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②

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②

▣ 임진왜란, 한반도를 지옥의 참상에 몰아넣다 1592년 임진년에 발발하여 1598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한다. 이 가운데 1597년 정유년에 일어난 재침략 전쟁이자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쟁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따로 명명한다. 그런데 이 정유재란 시기에 왜군을 따라 조선에 건너와 전쟁의 참상을 모두 목격한 종군 승려가 있었다. 일본의 종군 승려 게이넨(慶念)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라는 일기에 자세히 기록했는데, 그의 기록은 정유재란 당시의 참혹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8월 6일, 산도 들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사람을 보면 무참하게 칼로 베어버리고는 쇠줄과 대나무로 목을 묶어 끌고 간다. 묶인 부모는 어린 자식을 걱정하며 울부짖고, 자식은 어버이를 찾아 울며 헤맨다. 이렇게 비참한 모습은 난생처음으로 보았다. (野も山も、城ハ申におよはす皆々やきたて、人をうちきり、くさり竹の筒にてくひをしハり、おやハ子をなけき子ハ親をたつね、あわれ成る體、はしめてミ侍る也。) 8월 8일, 고려(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베어 죽여 갈라 놓으니,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된다. 서로 울부짖는 그 탄식은, 마치 지옥의 옥졸에게 형벌을 받는 것과 같았다. (かうらい人子供をハからめとり、おやはうちきり、二たひとみせす。たかひのなけきハさなから獄卒のせめ成りと也。) 8월 16일, 성안의 사람들은 남녀 모두 남김없이 죽여서 생포한 사람이 없다. (城の内の人數男女殘りなくうちすて、いけ取物ハなし。) 8월 18일, 날이 밝아 성 밖을 보니, 길바닥에 죽은 자들이 모래알처럼 널려 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다. (夜明て城の外を見て侍れハ、道のほとりの死人いさこのことし。めもあてられぬ氣色也。) 8월 28일, 가는 도중에 길가에서도 산야에서도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베어 죽인 모습이 차마 다시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가는 길마다 베여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여…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는 이가 없구나. (道すから、路地も山野も男女のきらいなくきりすてたるハ、二目共見るへきやうハなき也。道すからきられてしする人のさま五體につゝくところなきかな) 11월 19일, 일본으로부터 갖가지 상인들이 일본군을 따라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인신매매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서 달아나지 못하게 밧줄로 목을 묶고 끌고 다닌다. 잘 걷지 못하면 몽둥이로 몰아세우고 마구 두들겨 패는 모습이 마치 지옥의 하수인인 아방나찰(阿傍羅刹)이 죄인을 고문하는 것이 이런 모습일까 하고 생각되었다.(日本よりもよろつのあき人もきたりしなかに、人あきないせる物來り、奥陣ヨリあとにつきあるき、男女老若かい取て、なわにてくひをくゝりあつめ、さきへおひたて、あゆひ候ハねハあとよりつへにておつたて、うちはしらかすの有様ハ、さなからあほうらせつの罪人をせめけるもかくやとおもひ侍る。) <참고자료3>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서 일어난 노예매매의 참상 – 자료화면 출처: KBS <역사스페셜> 임진왜란 2편, 일본승려 정유재란 종군기 “산도 들도 불타고 있었다” / KBS <역사추리> 34회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이었다’ 1부 그의 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선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비인간적인 노예매매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는 불과 10년 전, 오무라 유코가『규슈 원정기』에 기록했던 일본에서의 그 참상과 흡사하다. 1998년 12월 11일자 부산일보 기사〈임란 조선인의 수난현장-8 노예시장〉에서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가미가이토 겐이치 교수의 저서『공허한 출병』을 인용해 “일본 상인들은 포르투갈인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행위를 배워 조선인 포로를 노예로 매매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전비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왜군 지휘부는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거나 군수물자와 교환하는 방식을 학습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1996년 9월 6일 7시 30분에 방영된 KBS <역사추리> 34회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이었다’에서는 임진왜란이 영토침략전쟁이 아니라 사실상 노예전쟁이었음을 입증하기도 했다. 해외로 팔려나간 조선인 노예의 수는 정확히 집계하기 어려웠다. 전쟁 통에 작성된 포로 명부가 체계적으로 남아있지 않고, 포르투갈 무역망을 따라 마카오·인도·유럽 등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을 수 있는 자는 누구든 일본으로 잡아가 경작을 대신 하게 했다”는 선조실록의 기록, “조선의 남자 포로가 3~4만이다. 늙은이와 여자를 합치면 그 곱절은 될 것이다”라는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의 기록, “사쓰마(現 가고시마)주에 3만 7백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다.”는 광해군 일기의 기록,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스쿠도(scudo·이탈리아 옛 화폐단위), 페루 노예가 400스쿠도인 것에 반해 조선인 노예는 2.4스쿠도에 불과했다는 카를레티의 동방여행기(Viaggi di Francesco Carletti) 등.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여러 사료들을 종합하여, 학계에서는 임진왜란 7년 동안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수를 약 20만 명의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임란 당시 조선인들의 비극은 노예로 팔려간 데서 그치지 않았다. 학살의 잔학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에도 학살은 있었다. 그러나 2차 침략인 1597년 정유재란에 이르러 그 성격은 차원이 달라진다. 이전의 학살이 전투 과정에서 벌어진 개인적인 약탈과 살인이었다면, 정유재란의 학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가 차원에서 내린 조직적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서 억류 생활을 했던 조선의 문신 강항이 남긴『간양록(看羊錄)』에는 히데요시의 명령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마다 귀는 둘이요, 코는 하나다. 목을 베는 대신에 조선 놈의 코를 베어올려라. 병졸 하나에 코 한 되씩, 모조리 소금으로 절여서 보내도록 하라. (人有兩耳,鼻則一也。宜割朝鮮人鼻,以代首馘。一卒各一升。沈之以鹽,送于賊魁。)” 코의 숫자는 곧 왜군들의 전공(戰功)이 되었고, 왜군들은 자신들의 전공을 높이기 위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코를 베어 보냈다. 실제로 한 왜군 부자(父子)는 “남녀와 갓난아이까지 남김없이 베어 죽이고, 코를 베어 그날그날 소금에 절였다.”며 이를 자신들의 전공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코 베기 현장을 직접 목격한『난중잡록(亂中雜錄)』의 저자 조경남은 “사람만 보면 죽이든 안 죽이든 코를 베었으므로 그 뒤 수십 년간 조선의 길에서는 코 없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기록했고, 정유재란을 직접 겪은 실학자 이수광도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 사전『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이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코는 베어 없어도 목숨은 건져 코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썼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도 이 참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소중한 것을 빼앗긴다는 뜻으로 쓰이는 ‘눈 뜨고 코 베어 간다’는 표현, 그리고 아이들에게 조심하라며 겁을 줄 때 쓰는 ‘에비!’라는 표현이 코와 귀를 베어 가던 일본군, 즉 ‘이비(耳鼻)야가 온다’는 경고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널리 회자된다. 한반도 전선에서 벤 코를 히데요시의 코 수집관에게 인도할 때 일본군 부대장은 반드시 코 영수증을 받아두었고, 코가 일본에 도착하면 히데요시는 그 수를 확인한 뒤 부대장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오늘날 일본 각지에 남아있는 코 영수증과 감사장을 살펴보면, 남원성 전투가 있었던 1597년 8월 15일부터 약 1개월간에 걸쳐 코 베기가 자행되었는데, 왜군 무사 오코치 히데모토가 기록한『조선물어(朝鮮物語)』에 따르면, 이 짧은 기간 동안 무려 214,752개의 코가 일본으로 보내졌다. 또한『조선물어』는 교토 동쪽 대불전 부근에 코들을 쌓아 묻고 석탑을 세워 누구나 볼 수 있게 전공을 기렸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코 무덤(鼻塚)은 현재까지도 교토에 남아 그 참상이 실제로 벌어진 역사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렇게 조선 전역을 피로 물들인 정유재란은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철수하며 비로소 끝을 맺는다. ▣ 가톨릭이 남긴 동아시아의 상흔과 배상 논의의 빈자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뒤, 일본과 조선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전쟁의 상처를 기억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두 나라 모두 가톨릭을 국가의 미래를 무너뜨릴 사교(邪敎)로 뇌리에 깊이 새겼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조선 전쟁과 인신매매는 기리시탄 세력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키웠는데, 그 결과가 바로 도쿠가와 막부의 금교 정책이다. 히데요시 사후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2년 막부 직할령에 기독교 금지 조치를 내렸고, 이어 1613년 말에는 ‘선교사 추방문’을 통해 선교사 추방과 금교 조치를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했다. 선교사 추방문에 의하면 기독교를 금지시킨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리시탄의 무리가 마침내 일본에 들어왔다. 그들은 단지 상선(商船)을 타고 와서 재물을 교역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함부로 사악한 법을 널리 퍼뜨려 바른 법을 미혹하게 하고, 나라의 정치를 바꾸어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 이는 큰 재앙의 싹이니 금하지 않을 수 없다. (…) 저 선교사의 무리는 의를 해치고 선을 파괴한다. 처형자(순교자)를 보면 기뻐하며 달려가 절을 한다. 이것을 종교의 본질이라 여기는데, 사악한 가르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둘러 금하지 않으면 후세에 반드시 국가의 우환이 될 것이다. (爰吉利支丹之徒党、適来於日本。非啻渡商船而通資材、叨欲弘邪法、惑正宗、以改域中之政号、作己有。是大禍之萌也、不可不制矣。(…) 彼伴天連徒党、皆反件政令、嫌疑神道、誹謗正法、残義損善。見有刑人、載欣載奔、自拝自礼、以是為宗之本懐。非邪法何哉。実神敵仏敵也。急不禁、後世必有国家之患。)” 조선 조정도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시간이 흘러 왜와의 국교를 재개하고서도, 가톨릭에 대해서만큼은 극도의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정조실록에 기록된 1795년 박장설의 상소문에 의하면, 박장설은 천주교가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가정과 제사로 이어지는 조선 사회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고, 집안과 나라에 해를 끼친다고 보았다. 또한 이 서양의 가르침이 명나라 때 중국에 들어온 뒤 여러 지역으로 퍼졌고, 끝내 일본의 기리시탄 세력에게까지 전해져 나라를 어지럽히는 혼란과 재앙의 씨앗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이후로도 조선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고 규정하며 천주교를 자신을 낳아준 부모도 공경하지 않으려 하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 인륜을 저버린 금수(禽獸)의 무리, 통화통색(通貨通色)하는, 곧 신앙을 돈으로 매수하고 남녀가 집단 혼음(混淫)하는 패륜아들의 집단이라 비판하며 경계해왔다. 이러한 기록들은 노예매매와 잔혹한 전쟁의 경험이 일본과 조선 모두에게 얼마나 막대한 피해와 공포, 거대한 트라우마로 남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 시작은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이 교회의 축복을 등에 업고 확장한 노예무역망이 대서양을 넘어 동아시아까지 번져 나가면서부터였다. 동아시아에서 노예무역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통로가 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전쟁은 조선과 일본 양국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조선은 전쟁 이후 여러 세대를 거치고도 인구와 토지, 경제력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일본 역시 외세에 대한 공포로 인해 쇄국 정책의 길로 들어서면서, 약 이백 년간 세계와의 교류에서 크게 후퇴해야 했다. 이처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학살되거나 끌려간 이들, 그 후손들이 겪은 차별과 빈곤, 전쟁이 남긴 정치·문화적 후유증까지 감안한다면, 노예무역은 두 국가의 미래를 파괴한 범죄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노예무역과 전쟁이 아니었다면, 동아시아의 근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재 국제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예무역 피해 배상 논의는 아프리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이 논의의 범주는 마땅히 동아시아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가톨릭이 축복한 노예무역과 전쟁의 여파가 동아시아에 남긴 깊은 상흔은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도, 배상 논의의 대상으로 다뤄지지도 않고 있다. 역사의 책임은 흔히 시대와 여론의 흐름을 타고 그 잘못이 크게 조명된 범위에서만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명받지 못한 피해까지 양심 있게 성찰하는 것이 마땅한 책임의 자세일 것이다. 노예무역으로 인간의 존엄을 유린하고 다른 나라의 미래를 파괴해 부와 세력을 쌓아올린 자들의 행보를 역사는 계속 지켜볼 것이다. <참고자료4> 현재까지 남아 있는 코 베기 학살의 증거들 ■ 코 베기의 증거, 역사에 남다 코를 베어오라는 간양록의 기록 정유재란 때는 국가 차원의 조직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직접 조선인의 코를 베어 보내도록 명령했고, 코의 숫자는 곧 왜군의 전공이 되었다. 이에 왜군은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이거나 산 사람의 코까지 베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선의 길에서는 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 각지에는 실제로 코의 수량을 확인하는 ‘코 영수증’과 코를 수령하고 장수들의 공을 칭찬하는 ‘코 감사장’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교토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는 코를 묻었던 무덤이 남아있다.

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①

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①

교황 레오 14세가 과거 노예제도에 직접 관여했던 가톨릭교회의 과오를 인정했다. 지난달 25일 발표한 새 회칙 ‘마니피카 후마니타스 (Magnifica Humanitas, 위대한 인간성)’에서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교회 기관들조차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이 여러 차례 개입하여 유럽 군주들의 인간 예속을 정당화해 주었고, 특정 시기에는 이교도들을 노예로 삼을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다”며 교황청의 역사적 책임을 시인한 것이다. 외신들은 이를 두고 이례적이라 평가했다. 과거 다른 교황들도 노예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적은 있었으나, 그 책임을 교회가 아닌 신자들의 잘못으로 표현해왔다. 그러나 이번 회칙에서는 가톨릭 국가들의 영토 확장과 이교도 정복 과정에서 교황이 직접 노예화 승인 칙령을 내려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구조적 본질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황의 이번 사과 선언으로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위로와 보상이 되었으며, 가톨릭의 과오가 청산될 수 있는 것일까. 이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노예무역이 인류사에 남긴 비인간적 만행과 그 참상의 기록을 통해, 가톨릭과 깊숙이 얽힌 노예무역의 역사를 재조명해 본다. ▣ 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잔혹했던 노예무역 오늘날 노예제의 역사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개 근세 이후 대서양을 건넌 흑인 노예무역일 것이다. 그러나 노예제는 근세 대항해 시대 때 갑자기 생겨난 제도가 아니다. 인류 역사 초기부터 전쟁 포로와 채무자, 정복당한 민족, 낮은 신분을 노예로 삼는 관습은 여러 문명권에 존재했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에도 노예제가 있었고,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예속과 강제 노동이 존재했다. 그런데 왜 수많은 노예제의 역사 가운데, 대항해 시대의 흑인 노예무역이 유독 강하게 기억되고 사과의 대상으로 소환되는 것일까? 아프리카 출신 독일의 교회사학자 피우스 아디엘레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이전까지와 차원이 다른 악행으로 분류하며 그 이유를 ‘유례없는 규모와 잔혹함, 인종차별, 종교의 승인과 축복’으로 들었다. 유럽 대륙 전체가 수백 년에 걸쳐 가담한 그 전례 없는 규모와 잔혹함도 다른 노예제와 구별되는 특징이었지만, 피부색을 기준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하고, 그들의 생명과 자유, 가족과 존엄을 송두리째 빼앗았다는 점, 종교가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축복하고 주도했다는 점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아디엘레는 이 시기를 “아프리카인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끝없는 구덩이가 인종·종교의 우월주의라는 삽으로 파헤쳐진 시대”라 표현했고, 나이지리아의 종교·문화 연구기관 윌런 연구원의 테오필루스 오케레 교수는 “유럽 기독교의 잔혹 행위, 교황과 신학이 승인한 비인간적 악행이 아프리카에 인명 손실과 행복, 자유, 존엄성의 상실을 안겨준 400년”이라 표현한 바 있다. 이들이 표현한 당시의 참상은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그 비극은 노역을 시작하기도 전, 해변으로 끌려와 노예선에 승선하는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 그 노예들에게 ‘승선’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그들은 배에 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존엄을 빼앗긴 채 화물처럼 그저 실려 갔기 때문이다. ▣ 축복받은 죽음의 노예선에 실려가다 15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노예가 된 1,240만 명 중 산 채로 아메리카 대륙에 ‘배송’된 ‘검은 상품’은 약 1,000만 명에 불과했다. 바다를 건너는 운송 과정에서 약 6분의 1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토록 참혹한 사망률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를 인간이 아닌 팔아치워야 할 상품으로만 취급했던 당시 유럽인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의『문명과 바다』를 비롯해 여러 서적과 기록에는 이른바 ‘중간항해(Middle Passage)’라 불린 이 과정의 참상이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아프리카 해안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까지 흑인 노예들을 강제 운송하는 단계를 ‘중간항해’라 한다. 이 항해는 대체로 50~80일 정도 걸리지만 길면 6개월까지 걸리는 수도 있었다. 이미 아프리카 내륙에서 해안까지 먼 거리를 끌려와서 몹시 쇠약해진 사람들이 다시 장기간 배를 타는 것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노예무역에 사용되는 배들은 대개 100~300톤 급의 소형 선박들이었는데, 오직 상업 이익만을 고려하는 상인들은 이 작은 배 안에 가능한 한 많은 노예들을 태우려고 했다. 심한 경우에는 배 밑바닥의 짐칸에 500명의 노예들이 꾸역꾸역 채워지기도 해서, 마치 통조림 속의 정어리처럼 빽빽하게 포개져서 바다를 건너야 했다.<자료1> 숨 막힐 듯 다닥다닥 겹쳐 누운 노예들은 관 속에 든 시체와 다름없었다. 선창의 공기는 너무나 덥고 체취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의 공기는 너무 탁해서 촛불을 켜고 들어가면 산소 부족으로 불이 꺼질 정도였다. 멀미로 인한 구토와 용변 문제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는데, 모두 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이동이 쉽지 않았고, 많은 경우 자기 자신, 혹은 남의 용변과 토사물 위에 누운 상태로 항해했다. 노예선 생활을 견디다 못한 어떤 노예들은 음식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차라리 곡기를 끊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상품으로서의 가치 때문에 노예들의 건강관리에 민감했던 선장은 선원들을 시켜 막대기, 깔때기 등을 이용해 노예들의 목구멍에 강제로 음식을 쑤셔 넣었다. 바다로 뛰어들려는 노예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선장들은 그런 행위를 시도한 노예들의 손발을 잘라 다른 노예들에게 겁을 주기도, 흑인들끼리 서로 감시하게 만들기도 했고, 갑판을 벗어날 수 없도록 아예 사슬로 묶어놓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단속도 상품 가치가 있는 노예들에 한한 것이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전염병에 시달렸고, 노예들을 검사하러 온 사람들은 때때로 죽은 노예들을 찾아내 시체를 사슬에서 풀어내야 했다. 죽거나 질병에 걸려 상품 가치가 없어진 노예들은 가차 없이 바다에 던져졌다. 식량과 물이 부족할 때도 노예부터 바다에 던져졌다.<자료2> 리버풀의 노예무역 책임을 다룬 책『리버풀과 노예제도』에서는 한 영국 노예선 선장이 병든 노예들을 살펴본 뒤 선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생생히 전한다. “내 생각엔 이 검둥이들은 바다에 던져버리는 게 낫겠어. 그러면 우리에게 공간도 더 생기고 상어 먹이도 되겠지. 보니 상어들이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군.” 던져진 노예들은 대서양 바다를 따라다니던 상어들에게 순식간에 뜯어먹혔다. 이렇게 인간적 연민이 완전히 결여된 처우 속에서, 영양실조, 탈수, 전염병, 트라우마, 적절한 의료 처치의 부재 등으로 인해 노예들 사이에서 높은 사망률이 나타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위험한 항해를 견뎌내야 했기에, 노예 상인들은 주로 젊고 건강한 남성들을 차출해갔다. 그 결과 아프리카의 미래가 될 인력이 대량으로 유출되었고, 지역 공동체의 생산 기반과 사회적 재생산 구조가 무너졌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가 장기간 발전의 기회를 잃고 저개발 상태에 머무르게 된 중요한 역사적 원인 중 하나였으며, 단순한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아프리카 대륙에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는 역사적 범죄였다. 이 범죄의 현장을 목격한 자들은 노예선을 ‘떠다니는 지하 감옥’, ‘움직이는 관’ 등으로 불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악명 높은 노예선들의 이름은 유럽인들에게 더없이 성스럽고 거룩한 이름을 하고 있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휴 토머스의 책『노예무역』에 따르면, 서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에서 브라질과 스페인령 아메리카로 흑인 아프리카인들을 실어 나른 포르투갈의 모든 대서양 노예선은 가톨릭식 이름을 달고 있었다. 배의 이름이 로마 가톨릭교회 성인들의 이름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많은 대서양 노예선들이 ‘자비의 성모호’와 같이 마리아의 이름을 달고 있거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 미카엘, 성 조지 같은 성인들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성인을 넘어 ‘선한 예수호’처럼 기독교의 신인 예수의 이름을 단 배들도 있었다. 휴 토마스는 “한 노예무역 회사의 경우 노예선 43척 중 두 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기록했다. 이 밖에도 영국 왕실의 대서양 노예선 ‘뤼베크의 예수호’는 일명 ‘좋은 배 예수’라 불렸으며,<자료3> 인도양 노예무역선 중에는 여러 명을 합친 ‘예수·마리아·요셉호’라는 이름의 배도 있었다. 노예선의 그 가톨릭적인 이름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일례로 수백 명의 흑인 노예들을 실어나른 ‘좋은 배 예수’의 선장 존 호킨스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선원들에게 ‘매일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했으며, 배 안에서는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예배가 열렸다. 이렇듯 실제 노예무역을 자행한 국가들, 그 선장과 선원들의 종교는 대부분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기독교였던 것이다. 독일의 교회사학자 피우스 아디엘레는 “교회는 단순히 노예제를 방관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가해자”였다며, 한스 프라이어의 『유럽의 세계사』와 크레펠의 연구를 인용해 “가톨릭 성인의 이름을 단 노예선에는 수도사와 사제들도 타고 있었으며, 그들은 출항 전에 노예선에 성수를 뿌리며 축복했다.”고 지적했다. 성모와 성인, 예수의 이름을 한 수많은 노예선의 돛과 깃발에는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 십자가 깃발 아래에서 사제들이 성수를 뿌리며 축복하는 동안 배의 밑창에서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죽음의 항해를 견디고 있던 것이다. ▣ 악마가 부리는 죽음의 노역 이 죽음의 항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을 기다린 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배 밑창을 벗어난 아프리카 흑인들은 이제 농장과 광산으로 끌려가, 채찍과 굶주림 속에서 또다시 죽음의 노역을 견뎌야 했다.<자료4,5> 노예제 폐지론자 시어도어 드와이트 웰드의 책『미국 노예제의 실상: 천 명의 증언』에 따르면,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영양실조에 걸렸으며, 비참한 옷차림과 거처에서 지내며 충분한 잠도 자지 못했다. 그들은 종종 목에 돌기가 달린 쇠목걸이를 차고, 발에는 무거운 쇠사슬과 추를 매달고 질질 끌며 밭에서 일해야 했다.” 작은 실수라도 눈에 띄면, 그들은 사악하고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방식으로 ‘정의’라는 이름의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끔찍할 정도로 매질을 당하고, 찢어진 살점에 붉은 고춧가루가 문질러졌으며, 고통을 가중시키기 위해 뜨거운 소금물과 기름이 상처 위에 부어졌다.” 조금이라도 주인에게 불복종하는 기색을 보이면 다른 종류의 가혹한 처벌과 신체 절단도 자행되었다. 남성 노예는 성기가 잘리는 것 외에도 “그들의 귀는 자주 잘려 나갔고, 사지는 잘리고, 눈은 뽑히고, 뼈는 부러지고, 살갗은 뜨거운 인두로 지져졌다.” 이러한 가혹한 노동과 학대로 서인도 제도와 북미의 플랜테이션 지역으로 끌려간 노예들의 평균 수명은 7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들의 처우를 개선하기보다는 더 많은 노예들을 사들이며 노동력을 충당했다. 그들에게 노예는 인격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닳아 없어지면 새로 사 오면 되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들이 자행한 행위는, 마치 악마의 지배를 받는 듯한 잔혹함 그 자체였다. 20세에 노예에서 탈출한 노예제 폐지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자서전『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의 부록에서 “부패하고, 노예 소유주이며, 여성을 채찍질하고, 아기를 유린하고, 편파적이고 위선적인 기독교를 증오한다”며 기독교는 “악마를 섬기기 위해 하늘 궁정의 제복을 훔쳐 입은 분명한 사례”라고 비난했다. 이어서 자신이 경험한 기독교의 모순적인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나를 둘러싸고 도처에 존재하는 종교적 허식과 과시, 그리고 끔찍한 모순들을 생각하면,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혐오감에 휩싸인다. 우리에게는 목사인 인간 납치범들이 있고, 선교사인 여성 채찍질꾼들이 있으며, 교회 신자인 영아 약탈자들이 있다. 평일에는 피로 얼룩진 소가죽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이 일요일에는 설교단에 오른다. 매주 내 노동의 대가를 빼앗아 가는 사람이 일요일 아침에는 생명의 길과 구원의 길을 보여 주는 지도자가 된다. 내 누이를 매춘으로 팔아넘긴 사람이 경건하게 순결을 옹호하는 자로 나선다. 우리는 도둑이 도둑질을 반대해 설교하고, 간음자가 간음을 반대해 설교하는 모습을 본다. 교회를 짓기 위해 남자들이 팔리고, 복음을 지원하기 위해 여자들이 팔리며, 가난한 이교도들에게 줄 성경을 사기 위해 아기들이 팔린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한다. 노예 경매인의 종소리와 교회 종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지고, 상심한 노예의 애통한 울부짖음은 경건한 주인의 종교적 외침에 묻혀버린다 (…) 거래상은 피 묻은 금을 바쳐 설교단을 지원하고, 설교단은 그 대가로 그의 지옥 같은 사업을 기독교의 옷으로 덮어 준다. 여기서 종교와 강도질은 서로의 동맹이 된다. 천사의 옷을 입은 악마들이 있고, 지옥이 천국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I therefore hate the corrupt, slaveholding, women-whipping, cradle-plundering, partial and hypocritical Christianity of this land. […] Never was there a clearer case of “stealing the livery of the court of heaven to serve the devil in.” I am filled with unutterable loathing when I contemplate the religious pomp and show, together with the horrible inconsistencies, which every where surround me. We have men-stealers for ministers, women-whippers for missionaries, and cradle-plunderers for church members. The man who wields the blood-clotted cowskin during the week fills the pulpit on Sunday, and claims to be a minister of the meek and lowly Jesus. The man who robs me of my earnings at the end of each week meets me as a class-leader on Sunday morning, to show me the way of life, and the path of salvation. He who sells my sister, for purposes of prostitution, stands forth as the pious advocate of purity. […] We see the thief preaching against theft, and the adulterer against adultery. We have men sold to build churches, women sold to support the gospel, and babes sold to purchase Bibles for the poor heathen! all for the glory of God and the good of souls! The slave auctioneer’s bell and the church-going bell chime in with each other, and the bitter cries of the heart-broken slave are drowned in the religious shouts of his pious master. Revivals of religion and revivals in the slave-trade go hand in hand together. The slave prison and the church stand near each other. The clanking of fetters and the rattling of chains in the prison, and the pious psalm and solemn prayer in the church, may be heard at the same time. The dealers in the bodies and souls of men erect their stand in the presence of the pulpit, and they mutually help each other. The dealer gives his blood-stained gold to support the pulpit, and the pulpit, in return, covers his infernal business with the garb of Christianity. Here we have religion and robbery the allies of each other —devils dressed in angels’ robes, and hell presenting the semblance of paradise.)” 당시 유럽인들은 어떻게 같은 인간에게 이런 끔찍한 만행들을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저지를 수 있던 것일까? 대서양 흑인 노예무역을 가능하게 한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제도적 책임을 추적한 학술서『교황들, 가톨릭교회와 흑인 아프리카인의 대서양 노예화 1418-1839』에서는 그러한 만행을 주도하고 실행한 것은 기독교 국가들이며, 이를 가능하게 한 원흉으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교황들의 칙서로 꼽았다.

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②

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②

▣ 교황들의 칙서로 노예제를 축복하다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이러한 잔혹 행위와 대학살의 가해자는 지금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가톨릭 왕과 군주들(Catholic kings and princes), 그리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 다른 주요 유럽 기독교 국가 정부로만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도덕적 권위를 지녔어야 할 교회와 교황이 오히려 이러한 잔혹 행위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축복하고 승인하며 노예제의 확산과 유지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0년 4월호 뉴 아메리카 매거진은 대서양 노예무역에 교회의 역할을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아프리카 최초의 유럽 노예 상인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1455년에 교황의 축복을 구하고 받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윌런 연구원의 오케레 교수도 “유럽이 아프리카에 가한 중대한 불의를 시작하고, 조장하고, 축복하는 데 있어 교회와 성직자들의 역할은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다.”며 교회가 노예무역을 조장하고 아프리카 흑인 노예 제도의 오랜 악행에 축복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12세기 십자군 원정을 비롯해 가톨릭 국가들이 이교도의 땅을 정복했을 때, 이를 정당화하고 축복한 교황 칙서들은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이며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칙서로는 1452년과 1455년 교황 니콜라스 5세가 발행한「둠 디베르사스(Dum Diversas)」와「로마누스 폰티펙스(Romanus Pontifex)」, 149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발행한「인테르 카에테라(Inter Caetera,)」가 꼽힌다. 1452년「둠 디베르사스」가 이교도를 침략하고 정복해 영구 노예로 삼을 수 있다는 원칙적 허가를 내린 문서였다면, 1455년「로마누스 폰티펙스」는 그 권한을 더 구체화한 문서였고, 1493년「인테르 카에테라」는 새로 발견된 땅에 대한 스페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문서였다. 이러한 칙서들로 인해, 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이교도의 땅을 빼앗고 사람을 노예로 삼는 행위가 교황의 권위로 정당화되었고, 그들은 오히려 이교도를 벌하고 기독교를 선교하는 공로로 죄의 사면과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다음은 1452년 교황 니콜라스 5세가 발행한「둠 디베르사스」의 주요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교도 침략과 노예화의 권한을 부여하고, 그 폭력을 신앙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이를 거역하는 자에게는 신의 진노를 내세워 위협하는 구조를 관찰할 수 있으며, 이 구조는 이후 발행된 비슷한 유형의 정복·노예화 문서들의 원형이 되었다. “우리는 사도적 권위를 부여받아 이 문서를 통해 귀하에게 사라센인(무슬림)과 이교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원수인 모든 불신자들을 그들이 어디에 있든 침략하고 수색하며 사로잡고 정복할 수 있는 완전하고 자유로운 권한을 부여한다. 또한 그들의 왕국과 공국, 토지와 도시, 그 밖의 모든 재산을 차지하고, 그들을 영구적인 노예로 삼을 수 있도록 허가한다. 나아가 그들의 모든 통치권과 소유물, 모든 재산을 귀하와 귀하의 후계자, 곧 포르투갈 왕위에 영구히 귀속시킬 수 있도록 허가한다. (…) 우리는 귀하에게 죄 사함을 위한 완전한 사면을 허락하며, 또 이 신앙의 싸움에서 당신 편에 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적들을 공격하는 데 힘쓰는 지휘관과 군인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 신자들에게도 같은 사면을 허락한다. (…) 누구도 이 칙령을 무모하게 거역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누군가 감히 이를 시도한다면, 그는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진노를 사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tibi Saracenos, et Paganos, aliosque infideles, et Christi inimicos quoscunque … Regna, Ducatus, Comitatus, Principatus, aliaque Dominia, Terras, Loca, Villas, Castra… invadendi, conquerendi, expugnandi, et subjugandi, illorumque personas in perpetuam servitutem redigendi … plenam, et liberam, auctoritate Apostolica, tenore praesentium concedimus facultatem (…) Duces, Principes, Barones, Milites, aliquique Christi fideles … in hac fidei pugna concomitants … plenariam remissionem omnium, et singulorum peccatorum, criminum, delictorum, et excessuum … devotionis tuae eadem auctoritate indulgemus. (…) Nulli ergo omnino hominum liceat hanc paginam nostrae concessionis, restitutionis, voluntatis, indulti, et decreti infringer, vel ei ausu temerario contraire. Siquis autem hoc attentare praesumpserit, indignationem Omnipotentis Dei, ac Beatorum Petri et Pauli Apostolorum se noverit incursurum.)” 이러한 권한 부여는 니콜라스 5세 한 사람의 칙서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칼릭스투스 3세, 식스토 4세, 알렉산데르 6세, 레오 10세 등 후대 교황들도 가톨릭 군주국에 부여된 정복과 노예화의 권리를 확인하거나 강화하는 문서들을 잇달아 발행했다. 결국 이교도 침략과 흑인 아프리카인 노예화는 일회성 허가가 아니라, 여러 교황의 문서를 거치며 반복적으로 승인되고 제도화된 권한이었다. 1548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인신매매를 승인하는 자의교서를 내리기도 했다. 바오로 3세는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사목적 직무에 따라 하느님의 도움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인들이 노예 부족으로 겪는 어려움을 기꺼이 돕고자 하며, 노예가 많을수록 상속 재산이 풍족해지고, 농지가 더 잘 관리되며, 도시가 확장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로마인이든 비로마인이든, 세속인이든 성직자든, 신분이나 지위, 계급,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남녀를 불문하고, 다른 곳에서 관례대로 노예를 자유롭고 합법적으로 매매하고, 노예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고, 노예를 공개적으로 소유하고, 그들의 노동을 이용하고,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하도록 강요할 수 있도록 명합니다. 그리고 사도적 권위로, 이 문서들의 취지에 따라, 자유를 호소하는 노예들은 결코 그들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지 못할 것이라고 영구히 제정하고 선포합니다.(By reason of our Pastoral Office, we gladly attend to the troubles due to the lack of slaves of individual Christians as far as we can with God’s help, and having regard to the fact that the effect of a multitude of slaves is that inherited estates are enriched, agricultural property is better looked after and cities are extended, we decree that each and every person of either sex, whether Roman or non-Roman, whether secular or clerical, and no matter of what dignity, status, degree, order or condition they be, may freely and lawfully buy and sell publicly any slaves whatsoever of either sex, and make contracts about them as is accustomed to be done in other places, and publicly hold them as slaves and make use of their work, and compel them to do the work assigned to them. And with Apostolic authority, by the tenor of these present documents, we enact and decree in perpetuity that slaves who flee to the Capitol and appeal for their liberty shall in no wise be freed from the bondage of their servitude.)” 변증론자들은 이후 교황들이 노예제를 반대하는 문서를 냈다고 주장하지만 그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세례받은 카나리아 제도 주민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예화를 문제 삼았을 뿐, 대서양 흑인 노예무역 전체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교황청은 노예제와 실제로도 단절하지 않았다. 1488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스페인 왕 페르난도에게서 무어인 노예 100명을 선물로 받아 추기경들과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1629년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교황 함대 유지를 위해 노예 40명을 구매하도록 명령했다. 흑인 아프리카인 노예무역을 직접 거론한 문서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나왔는데, 그마저도 이미 세속 사회에서 노예제 폐지 여론이 거세진 뒤였으며, 위반자에 대한 파문 처벌도 담지 않았다. 결국 교황청의 태도는 일관된 반노예 선언이라기보다, 시대적 압력과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뒤늦게 나온 제한적 반응에 가까웠다. ▣ 망각의 문화 조장이 아닌 진실한 사과와 보상 요구돼 『교황들, 가톨릭교회와 흑인 아프리카인의 대서양 노예화 1418-1839』의 저자 아디엘레는 이 주제를 연구한 동기를 대서양 노예무역의 책임 소재를 정확히 하기 위함임을 밝히며 다음의 문제를 지적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종식된 지 150년이 지났지만, 그 기간 동안 가톨릭교회의 행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중요한 핵심은 가톨릭교회와 그 지도부가 노예무역이 끝난 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아프리카인 노예화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계속 유지해왔다는 점이다. 교회의 지도부는 흑인 아프리카인 노예화에 대한 교회의 공모의 심각성을 축소했고, 결과적으로 ‘망각의 문화’를 조장하고 노예화 국가 정부들과 한통속이 되어, 아프리카 흑인들 스스로가 노예화의 장본인이며, 따라서 이 수치스럽고 악랄한 행위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선전을 널리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joining the governments of the enslaving nations of Europe and America in spreading widely the propaganda that Black Africans themselves are the architects of their enslavement and therefore are to be blamed for the shame and the evil of this slave trade.) 이 주제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에 대한 심도 있는 학술 연구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를 옹호하는 변증적인 글을 쓰는 경향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들은 이전 교황들이 교황 칙서를 통해 흑인 아프리카인들의 대서양 노예무역을 시작하고, 축복하고, 지원함으로써 노예제도를 지속적으로 옹호해 왔다는 상당한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전체의 이미지에 입힌 수치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이었다.” 이번에 발표한 회칙에서 레오 14세는 이전 교황들이 사과문에 사용하던 ‘가담했다’, ‘연루됐다’, ‘방관했다’, ‘침묵했다’라는 표현 대신 교황청이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미국 출신의 교황 레오 14세(본명 로버트 프레보스트)는 루이지애나 크리올 혈통으로, 노예였던 조상과 노예 소유주였던 조상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는 노예제를 비판했던 19세기 후반 교황 레오 13세를 기리기 위해 교황명을 선택했을 정도로, 이 역사를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레오 14세가 새 회칙에서 ‘가톨릭교회가 직접 노예를 부리고, 노예제 합법화를 주도했던 사실’을 직접적으로 인정하며 사과하자, 이제는 그 사과의 진정성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시작되었다. 지난 6월 10일, 미국의 법률 뉴스·해설 매체 JURIST에는 “교황의 사과가 진실됨을 보이기 위해선 구체적인 보상과 기록 공개, 제도적 책임 인정 및 교육이 뒤따라야 한다”는 취지의 논평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진심 어린 용서는 단순한 상징적 제스처에 그치지 않는다. 수 세기 동안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규범을 형성해 온 가톨릭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불의 중 하나에 관여했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교황의 칙서들은 기독교 군주들이 비기독교 지역을 정복하고 그 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허용했고, 이는 유럽의 식민지 확장과 대서양 노예무역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했다. 사실상 교회는 아프리카인과 원주민의 대량 노예화를 초래한 관행을 신성시하고, 노예 제도를 기독교의 도덕적 틀 안에 자리 잡게 했다.(In effect, the Church sanctified practices that led to the mass enslavement of Africans and indigenous people, embedding slavery within the moral framework of Christendom.) 이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비판은 너무 늦었다. 세속 사회에서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이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후인 19세기에 들어서야 교회는 노예 제도에 대해 뒤늦은 비판 성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교황 레오 14세가 이를 인정한 것은 교회가 가장 기본적인 인권 중 하나인 자유를 옹호하는 데 뒤처졌다는 도덕적 실패를 시인하는 것이다.(Pope Leo’s acknowledgement of the delay is an admission of moral failure as the Church lagged behind in defending one of the most fundamental human rights –freedom.) 과거를 부인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오히려 대중의 교회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킨다. 죄를 직면하기를 거부하는 신앙 공동체는 위선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레오 14세는 교회의 제도적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인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과는 필요하지만 구체적인 조치가 수반되지 않으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는 배상이 적절한지 고려해야 한다.(The Church must consider whether reparations are appropriate.) 배상은 노예제도로 인해 역사적으로 불이익을 당했던 공동체에 대한 재정 지원, 교육 투자 또는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 등의 형태가 있을 수 있다. 구체적인 약속이 없다면, 사과는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그칠 것이다.” 6월 2일, 범아프리카 배상 운동 네트워크 ‘배상 치유 국제 연대(Global Circle for Reparations and Healing)’도 이번 회칙에 어떠한 배상도 언급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이 단체는 2022년 바티칸을 방문하여 교회의 책임 인정과 사과, 노예제도와 관련된 교황령 폐지, 배상 위원회 설립, 그리고 수 세기 동안의 피해 복구를 위한 상당한 재정적 약속을 요구하는 공식 배상 청원서를 전달한 바 있었다.<참고자료1>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사과한다면서 정작 단체가 요구했던 배상에 대한 약속은 하지 않았고, 노예제도와 관련된 교황령을 완전히 폐지하지 않았으며, 노예무역으로 인한 지속적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더 광범위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또 영국 로이터, 가디언지 등에 따르면 6월 17~19일 가나 아크라에서는 ‘Next Steps’ 컨퍼런스(정식명: 아프리카 노예 매매에 관한 유엔 결의안의 다음 스텝을 위한 고위급 협의 회의)가 열렸다. 지난 3월 유엔 결의안은 대서양 노예무역을 ‘인류에 대한 가장 심각한 범죄’로 규정하였으며, 이에 따른 배상 논의를 구체화하기 위해 이번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회의에는 가나를 비롯해 나미비아, 라이베리아, 세네갈, 상투메 프린시페의 대통령과 베이도스 총리, 적도 기니의 부통령 등 80개국 이상에서 국가 원수, 정부 수반, 장관, 시민 사회 대표, 역사가, 연구원 및 법률 전문가들이 참석했으며, 19개 항의 국제 배상 정의 추진안이 논의 및 채택되었다. 이번 회의의 목적은 ‘단순한 인정’에서 ‘배상을 위한 구체적 조치’로 전환하는 것으로, 회의를 주최한 가나의 존 드라마니 마하마 대통령은 “역사는 죄책감을 물려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물려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History does not ask us to inherit guilt, but it asks us to ​inherit responsibility.)”라고 연설했다.<자료6> 노예제 피해 배상 규모는 천문학적이다. 2023년 2월 미국 국제법 학회(ASIL)와 서인도제도대학(UWI)이 공동 주최한 ‘아프리카 노예자들에 대한 국제법상 배상’ 제2차 심포지엄에서 경제·금융 컨설팅 업체 브래틀 그룹(The Brattle Group)은「대서양 노예제 피해 배상액 산정(Quantification of Reparations for Transatlantic Chattel Slavery)」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미국,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 브라질 등 각 노예무역 가담국의 배상 책임을 산정해, 전체 배상 규모를 ‘약 131조 달러(2023년 기준 약 17경 1,186조 원)’로 최종 산정했다. 브래틀 그룹은 노예가 된 사람들이 평생 빼앗긴 임금이 당시 얼마였는지 계산하고, 수백 년 동안 받지 못한 손실을 이자로 반영해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했다. 여기에 생명 손실, 자유 박탈, 신체·정신 피해, 성폭력 피해 보상액을 더하고,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계속된 차별로 세대를 이어 벌어진 부의 격차도 반영해 131조 달러라는 배상액을 산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산정 방식은 경제학적 손해 산정 모델에 따른 것으로, 돈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가족 해체, 문화 상실, 정체성 파괴 등의 피해는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보수적 추정치다. 이에 보고서는 이 배상액도 실제 피해액에 비해 과소평가된 것임을 강조했다. 피해 산정 범위 자체도 15~19세기 대서양 노예무역에만 국한된 것으로, 원주민 집단 학살과 토지 약탈, 원주민 기숙학교 피해, 근대 이후의 노예 착취, 아시아 노예무역에 대한 배상은 포함되지 않은 금액이다. 이 거대한 배상 규모 앞에서, 바티칸은 책임을 축소하거나 회피할 것이 아니라, 과거 자신들이 축복하고 노예무역에 앞세웠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과 협력해서라도 배상기금을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은 천문학적 숫자로도 그 크기를 다 담아낼 수 없는 깊은 죄악에 대한 책임의 무게다. 교황의 권위와 그들 신의 축복을 등에 업은 유럽 제국들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전역에서 벌인 노예화와 착취의 대가는 몇 마디 사과 표명으로 덮을 수 없다. 사과는 책임의 끝이 아니라, 배상의 시작이어야 한다. 사실 아프리카인들이 겪은 역사적 상처와 고통은 그 뿌리가 너무도 깊고 광범위하여, 그 어떤 형태의 배상으로도 온전히 치유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피해자들에게 진실된 사과를 할 의지가 있다면, 사과를 선언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금전적 배상에 한계가 있다면 빚을 내서라도 보상해야 하는 것이 예의다. 수백 년간 자행한 만행의 무게에 비하면 이는 마땅히 감수해야 할 최소한의 양심이다. 교황과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이 행한 죄악을 진정으로 직시하고 있는지 앞으로의 실질적인 행보를 통해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회칙은 여론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한 퍼포먼스적인 사과로 증명되는 것이며, 그 사과는 교회의 뿌리 깊은 위선만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결과로 남을 것이다. 한편, 가톨릭이 축복한 노예화의 영향은 대서양에만 머물지 않았다.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이 폭력의 구조는 일본과 조선의 역사 속에서도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되었다. 다음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임진왜란과 조선인 인신매매, 그리고 그 배후에 얽힌 기리시탄 다이묘와 가톨릭 선교의 그림자를 살펴보고자 한다.

세계 종교 탐구 <57>성수의 성스러움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②

세계 종교 탐구 <57>성수의 성스러움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②

▣ 소금으로 부패를 막으며 성스러움을 연출해오다 우선 현행하는 성수 예식에서 성수를 어떤 식으로 축복하는지 살펴본다. 가톨릭교회의 미사 공식 전례서인 『로마 미사 경본』의 ‘성수 예식’에 따르면, 사제는 성수를 만들 때 축성할 물이 담겨 있는 그릇을 앞에 놓고, 신자들을 바라보며 기도문을 낭송한다. 이때 다음과 같이 죄 사함과 병 치유를 구하는 구절이 낭송된다. “믿음으로 이 성수를 사용하는 저희의 […]

세계 종교 탐구 <57>성수의 성스러움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①

세계 종교 탐구 <57>성수의 성스러움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①

2024년 12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프랑스 코르시카 섬을 방문했다. 교황이 코르시카를 찾은 것은 가톨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당일 아침 거리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바티칸 공보실에 따르면, 교황은 교황 전용차 포프모빌을 타고 군중 사이를 천천히 이동하다가 성 요한 세례당에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는 포프모빌 위에서 군중을 향해 성수라며 가져온 물을 뿌렸다. 성수채 끝에서 물방울이 […]

세계 종교 탐구 <56>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사기다②

세계 종교 탐구 <56>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사기다②

▣ 숨겨왔던 위조 사기, 과학의 발달로 발각되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교회는 수의의 진위 검증에 대해 과학계와 언론의 거센 압박을 받게 된다. 연대 측정 분야에서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며 아주 작은 표본만으로도 정확한 연대 측정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가장 확실한 과학적 검증 방법인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왜 허가하지 않느냐”, “가짜인 것이 들킬까봐 숨기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1980년대 […]

세계 종교 탐구 <56>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사기다①

세계 종교 탐구 <56>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사기다①

지난 호에서는 예수의 처형 사건에 대한 1세기 역사 기록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들을 살펴보았다. 1세기 초, 성경의 주장대로 추종자들을 대거 거느렸던 영향력 있는 신흥 종교 지도자가 반역죄 판결을 받고 공개 처형되었다면, 이는 분명 특기(特記)되었어야 할 사건이다. 그러나 반란 사건을 비롯해 일개 범죄자의 재판과 처형까지 기록으로 남겼던 당시 로마 당국, 역사가, 저술가들의 기록에서, 예수의 기록은 찾아볼 수 […]

세계 종교 탐구 <55>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②

세계 종교 탐구 <55>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②

▣ 예수의 십자가형을 기록했다는 문헌은 조작이었다 1세기 유대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 중 가장 방대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AD 37 ~ AD 100)다. 요세푸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창세기부터 서기 66년까지 유대 민족의 역사를 집대성한『유대 고대사』인데, 유대 고대사에는 여러 정치적 사건들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자료7> 예를 들어『유대 고대사』19권에는 서기 41년 칼리굴라 황제의 암살 사건을 다뤘는데, 칼리굴라가 누구에게 […]

세계 종교 탐구 <55>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①

세계 종교 탐구 <55>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①

지난 6일, 아르헨티나 산후안 대성당은 수십 년 동안 분실되었던 한 성유물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못박혔던 십자가 파편’이라 주장하며 ‘성십자가’라 부르는 유물이었다. 산후안 대성당이 보관하던 것은 두 조각의 작은 나무 파편이었는데, 1944년 지진으로 행방불명 되었다가 최근 근처 학교의 예배당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자료1> 대성당 측은 이를 성당으로 다시 가져오며, 그 이유를 “시민들과 매일 성당을 찾는 […]

세계 종교 탐구 <54>과학과 종교는 우주 너머의 진실에  얼마나 도달했는가②

세계 종교 탐구 <54>과학과 종교는 우주 너머의 진실에 얼마나 도달했는가②

▣ ‘빅뱅 이론 파괴자’들이 관측되다 2021년, 인류의 새로운 눈이 우주를 향해 열렸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성공적으로 발사된 것이다. 적외선 관측에 특화된 제임스 웹 망원경은 가시광선 중심의 허블 우주망원경이 보여주지 못했던 영역을 포착하며, 먼지에 가려져 있던 별의 탄생 현장, 우주 초창기의 희미한 빛까지 담아냈다. 그런데 2023년 2월 22일 과학저널 ‘네이처’에 따르면,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현재의 표준 […]

세계 종교 탐구 <54>과학과 종교는 우주 너머의 진실에  얼마나 도달했는가①

세계 종교 탐구 <54>과학과 종교는 우주 너머의 진실에 얼마나 도달했는가①

“천문학의 역사는 멀어지는 지평선의 역사다.(The history of astronomy is a history of receding horizons.)” 이는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이 남긴 말이다. 천문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한계, 우주의 끝이라고 생각한 지점은 늘 더 먼 우주로 확장되어 왔다. 눈으로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던 인류는 망원경을 개발해 직접 별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더 선명하고 정확하게 우주를 관찰할수록 기존의 […]

세계 종교 탐구 <53> 성경만 주장하는 예수의 부활. 십자가에서 죽기는 했는가? ②

세계 종교 탐구 <53> 성경만 주장하는 예수의 부활. 십자가에서 죽기는 했는가? ②

▣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성경 외에도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들은 많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가장 특기할만한 사건인 부활에 대한 기록은 하지 않거나 부정한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의 경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로, 그들의 경전에서 예수를 어느 정도 비중 있게 다루며,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해주기까지 […]

세계 종교 탐구 <53> 성경만 주장하는 예수의 부활. 십자가에서 죽기는 했는가? ①

세계 종교 탐구 <53> 성경만 주장하는 예수의 부활. 십자가에서 죽기는 했는가? ①

지난달 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한 미술 전시회가 ‘신성모독’ 논란에 휩싸였다. 일부 작품들이 기독교를 조롱한다며 가톨릭 보수 단체들이 반대 시위를 일으킨 것이다. 논란이 된 작품 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개구리 조각’, ‘라텍스 돌기로 표현한 십자가의 예수’ 등이 있었다.<자료1> ‘개구리 조각’의 경우 2008년 이탈리아에서도 전시되었는데, 당시 교황이 직접 철거를 요청했으나 거부했으며, 이번에 재전시 되었다. 시위대 측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