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홀로코스트의 진범(眞犯)은 누구인가? (上)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홀로코스트의 진범(眞犯)은 누구인가? (上)

홀로코스트란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용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들으면 강제 수용소에서 착취당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유대인의 모습이나,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의 텅 빈 눈동자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만큼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영상과 사진, 각종 문헌을 통해 생생히 알려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료1,2,3,4,5> 그러나 홀로코스트에 대해 아직 베일에 싸인 듯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있는데, 홀로코스트의 뜻이 “불에 의한 파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나치가 유대인을 불에 태워 ‘소각’하면서 세상을 정화시킨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랜 세월 세상을 지배해 온 집단이 ‘악을 처리하는 방식’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이 집단은 유대인을 향해 ‘예수를 살해한 종족이자 악의 근원’이라고 지목해 왔을 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유대인을 학살한 전범(戰犯)들을 법의 심판을 피해 안락한 삶을 누리도록 보호하고 은닉해 주었다. 이에 기획기사에서는,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알지 못하는 홀로코스트의 진범 (眞犯)에 대해서 두 편에 나누어 조명해 본다. 먼저 홀로코스트라고 하면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떠올리는 것은 히틀러가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힌 독재자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격렬한 제스처와 함께 “유대인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외치는 히틀러의 모습이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돼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히틀러가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자서전에서도, 히틀러의 생애를 탐구한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힐 만한 근거나 경험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이렇게 적었다.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처음으로 특별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이 언제였는지 말하기란 곤란하다. (…) 나는 중세의 유대인 박해를 생각하면 기가 죽는다. 이것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자서전에서 밝히기를, 심경에 일대 반전이 일어나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고 술회하면서도 정작 변하게 된 명료한 근거나 경험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했다. 히틀러 연구자인 이언 커쇼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히틀러가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유대인 학살에 집착했는지 모르고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도 모른다.”라고 했다.(이언 커쇼, <히틀러1>, 교양인. 2012년, p.118.)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유럽을 정복하겠다는 야망과 광기에 사로잡힌 것은 각종 사료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유대인 말살에 집착한 것은 그 계기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히틀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독일 작가이자 역사가 브리지트 하만) 그렇다면 히틀러와 나치가 처음으로 정권을 잡았던 1933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본다면 유대인 말살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33년 4월, 히틀러 정부는 가톨릭 교황청과 ‘제국종교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비밀리에 교섭을 시작했다. 이 협약은 교황청이 히틀러 정부의 정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지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으로, 정치권의 아웃사이더로 평가받으며 지지 기반이 약했던 나치와 히틀러에게 이 조약을 성사시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히틀러와 교황청이 맺은 이 조약은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자마자 전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 최초로 맺은 조약이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사활을 걸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 정부가 교황청과 교섭을 시작하던 4월, 나치당원들은 범국가적인 유대인 차별 운동에 돌입해 유대인의 가게를 불태우기 시작했고, 히틀러 정부는 ‘사법시험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켜 유대인 변호사들의 활동을 금지했는데 이는 유대인을 차별하는 첫 번째 법률이었다. 이때부터 4월 한 달에만 유대인의 교사와 판사 활동 금지, 유대인 참전 용사와 그 가족의 연금 차단 등의 정책이 계속해서 발효되었다.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률이 시행되자 ‘누가 유대인이고, 누가 가톨릭 신자인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때 가톨릭 사제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결혼 증명서와 세례식 증서를 나치당에 넘겨 주었고, 나치는 이를 사용해 유대인을 색출하고 차별하는 근거로 삼았다. 나치가 반유대 정책을 대대적으로 파급시키는 동안 가톨릭 교황청은 히틀러 정부와 성의 있게 교섭에 응했고, 마침내 7월 20일 33개 조항으로 구성된 제국종교협약에 조인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추기경 폰 바오로하버는 “교황과 히틀러간의 협약은 헤아릴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예수여! 히틀러를 보호하소서.”라고 감격스러워했으며, 나치 또한 로마가톨릭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정치적 지배권을 강화시켰다는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자료6> 이후에도 히틀러 정부는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률을 계속해서 제정해 유대인은 가톨릭 신도와 결혼할 수 없고(독일의 혈통과 명예 보호법) 공무원이 될 수 없으며 (직업공무재건법), 대학교의 학위를 받을 수 없도록 했는데(독일 학교 및 대학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법), 이와 판박이 같은 선례가 로마가톨릭교회에 있었다. 가톨릭 교회법에 따르면 유대인은 가톨릭 신도와 결혼할 수 없고(306년 엘비라 종교회의) 공무원이 될 수 없으며(535년 클레르몽 종교회의), 대학교의 학위를 받을 수 없었던 것(1434년 바젤 평의회)이다. <자료7> 이처럼 교회법이 시행된 시점을 보면, 유대인 차별은 4세기부터 유구한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4세기는 로마가톨릭이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받아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던 때인데, 흥미로운 것은 가톨릭이 이런 힘을 갖기 전까지 로마제국에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률이 없었고 로마시민들과 법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아 유대인이 로마인과 결혼할 수도 있고 로마의 공직을 얻을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보면 로마가톨릭 교회가 정치적인 세력을 갖게 되면서부터 유대인 차별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로마가톨릭을 시작점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창궐해 혼란과 공포가 극심하던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 있다. 당시 로마가톨릭은 순식간에 죽음을 몰고 오는 흑사병이 타락한 인간을 향한 신의 회초리라고 했고, 이에 따라 대규모 참회 집회가 늘어났지만 가톨릭교회에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흑사병은 도리어 더 빨리 퍼졌다. 신의 분노를 풀겠다며 스스로를 채찍으로 때리는 ‘채찍질 고행단’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자 병균은 더욱 빨리 전염되었다. <자료8> 온갖 대책에도 떼죽음이 멈추지 않자 채찍질 고행단을 비롯한 가톨릭 신도들은 유대인을 ‘이 모든 악의 근원’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고, 유대인을 감금하고 끔찍한 고문으로 자백을 이끌어냈다. 유대인들 입에서 “악마의 사주를 받아 우물에 병균을 퍼뜨렸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고, 고통을 이기지 못한 유대인이 시키는 대로 자백하면 유대인을 남녀노소 구별 없이 시나고그(유대인 회당)에 가두고 불을 붙여 몰살시켰다. <자료9> 이 같은 학살이 1348부터 2년간 유대인 공동체 1000곳 이상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는 ‘불에 의한 파괴’이며 이는 인간이 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 악의 근원을 불태워 죽이는 것을 어원으로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세의 사건이 홀로코스트의 진정한 발화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연구한 역사가 라울 힐베르크는 ‘유대인 학살은 정신의 문제이자 공감의 문제’라고 분석했다. 행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유대인 전체를 학살한다는 계획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는 일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치는 기괴할 만큼 극단적인 효율성으로 학살을 수행했는데 이 효율성은 유대인을 파괴해야 한다는 정신과 공감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치의 SS대원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극단적인 효율성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유대인의 재산 몰수와 수송을 책임지고 있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1942년 나치 고위급 회의에 참석한 후 유럽 전역에서 ‘최종 해결’ 해야 하는 유대인의 숫자를 표로 기록했다. 최종 해결이란 곧 대량학살을 의미했고 그 목표 숫자는 1,100만 명에 달했다. <자료10> 아이히만은 독가스실이 운영되는 ‘절멸 수용소’를 향해 기차 노선을 운행하고 유대인을 어떻게 수송할 것인지 계획을 작성했는데, 전쟁 막바지에 기차로 끊임없이 군수 물자를 운송하는 속에서도 극도의 효율성을 발휘해 유대인이 기차를 타고 신속하게 독가스실로 직행하도록 했다. <자료11> 그는 자신이 기차에 태운 유대인의 숫자가 수백 만에 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전쟁이 끝난 후 나치 전범(戰犯)들은 뉘렌베르크 재판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범죄에 대한 재판을 받았지만 아이히만은 처벌과 추적을 피해 교묘하고도 치밀하게 종적을 감췄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60년, 아이히만은 유대인 정보기관이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됐는데, 이 가공할 범죄자의 탈출과 은닉을 실행한 세력이 로마가톨릭 교회라는 사실이 그때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이히만 은닉에 주도적인 임무와 책임을 부여 받은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알로이스 후달이라는 주교와 신분 세탁을 위해 서류를 만든 안톤 베버라는 신부였다. 서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히만은 주세페 시리 대주교가 관할하는 제노아의 수도원에서 은밀하게 생활하며 완벽한 보호를 받았다. 아이히만은 1960년 체포된 후 심문을 받았을 때 “아르헨티나로 가는 동안 가톨릭 사제들이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계속해서 도와주었다.”고 증언했다. <자료12,13> 아이히만은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국제 적십자사가 발행한 여권을 소지했는데, 이는 교황청의 난민 지원 위원회가 난민들의 이민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적십자사를 통해 여권을 발급해 준 덕분이었고, 이것이 신분 세탁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자료14>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후 15년간 가족들과 안락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것은 안전한 은닉을 가능하게 해 준 로마가톨릭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힘입은 것이었다. 로마가톨릭에서 구출한(?) 사람은 아이히만뿐만이 아니었다. 악명 높은 소비보르와 트레브린카의 절멸 수용소 지휘관으로 1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프란즈 스탕글도 로마가톨릭의 손길에 숨겨진 인물이었다. 패전의 기운이 짙어지자 폴란드 국경을 넘어 도망치던 스탕글은 아이히만과 마찬가지로 후달 주교를 만나 안전한 은닉처를 찾았을 뿐 아니라 후달 주교가 두 손을 들어 스탕글을 환영했다고 하니 얼마나 큰 위로를 주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료15> 또한 나치의 SS 연대장이었던 발터 라우프는 움직이는 가스 차량을 이용해 9만 7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자였는데 역시 후달 주교의 도움으로 추적자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고, 교황청 직속의 수녀원(convents of the Holy See – 발터 라우프는 1963년 칠레 대법원 증언에서 가톨릭 사제의 도움을 받아 약 18개월 동안 “교황청 직속 수녀원”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에 은신하다가 결국 시리아로 도망쳐 1984년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료16> 요컨대 로마가톨릭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홀로코스트의 설계자와 실행자를 구원한 것이었고, 그 손길로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다른 나라에 세워진 독재 정권의 정치적 고문 역할을 하면서 또다른 홀로코스트의 발화점이 된 인물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후술하기로 한다. 최근 미국 가톨릭 주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사형 집행에 반대하며 “우리는 죽음을 야기해서는 안 되며 생명을 수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형은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예수의 부르심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미국이 사람을 죽이는 시대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집니다.”라고 호소했다. 나치가 갈고리 십자가를 앞세우고 학살을 했던 시대처럼 사람을 죽이는 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의 생명조차 존중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은 듣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지만, 역사상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진범이라면 그 정도 사형수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용서를 베풀어 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들의 호소와 용서는 섬뜩할 뿐이다. <자료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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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대량학살의 정당화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대량학살의 정당화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역사적으로 ‘대량학살’의 범인을 꼽으라고 한다면 60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해 인종청소를 실시했던 히틀러가 원흉의 대열에 서게 될 것이다. 또한 히틀러와 같이 대량학살을 일으킨 A급 전범들이 가장 경배받고 추앙받는 시설을 꼽으라고 한다면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가 선정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7년 독일 해군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970년, 독일 공군 중장이 참나무를 야스쿠니에 선물한 사실을 보면 두 나라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독일과 일본은 세계대전 당시 철저한 동맹 관계였으며 기모노를 입고 촬영한 히틀러의 사진에서 두 전범국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히틀러의 기모노에는 나치의 상징인 갈고리 십자가(Hakenkreuz)가 수놓아져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은 ‘십자가’로 대표되는 로마교회(로마가톨릭교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남긴 역사적인 사실을 따라가며 전범 국가와 기묘한 관계를 맺고 근본적인 동질성을 가진 한 집단을 추적해 본다. <자료1,2,3> 1933년 9월 17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축하와 찬양으로 들뜬 분위기였다. 유서 깊은 가톨릭교회 중 하나인 세인트 헤드비지스 성당에서 성대한 축하 미사가 열려 성당은 수많은 교황 깃발과 나치 깃발이 장식되어 펄럭였고 미사에는 정복을 갖춰 입은 나치의 친위대(Schutzstaffel, SS) 요원들이 특별 초대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미사를 주재한 세자레 올세니고는 교황대사로서 교황의 뜻을 전달하고 대리했으며 히틀러와 여러 차례 대면하며 교황과의 연결고리로서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다. 설교를 하던 올세니고가 “히틀러는 가톨릭이 믿는 신에 헌신하는 인물(출처 : God’s Bankers : A History of Money and Power at the Vatican)”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찬양하자 가톨릭 신도들은 열광적인 환호로 화답했다. 이날 가톨릭교회가 성대하고 화려한 축하 미사를 거행했던 이유는 바티칸과 나치, 다시 말해 교황과 히틀러 사이에 맺어진 “제국종교협약(Reichskonkordat)”을 대대적으로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이 협약은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임명된 후 다른 국가(바티칸은 교황이 다스리는 국가이다.)와 맺은 첫 번째 조약이었고,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히틀러와 나치를 전 세계 앞에 인정해 줌으로써 히틀러가 그의 가공할 계획을 펼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것과 다름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협약의 단초는 가톨릭교회가 먼저 히틀러에게 보낸 서신에서 비롯되었다. 바티칸의 국무총리였던 에우제니오 파첼리(6년 뒤에 교황 비오 12세가 되는 인물)가 히틀러에게 은밀하게 편지를 보내 나치의 정책을 승인한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히틀러가 이에 응하면서 비밀 협상을 통해 협약을 맺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자료4,5,6,7,8> 33개 조항으로 구성된 제국종교협약의 특징은 히틀러 정부가 가톨릭에게 막대하고도 안정적인 금전을 선사하며, 이에 따른 대가로 가톨릭교회는 히틀러 정부에게 공식적이고도 확고한 정치적 지지를 약속하고 조인한 사실이었다. 조약에 따라 히틀러 정부는 독일 국민 전체에게 교회세(Kirchensteuer)를 부과하고 원천 징수하여 바티칸에게 제공하게 되었다. 이전부터 가톨릭교회는 전 국민에게 교회세를 걷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자발적으로 납부하지 않는 상황에서 강제 징수할 방법이 없었는데, 히틀러 정부가 자동 급여 공제 제도를 통해 임금 소득자들에게 8~9%의 교회세를 강제 징수해 바티칸에게 송금하기 시작하자 현금이 고갈되었던 바티칸의 금고는 금세 안정을 찾게 되었다. 히틀러 정부가 걷어 들인 세금을 가톨릭교회에 제공했다는 것은 그만큼 히틀러와 가톨릭 간의 밀접한 결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막대한 금전을 보장받은 가톨릭은 조약의 내용대로 히틀러 정부를 향하여 굳건한 정치적 지지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제국종교협약 제16조는 가톨릭 주교와 추기경들이 히틀러 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이며, 가톨릭교회의 매 주일 미사에서 히틀러 정부를 위해 특별 기도를 한다는 것도 협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추기경 폰 바오로하버는 일요일 미사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교황과 히틀러간의 협약은 헤아릴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예수여! 히틀러를 보호하소서.” 추기경과 같은 가톨릭교회의 수장부터 매 주일 미사를 실시하는 일반 사제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는 이 협약을 철저하게 이행하며 히틀러와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자료9> 주목할 점은, 이 협약이 조인된 후로 나치는 유대인 학살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각국의 비난을 받았지만 가톨릭은 협약에서 탈퇴하지 않았으며 협약의 효력이 소멸된 적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협약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면 두 국가의 관계가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한 파트너라는 합리적인 추론에 이르게 된다. 일례로 1938년 11월 19일, 나치가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을 공격해 수천 곳의 유대인 사업장과 회당을 파괴했을 때 각국은 비난을 쏟아부었지만, 가톨릭 주교들은 “유대인은 예수에게 살인적 증오를 품은 종족”이라며 오히려 유대인을 비난하고 대중에게 격렬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어떤 의미로 보아야 할까. 1942년 12월 21일 교황 비오 12세가 유대인 학살에 이용되는 독가스실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받고서도 나치의 범죄를 비난하는 연합국 선언문에 서명하기를 거절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대규모 인종청소와 학살을 지휘하는 히틀러에게 “걸출한 아돌프 히틀러 각하! 부디 신의 도움으로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고 축복의 메시지를 보냈던 교황의 진정한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하여 유대인들(미국 유대인 위원회)이 1979년부터 30년간 끈질기게 바티칸의 비밀 문서 공개를 요청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톨릭교회와 나치의 관계에서 파트너십을 넘어 근본적인 동일성을 확인하게 되는데 단적인 예로 히틀러가 창안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대량학살의 현장마다 휘날렸던 나치의 십자가를 꼽을 수 있다. 끝이 갈고리처럼 휘어져서 ‘갈고리 십자가’라고 불렸던 이 문양은 히틀러가 어릴 적 다녔던 람바흐 수도원에서 봤던 것인데, 수도원의 석재와 목공예에 장식돼 있던 십자가가 히틀러의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었다. <자료10,11> 람바흐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받은 히틀러는 성가대원으로 활동할 때 가톨릭 미사에 도취되었던 경험을 성장한 후에도 생생히 간직했다. 어린 히틀러는 수도원장을 꿈꿀 정도로 가톨릭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성인이 되어 화가로 활동할 때도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를 경건하고 성스럽게 묘사한 것을 보면 십자가를 나치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십자가를 상징으로 내세운 두 집단의 근본적인 동질성, 다시 말해 같은 뿌리에서 나와 같은 결과를 보여 준 사실은 마녀사냥과 인종청소로 특징지을 수 있다. 마녀사냥은 가톨릭교회가 일으켰던 십자군 전쟁과 아메리카 대륙 침탈, 종교 재판 등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학살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15세기부터 시작돼 20만 명에서 50만 명을 학살한 마녀사냥의 광기는 독일 지방에서 극심했고, 끔찍한 화형과 고문의 방법을 자세히 열거해 놓은 책 ‘마녀의 망치’를 저술한 가톨릭 사제들도 독일의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독일의 수백 개가 넘는 문서 보관소와 도서관에는 가톨릭 재판부가 마녀사냥의 피해자를 심문한 내용이 자세히 남아 있었고, 이 심문 내용을 보면 가톨릭이 어떤 논리로 무고한 피해자를 마녀로 몰아 처형했는지 그 명분과 사상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학살의 명분은 ‘선을 위해 악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가톨릭 교리의 기초를 닦은 교부(敎父)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립한 것으로, 그는 가톨릭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악에 대한 처벌이 핵심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사상적 뿌리는 피해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학살을 신성하게 여기는 마녀재판으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히틀러의 오른팔이자 나치 친위대 지도자로 대량학살을 주도했던 하인리히 힘러(Heinrich Luitpold Himmler)는 학자들을 동원해 마녀재판을 심도 있게 조사하고 33,800개가 넘는 카드에 마녀재판의 자료를 기록하면서 대량학살의 명분과 사상을 학습할 수 있었다. 학습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나치대원들은 독가스실에서 한 번에 수백 명씩 유대인을 죽이면서도 “악의 근원인 유대인을 소멸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를 위한 신성한 의무”라는 신념을 고수했다. 이는 마녀재판을 주재한 가톨릭 사제들이 사람을 화형대에 올려 활활 타는 불길에 살이 녹아내리고 뼈가 드러나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서도 “악이 소멸되고 너의 영혼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엄중히 선언한 것과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료12,13> 가톨릭과 나치는 학살 중에 보여 주는 행태도 비슷했는데, 첫 번째 공통점은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처참한 대우였다. 나치는 강제 수용소에 도착한 포로 중에 임신한 여성과 자녀가 있는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을 ‘노동 불능자’로 선별해 가장 먼저 독가스실로 보냈고, 살아남은 경우에도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나치와 비슷한 시기인 1900년대 중반 가톨릭교회는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어린이를 집단 학살한 사건을 일으켰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시설인 ‘세인트 메리의 집’에서 1925년부터 40년간 미혼 여성이 낳은 아기들 6,000여 명이 죽어 나갔으며 그중 796개의 아기 유골들이 정화조에 암매장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검증되지 않은 백신을 투여하며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자료14,15,16> 두 번째 공통점은 학살을 통해 금전을 추구하는 방식이었다. 가톨릭교회가 마녀사냥으로 죽은 피해자의 재산을 여러 가지 명목으로 몰수했던 것과 같이 나치는 강제 수용소에 끌려온 부유한 유대인의 재산을 체계적으로 압수했다. 뿐만 아니라 나치의 학살을 통해 가톨릭이 직접적으로 이윤을 얻은 사업도 있었는데, 나치의 유대인 강제 수송 사업이었다. 당시 바티칸은 혼란이 가중되는 2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히틀러가 보장한 교회세 덕분에 재정적인 안정을 누리면서 이를 발판으로 전쟁 관련 사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었다. 바티칸은 ‘제네랄리’라는 보험 회사에 투자하여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철도 수송에 대한 보험을 제공했던 제네랄리는 강제 수용소까지 유대인을 이동시키는 기차가 사고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보장해 줌으로써 이익을 얻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나치가 유대인을 죽음의 기차에 실어 착오 없이 완벽하게 독가스실로 보내는 숫자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제네랄리의 수익은 높아졌고 이에 따라 바티칸의 수익 또한 증가되었다. 같은 뿌리로 연결된 두 집단이 돈이라는 열매를 함께 거두며 공존공생하는 관계였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세계의 여러 현안에 대해 발언하기를 즐기는 가톨릭교회 프란치스코는 최근 여러 가지 발언으로 주목을 끌었다. 정치권을 향해서는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모든 악의 뿌리는 돈에 대한 욕심’이라며 준엄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가톨릭교회를 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고 스스로 정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은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했다. 가톨릭교회가 어렵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걷어 들인 ‘베드로 성금’에서 90% 이상을 바티칸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메우는 데 쓰거나 호화 부동산을 투자하는 데 썼다는 폭로였다.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교회 운운하는 목소리는 5천만 유로(약 663억원)에 달하는 베드로 성금의 엄청난 규모와 불투명한 투자 행태를 밝히는 사실 앞에서 머쓱해졌다. 그렇다면 악의 뿌리를 논하는 자가 도리어 악의 뿌리와 연결된다는 사실 앞에서 그가 다시 꺼낼 카드는 무엇일까. 최근 섹시 스타의 SNS 사진에 프란치스코의 이름으로 ‘좋아요’를 눌러 놓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악의 뿌리’에 대해서도 침묵의 카드를 내놓을 것인가. 아니면 상식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는 것일까. <자료17>

특집
야스쿠니 신사의 비밀… 성스러운 피와 죽음을 숭배하는 집단에 대하여

야스쿠니 신사의 비밀… 성스러운 피와 죽음을 숭배하는 집단에 대하여

일본 도쿄 중심부에 위치한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 총리직에서 물러난 아베 신조가 한 달 사이 두 번이나 참배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긴 했지만 평소 야스쿠니 신사는 평범한 일본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찾아 소원을 비는 곳이다. <자료1,2> 두 손을 모으고 대학원 합격이나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여느 종교 시설과 다를 바 없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피와 죽음이 뒤엉킨 괴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국제 재판에서 사형을 당한 A급 전범(戰犯)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신으로서 숭배받을 뿐 아니라,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까지 하나의 신으로 합사(合祀)되어 불가분의 관계로 엉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괴이한 것은, 전범을 신으로 숭배하고 전쟁을 찬양하는 야스쿠니 신사가 전쟁 후에도 여전히 존속한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나면 패전국에서 전쟁의 상징물이 여지없이 파괴되고 불태워지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인데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에서 가장 노골적인 전쟁의 상징이었던 야스쿠니 신사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이 이야기는 두 명의 가톨릭 신부로부터 시작된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망한 일본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최고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국 최고 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통치 기간 동안 일본의 전쟁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GHQ는 야스쿠니 신사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GHQ는 야스쿠니 신사가 전쟁과 죽음을 숭배하고 찬양함으로써 자살 특공대와 같은 가공할 살인 병기를 양산하는 정신적인 토대가 된다는 것을 간파했다. 실제로 가미카제(かみかぜ, 神風)라 불렸던 일본의 자살 특공대원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는 말로 대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자료3,4> GHQ 내부에서는 야스쿠니가 전쟁을 조장하는 원흉이므로 남김없이 불태워야 한다는 의견과 종교적인 시설로 보아 존속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었다. 이들은 종교계 인사의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었고, 일본에서 활동 중인 가톨릭 신부에게 의견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독일 예수회 소속의 브루노 비테르(Bruno Bitter, SJ, 1898~1987)와 미국 메리놀회 소속의 패트릭 번( Fr.Patrick J Byrne, 1888~1950)이었다. 브루노 신부는 예수회가 일본에 세운 상지 대학교의 주임 사제로 근무하면서 전쟁 기간 동안 교황청 대사직을 대리했으며, 패트릭 신부는 교토 지역에서 10년 넘게 활동하고 종전 직후에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 국민에게 안심하라는 내용의 연설을 함으로써 큰 주목을 받은 인물이었다. <자료5,6> 두 신부는 ‘야스쿠니 파괴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요청하는 GHQ에게 “야스쿠니 신사를 파괴하면 일본인의 감정을 해칠 수 있다. 가톨릭은 야스쿠니 파괴에 반대한다.”고 분명하게 선언했다. 이에 대해 맥아더 장군은 “가톨릭이 야스쿠니 신사를 옹호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당혹스러워했다. 야스쿠니 신사의 파괴로 상처를 입게 되는 일본인의 감정이란, 전범국으로서 전쟁을 미화하고 찬양했던 감정이며 이러한 전쟁의 광기는 전후 반드시 처리되어야 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부들이 이를 보호해야 한다고 나선 것이다. 이런 모습에 맥아더 장군은 당혹스러워했지만 사실 가톨릭이 전범국인 일본을 보호하고 지지하는 입장에 서는 것은 그때뿐이 아니라 오히려 시종일관 반복된 행태였다. 일본이 중국을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오르던 1937년 10월, 교황청은 전 세계 가톨릭 교회를 향하여 일본이 중국에서 벌이는 성전(聖戰)에 협력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1937.10.14. 교황청 지령 5개조) 이를 보도한 도쿄 아사히 신문(1937.10.17.자)은 “백만 대군보다 더 든든하다.”고 평했는데, 교황청이 일본의 잔혹한 전쟁에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실어 주고 전 세계 협력까지 촉구하고 나섰으니 그만큼 든든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자료7> 가톨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은 그해 12월 중국의 주요 도시인 난징(南京)을 함락시켰고, 단 6주 동안 최소 26만 명에 이르는 중국인을 도륙하고 학살했다. 난징에 주재하던 외국인들과 신문 기자들에 의해 난징 대학살은 전 세계 곳곳에 알려졌으나 그 참상이 낱낱이 밝혀진 후에도 가톨릭은 일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확고한 지지를 표명했다. 도쿄 가톨릭 교구장이었던 도이 타츠오는 “일본이 무기를 들게 된 것은 신의 깊은 배려에 근거한 것이므로, 세계의 3억 5천만 가톨릭 신자들은 일본의 행동에 찬동을 보내야 한다.”고 역설했다.(1943년 8월호 『성(聲)』 잡지) 이 발언대로라면 일본은 가톨릭의 신이 깊이 배려한 덕분에 무기를 들게 된 것인데 일본은 그 무기로 갖가지 만행을 저질렀다. 난징 대학살만 해도 일본군은 이 유서 깊은 도시를 점령한 후 순식간에 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군은 중국인의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고 거리에는 고환이 잘린 중국 남성의 시체가 즐비했는데, 사람의 고환을 먹으면 남성다워진다고 믿은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이었다. 또한 목 베기 시합을 벌여 먼저 100인의 목을 베는 사람이 누구인지 경쟁했으며, 일본 신문들은 100인 목 베기를 초과 달성한 일본군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사나운 독일산 셰퍼트를 풀어 놓아 중국인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은 다반사였고 거리에는 셰퍼트가 사람의 내장을 물고 돌아다녔다.<자료8,9,10,11,12>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은 가톨릭이 전 세계 전쟁에서 저지른 것과 유사했다. 시리아의 소도시 마라를 함락시켰던 가톨릭 십자군은 식인 행위를 벌여 어른들을 솥에 넣어 삶고 아이들은 불에 구워 먹었으며, 히스파니올라 섬을 장악한 가톨릭 세력은 원주민을 남김없이 도륙하면서 한 칼에 사람의 목을 베는 것을 놓고 열띤 경쟁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전쟁을 벌일 때 가톨릭 세력은 사나운 군견에게 90킬로그램짜리 갑옷을 입혀 앞장세웠고, 그 군견들의 먹이로 살아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던져 주었다. <자료13,14> 그러나 살인과 폭력의 광기가 아무리 유사하다고 해도 종교 집단이 전범 국가를 옹호하고 지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가톨릭이 야스쿠니 신사를 보호하고 나선 것에는 더욱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피가 지닌 의의를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자랑 중 하나다. 피에서 최고의 의의를 발견하고 신으로 찬양하는 정신은 일본 외에는 없다. 기독교 또한 피의 의의를 자각한 종교로서 예수의 피는 구원의 근원이다. 기독교와 일본인은 이러한 공통점이 내면에 가득 차 있다. 예수의 피로 순결하게 된 기독교인이 야스쿠니의 호국 영령의 피에 감동받는 것은 그러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尊い血の意義の深酷な意義の自覚こそ、我国の誇るべき一つであろう。…この血に再興の意義を見、祭神と讃える精神は、我が日本をおいて外にはない。… 基督教は血の意義を最も深く自覚した宗教である。…即ちキリストの血こそ救拯の根元であるからである。… キリストの血に潔められた日本基督者が、護国の英霊の血に深く心打たれるのは血の精神的意義に共通のものがあるからである。血の意義の深い自覚に共通なものが潜み湛へられているからである”-기사 원문 중에서 발췌) 이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열리는 대제(大祭)를 앞두고 일본 기독교 신보가 게재한 ‘야스쿠니의 영령’이라는 기사의 주요 내용이다.(1944. 4. 11. 자) 예수의 피가 구원을 준다는 기독교의 교리와 호국 영령의 피가 신으로서 숭배를 받는다는 야스쿠니의 주장은 근본부터 동일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을 찬양하는 기독교와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은 것을 찬양하는 야스쿠니는 죽음을 숭배한다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죽음을 숭배하고 찬양하는 정신은 가톨릭에서 ‘순교’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되었고 가톨릭 신도들은 순교 전설을 반복해 들으며 ‘예수를 따라 죽는’ 순교를 갈망하게 되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가톨릭의 ‘순교’ 정신이 일본에 해악을 끼칠 것이라고 내다보고 가톨릭을 철저히 금지했으나, 이후 들어선 메이지 정부는 가톨릭과 같이 죽음을 숭배하고 찬양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천황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극렬한 전쟁을 벌였고 이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천황을 위한 죽음’을 찬양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건립한 것이다. 야스쿠니가 죽음을 숭배하는 행태는 차츰 일본인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었고, 일본인들은 가미카제와 같은 살인 무기가 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더욱 섬뜩한 것은 이러한 죽음의 숭배가 가톨릭과 야스쿠니 신사 모두에게서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전쟁 후 불태워질 위기에서 가톨릭의 수호 덕분에 극적으로 살아남은 야스쿠니는 이제 전 현직 일본 총리가 직접 참배하거나 공물을 바칠 만큼 그 위력을 확장해 가고 있다. 과거 일본이 강대국으로서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인을 학살하던 때는 ‘일본은 신의 배려로 무기를 든 것’이라며 지지를 보냈던 종교 집단이 이제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을 향해 ‘성모 마리아가 중국의 수호자’라며 사랑과 화해의 제스쳐를 보내고 있다. 이는 과거와 같이 강자에 편승하는 교활한 역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섬뜩한 사실을 보여 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선(善)이 무너지는 위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악랄한 죄악이라는 발언(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a period of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을 자주 했다. 악을 보고도 침묵한다면 그 침묵하는 자가 악을 행한 자보다 더욱 악하다는 것이다. 이 침묵을 깨야 할 책임은 못 배운 자보다 배운 자에게, 힘없는 자보다 힘 있는 자에게 더욱 클 것인데, 미국 명문가의 엘리트였던 케네디 대통령은 비록 가톨릭 신자였어도 정직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피와 죽음을 숭배해 온 집단은 인간을 사육하고 생각을 지배한 역사를 가졌다. 종교 사칭 집단은 피와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사기술로 전 세계에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오늘도 전 세계 신도들이 미사에서 ‘예수의 피’를 마실 때 그들의 신이 내려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일까? 죽음의 광기일까?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 홀로코스트의 진범(眞犯)은 누구인가?(下)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 홀로코스트의 진범(眞犯)은 누구인가?(下)

<다시 쓰는 세계사 15>

나치가 폴란드에 세운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대인을 노동 착취로 혹사시킨 강제 수용소이자, 1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집단 학살한 ‘절멸 수용소’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유대인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학살하는 것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이라고 명명했던 나치는 그 최종 해결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완결되는 장치를 고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독가스 치클론 B를 사용한 가스실이었다. 유대인들이 화물 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에 […]

순교(殉敎)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죽음을 불사하는 신앙인가? 죽음을 숭배하는 사교(邪敎)인가?

순교(殉敎)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죽음을 불사하는 신앙인가? 죽음을 숭배하는 사교(邪敎)인가?

다시 쓰는세계사 <11>

1612년 10월 8일, 일본의 통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 국왕<자료1>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가톨릭 신부들은 일본인을 가톨릭으로 끌어들인 후 종교를 빌미로 큰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톨릭의 생각대로 되는 것입니다.”(야마모토 시치헤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당시 네덜란드는 일본과 무역 거래를 하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80년 전쟁을 치른 것을 비롯해 가톨릭 […]

1955년 9월 16일 인천집회

1955년 9월 16일 인천집회

이달의 역사 잠실 야구 경기장 보다 큰 규모 수만 명 모여 은혜의 창파 이뤄 1955년 9월 16일, 인천 시민 심령 대부흥회가 열렸다. 일명 ‘동산운동장 집회’라 불리는 하나님의 천막집회였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동산중학교 운동장에 운집했다. 당시 동산중학교 운동장은 인천에서 가장 넓은 공터였다. 1957년 정비된 동산중학교 운동장의 넓이는 10,760평이다. 동대문 야구경기장이 5,449평, 잠실 야구경기장이 […]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살인자로 단죄하다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살인자로 단죄하다

다시 쓰는세계사 <10>

1910년 3월 9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있었던 고해성사에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사형 집행을 앞둔 한국인 사형수가 가톨릭 신부를 만나 고해하는 자리였는데, 이 자리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사형수가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義士)였기 때문이다. <자료1> ◈ 독립운동가에게 찍어준 살인자 낙인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주권을 침탈당하고 격렬하게 항거하던 때로, 안중근 의사가 식민 지배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은 […]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악랄한 범죄자인가, 용서의 구원자인가?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악랄한 범죄자인가, 용서의 구원자인가?

다시 쓰는세계사 <9>

◈ 일본 학자 눈에 비친 고해성사 1620년, 일본 학자 후칸사이 하비안(1565년~1621년)은 로마 가톨릭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저서를 집필했다.<자료1> 제목부터 ‘가톨릭의 신을 파괴하다.’라는 뜻의 『하데우스(破提宇子)』인 이 저서는 가톨릭의 가장 큰 문제가 고해성사라고 지적했다. <자료2> ‘고해성사는 말로 고백만 하면 죄가 소멸된다는 것으로 이는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살인과 같은 중범죄도 가톨릭 신부에게 말만 하면 죄가 […]

일본에게 노예 무역과 잔인한 폭력을 교사(敎唆)하다 … 반인류 범죄의 뿌리를 찾아서

일본에게 노예 무역과 잔인한 폭력을 교사(敎唆)하다 … 반인류 범죄의 뿌리를 찾아서

다시 쓰는세계사 <8>

■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톨릭 금지령을 내리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인 1612년, 일본의 쇼군(しょうぐん, 将軍)으로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 금지령’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에 가톨릭이 광범위하게 퍼져 신도가 60만 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가톨릭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톨릭을 금지한 첫 번째 이유는 가톨릭이 순교자를 찬미하는 행태에 대한 강한 반발 내지 혐오 때문이었다. […]

전쟁의 기술과 야욕은 어디서 오는가? 임진왜란을 촉발한 숨은 범죄 집단에 대하여

전쟁의 기술과 야욕은 어디서 오는가? 임진왜란을 촉발한 숨은 범죄 집단에 대하여

다시 쓰는 세계사<7>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는 세계를 향해 무기 개발을 멈추고 그 돈으로 감염병 연구를 하라고 촉구했다.<자료1> 무기 만들 돈으로 사람 살리는 연구를 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지적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 무기를 개발하고 구입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계속돼 온 일이다. 지금부터 480여 년 전 일본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 […]

모두를 속인 사기범은 누구인가? … 코로나 바이러스가 남긴 미스터리

모두를 속인 사기범은 누구인가? … 코로나 바이러스가 남긴 미스터리

이슈추적 <다시 보는 뉴스>

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사회에 두 가지 미스터리를 던져 주었다 누가 31번 확진자를 감염시켜 엄청난 확산을 일으켰는가? 누가 진짜 사기 전도로 대중을 기만하고 있는가?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던 금년 4월 11일, 이탈리아 가톨릭교회는 토리노 수의(壽衣)를 공개했다. 토리노 성당에서 보관하는 이 수의는 예수가 죽은 뒤 시신을 감쌌다고 주장하는 세마포 천으로, 가톨릭에서는 이 천이 병을 낫게 하는 등 기적을 […]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수은 중독과 매독, 탐욕이 부른 질병에 대하여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수은 중독과 매독, 탐욕이 부른 질병에 대하여

다시쓰는 세계사 <6>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빈자의 날”을 제정해 해마다 빈곤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때마다 노숙자와 실업자를 베드로 성당에 초대해 함께 식사하는 교황의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었다. 작년 11월 빈자의 날에 교황은 베드로 성당 미사에서 “소수의 탐욕으로 다수가 빈곤해진다.”며 탐욕의 세력 때문에 다수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강조했다.<자료1> 탐욕이 수많은 사람을 빈곤에 빠뜨리는 일은 역사에서 반복되어 왔다. 스페인에게 […]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식민 지배의 신호탄과 전염병 생물학 폭탄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식민 지배의 신호탄과 전염병 생물학 폭탄

다시쓰는 세계사 <5>

교황 프란치스코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류와 문화를 케이크에 비유해 설명한 적이 있다. “인류와 문화는 케이크처럼 조각조각 자를 수 없다. 케이크를 잘라 반은 네가 갖고, 반은 내가 갖는 식의 협상으로 갈등이 종결되지 않는다. 함께 대화하고 건설해야 한다.” 세계 역사에서 케이크를 나누는 식의 협상은 여러 번 있었다. 각 나라의 인류와 문화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경계를 나눠 버린 최초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