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허락해 주시는 귀한 은혜에 뜨거운 눈물 흘러”

“허락해 주시는 귀한 은혜에 뜨거운 눈물 흘러”

저는 1937년 중국 만주 도문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부모님은 제가 네 살 무렵 감리교 세례를 받게 하셨고, 저 역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듯 1947년 한국에 돌아와서도 집과 가까운 기성교회에 다니며 새벽기도 종까지 직접 칠 정도로 열심인 주일학생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용산 도원동교회에서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가 열린다는 포스터를 우연히 보았는데, 신앙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저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55년이었습니다. 도원동교회에 찾아가 보니 전날부터 집회에 참석해 철야 기도까지 드렸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이슬 같은 은혜를 받았네, 불같은 성신을 체험했네’ 하며 저마다 받은 은혜를 이야기하느라 들뜬 표정이었고, 그토록 은혜가 많이 내린다 하니 저도 내심 기대가 되어 박태선 장로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박 장로님이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셨습니다. 박 장로님의 찬송 소리는 힘이 넘쳤고, 설교도 어찌나 가슴에 와닿던지 과연 유명하신 분 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예배 내내 회개의 눈물을 흘린 저는 박 장로님 예배에 깊이 감화되어 그분의 집회라면 모두 참석해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이후 서울에서 열린 남산집회, 한강 모래사장 집회, 서울 제2운동장 집회 등 많은 집회에 참석하며 임영신 총장, 윤치영 전 장관 등 유명인사들의 은혜 체험담도 직접 들었고, 집회 기간 동안 병이 나아 기뻐하는 수많은 사람도 제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박 장로님이 가시는 곳마다 은혜가 내린다는 것을 알게 된 저는 자연스럽게 기성교회에 발길을 끊고 원효로 구제단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원효로 구제단은 박 장로님 댁 뒷마당에 임시로 마련한 교회였는데, 저처럼 집회 때 받은 은혜가 그리워 이곳을 수소문해 찾아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원효로 구제단에서 예배를 드리면 마음속 기쁨이 끝없이 샘솟아서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쉽게만 느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들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밖을 나서면서도 큰 소리로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하고 찬송을 부르며 웃고 즐거워했습니다. 좀 더 자주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저는 을지로였던 집에서부터 원효로까지 걸어서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예배에 가면 박 장로님 바로 앞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이른 새벽 원효로까지 걷는 발걸음이 매우 가벼웠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는 원효로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온몸이 불에 타는 듯이 뜨거워지더니 조금 지나자 점차 시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몸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가벼워져서 훌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불 성신 체험이었습니다. 또한 그날은 배도 고프지 않고, 밥을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서 참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이후 1956년 7월에는 이만제단 부지에서 천막집회가 있었습니다. 집회장은 수많은 인파가 몰려 매우 비좁았고, 그나마 겨우 잡은 자리도 잠시만 비우면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집회기간 내내 피곤하거나 배고픈 줄을 몰랐고, 불치병이 나아 기뻐하는 사람들도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집회가 끝난 뒤 이만제단 신축공사가 시작되었고, 1957년 4월 완공되어 개관집회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촬영된 사진 중 이슬성신이 폭포수 같이 내리는 모습이 생생히 담긴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 속 그날은 장로 장립식이 있었던 날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했고, 저 역시 이슬 같은 은혜를 눈으로 직접 보았던 날이기도 합니다. 당시 예배를 드리는 데 어느 순간부터 예배실이 안개가 낀 것처럼 뽀얀 것이었습니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뽀얀 것은 사라지지 않았고, 저는 그것이 이슬 같은 은혜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특전대 활동도 시작했습니다. 특전대란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특별전도대의 줄임말입니다. 전도사님을 주축으로 특전대 사람들과 함께 기성교회를 찾아가 성경 토론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전하며 참 즐겁게 전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58년에는 소사신앙촌에 사는 친구네 집에서 몇 개월간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앙촌 카스텔라는 이름이 비슷한 유사품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좋아서 공장이 바삐 움직였기 때문에 카스텔라 공장 뒤편에 위치해있던 친구네 집에서는 달콤한 카스텔라 냄새를 자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지내며 카스텔라와 캐러멜을 자주 먹을 수 있었는데. 특히 박 장로님께서 축복해주신 캐러멜 같은 경우는 몸이 아플 때 물에 넣어서 끓여 먹으면 금세 병이 낫고, 다친 곳에 캐러멜 껍질을 붙이면 빠르게 아물었기 때문에 껍질까지 소중히 보관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사회에 발을 내디디면서 신앙은 조금씩 식어갔고 결국 교회에도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 중에서도 ‘눈으로도 죄 짓지 말라’ 하셨던 말씀이 문득 문득 양심을 두드렸고, 신앙과 멀어졌다는 죄책감은 늘 마음의 짐이 되었습니다. 교회에는 나가지 않아도 전도관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었던 저는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한 날에는 원효로 구제단이나 이만제단을 찾아갔습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예전에 즐겁게 신앙생활 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언젠가 박 장로님께서 ‘앞서 걸어간 사람의 발자국을 밟으면 그 사람이 지은 죄의 정도를 알 수 있다’고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언젠가는 전도관에 다시 나가야지’하다가 결정적으로 다시 전도관을 다니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1982년도에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장모님이 공주전도관 교인이셨기 때문에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후 전도관식으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들은 전도관식으로 입관예배를 드리면 생명물의 권능으로 시신이 아름답게 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입관예배가 진행되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전도사님이 수건에 생명물을 적셔서 장인어른의 몸을 닦아 드리자 뻣뻣했던 팔다리가 부드럽게 움직이고, 어두웠던 얼굴빛이 환하게 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입술에는 혈색이 돌면서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생명물의 권능을 보고 전도관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신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또한 교회를 오래 쉬고 있던 제게 이렇게 확실한 은혜를 보여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죄송해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저는 용기 내어 1983년도 2월부터 서대문 천부교회로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께서 안수를 해주신다기에 교인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기장신앙촌에 내려갔습니다. 저는 안수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도 안 가고 죄를 많이 지었는데 막상 하나님 앞에 서려니 너무나 죄송하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줄은 점점 줄어들어 결국 제 차례가 되었고 머뭇거리며 다가가지 못하는 저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이리 가까이 오세요” 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천천히 하나님 앞에 가서 두 눈을 질끈 감으니 하나님께서 머리를 탁 쳐주셨고, 그 순간부터 눈물이 그렇게 많이 날 수 없었습니다. 많은 눈물을 흘린 저는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신앙생활에 더욱 열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교회에 가서 그동안 듣지 못했던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데 재미를 붙였습니다. 특히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들은 직후에는 놀라기도 했지만 초창기부터 보여주신 권능과 기사이적을 떠올려 보며 인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은혜의 역사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소사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저는 친척들을 전도하고 싶어서 신앙신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가톨릭교회에 다니는 친척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는 지구가 둥근 걸 몰랐답니까? 그 종교는 지구가 둥글다고 한 과학자 갈릴레이를 왜 그리 핍박했습니까? 성경은 지구가 창조된 지 6천년밖에 안됐다고 주장하는데 과학적으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까?” 제 질문에 친척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일찍부터 예수의 허풍과 성경의 거짓을 밝혀주신 하나님을 떠올리며 더 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해야겠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떠올리면 눈물이 납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기만 한 죄인에게도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젊었을 적 그 크신 사랑과 희생을 알지 못했던 저는 너무나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 귀한 진리의 길로 돌아온 만큼 이제는 하나님 바라시는 대로 자유율법을 지키며 맑고 성결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매일 마음에 성신을 모시고 살며 죄와 상관없는 의로운 자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테마로 보는 신앙체험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저는 1939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8․15 해방이 되고 월남한 저희 가족은 6․25전쟁 중에 피난 생활을 하다 서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저는 서울사대부고 2학년 때 휴학을 하고 잠시 부산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부산 영락교회를 스스로 찾아 나갔습니다. 사춘기 시절에 전쟁의 혼란과 고달픈 피난 생활을 겪었던 저는 종교를 통해 심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고 싶었습니다. 부산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길거리를 지나다가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 부흥집회” 포스터가 전신주에 붙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포스터를 보고 호기심이 생긴 저는 집회 장소인 ‘부산전도관’을 찾아갔는데,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장로교회에서 찬송을 부를 때 한 번도 손뼉을 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광경이 너무나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1시간 후면 박태선 장로님께서 도착하신다고 했으나 저는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59년에 저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과 친구인 재환이(故 오재환 권사)는 전도관에 열심히 다니는 학생으로 저와 자주 신앙 토론을 하곤 했습니다. 재환이는 기회가 될 때마다 전도관의 교리를 설명하며 전도하려고 했지만,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가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때 세광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저는 “전도관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이다”, “생수는 박 장로가 손 씻은 물, 발 씻은 물이다”라는 등의 험한 이야기를 많이 들은 데다가, 당시 신문 지상에서 매일같이 전도관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와 토론을 계속하면서 ‘동방의 일인’과 ‘감람나무’ 등의 전도관 교리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친구의 간곡한 권유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당시 저희 과는 수업과 관련해 야외 현장 학습을 자주 다녔는데, 1960년 어느 일요일에 재환이와 함께 관악산으로 지질 조사를 하러 갔습니다. 관악산에서 저는 재환이가 건네준 신앙촌 캐러멜 한 알을 입에 넣고는 산길을 올라갔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아주 향긋하고 좋은 냄새가 풍기는 것이었습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봤지만 꽃도 없고 그런 향기가 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재환이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런 향기를 전혀 맡지 못했다고 하여, 저는 ‘참 이상한 일이군. 분명히 향기가 났는데…….’ 하며 속으로 의아스러웠습니다. 야외 학습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재환이가 청암동에 있는 이만제단으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한강 변 언덕에 우뚝 세워진 이만제단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으며, 그곳에 수만 군중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모여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전도관에 대해 부정적인 소문만 들었던 저는 마음 한편으로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는 처음으로 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박태선 장로님께서 설교하실 때 주의를 기울여 들어 봤지만 그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쉽게 설명하시는 것 같았으나 저는 단지 말소리가 들릴 뿐 내용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고, 모두 말씀에 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저 혼자만 아무런 느낌도 없이 맹숭맹숭했습니다. 그렇게 이만제단 예배에 참석한 후로 재환이는 계속 전도관에 다니자며 더욱 적극적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저는 친구의 권유대로 전도관에 가야 할지, 아니면 다니던 장로교회에 계속 가야 할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세광교회에서 밤새워 기도하는 한편 목사와 장로를 찾아가 저의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그들은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한다”라며 전도관에 휩쓸리지 말고 교회나 열심히 다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덮어놓고 전도관은 나쁜 곳이니 가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더 이상 속 시원한 해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도관에 부정적 편견 있었으나, 전도관에 대해 알면 알수록 기성교회와 언론에서 말하는 전도관과 실제 전도관이 180도 다르다는 것을 느껴 그렇게 고민을 계속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안찰을 받아 보라는 재환이의 권유에 못 이겨 저는 재환이와 함께 중구 갑구 제단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제단에 들어서면서 보니 현관 양옆에 물통들이 줄지어 있는데, 거기서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강하게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향기는 전에 신앙촌 캐러멜을 먹었을 때 맡았던 향기였으며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관에 놓인 그 물은 박 장로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이었습니다. 예배실 안에 들어가서도 좋은 향기가 계속 진동하여 재환이에게 이야기했더니, 재환이는 그 향기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 향기를 두 번이나 맡았으며 친구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관에 대해 험한 소리를 많이 들어서인지 여전히 마음 한구석의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도관에서는 향수를 뿌려 놓고 사람들을 미혹한다던데 혹시 향수를 뿌렸나?’ 하며 예배실을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향수를 뿌린다 한들 그렇게 코에 쏟아붓는 것처럼 진동할 수는 없을 것 같았고, 그 좋은 향기는 여느 향수와는 분명히 차원이 다른 냄새였습니다. 그날 중구 갑구 제단에는 안찰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줄을 서서 한 사람씩 안찰을 받는 가운데 안찰하시는 모습을 살펴보니 박 장로님께서는 사람들의 눈과 배 위에 두 손을 살짝 얹었다가 놓으셨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을 때 박 장로님께서는 안찰하시면서 저의 고집이 센 것을 지적하셨으며 “성경을 지독히 파는군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곁에서 보신 것처럼 다 알고 말씀하시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안찰을 받은 후로 저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 만한 일이 생겨도 속에서 화가 전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저는 재환이와 함께 경기도 부천의 소사신앙촌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신앙촌 전경과 거리를 다니는 신앙촌 사람들의 환하고 밝은 표정,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또한 주인 없는 상점이 운영되는 것을 보면서 ‘이곳이야말로 죄를 멀리하는 생활을 하는 곳이구나’ 하고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전도관에 대해 알면 알수록 기성교회와 언론에서 말하는 전도관과 실제 전도관은 180°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손 씻은 물, 발 씻은 물’ 운운하던 생명물이 실제는 물통을 향해 “쉭! 쉭!” 하고 축복하시는 것임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악의적이고 허무맹랑한 비방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물을 실제로 축복하시는 광경을 직접 보고 나니 전도관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악의적이고 허무맹랑한 비방인지 알게 돼 저는 이만제단 주일예배에 참석하면서 차츰 하나님 설교 말씀을 이해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비롯한 성경 상의 선지자에 대해 풀어 주셨는데, 기성교회에서 들어 보지 못한 그 말씀이 참으로 새롭고 재미있었습니다. 또한 구원을 얻으려면 죄와는 상관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제 마음속에 울렸습니다. 아버님께서 제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아시고 심하게 반대하셨지만 저는 제 뜻을 굽힐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관에 대해 비방하는 말만 들으시는 아버님을 보면서 저의 지난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구원의 참 길을 깨달은 이상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 길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1963년 군에 입대한 저는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받은 후 계속 그곳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병영 생활을 하며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친구 재환이가 보내 주는 신앙신보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매주 신문에 실리는 설교 말씀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은혜 체험담을 읽을 때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예배 시간이 몹시도 그리웠습니다. 그 후 근무지가 27연대로 옮겨지면서 일요일 외출이 허용되어 인근의 금마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단 하루 예배에 참석하는 그 시간이 더할 수 없이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금마전도관은 언덕 위의 자그마한 시골 제단이었는데 하루는 예배드릴 때 향취가 강하게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단을 가득 채우는 듯한 향취 은혜 속에서 이곳 시골 제단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심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하나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니” 하는 찬송가를 그때 절실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저는 졸업 후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으며 매일 도봉제단에서 새벽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교인 분들과 같이 여러 집을 심방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집에 갔더니 환자 분이 오랫동안 거동을 못하여 등에 생긴 욕창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아파하시는 모습을 보고 몹시 안타까웠던 저희는 그때 생명물이나 축복 캐러멜이 없어서 급한 대로 축복 캐러멜 포장지를 욕창 위에 붙여 드렸습니다. 욕창 부위는 피부가 심하게 짓물러 진물이 줄줄 흐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잠시 동안 찬송을 부른 후 욕창을 다시 살펴봤더니, 진물이 어느새 꾸덕꾸덕하게 마르고 정상 피부와 다름없이 되어서 모두들 놀라워했습니다. 1981년 하나님께서는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신 후, 인간의 창조와 천체 운행 등 창조주만이 밝히실 수 있는 말씀을 세밀히 풀어 주셨습니다. 지구과학을 전공한 저에게 우주와 지구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경이로울 뿐이었습니다. 태양 열도나 화산 폭발에 관한 말씀은 학교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내용이었으며, 특히 지구 가열에 관한 말씀이 너무도 인상 깊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화부(火夫) 역할을 하며 지구 내부에서 가열하실 때 암석에 따라 열이 통과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전부 계산하여 가열하게 되며, 지열과 함께 지상의 햇빛과 바람 등 모든 조건을 알맞게 조절하셔서 식물의 뿌리가 마르지도 냉하지도 않게 되어 곡식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뵈었다는 사실은 생각하면 할수록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귀한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경외를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1981년에는 제1회 이슬성신절이 제정되었으며 이후 해마다 축하 음악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 남성 합창단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특히 1986년 이슬성신절 음악 경연 대회에서 1등을 수상했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합창단원들 모두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연습했던 것과 합창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은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습니다. 현재 저는 시온 남성 합창단으로 활동하면서 여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향취와 이슬성신, 시신을 피어나게 하는 생명물의 권능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지난 1999년 교직에서 정년 퇴임한 저는 기장신앙촌에 입주하여 신앙촌 인근 동부리에서 경비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앙촌 상공에 찬란한 빛으로 은혜가 내리는 것을 자주 목격했는데, 경비원들뿐 아니라 신앙촌에 있는 주민들과 도로에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다 함께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밤하늘에 선명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성신을 보면서 저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길을 따르며 시신이 은혜를 받아 아름답게 피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2001년에 72세를 일기로 운명하신 성영순 전직 관장님이셨습니다. 생명물로 씻긴 시신은 피부가 너무나 맑고 뽀얗게 피어나 마치 형광등이 하얗게 빛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저는 고인과 같은 숙소에서 생활하며 생전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살아 계실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운 모습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신이 피는 것을 많이 보았으나 피부가 형광등처럼 빛나는 시신은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입관예배에 참석한 유족들과 교인들 모두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크신 권능에 놀라워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50년 가까이 이 길을 따르는 동안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해 주심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여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면 큰 위로와 평안을 주시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셨습니다.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자유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면서 죄를 멀리하는 생활이 될 것을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 빛 앞에 설 수 있는 가지가 되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곡식 한 알도 하나님의 조화로 맺어져

이번 추수감사절 사진전시실에는 1958년 소사신앙촌에서 무를 수확하는 사진이 전시되었습니다. 사진 속 모습처럼 추수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느껴지는 추수와 관련된 체험기를 이번 호 특집에 모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 것은 평생의 복 추수감사절 사진전시실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니 소사신앙촌에서 즐겁게 일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제 나이 스무살 때였습니다. 원래 저는 건설대로 들어갔지만, 소사신앙촌 무밭에 무 수확량이 많다는 소식을 […]

I came to recognize that God i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and the one who operates it

Jeong Soo-gil, Seungsa

I was born in Cheolsangun, Pyeonganbuk-do in 1939 as the first son of three brothers. After the Liberation Day of August 15, 1945, our family came down to the south and spent a period of refuge during the Korean War and finally settled in Seoul. A few years later, during my second year at Seoul […]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친 것은 감람나무를 증거하기 위한 것

하나님께서 전국을 순회하시며 천막집회를 하실 때,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 집회에 참석하여 기사와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벙어리가 말을 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 초현실적인 일 뿐 아니라 전염병으로 여겨져 가까이하기를 꺼리던 나병 환자들까지도 하나님께 안찰을 받거나 축복받은 물질로 대부분 완치되었습니다. 몇십 년 불치병으로 여기며 살아오던 사람들을 안타까이 여기셨던 하나님께서 그의 손길로 병을 고쳐주시자 사람들은 병고에서 […]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신앙체험기 502회 덕소교회 홍순호 권사>

1937년생으로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던 해 전도관에 처음 가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교회나 신앙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감리교인이던 누나들이 교회에 가자고 할 때도 “하나님이 어디에 있나? 보여주면 믿겠다”며 거절하곤 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전도관을 다니게 된 것은 친구 종국이 덕분이었습니다. 종국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종국이네 집에 가던 중 우연히 […]

성전이 우뚝 세워질 때 하나님 기뻐하셔

1955년 원효로 구제단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전도관이 개관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는 소사, 덕소, 기장, 세 곳에 신앙촌이 건설되며 신앙의 구심점이 되어 1970년대까지 전도관 개관이 국내외로 확대되었습니다. 1976년 3월, 미국 L.A에 전도관 건물이 마련되었으며, 그 이후로 콜로라도 주 덴버시, 텍사스 킬린, 뉴욕, 워싱턴 등 여러 곳에서 전도관이 개관되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참 […]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선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

<신앙체험기 501회 홍제교회 선동순 권사>

(지난 호에 이어) 이후 소사신앙촌이 건설되고 노구산 집회가 열렸습니다. 1958년 6월 30일, 노구산 정상에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하나님 모습은 또렷이 보였고, 설교하시는 목소리도 아주 잘 들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집회하는 동안 매우 많은 양의 비가 내렸는데,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계속되던 시기에 내린 […]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김영환 승사

20여 년간 장로교회 교리에 빠져 천당 가기로 예정 받은 사람인 양 자부하며 살다가 1955년 11월 광주 공원 집회에 참석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은 후로 장로교 신앙의 뿌리 흔들려 집회 인도하러 오신 하나님 가까이서 ‘소위 동방의 의인, 감람나무가 정말 이 분이신가?’ 의심하자, “소위 동방의 의인이요 감람나무”라고 하시며 “아무래도 자격이 없는 것 같지요?”라고 되물으셔 그 이후 하나님을 […]

“이슬 같은 은혜로 마음의 괴로움까지 사라지게 해주시니”

<신앙체험기 501회 홍제교회 선동순 권사 1편>

1929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난 저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3남 1녀를 낳고 서울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대체로 건강하게 자랐는데, 유독 큰아들만 4살 무렵 천연두에 걸려 초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도 별 차도가 없어 가족 모두의 걱정을 샀습니다. 아들의 얼굴과 온몸에는 크고 작은 수포들이 터지고 아문 자국들이 가득했고, 눈알까지 새빨개져서 보기에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

하나님의 법, 자유율법

자유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해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신앙체험기 속에는 이슬성신의 은혜를 받고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짓지 않아야 하는 자유율법을 깨닫게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 몇 편을 간추려 실었습니다. ◇ 양심의 법을 지킬 때 하나님의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1945년 해방 후 저희 가족은 전 재산을 버리고 빈 몸으로 피난 나온 탓에 생활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먹고 […]

“기쁨의 신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쁨의 은혜를 주시는구나!”

<신앙체험기 500회> 천안교회 김순모 권사

(지난호에 이어) 기성교인들의 횡포는 끝이 없었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정확한 지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전주에서 멀지 않은 시골 마을에도 하나님께 은혜받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기에 주일예배를 마치고 그곳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 장소는 전형적인 시골 가정집이었는데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모여 이제 막 예배를 드리려던 찰나 마을에 전도관이 들어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