬 같은 은혜를 받으니 그 은혜를 계속 간구하게 돼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1편

예배실에서 기도드리던 중 백합꽃 향기 같으면서도 산뜻하고 시원한 향 맡아져 향취 은혜임을 깨닫게 돼 노구산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할 정도로 이슬 같은 은혜가 집회장에 자욱이 퍼져 반사 활동 당시 예배실에 들어갔는데 박하사탕처럼 시원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고 가슴 속이 시원해지며 처음 맛 보는 기쁨이 솟아나 저는 1941년생으로 경기도 오산에서 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살던 집 바로 옆에는 앞마당이 유난히 넓은 […]

큰 위기가 올 때마다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뉴욕교회 안음전 승사

제가 처음 하나님을 따라 나오게 된 동기는 잊을 수 없는 감사한 기억 때문입니다. 1950년 당시 저희 가족은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살고 있었고 남편은 트럭 2대에 직원 4명을 두고 자그마한 운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6․25 전쟁이 발발했고 저희 가족은 일가친척이 있는 양평에 얼마 동안 피신해 있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살아보려던 중에, 또다시 인민군이 […]

Grateful to God Who Has Protected Me in Every Great Crisis

Ahn Eum-jeon, Seungsa

The reason I first came to follow God was because of an unforgettable and precious experience of gratitude. In 1950, my family lived in Palpan-dong, Jongno-gu, Seoul. My husband owned a small transport business with two trucks and four employees. That year, the Korean War broke out, and our family fled to Yangpyong where relatives […]

“기도하고 찬송하며 간절한 마음이 될 때 은혜를 허락해 주셔”

<신앙체험기 516회> 소사제2교회 백종찬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전도관에 다닌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전도사님께서 저와 김정범 씨에게 이제 전도사로 나가야 하지 않겠냐며 교육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처자식이 마음에 걸려 고민이 되었지만, 이 귀한 은혜의 진리를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전도사 교육을 받으러 김정범 씨와 함께 돈암동 전도관에 갔습니다. 거기서 오전에는 체계 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

“전도관에서 성신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니 새로운 세상이 열려”

<신앙체험기 516회> 소사제2교회 백종찬 권사 1편

무더운 여름날 고인을 모신 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계속 관 주변으로 불어와 성신의 바람으로 고인을 지켜주셔 김천 전도관에 다니며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를 맡게 돼 그것이 향취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의 기도 드려 저는 1942년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농가의 외아들이었던 저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보리, 벼, 감자, 수박, 참외 등을 키우셨고, 풍년이 든 해에는 장터에 나가 작물을 판매하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