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하나님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며 끝까지 따라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며 끝까지 따라가고 싶습니다”

1940년생으로 인천이 고향인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이런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 어디 계신지 잘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 약주 좀 못 잡수시게 해주세요.” 온 가족의 만류에도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술을 드시던 아버지를 멈추게 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때는 진짜 하나님도 모르고, 은혜도, 구원도 모를 때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1956년, 열다섯 살의 가을이었습니다. 하루는 동갑내기인 조카가 같이 전도관에 가자고 하였습니다. 전도관이 뭐 하는 곳인지 물었지만, 조카는 가보면 안다고 길을 재촉했습니다. 조카의 성화에 못 이겨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인천의 한 짠지 공장(단무지 공장)이었습니다. 인천전도관이 지어지는 중이어서 임시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다는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서 앉아있었고, 다들 박태선 장로님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조카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박 장로님은 굉장히 유명하신 분으로 그분이 인도하시는 예배에서는 기사이적이 일어난다고 하여 그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박 장로님께서 등단하셨습니다. 장로님이라 하여 연세 지긋하신 분일 거라 짐작했는데, 예상과 달리 훨씬 젊은 분이 단에 오르셔서 의외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 장로님은 큰 소리로 예배를 인도하셨으며,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던 중 문득 박 장로님의 목소리가 바닷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예전에 맛 조개를 잡으러 바닷가에 갔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썰물이 저만치 빠져나갔을 때 뒤에서 들려오던 물이 구르는 듯한 바닷물 소리가 꼭 장로님의 음성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박 장로님은 정말 보통분이 아니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몇십 년 후 하나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는 성경 구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에도 저는 이분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전도관이 지어진 후에는 매주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상쾌한 바람과 함께 너무나 좋은 향기가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예배실에 꽃다발을 들고 온 사람이 있는 줄 알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그런 사람은 없었고, 그 향기는 꽃향기라고 하기에는 그동안 맡아본 일이 없는 귀한 향기였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향취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비로소 제가 체험한 것이 향취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매주 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리다 보니 인천 각 지역에서 온 여학생들과 많이 친해졌습니다. 친구들과 저는 일요일마다 이른 시간부터 교회 입구에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차에서 내리시는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제단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신 하나님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며 저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는데, 너무나 진하게 풍겨서 어디까지 이 향기가 퍼져나갈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또 예배가 끝나면 하나님께서 안수를 해주셨는데, 하나님의 손이 머리에 닿는 순간 제 속이 뻥 뚫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몸이 가볍고 시원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귀한 은혜를 체험한 저와 친구들은 전도관 다니는 것이 몹시 즐거워서 예배 시간보다 훨씬 앞서 교회에 도착해 하나님 오시기를 기다리며 저희끼리 즐거워했습니다. 1957년 4월 25일부터는 서울 용산구 청암동에 위치한 서울중앙전도관(이만제단) 개관 집회가 열렸습니다. 동시에 제2회 전도관 체육대회도 개최되어 낮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배구, 농구 등 운동을 하고, 저녁에는 이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개관집회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중 어느 아침 예배시간이었습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은혜의 창파를 이룬 날로 기억됩니다. 저를 포함해 인천에서 온 친구들은 예배실 2층에 앉았고, 1층에는 인천 소래에서 온 친구 한 명이 따로 앉아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다리가 굽어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제단에 올때도 동생에게 업혀 와야 할 정도로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는 친구였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병자들은 일어나라’고 외치시자 여기저기서 병이 나은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벙어리였는데 말을 하게 되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아픈 몸이 나았다고 하는 등 너무나 신기한 장면이어서 유심히 지켜보던 중 1층에 앉아있던 다리 아픈 친구가 천천히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2층에 있던 저와 친구들은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1층으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 친구는 아직 다리를 덜덜 떨고는 있었지만 분명히 일어나서 제 발로 서 있었습니다. 친구는 감격한 목소리로 앉은뱅이였던 자신이 이렇게 스스로 일어나게 되었다며 마이크를 통해 큰 소리로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했고, 저희는 그 친구를 에워싸고 발을 동동 구르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소래에서 온 친구는 그 후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걸어 다니며 밝은 얼굴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병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그날, 저는 또 하나 분명히 목격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뽀얗게 내리는 이슬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병자들은 일어나라고 하실 때 예배실 안에 안개가 끼더니 점점 자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실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개는 점점 짙어져서 나중에는 앞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예배실을 가득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신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직접 체험한 그 은혜는 너무나도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앞으로 이분을 따라가야겠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서울중앙전도관 개관 집회가 있었던 그해 말에는 소사신앙촌이 건설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앙촌 건설을 위해 많은 교인들이 소사에 와서 일손을 보탰습니다. 저와 친구들도 건설에 도움이 되고자 시간을 내어 소사에 가서 땅 고르는 작업을 도왔습니다. 땅에서 자갈을 캐서 한곳에 모아두면, 어른들이 자갈을 트럭에 실어서 날랐는데, 그 땅에 오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오만제단을 지을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큰 소쿠리에 찐 고구마를 한가득 가지고 오신 하나님 모습이셨습니다. 환하게 웃으시며 고구마를 가져왔으니 많이들 먹으라고 하시는 말씀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꿀맛 같은 고구마를 먹고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소사신앙촌에 이어 덕소신앙촌이 완공되면서 저는 1966년 덕소신앙촌에 입주해 카스텔라 공장 포장반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신앙촌 카스텔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공장은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혔고, 직원들도 보람과 자부심을 갖고 힘든 줄 모르고 일했습니다. 인천전도관에서 예배드릴 때 상쾌한 바람과 함께 너무나 좋은 향기가 맡아져 이만제단에서는 앉은뱅이였던 친구가 두 발로 일어나고, 뽀얗게 내리는 이슬성신을 눈으로 보게 돼 가슴이 옥죄고 아프던 증상도 축복해 주신 음식을 먹고 완쾌되어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려 이후 저는 덕소신앙촌을 나와서 결혼을 하고 살다가 언제부턴가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화가 잘 안된다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쌀밥 외에 다른 반찬은 일절 못 먹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옥죄고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만 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찾아가 보았지만 원인은 알 수가 없었고, 세 발짝만 걸어도 쓰러질 지경이어서 교회는커녕 일상생활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1976년의 어느 날, 저를 전도했던 조카가 찾아왔습니다. 조카는 전도관에 가보자고 했지만, 저는 몸이 너무 아파서 못 갈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조카가 돌아가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은데 교회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 일요일에 큰맘 먹고 집을 나섰는데, 다행히 쓰러질 듯 아프거나 피곤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 동생과 함께 무사히 노량진 전도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동생의 부축을 받아 예배실 맨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앉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한참 울고 있는데 예배가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단에 서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웠던 하나님을 다시 뵈니 너무나 기쁘고 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배가 끝날 무렵, 하나님께서 다음 주부터는 축복을 해주신다고 하시며 축복받을 물건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우유와 설탕을 가지고 그다음 주 일요일에 노량진 전도관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축복받을 물건들을 가져왔고, 그 물건들을 한곳에 모아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가 끝나고 물건들을 모아놓은 곳에 가셔서 쉭쉭 하고 세 번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서 축복받은 우유에 설탕을 타서 한 컵 마셨습니다. 그런데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배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었습니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배가 들썩거릴 정도로 덜덜 떨려왔습니다. 밤새도록 끓던 배가 어느새 잠잠해져서 화장실에 갔더니 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한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양이 나와서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배 속이 텅 빈 듯 가볍고 시원했습니다. 그 뒤로 제 병세는 점점 호전되어 예전과 같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렸고, 그 후로 집과 가까운 천호동에 있는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꾸준히 교회에 다니다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무척 바빠진 저는 교회에 가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바쁘게 살며 건강을 챙기지 못했더니 또다시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증세가 심각해져서 병원에 가보니 담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운 좋게 바로 수술을 해서 살아날 수 있었지만, 위는 여전히 딱딱하게 뭉쳐서 늘 아팠습니다. 그게 2005년쯤이었습니다. 수술을 집도해 준 의사 선생님은 유산균음료를 많이 먹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마트에서 사다 준 유산균 요구르트는 너무 달아서 위가 더욱 쓰리고 아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달지 않은 유산균음료를 찾던 중 신앙촌에서 요구르트 런이 출시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요구르트 런을 꾸준히 마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누가 꽉 쥐고 있는 것처럼 뭉쳐있던 위가 편안하게 움직이면서 소화가 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요구르트 런을 먹으면서 위가 아파 그동안 먹지 못했던 매운 김치, 쫄깃한 떡도 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력을 되찾고 오랜만에 천호 천부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간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머리가 멍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뒤 축복일이 되어 신앙촌에 갔는데 신기하게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뒤로도 예배시간마다 머리가 멍하다가, 신앙촌에 가면 머리가 맑아지는 일이 한동안 반복되더니 어느 날은 신앙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머리가 번쩍 뜨이면서 정신이 환하게 맑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동안 들어오지 않던 하나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예배시간에 멍해지는 증상은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동안 많은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해 생긴 일인 것 같아 너무나 죄송했고, 다시 맑은 정신을 되찾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는 더욱 신앙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신앙촌에서 만들어지는 복된 물건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이 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친한 소비조합 사장님을 따라다니며 일을 도와드리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물건은 어떻게 구입하는지, 배달은 어떻게 하는지, 홍보는 어떤식으로 하는지 조금씩 배우게 되면서 마침내 2010년 신앙촌상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저는 신앙촌상회를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요구르트 런을 마시고 건강을 회복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신앙촌상회를 운영하며 하루하루 활기차게 살아가는 지금이 저는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지독히도 몸이 약했던 제가 하나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허락해 주셨던 귀한 은혜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고 죄송하기만 한 삶이지만, 남은 생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맑고 성결한 삶,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삶, 하루하루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지는 삶을 살며 끝까지 따라가는 제가 되겠습니다.

신앙체험기
“죄짓지 말라 하신 하나님 음성을 늘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죄짓지 말라 하신 하나님 음성을 늘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1942년생인 저는 전남 광주 광산구에 있는 산속 마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마을은 깊은 산중에 있어서 그런지 교회나 절이 없었고,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종교를 가진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역시 신이라든지 천국이라든지 종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전도관을 다니게 된 것은 1957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직장을 구하러 먼저 서울로 간 여섯째 언니(기연수 권사, 나주교회)를 따라 무작정 상경하였습니다. 그때 언니의 나이가 스물셋, 제가 열여섯이었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배운 기술도 없던 저와 언니는 각각 다른 집의 가정부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저는 빨리 돈을 모아서 가족들과 함께 살 집도 얻고, 더 좋은 직장도 구해야겠다는 희망을 안고 낯선 서울 땅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언니를 만났는데, 언니가 대뜸 앞으로 일요일마다 전도관에 함께 다니자는 것이었습니다. 언니의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어느 날, 언니가 일하는 집에 전도관 사람들이 심방 예배를 보러 왔다고 합니다. 언니도 자연스럽게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전도관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을 들으니 눈물이 흐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쁨이 마음에 넘치도록 차올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언니는 그렇게 기쁜 적은 처음이었다며 하나님의 은혜가 전도관에 임하는 것이 확실하니 같이 다녀보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은혜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확신에 찬 언니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어 함께 서울중앙전도관에 다니기로 하였습니다. 처음 가본 서울중앙전도관은 공사가 한창이어서 건물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불의 사자로 유명하신 박 장로님께서 인도해 주셨는데, 찬송을 부르던 도중 어디선가 시원한 향기가 맡아졌습니다. 맡으면 맡을수록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속까지 와닿는 듯한 그 향기는 신기하게도 예배 시간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향기일까?’ 그때 저는 예배실에서 진하게 맡아지는 그 향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통해 그것이 향취 은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예배를 마치고 박 장로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안찰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쭉 지켜보니 장로님께서 배에 손을 살짝만 얹으시는 것 같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프다고 발버둥 치거나 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안찰을 받았는데 저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은혜를 받지 못했나 보다’하고 약간 실망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얼마 뒤 신기한 은혜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1957년 4월에는 서울중앙전도관이 완공되었는데, 이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하여 일명 이만제단으로 불렸습니다. 이만제단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형 음악종을 도입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 은은하게 들려오는 이만제단의 아름다운 음악 종소리는 참으로 듣기 좋았습니다. 예배 시간에 저는 이만제단 2층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한참 찬송을 부르다가 앞을 보니 박 장로님 계신 단상 쪽에 소나기가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새로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건물 실내에서, 그것도 단상 쪽에만 비가 내리는 것이 이상해서 처음엔 잘못 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비가 떨어져도 단상이 젖거나 아래에 물이 고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가 아닌 이슬은혜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이슬 같은 은혜를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전도관에 임하신다고 했던 언니의 말은 참이었고, 구원은 전도관에 다녀야 얻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은혜를 확실히 체험한 저는 지방에 있는 가족들을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에 고향인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마침 박 장로님께서 지방 순회를 하시던 때라 운 좋게 광주전도관에서도 박 장로님이 인도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던 중 찬송을 인도하시던 박 장로님께서 박자에 맞춰 단상을 손으로 내리치셨습니다. 그러자 단상 쪽에서 불꽃이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불의 사자’라고 불리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성신의 불꽃이 박 장로님의 손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니 실로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전에도 장로님께서 인도하시는 예배에서 향취와 이슬같이 내리는 은혜를 체험했기에 저는 이분이야말로 진짜 하늘의 권능을 가지고 오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후 저는 어머니를 적극적으로 전도하여 얼마 뒤 어머니와 언니, 저 셋이 함께 소사신앙촌에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1960년 즈음, 가족과 함께 소사신앙촌에 입주한 저는 제과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살 집도 생기고, 바른 양심으로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기로 소문난 신앙촌 기업의 일원으로 근무하게 되니 그 기쁨과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과 공장에서 당시 신앙촌의 인기 제품이었던 캐러멜 포장일을 맡았는데, 신앙촌 주택 그림이 컬러로 인쇄된 캐러멜 상자가 참 예뻤던 기억이 납니다. 1962년에 덕소신앙촌으로 이주하고 나서도 제과공장 캐러멜 반에서 일했는데 그때는 훨씬 좋은 자동화 기계가 생겨 캐러멜 포장이 한층 수월해져서 더욱 신나게 일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덕소에서 지내는 동안 계속 눈길이 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건설대였습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신앙촌의 건물을 짓는 그들은 항상 활기차고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박 장로님, 즉 하나님을 은혜를 주시는 영적인 어머니와도 같다는 뜻의 ‘영모님’이라고 부를 때였는데, 영모님께서도 직접 현장에 나와 건설대원들과 함께 일하시는 모습을 보니 그들이 더욱 부러웠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제과 공장 공장장님께 건설대로 옮기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처음에는 반대하시던 공장장님께서도 나중에는 제 뜻을 존중해주셔서 마침내 건설대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중앙전도관에 처음 간 날 찬송을 부르던 중 가슴 속까지 와 닿는 시원한 향기가 맡아져 어느 날은 하나님 계신 단상 쪽에 소나기가 떨어져 자세히 살펴보니 단상이 젖거나 물이 고이지 않아 그제야 이슬 같은 은혜임을 깨달아 기장신앙촌 건설대로 일하던 중 높은 곳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는데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니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돼 건설대원이 되어 제가 한 일은 철근 엮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작업 중 하나였는데, 먼저 땅을 파서 단단한 지반이 나오면 자갈을 고르게 펴서 깔았습니다. 그 위에 철근을 엮어 올리고 시멘트를 부어서 건물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2년도에 기장신앙촌 1차 건설대로 선발되어 간 이후에도 철근 엮는 일을 계속 했는데, 1동 건물을 지을 때는 땅이 갯벌과도 같아서 작업이 전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작업 현장에 늘 함께하시며 기운을 북돋아 주시니 저를 포함한 건설대원들은 힘든 줄도 모르고 의욕적으로 일했습니다. 또 건설대원들은 A, B반으로 나누어 어느 반이 더 빨리, 더 잘하는지 시합을 할 때가 자주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싶은 마음에 반끼리 똘똘 뭉쳐서 손발을 척척 맞춰가며 일하니 더욱 신나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일에 몰두하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에는 흙탕물이 여기저기 묻어있어서 서로의 모습에 한바탕 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1동 건물 3층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콘크리트를 담아놓았던 제 옆의 리어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제 쪽으로 굴러오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잡을 새도 없이 리어카는 빠르게 저를 들이받았고 저는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래는 뾰족한 바위들을 모아놓은 곳이었기에 그대로 떨어지면 저는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추락하면서 바위들을 살짝 비켜난 곳으로 떨어졌는데, 그곳은 깊은 물웅덩이가 있는 곳이라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진 탓에 허리에 충격이 가서 움직이지 못하는 저를 곧바로 달려온 건설대 언니들이 의무실로 옮겨주었습니다. 한참 의무실에 누워있었는데 급히 들어오시는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은 부산에서 바이어를 만나고 돌아오시는 길이었는데 신앙촌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시자마자 경비원에게 혹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셨다고 합니다. 건설하던 사람이 3층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하나님은 한걸음에 의무실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친 허리를 강하게 축복해주시며 저를 향해 인자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죄짓지 말아야 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참 축복을 받고 나니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움직일 수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도 모두 놀라고 신기해했습니다. 저는 그날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목숨이니 앞으로는 말씀하신 대로 작은 죄라도 범하는 일 없이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며칠 후 몸이 완전히 회복된 저는 오랜만에 건설대 언니들과 함께 죽성 바닷가에 놀러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해녀 한 분이 친근하게 다가와 어디서 오신 분들이냐고 물었습니다. 신앙촌에서 왔다고 하니 해녀 아주머니는 “신앙촌 건물 3층에서 사람이 떨어졌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대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건설 현장에 고용된 외부 목수들이 제가 떨어진 상황을 보고 죽었다고 생각해서 헛소문을 퍼뜨린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해녀에게 웃으면서 “거기서 떨어진 사람이 저인데요? 저는 하나님께 축복받고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어디서 잘못된 소문을 들으신 것 같아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해녀 아주머니는 무척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더니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1976년도에 결혼하여 고향인 광주로 돌아온 저는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신앙촌 이불, 메리야스, 간장 등을 판매하며 소비조합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도에 하나님께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는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습니다. 그동안 많은 은혜를 직접 체험했던 저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권능이 진짜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무지한 저에게 그토록 귀한 축복을 한없이 베풀어주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과 함께 두려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을 위해 열어주신 귀한 이 길을 따라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85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소사신앙촌, 광주를 거쳐 저와 함께 나주로 이사오신 이후에도 꾸준히 신앙생활을 해오셨기에 나주교회 관장님을 포함해 많은 전도관 식구들이 와주셨습니다. 입관 당시 어머니께 생명물을 수저로 넣어드리면 그대로 잘 넘기셨고, 안색도 환하게 피어나셨습니다. 또한 굳었던 몸이 노긋노긋하게 움직여서 앉혀 놓고 수의를 입혀드릴 수 있었습니다. 환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피어난 어머니를 보니 크신 권능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더욱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언니와 함께 전도관에 첫 발을 내딛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전도관에 다니며 하늘의 은혜를 직접 체험한 저는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되었고, 그 은혜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저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죄 짓지 말라 하셨던 부드러운 그 음성을 가슴 깊이 새기며 항상 맑고 성결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벌써부터 기쁜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9월부터 시작된 나주 천부교회의 개축공사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나주교회가 아름답고 깨끗하게 완공되면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을 예정입니다. 지금껏 받아오기만 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할 수만 있다면 제 마음은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던 그 순간, 전도관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었던 그 기쁨의 환희를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뜨거운 마음으로 전도하는 제가 되겠습니다.

Holy Dew Spirit falling down through the Olive Tree

Former minister, Oh Sung-min

After graduating from theological college, I attended God’s meeting while working as a missionary of the Presbyterian Church. Dreaming of becoming a pastor since I went to a Presbyterian church young. As I went to the Presbyterian Church since I was a teenager, I focused on studying the Bible for my education and went to the […]

하나님의 사랑은 형언할 수 없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이슬 같은 은혜를 한없이 부어 주시며 삶의 위로가 되어 주시고, 육신의 병을 고쳐 주시며 몸소 감람나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신앙의 터전을 만들어 은혜로 길러주시며 감람나무 가지들이 죄에 물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안타깝게 바라보시던 모습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이셨습니다. 가지들이 오직 […]

The time God has been waiting for to announce Him

The former Principal of Zion High School Seok Se-jo (2)

After saying “No one knows who I am.” in 1957. Waiting for 25 years, He announced that He is God. (Following the first episode) It was early 1963. My body, which was relatively healthy, was weakening and lost strength, and the sound of my breathing could be heard even outside the door. I urgently had […]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시기 위해 기다려 주신 시간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前 시온고등학교 교장 석세조 (2)

1957년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라” 말씀 하신 뒤, 25년을 기다려 하나님이심을 발표 1963년 초였습니다. 비교적 건강하던 저의 몸이 쇠약해지며 온몸에 힘이 없어지고 숨 쉬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릴 정도가 되어서 급히 진찰을 받아 보니, 급성으로 온 장결핵과 폐결핵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에 제가 거의 죽게 되었다는 소문이 친척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사이신 […]

베풀어 주신 은혜 잊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 따라가겠습니다

저는 1944년생으로 인천 덕적도에서 1남 3녀의 맏이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다 1952년 큰이모집과 가까운 대부도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도에서 아버지는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셨는데, 저는 어렸어도 새벽에 아버지를 따라 물고기도 잡고, 벽돌 쌓는 법도 보고 배우며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이사하고 몇 해 뒤, 집이 가까워 자주 왕래하던 큰이모가 뱀에 물려 24시간 만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

천부교 역사 속의 특별한 12월

1955년부터 시작된 천부교 역사 속에서 12월은 특별한 달입니다. 첫 번째 천부교회 건립과 첫 번째 대규모 합창을 비롯해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12월, 천부교 역사 속의 12월을 함께하신 분들과 신앙신보 기사를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 1955년 12월, 첫 번째 천부교회가 시작되다 1955년 12월은 첫 번째 천부교회인 ‘원효로 […]

그 은혜는 세상 모든 기쁨을 다 더한대도 비할 수 없어

1980년 서른여덟 살이 되던 해, 저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 제가 사정이 나아지면 그때 다시 교회에 나가겠습니다.”로 시작했습니다. 강원도 태백에 살던 저는 서른 즈음에 주변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 장로교회에 다닌 이래로 주일예배는 물론 새벽예배 한 번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냇가에서 빨래할 때도 ‘더러운 빨래가 희어지듯 저의 죄도 깨끗이 씻어주시옵소서’ 하며 기도하던 저였는데, 서른여덟에 남편을 잃고 혼자 […]

불과 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성신

1950년대 교계는 여러 부흥집회가 성행하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하나님 집회에서 불과 같은 성신이 임한다고 하여 ‘불의 사자’라 불렸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불치병이 나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며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서울, 인천, 부산, 대전, 광주, 전주, 마산 등 전국에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의 부흥집회’를 알리는 플랜카드와 포스터가 붙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기성 종교계에서도 장로교회, 감리교회 할 것 […]

“세상의 기쁨과 견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내려주셔”

1938년 충북 보은 산외면 원평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저는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 바로 옆에는 장로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흘러나오는 찬송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던지 교회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엄격한 불교 집안인 저희 집에서 제가 교회 다니는 것을 허락해줄 리가 만무했기에, 가끔 부모님의 눈을 피해 친구들과 몰래 교회에 […]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마음의 근심과 걱정이 사라져

<493회> 김애자 권사/기장신앙촌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난 저는 아홉 살 무렵에 고아 아닌 고아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저를 유달리 예뻐하셨던 첫째 이모가 광주 계림동에 있는 이모네 집에 저를 데리고 간 날이었습니다. 이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저는 혼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익숙지 않은 이모네 동네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결국 길을 잃어버리고만 것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추운 겨울에 혼자서 눈 쌓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