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세계 종교 탐구 <19> 접신과 방언의 뿌리를 찾아서

세계 종교 탐구 <19> 접신과 방언의 뿌리를 찾아서

오른쪽의 그림은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 성당 천장 벽화의 한 장면으로, 사도행전 2장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자료1>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도행전 2장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한 지 50일째 되는 날 예루살렘에 모였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불의 혀가 각자의 머리 위에 나타났고, 그들은 ‘신의 영’을 충만히 받아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는 이날을 ‘오순절’ 또는 ‘성령강림절’이라는 절기로 기념한다. 성령 강림 사건은 사도들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오순절은 ‘초대교회의 탄생일’로도 여겨지며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3대 축일로 지켜지고 있다. 그런데 신을 받았다며 무아(無我)상태로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방언과 같은 종교 행위는 그리스도교 발생 이전부터 흔히 존재해왔다. 자신들이 신을 접했으며, 신의 말을 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신의 소리를 듣던 고대의 정신 체계와 방언을 행했던 여러 종교들을 알아보며 접신과 방언의 뿌리를 찾아가 본다. ▣ 신의 소리를 듣다 고대의 사람들은 신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자세히 말하면 머릿속에서 들려온 어떤 목소리를 신의 목소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정신 체계를 ‘양원적(兩院的) 사고방식’이라 한다. 이 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사람은 미국의 심리학자, 프린스턴 대학교의 줄리언 제인스 교수다. 제인스 교수는 좌뇌와 우뇌의 역할이 각각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양원제라는 정치 제도의 표현을 빌려 ‘양원적’이란 용어를 명명했다. 고대의 사람들이 들었던 목소리는 무엇이었을까? 제인스의 저서『의식(意識)의 기원(원제: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에 따르면 신의 목소리라 여겼던 소리의 정체는 우뇌의 명령이다. 일반적으로 우반구가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수합하고 처리하면, 좌반구가 이를 분석하는데, 그 기능이 통제되지 않고 우뇌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처리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반구의 명령을 환청의 형태로 듣는 것이다.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 보면 당시의 정신 체계는 ‘정신분열증적 환각’과 유사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기록들을 보면, 인간들의 통치자는 왕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신들의 환각적 목소리였음을 알 수 있다. 서기전 2500년경 라가쉬의 원뿔형 점토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키쉬의 왕 메실린은 그의 신 카디의 명령을 받아 들판의 농원에 경계비를 세웠다. 움마의 왕 우쉬가 그것을 빼앗을 계획을 세웠고, 그는 그 비석을 산산이 부숴 라가쉬 평원으로 진격했다. 신 닌기르수의 의로운 명령으로 움마에 전쟁을 일으켰다. 신 엔릴의 명령에 따라 그의 큰 그물로 덫을 놓았다.” 왕은 신의 명령을 듣고 그를 수행할 뿐, 무엇을 해야할 지 결정해 주는 것은 신의 명령이었다. 서기전 1700년경 라사 왕조 시대 원추형 토기에는 니네갈 여신에 대해 “상담자, 놀라운 지혜의 사령관, 모든 위대한 신들의 공주, 찬양받을 웅변가. 그의 선포에 맞설 자 누구랴”라며 칭송하는 내용이 있다. 신들의 소리를 듣고 조언을 받았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거대한 신전을 짓고 지극정성으로 신상을 모셨다. 신전에서는 신상이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여러 의식을 수행했다. 성수를 뿌려 신상을 목욕시키고, 옷을 차려입혔으며, 즐거운 향을 피우고, 빵과 고기 등의 음식과 음료를 제물로 바쳤다. 신상은 목소리 환각을 더욱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신상을 신전에 안치하기 전에 ‘입을 열어드리는 의식’을 치렀다. 또 환각 음성이 뜸해지던 시기에는 ‘입씻기 의식’을 거행했다. 사제는 주문을 외우며 신상의 입을 성수로 수차례 닦아냈다. 신상의 입을 정성껏 닦으면 신의 말씀이 부활할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명료함도, 출현 빈도도 점차 줄어들어갔다. 양원 정신이 약화된 요인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서기전 3000년경,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문자가 발명된 것이다. 기록을 남기고 분류함으로써 사회적 복잡성이 크게 증가되었고, 사람들이 처리하는 복잡성의 수준도 상승했다. 양원적 정신의 사람들은 익숙치 않은 상황이나 스트레스가 발생하면 내가 할 일의 결정을 신에게 미뤘었다. 하지만 복잡하다고 느끼는 한계치가 높아지자 더 이상 신을 찾지 않고 스스로 사고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신에 의지하던 양원적 정신 체계는 점점 주관적이며 의식적인 정신으로 전환되어 갔다. ▣ 신의 소리가 사라지다 서기전 1230년경 메소포타미아 역사상 처음으로 신이 부재중인 장면이 그려진다. 아시리아의 왕 투쿨티-니누르타의 제단 전면에 그려진 그림이다. 돌로 된 제단에 새겨진 부조에서 투쿨티 왕은 신이 없는 빈 보좌를 가리키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자료2> 그림에서 뿐만이 아니다.『투쿨티-니누르타 서사시』라는 문헌의 서두에는 바빌론의 신들이 자신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 바빌론 왕에게 화를 내고, 아무런 계시도 남기지 않은 채 도시를 버리고 떠나버리는 내용이 있다.<자료3> 이로써 투쿨티가 이끄는 아시리아군은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승리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쓰여진『지혜의 주님을 찬양하리(Ludlul bēl nēmeqi)』라는 시에서는 “나의 신은 나를 버리고 사라지셨다. 나의 여신은 나를 돌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 내 곁에서 걷던 선한 천사도 떠나버렸다.”며 더욱 직접적으로 신의 부재를 묘사하기도 한다.<자료4> 신이 인간을 저버린다는 생각은 양원적 정신이 뚜렷하던 시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기록들은 그 무렵 양원 정신의 파괴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그런데 양원 정신의 약화는 의도치 않은 변화였고, 사람들은 신의 부재를 불안해했다. 신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신을 찾는 기도는 예배의 중심행위가 되었다. 다음은 메소포타미아의 전형적인 기도의 예시로, 신 나부에게 올리는 기도이다. “오 주여, 당신은 강하신 자, 모든걸 아시는 자, 눈부신 자, 스스로 갱신하는 자, 완벽하신 자, 마르둑(바빌론의 최고신)의 첫 열매…… 공고히 예배의 중심이 되시며, 모든 숭배를 받으시는 이…… 당신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굽어보시며, 그들의 탄원을 받아들이십니다……. 외롭고 불안하며, 몸은 병들어 있습니다. 당신 앞에 이렇게 고개 숙이고 있사노니,…… 오 주여, 신 중에 현명하신 당신께서 입을 열어 나에게 선한 것을 명하소서. 오 나부신이여, 신 중에 현명하신 이여, 당신의 말씀으로 이 몸이 소생하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신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개인적 탄원으로 끝내는 메소포타미아의 기도 형식은 큰 변화 없이 현대 종교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 무아(無我)상태를 만들다 종교들은 마침내 기도보다 더 효과적으로 신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방식은 종교마다 달랐지만, 접신에 이르는 조건에는 모든 종교에 해당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무아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들은 성적인 환락이나, 술, 환각제, 향 등을 매개체로 하여 자아를 몰아내고 무아상태를 만들었다. 고린도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지역에서 성행했던 아프로디테, 디오니소스, 아폴로 신의 제의를 통해 예를 들어본다. 아프로디테는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다. 그녀를 기리는 축제에서는 난잡한 성교와 이를 매개로한 황홀경이 행해졌는데, 이는 음란했던 아프로디테의 성품을 재현함으로써 그녀와 정신적 인격적 합일에 이르고, 신의 호의를 얻기 위함이었다. 의식이 흐려진 채 황홀한 상태가 되는 것은 영적인 세계에 이르는 길이며, 신과 같이 되는 신화(神化)의 과정으로 여겨졌고, 이들은 성적인 환락을 통해 무아지경에 도달했다. 디오니소스는 무아경과 술의 신으로, 디오니소스의 숭배 의식이었던 비밀 야간 집회는 가히 광란의 축제라 할 수 있었다.<자료5> 처음에는 디오니소스 신에게 헌주한 후에 포도주 연회를 벌인다. 축제에 쓰는 포도주에는 밀의 맥각 같은 환각 물질을 첨가했는데, 이는 마약 환각제 LSD와 비슷한 효과를 냈다. 축제가 절정에 이르러서는 술에 취해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산기슭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었고, 제물로 바쳐진 짐승, 또는 어린아이를 산 채로 뜯어 먹고 그 피를 마셨다고 한다. 이는 신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상징적 행위로서, 일종의 신과의 합일이라는 뜻이었다. 『델피』의 저자 피터 호일은 디오니소스의 의식에서 입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입신의 경지에 이르면 그들은 무아의 상태에서 난잡한 춤을 추었고…… 그리고는 ‘에보이!’라고 뜻을 알 수 없는 감탄사를 외쳐댔다. 입신의 절정에 도달하면 그들은 신과 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들은 마침내 디오니소스의 영에 의해 충만하게 되어 신적 능력을 얻게 된다.” 아폴로는 태양의 신이자 진리와 예언의 신이다. 고린도에는 아폴로를 위한 신전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신전은 델피에 있는 것이었다.<자료6> 델피의 신전에는 신탁을 받아 전하던 여사제인 ‘피티아’가 있었다. 피티아는 입신적 상태에서 낯설고 이상한 말로 중얼거리며 신탁을 전달했다. 이 방언은 옆에 있는 사제에 의해서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되어 기록되었다. 신학자 타티안은 그리스의 신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음료를 마신 여자들은 열광상태에 도달한 뒤에 유황 연기를 들이키고서는 무아경에 돌입하였다. 그런 다음에야 소위 그녀들은 예언의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자료7> 델피가 자리한 파르나수스에는 유황 연기가 땅과 바위의 갈라진 틈에서 새어나와 이 독한 연기가 사람들의 의식을 진정시키고 무아경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물리학자 폴 할펀은 ‘그곳이 신전이 아니라 붐비는 아테네 거리나 시장이었으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을 것’이라 했고, 성서학자 브루스는 사도행전 16장 16절에서 바울이 만났다던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은 피티아였을 것이라고 한다. 또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의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했다며 서로 놀라워할 때, 사람들은 저들이 ‘술에 취했다’며 조롱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모습은 정신질환자에 가까웠다. 예수의 사도들은 술에 취했다는 조롱에 지금 시간이 낮 3시이니 취한 게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급성몽롱상태라 부르는 상황에서는 대낮에도 장면이 환각으로 나타난다. 대개는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데, 천국이 열리고 신이 나에게 말을 하기도 한다. 시각적 환각이 현실에 섞여 상상의 것들이 나타나거나, 시각적 환각에게서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사람이 뇌사 상태에 빠질 때도 “의식이 없다”, “의식을 잃었다”라고 진단하지만 간질병 환자가 발작을 일으킬 때도 “의식이 없다”, “의식을 잃었다”고 말한다. 전자는 정말 뇌의 활동이 멈춘 것이지만, 후자는 제정신을 잃었다는 뜻이다. 무아경에 빠진 사람들은 마치 간질 환자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정신이 돌아온 후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 무아경에 이르는 것은 일시적으로 양원적 정신상태를 만드는 것이었고, 예언, 신들림 현상, 정신분열은 양원적 의식이 존재했던 잔재라 할 수 있다. ▣ 방언을 신성하게 여기다 당시 이런 종교들의 입신이나 무아경은 경멸스러운 행위나 저급한 광신도의 징표가 아니라 종교의 진정성과 능력을 입증하는 매우 중요한 증표가 되었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를 원했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했다. 대중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 불안과 공포에서 구원받고자 했고 무녀들은 종종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철학자 플라톤도 그의 저서에 무아경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는 “델피를 비롯한 다른 그리스의 무녀들이 넋이 나간 채 무아경적 발성을 했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에 많은 유익을 끼쳤다”고 평했다. 유대 작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무아경은 오직 소수의 선량한 현자에게만 주어지는 신적인 영의 현존을 드러내는 최고의 증거’로 여겼고, 그리스도교에서도 방언을 ‘영적인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표지’로 간주했다. 접신 상태에서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던 당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방언’이란 개념은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 아니라 고대 종교의 통속적인 특징이었고, ‘방언을 말하다’는 표현은 선교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이 신성히 여겼던 행위를 차용해온 것이다. 하지만 서기전 5세기부터는 신들림에 대한 태도에 흥미로운 변화가 생겼다. 신들림이라는 형태의 신성한 축복에서 귀신들림이라는 형태의 저주로 바뀐 것이다. 고대 후기에는 질병과 정신이상의 원인을 귀신으로 지목하는 추세로 변화했다. 마가복음 9장에서도 귀신 들린 사람을 ‘경련을 일으키고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렸다’며 간질 증세와 흡사하게 묘사했다.<자료8> 귀신에 대한 믿음은 악의 존재에 대한 그럴듯한 근거를 대중에게 제공했으며, 새로 등장한 기독교가 이교도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보다는 귀신으로 지목해버리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신성한 방언’의 능력이 있다던 그리스도교는 이제 ‘귀신들림’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는 종교로 탈바꿈하였다. 1976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가톨릭 구마 의식을 받던 여성이 과실치사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간질성 정신병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이던 아넬리제 미헬은 환각과 환청, 우울증에 괴로워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미헬은 자신의 몸에 악마가 들어왔다고 생각했고 신부들에게 구마를 요청했다. 하지만 구마는 실패했고 신부들은 과실치사 혐의로 법정에 올랐는데, 그들의 변호인은 그녀가 정말 귀신에 들린 것이라며 구마 의식 당시 상황을 녹음한 테이프를 재생했다. 그녀는 실제로 종종 악마가 떠든 것이라고 주장되는 괴이한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간단한 외국어를 구사하기도 했다. 이는 성서에서 묘사했던 방언의 특징과 일치하지만 그녀는 방언을 한 것이 아니라 귀신 들린 것이라며 가혹한 구마 의식을 당하게 되었다. 한편 녹음 테이프를 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신부는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6개월과 집행유예 3년 및 벌금형을 선고받게 된다. ▣ 현대에 방언을 다시 유행시키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신약시대 사람들은 방언이 구약성경 요엘서 2장의 예언이 신약시대에 실현된 것이라 믿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 사도행전 2장 16~18절 또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한 말을 보면,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 고린도전서 14장 2절, 5절 1914년,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이 현시대에도 재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오순절 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성령 체험을 강조하며 빠른 속도로 선교해 나갔다. 개신교에서 이를 ‘오순절 운동’이라 한다면, 가톨릭에선 ‘성령쇄신운동’하여 1967년부터 시작되었다.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성령쇄신의 활동은 주로 세미나와 성령기도회(성령기도=방언)로 나누어지며 기도회나 세미나 때 체험하는 성령세례(접신)가 중요하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현존과 그리스도의 사랑 등 갑작스런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1971년에 도입되었고, 1973년에는 가톨릭 성신운동협의회가 창설되었으며 현재도 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위원회로 개칭되어 활동하고 있다. 방언이나 심령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없는 소리를 빠른 속도로 중얼거린다.<자료9> 이때 과하게 심취하여 흐느끼고, 울고, 절규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들이 과연 신을 만난 것이라면, 50년간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며 괴로워하던 테레사 수녀와 “신이 주무시는 것 같다”며 신의 대리인인 교황직에서 자진 사임한 前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고민은 부질없던 것일까? “제 안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갈망의 고통이 너무나 커질 때마다 저는 단지 주님을 바라고 또 바랍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 하느님은 저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고통과 괴로움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더 데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中 오는 6월 5일, 다가오는 ‘성령강림절’, ‘성령강림대축일’에도 성령의 강림을 믿는 이들은 이를 기릴 것이다.<자료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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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 탐구 <18> 그들이 약탈하고 파괴한 것은 무엇인가?

세계 종교 탐구 <18> 그들이 약탈하고 파괴한 것은 무엇인가?

1901년, 고대 엘람 왕국(現이란)의 수도 수사에서 2미터가 넘는 커다란 돌비석이 발굴되었다. 엘람 왕국의 유물인 줄 알았던 이 비석은 바빌로니아(現이라크)의 함무라비 법전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으로 유명한 함무라비법은 서기전 1760년경, 고대 바빌로니아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가 세운 법으로, 모든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거대한 비석에 새겨져 바빌론의 한 신전에 세워졌다. 그는 법의 서문에서 이 법이 신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임을 밝혔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자라도 이를 알 수 있도록 비석 상단에 법을 하사받는 자신의 모습을 부조로 새겨넣었다.<자료1> 신과 왕, 그리고 법이라는 신성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이 비석은 바빌론의 대단한 성물이고 문화재였다. 그러나 6백 년 후인 서기전 1158년, 엘람 왕국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이 비석을 약탈해갔다. 엘람의 왕은 비문의 일부를 지우고 자신의 승전 사실을 새겨 넣었고, 전승 기념비로서 엘람의 신전에 전시하였다. 이번뿐만 아니라 당시 엘람 왕국은 바빌로니아를 수시로 침략하여 문화재를 조직적으로 약탈해 갔고, 엘람의 왕궁에는 약탈해 온 바빌로니아 문화재를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물품들은 금이나 은에 비해 물적, 경제적 가치는 없을지라도 상징적 가치가 있었다. 승전의 증거였으며, 자신들이 바빌로니아 문명의 소유자이며 계승자라는 증거였던 것이다. 반대로 바빌로니아가 약탈당한 것은 단순히 물적인 가치가 아닌 그들의 문명과 역사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나라가 정복되는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신전과 신상, 도서관과 점토판(현재의 책) 등이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이쉬비에라(서기전 20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신 왕조의 초대왕)에 대한 찬가』라는 점토판에 그 목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국가와 도시를 파괴하라는 엔릴(수메르에서 지상의 최고신)의 명령에 관해 살펴보자면 (…) 그 문화를 말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고대사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시 약탈과 파괴는 마치 인류의 한 관행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주체의 상당수가 ‘종교’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약탈하고 파괴한 것이 비단 물적인 가치에 한하는 것일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종교가 벌인 약탈과 파괴 행위에 대해 알아본다. ▣ 예루살렘 성전 종교물의 약탈 및 파괴 서기 70년 9월 7일,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은 유대인들의 도시 예루살렘을 함락시킨다. 로마 제국이 황제 숭배를 강요하자 야훼를 숭배하는 유대인들은 이에 반발했고, 무력 항쟁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또 유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도 철저히 파괴하고 약탈했다. 현재 로마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로마군이 제사상, 촛대, 나팔 등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용품을 약탈해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자료2> 유대인들은 반란 실패의 결과로 자신의 국가와 성전을 잃어버리고 중동 전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455년 6월 2일, 가톨릭 국가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에 점령당한다. 이때 반달족이 로마가 예루살렘에서 약탈했던 유물들을 약탈해 갔다고 한다. 그러나 반달 왕국은 534년 다시 로마에 의해 멸망되었고 그 유물들은 현재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보관돼 있다. 이 지하 묘지는 가톨릭에서 초대 교황 베드로가 묻혀 있다고 주장하는 곳으로, 교황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려는 가톨릭 전통에 따라 역대 교황들이 온몸의 혈액과 가스를 제거하고 화학약품을 넣는 방부 처리가 되어 묻혀 있는 공동묘지이다.<자료3> 지난 4월 29일, 이스라엘의 랍비 제머 토브는 이스라엘의 주요 일간지 이스라엘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70년 이스라엘에서 약탈한 유물들이 바티칸 지하 묘지에 있다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했으며, 랍비 보코브자가 겪은 실화를 얘기했다.<자료4> “1929년 랍비 보코브자는 이탈리아 왕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는 왕의 요청에 “약탈당한 예루살렘 성전의 유물을 보고싶다.”고 한다. 그는 왕의 도움으로 바티칸의 깊숙한 지하 묘지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하에 내려간 그는 동반한 경비병이 베일을 벗기려 할 때 “충분히 봤다”며 멈추라고 요청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그 후 침묵하겠다는 맹세를 한 뒤, 한 달 후에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그는 이스라엘 당국이 나치에게서 약탈당한 유대인의 물품은 돌려받기 위해 노력하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 바티칸에는 요구하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인터뷰는 유대교에서 생각하는 예루살렘 유물의 가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 이교도 종교물의 약탈 및 파괴 종교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반하는 철학이나 이교를 탄압해 왔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을 부정하는 철학자나 유대인의 율법책을 불태웠으며, 1193년 이슬람은 힌두교 및 불교 지식의 보고였던 인도 날란다 사원의 도서관을 불태웠고, 12~13세기 몰디브와 인도 갠지스 평원 지역에서 수백 개의 불교 사원과 사당을 파괴하고, 불교 경전을 불태웠다. 그리스도교에서 공식적이며 본격적으로 이교의 신전과 신상, 도서관과 서적을 약탈하고 파괴한 것은 391년,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금지하면서부터다. 당대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자 지식의 보고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이때 방화당했다.<자료5> 《사라진 도서관》의 저자 루치아노 칸포라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중요 건물인 세라피스 신전도 이교라는 이유로 불살라졌고, 이때 약 20만 부의 귀중한 두루마리 책이 타버렸다.”고 했으며 “분서는 기독교화 과정의 일부”라고 단언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비롯해 당시 성행했던 이교들의 사원과 서적, 또 그리스도교에 반하는 문서들을 파괴한 결과, “4세기 로마에서 책이 거의 사라졌다.”고 평가될 정도로 많은 책들이 소실되었다. 중세에는 원주민 대륙에 찾아가 그곳의 신상과 책들을 약탈하고 불살랐다. 스페인의 후안 데 수마라가 신부는 멕시코에 가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임무를 맡는다. 고대 멕시코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그는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아즈텍과 마야의 눈부신 문화와 훌륭한 문학 때문이었다. 그들은 독특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으며, 왕궁에는 거대한 도서관을 두었다. 그러나 수마라가는 이 땅이 미신적인 우상숭배의 대표적인 경우라 생각했고, 1530년 그는 수거 가능한 마야의 모든 저술과 신상을 약탈하여 모조리 화형시켜 버린다. 프란치스코파 소속의 디에고 데 란다 주교도 신상 5000개와 함께 마야의 책들을 전부 유카탄 반도의 ‘마니’라는 도시로 가져다가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린 뒤 불태웠다.<자료6>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의학, 천문, 신앙,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잿더미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인류의 위대한 자산일 수도 있었을 수세기에 걸친 원주민들의 지혜가 검은 연기 속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란다 주교는 자서전에 “그 책들은 거의 악마에 관한 미신과 날조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심지어 수마라가 신부는 가톨릭 당국의 노력으로 ‘멕시코에 인쇄술을 처음 도입하고, 최초로 공공도서관을 설립한 위인’으로 탈바꿈되었다. 이렇게 원주민들의 찬란했던 정신과 기록들은 사라지고, 그들에게 이교도였던 가톨릭 문화가 원주민들의 터전에 자리잡게 되었다. ▣ 반(反)그리스도교 학문의 탄압 그들이 이교의 서적이나 종교물만 약탈하고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반그리스도교적이라 판단되는 모든 학문과 문학작품을 금지하여 세상에서 학문을 약탈해갔다. 그 방법은 출판 검열과 강제적인 금서(禁書)의 형태로 행해졌다. 1475년, 독일 쾰른 대학은 로마 가톨릭 교황에게서 인쇄소, 출판사, 심지어 독자까지 검열하는 허가를 얻었고, 주교들도 똑같은 권력을 휘둘렀다. 1501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인테르 물티플리케스(Inter Multiplices)」라는 교서를 내려 교회의 승인이 없으면 독일에서 어떤 책도 인쇄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1515년에는 라테란 공의회에서 그 권력을 그리스도교권 전역으로 확대하여, 교황청의 이단심문소와 종교재판소가 관장하게 되었다. 16세기에는 금지서적이 크게 늘어 아예「금서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을 작성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했다.<자료7,8> 가톨릭교회 전체의 첫 금서목록은 1559년 교황 바오로 4세가 반포했다. 그들이 반그리스도교 서적으로서 금지한 책들은 주로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 철학, 과학에 관한 것이었다.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은 금서 목록이 생기기 이전부터 금지되어 왔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오직 라틴어 성경만을 인정했고, 사제들은 일반 시민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설교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오직 사제만이 할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성경을 소유하는 것조차 죄가 되었다. 이렇듯 교회는 일반 사람들이 성경을 보게 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금지하며 경계했는데, 그것은 평신도가 스스로 그동안 숨겨져왔던 성경의 모순점들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의 경전은 스스로 그들의 종교에 반하는 서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과 과학은 왜 반그리스도교 서적으로 지목되었을까?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의 기록은 신성불가침한 사실이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학문은 비기독교적인 것이었고,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이후, 더 정확히는 2세기 초부터 비기독교적인 것은 총체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비기독교적인 것은 거짓 신과 관련된 것이고, 마법이고, 잘못된 것이었다. 유클리드의 수학, 아르키메데스의 물리학, 에라토스테네스의 지리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 지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 아리스타르코스의 천문학,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모두가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중세 의학에서는 과학적 방식 대신 성경에서 선보인 주술과 기적을 채택했다. 신성한 샘물과 성소가 치료법으로 각광을 받았고, 전염병은 ‘신이 보낸 징벌’로 간주되었다. 서기전 5세기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간질을 자연적 질병으로 보았지만, 1900년이 지난 14세기, 그리스도교를 믿던 잉글랜드의 의사는 간질 환자에게 복음을 읽어주고 흰 개의 털을 뿌리면 치료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바울의 열렬한 제자였던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정리했다.<자료9> “생각의 흐름을 억제하고, 마음에서 세속적 학문을 비우고, 마음을 깨끗이 한 뒤 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4세기 최초로 이단 목록을 작성했던 가톨릭의 성인 필라스트리우스도 “경험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이단”이라고 보았다. 학문에 대한 혐오는 계속 되어 529년,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철학적 사색이 이단에게만 도움이 될 뿐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는 오히려 논쟁만 가열시킨다고 보아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미를 닫았다. 일부 그리스도교권에서는 “책이 의심의 근원”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13세기경에는 인문학 연구를 하는 학교가 많은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유해한 학문의 온상이라 비방하며, “성서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읽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태도는 널리 퍼져 13세기 초 아리스토텔레스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201년 파리에서 열린 지역 종교회의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를 전부 중단하라고 명했고, 1231년 자국어로 과학적 주제들을 토론하는것도 죄로 규정되었다. 결국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은 1000여년간 학문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중세 시대, 반그리스도교적 이론을 주장한 과학자 중에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1543년《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한다. 그는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돈다는 태양중심설, 즉 지동설을 주장하였다.<자료10> 태양중심설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종교 재판에 회부될 수 있었고, 그 스스로도 책의 앞날이 험난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적 증거들이 명백했기에 그는 출판을 결심한다. 그는 출판 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편지를 썼는데,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론에 대한 그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제 이론이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괴이한 것으로 보여 논쟁이 커지겠지만, 책이 출판되어 그 안에 담긴 가장 명백한 증거들이 불합리의 안개를 몰아내면 그만큼 감탄과 감사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심한 수다쟁이들이 수학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성서의 구절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제 견해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저는 그들의 말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 불합리한 주장을 비웃을 겁니다.” 그러나 1616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비롯해 지동설을 주창하는 모든 문헌은 금서 목록에 올랐으며, 가톨릭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가르치지도, 읽지도 말라고 명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지동설의 숱한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고, 갈릴레오 이후에도 계속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의심하려면 의도적으로 증거를 왜곡해야만 했다. 1822년까지도 지동설을 다룬 책의 인쇄를 허용하지 않았던 가톨릭이었지만, 망각할 수 없는 과학적 증거 앞에 현재는 지동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내 한 추리 소설에서, 범죄 후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던 범죄자의 심리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한다.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 ” 의도적인 사실의 망각, 진실의 망각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불합리의 안개를 몰아내면 자신의 이론의 진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던 코페르니쿠스의 말을 빌리자면, 망각의 안개를 걷어내고 나면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불변의 진리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진실을 외치고 가톨릭 금서 목록에 오르다 ■ 에밀 졸라, 진실을 외치다. 1898년 1월 13일 <로로르>지 1면에는 프랑스의 작가 에밀 졸라가 투고한 격문 ‘나는 고발한다!’가 발표된다. 에밀 졸라는 이 격문을 통해 독일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됐던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임을 격정적으로 밝혔다. 이를 실은 <로로르>지는 몇 시간 만에 30만부가 팔려나갔다. 이후 많은 예술가, 과학자, 교수들이 일명 ‘드레퓌스 사건’ 재심 청원서에 서명했고,드레퓌스 재심 운동은 활화산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드레퓌스가 간첩이라는 증거는 진범과 반대파가 함께 날조했다 들통났던 것 외에는 처음에도, 재심 때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드레퓌스는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난다. ■ 금서 목록에 오르고 의문의 죽음을 맞다. 글이 발표된 후, 에밀 졸라는 반대파들에게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집은 경매에 붙여지고, 벌금이 물려지고, 명예훼손 소송에 시달리며 결국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며 끝없이 반유태주의를 퍼뜨리던 로마 가톨릭교회는 에밀 졸라의 모든 작품들을 자신들의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올렸다. 1898년 6월, 드레퓌스의 재심 진행이 결정되자 에밀 졸라는 망명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한 예수회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을 피력해왔다. 그러던 1902년, 에밀 졸라는 방에 피워둔 난로 가스에 중독되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훗날 암살자가 붙잡혔는데 그는 굴뚝 청소부였고 누군가의 지시로 굴뚝을 막아 놓았다고 자백해, 가톨릭 예수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불거졌다. 가톨릭 교회와 군부의 괴롭힘은 드레퓌스의 무죄가 밝혀진 후에도 계속 됐었고, 졸라는 생전에 이렇게 한탄했다. “진실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늪지대를 지나가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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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 탐구 <17> 죽고 부활하는 신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17> 죽고 부활하는 신에 대하여

인간은 한번 죽고 나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하지만 신은 죽고 나서 부활하기도 한다. 그런 신을 믿는 종교들은 주기적으로 신의 부활을 기념하는 의식을 치른다. 지난 4월 17일에는 그리스도교에서 그들이 믿는 신인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있었다.<참고자료1: 매년 달라지는 부활절 날짜> 부활절 전후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는데, 대표적으로 달걀 나누기, 세족식, 예수 고난 재현, 십자가 행진, 부활절 예배 및 미사가 있다.<자료1,2,3> 부활절에만 부활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일요일을 주일(主日)로서 지키는 이유도 예수가 일요일에 부활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의 절반을 저술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있게 한 인물이라 평가되는 바울은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자료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 고린도전서 15장 14~15절 부활하는 신을 믿는 종교는 그리스도교 이전에도 다수 존재했다. 다른 종교들에서는 신의 부활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여러 종교의 죽고 부활하는 신에 대해 알아본다. ▣ 고대 수메르의 부활하는 신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람들은 누구나 죽으면 지하세계로 내려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하세계로 내려간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했는데, 서기전 2100년경 수메르 시대에 기록된『이난나의 저승 여행』이라는 문헌을 보면 저승에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신들에 대한 내용이 있다.<자료5> 하늘의 여주 이난나는 어느 날 저승에 내려가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저승에 간 이난나는 일곱 대문을 지나며, 각 대문을 지날 때마다 몸에 걸친 것을 빼앗겨 벌거숭이가 된 채 저승의 여주 앞에 끌려온다. 저승의 여주가 일어나자 이난나는 재빨리 그 옥좌에 앉았고 이를 지켜보던 큰 신들은 그녀를 저주한다. 이난나는 두들겨 맞아 고깃덩어리처럼 변한 채 나무못에 매달려있는 신세가 된다. 3일 동안 이난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의 시종은 지상의 큰 신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이난나는 구원의 신 엔키가 준 생명초와 생명수로 다시 일어나 지상으로 올라간다. 저승사자들은 이난나를 대신할 사람을 데려가야 한다며 그녀를 따라왔다. 이난나는 석류나무 밑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즐겁게 걸터앉아 있던 그녀의 남편, 목자의 신 두무지를 보자 덜컥 화가 났고 그를 저승으로 보내라고 한다. 두무지는 도망쳐 그의 누이, 포도주 여신 게쉬티난나의 양조장에 숨었으나 결국 붙잡히게 된다. 이난나는 두무지와 그를 숨겨준 게쉬티난나가 각각 반년씩 번갈아 이승과 저승을 오가도록 명한다. 학자들에 의하면 금성의 신 이난나의 부활은 금성이 지고 떠오르는 모습을 의미하고, 목자의 신 두무지와 포도주의 신 게쉬티난나의 죽음과 부활은 계절의 순환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덥고 건조한 여름을 초목과 목자의 신 두무지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라 믿었다. 여름 한 달 동안은 그를 애도하는 의식을 가졌고, 매해 봄에는 수태 준비를 마친 대지에 씨를 뿌린 뒤 두무지의 부활제를 올렸다. 3~4월 사이에는 두무지의 죽음을 재현하는 연극을 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기리는 제의를 했다. 이때 애가(哀歌)를 부르며 죽은 두무지를 향해 사막으로 나가는 행렬을 지었다고 한다. 수메르의 부활하는 신들 이야기에서, 저승에 붙잡혀 두들겨 맞아 나무못에 매달려 있다가 3일 만에 다시 부활했다는 주제, 또 목자나 포도주의 신이 부활한다는 주제는 부활하는 신을 믿는 후대의 종교에서도 자주 관찰된다. 또 그러한 종교에는 신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의식도 항상 동반하여 존재했다. ▣ 고대 이집트의 부활하는 신 고대 이집트에도 부활하는 신이 있었다. 농업, 곡물, 초목, 부활의 신 오시리스다. 다음은 이집트 토착 문헌들과 그리스 저술가들의 기록을 종합한 오시리스의 부활에 대한 내용이다.<자료6,7> 오시리스가 태어났을 때에 ‘만물의 주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선언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시리스는 대지의 왕으로서 이집트를 통치할 때 이집트인을 야만 상태에서 교화하여 율법을 가르쳤고 신들을 숭배하게 했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밀과 보리가 야생하는 것을 발견했고, 오시리스는 그 곡식의 재배법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오시리스는 또한 최초로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로 술을 빚는 법도 가르쳤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를 칭송하고 신으로서 섬겼다. 그러나 그를 질투한 동생 세트는 형을 죽인 뒤 시신을 14조각으로 잘라 나라 곳곳에 버렸다. 아내 이시스는 나라 전역을 돌아다니며 오시리스의 흩어진 시신을 모두 찾았고, 신들의 도움으로 오시리스는 곧 부활했다. 농업, 곡물의 신 오시리스의 부활로 세계의 풍요가 회복되는 한편, 오시리스는 저승의 왕이 되어 죽은 자를 심판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의 부활은 해마다 기념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서『역사』에 따르면,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삼각주의 모래톱에서 매해 대규모 축제를 열어 수만 명의 남녀가 보는 가운데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연극을 공연했다. 또 신관들은 오시리스 조각상을 배에 싣고 행진했고 그 뒤로 순례 행렬이 뒤따랐다. 헤로도토스는 오시리스의 축제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와도 동일하다며, 그 유사성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판단하면서 고대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그 축제가 소개되었다고 얘기한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의 포도주의 신으로, 로마에선 바쿠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디오니소스도 오시리스와 같이 몸이 찢긴 채 살해당했으며, 곡물과 포도 재배법을 가르쳐주는 신이었다. 아기 디오니소스는 동굴에서 자라다가 거인들에게 사로잡혀 온몸이 찢기는 불행을 당한다. 하지만 대지의 신 레아의 도움으로 찢긴 몸을 회복하고 부활한다. 이후 디오니소스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황홀경에 이르는 법과 포도와 곡물 재배법을 가르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등 기적을 행했다.<자료8> 결국 디오니소스는 신으로 인정받아 올림포스 산에 사는 열두 신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는 앞서 소개한 오시리스의 축제와 닮았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디오니소스의 나무 신상을 든 신관들의 행렬로 시작하여 빵과 기타 봉헌물, 물과 포도주 단지를 든 사람들이 뒤따랐다. 행렬 후에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모방하는 합창과 연극을 했다. 대중적 축제가 열리고 있는 동안 소수의 엘리트 계층은 밀실에서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종교 집회를 가지며 디오니소스의 수난극을 재현했고, <자료9> 그럼으로써 상징적인 영생을 추구했다. 그리스와 로마 지역에는 디오니소스 외에도 두무지와 동일시되는 아도니스, 식물 신이자 죽음과 부활의 신 아티스, 태양신 미트라 등과 같이 죽음을 겪고 다시 부활하는 신들이 많았다. 아도니스는 메소포타미아의 두무지처럼 절반은 지하세계에서 절반은 지상에서 살게 된 신으로, 매년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부활을 축하하는 축제가 거행됐다. 사람들은 구슬픈 피리 소리에 맞추어 통곡하고 가슴을 치면서 아도니스의 죽음을 애도했고, 다음날 그가 다시 살아나서 숭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오른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아티스와 미트라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나 3일 뒤 부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신들은 그리스도교 이전 고대부터 존재했던 신이지만, 그리스도교가 교세를 확장하던 동시대에도 부활하는 신은 다수 존재했다. ▣ 로마 제국 시대의 부활하는 신 2010년 미국의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는 예수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경쟁자들에 대해 방영하였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재현하는 논픽션 기록으로 전문가의 검증을 거쳐 사전에 많은 조사가 이루어진 후에 제작된다. 이 기록과 외신 기사들에 의하면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서기전 27년 이후, 제국 안에 여러 나라가 뒤섞이며 여러 종교와 신들이 경쟁했고, 예언자와 메시아, 동정녀 몸에서 태어났다는 신의 아들들이 많았다. 죽음에서 부활한 신들이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은 당시 그리스 로마 시대에 아주 흔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선지자들이 각지에 등장했는데, 그중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라는 인물도 있었다.<자료10> 아폴로니우스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했고, 제자를 모으고 평화와 사랑을 설파하며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에 의해 고발당해 처형되었다. 그런데 그의 사후, 몇몇 추종자들은 그가 자신들 앞에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를 만지기도 했으며 그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당시에는 로마의 황제도 신으로서 숭배받았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평화를 주는 자, 만물의 주 아우구스투스로 불렸다. 그의 통치 아래 로마의 평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의 양아버지 카이사르는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주장이 있었고,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그가 신들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믿음과 더불어 그의 신전이 생겨났다.<자료11> 당대에 존경받는 이들은 신격으로 추대받았고, 그들이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주장이 일반적인 시대였다. ▣ 부활하는 신이 왜 이렇게 많은가? 학자들은 고대 시대에 서로 유사한 부활 신과 부활 의식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다고 말한다. 고대의 사람들은 자연 현상이나, 천체의 이동, 계절의 순환 등을 신들의 결혼이나 죽음, 부활에 의한 것으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부활은 종교에서 흔한 주제였으며, 종교적인 연극이나 주술도 그러한 주제를 다루었던 것이다. 앞선 종교의 성공 사례를 변형 및 발전시킨 후발 종교에서도 자신들의 신이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교만이 신성하고 유일무이하며, 이교 신앙은 원시적이고 악마적인 활동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이었고, 이교 신앙이 그리스도교와 동일한 전통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풍자가인 켈수스는 이에 대해 통렬하게 비난했다. “그 공통된 특이한 사건들이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어떻게 유일무이한 사건인가? 무슨 근거로 자신들의 믿음에 특수성을 부여하는가? 사실 그리스도교인들이 믿는 것에는 특수한 것이 전혀 없다.” 이에 대해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특수성을 증명하기 보다는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사악한 악령들이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자들을 미리 만들어 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이, 시인들의 말과 마찬가지로 단지 경이로운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인간들에게 미리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와 당대 최대 경쟁 종교였던 미트라교의 성사(聖事)가 동일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진실을 곡해하는 것을 일삼는 악마는 성사의 정확한 전말을 흉내낸다. 악마는 신도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수로 인해 죄가 용서된다고 약속하며, 신도들을 미트라스 의식에 입문시킨다. 그래서 악마는 성찬 봉헌식을 행하며 부활의 상징을 끌어들인다. 그러니 우리는 신성한 것들을 흉내내는 악마의 간교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313년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392년 이교를 금지시키면서, 그리스도교 이전 로마에 성행했던 기존 종교들은 그리스도교를 모방하는 악마의 종교이자, 신화에 불과한 죽은 종교로 전락당했다. 그리고 현재 그리스도교는 부활신을 믿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가 되었다. ▣ 그리스도교의 부활론에 대한 여러 연구들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예수는 십자가 형틀에 못박혀 사망했다 3일 만에 부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20~21세기에 들어 과학적, 고고학적 증거들이 잇따라 발견됨에 따라, 이에 대해 새롭고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며 관련 서적,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속속 출간 및 방영되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종교학부 바트 D. 어만 교수의 저서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에서 ‘인간 예수를 신으로 보는 믿음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한 역사적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심지어 유대인들까지도, 현재 우리처럼 신이냐 인간이냐를 흑백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위대한 인물은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 보는 시각이 보편적이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라는 인물을 신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그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그가 부활했다고 믿었다. 부활했다고는 했지만 더 이상 자신들과 함께 있지 않자 그가 하늘로 올라갔을 것으로 믿게 되었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예수는 신의 아들로 격상되고 그 결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1982년 영국에서 출간된『성혈과 성배』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해 자식들을 두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고 프랑스로 도망가 현재 그의 후손도 살아있다는 것을 소개해 그리스도교계의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마이클 베이전트 外,『성혈과 성배』, 행림출판, 1982., p.342 ~352,393~428.)<자료12> 교계 지도자들은 이 저서가 예수의 거룩한 보혈을 모독한 것이라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 저자들을 비롯해 예수 부활에 대해 그리스도교의 전통 입장에 반하는 증거들을 밝혔던 여러 학자와 방송사들은, 대중들이 2천 년간 진실로 알고 있던 내용을 공식적으로 반증하기 위해 여러 문헌과 사료들, 과학적, 고고학적 증거들을 참고하여 철저한 고증을 거친 연구 결과로서 이를 발표한 것이었다. 지난 14일에는 예수의 죽음을 믿는 영국의 한 의사 출신 신부가 자신이 예수의 사인(死因)을 의학적으로 밝혔다며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예수의 시체를 감쌌던 천이라는 수의에서 시체 자국을 분석해, 예수가 어깨 탈구에 의한 동맥 파열로 내부 출혈이 심해져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사용한 수의는 1988년 영국 국립 박물관과 영국 옥스퍼드대학 등에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진행한 결과, 예수 사후 1300년 후인 13∼14세기에 만들어진 것이 드러나 조작으로 판명된 수의였다.<자료13> 1354년 발견된 이 수의는 발견 당시 예수 부활의 구체적 증거라며 그리스도교계의 큰 기대를 모았으나, 연대 측정, 재료 역사학적 분석, 혈흔 분석, 꽃가루 분석 등 여러 분석에 의한 교차 검증을 통해, 조작한 사실이 과학적 사실로서 입증되었다. 이 조작 논란에 대해 수의를 보관하고 있는 토리노 성당의 대주교는 ‘머리보다 마음으로 수의를 보라’고 조언하며, ‘수의는 진위에 상관없이 중요한 믿음의 수단이 된다’는 변명으로 둘러댔다. 지금도 이 수의는 성물로서 그리스도교에서 귀하게 보관하고 있다.<자료14> 부활절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절기이자 최대 명절이다. 부활절 당일 하루만이 아니라 70일 전 일요일부터 칠순절, 60일 전 일요일은 육순절, 50일 전 일요일은 오순절, 40일 전 일요일은 사순절이라 하며 5주 전, 4주 전, 3주 전, 2주 전, 1주 전 모두 다른 명칭으로 부르며 기념한다. 부활절 전 일주일은 고난 주간으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간 고난을 기념하는 기간이다. 이에 지난 15일,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도 국가에서 예수의 수난을 재현하는 행사와 행렬이 이어졌다. 로마 가톨릭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날 낮에 바티칸 베드로 성당에서 성금요일 전례를 진행했고<자료15>, 밤에는 로마 콜로세움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행사인 ‘십자가의 길’ 예식을 주재했다.<자료16> 예수의 부활을 잊지 않으려는 이들의 노력과 정성이 엿보인다. 과학이 발달하고 진실이 드러날수록 이들은 더욱 필사적으로 부활을 기념할 것이다.

세계 종교 탐구 <16>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16>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16>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義士)의 순국일이었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의거(義擧)를 단행했고, 이듬해 3월 26일 중국 뤼순 형무소에서 ‘살인’의 죄목으로 사형되었다. 다른 나라를 침탈하고 그 국민들을 학살한 침략국의 수장을 제거한 것이지만 일본 재판부는 의거가 아닌 살인 범죄로 판결한 것이다. 안 의사는 피의자 신문 당시 “이토 암살이 죄악이라 생각되지 않는가?”라는 […]

세계 종교 탐구 <15> 신(神)을 이용한 지배 방법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15> 신(神)을 이용한 지배 방법에 대하여

지난 3월 9일, 우리나라에서는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나라를 대표할 국가의 원수를 선출한 것이다. 대통령은 국가의 수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절대적인 권한과 권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서 이것은 당연한 이치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며 항상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어떨까? 자신들의 지도자가 신 내지는 신의 대리인이라고 믿던 고대에서는 ‘신권정치(神權政治)’가 […]

세계 종교 탐구 <14> 민족문화 말살의 변천사를 따라서

세계 종교 탐구 <14> 민족문화 말살의 변천사를 따라서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던 민족문화 말살의 모습에 대해 알아본다.

오는 3월 1일이면 삼일절이 올해로 103주년을 맞이한다. 한민족 최대 규모의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던 3월 1일은 우리나라 독립사에 있어 역사적인 날이다. 이를 기념하듯 1996년의 3월 1일에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한 정책이 시행됐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국민학교란 ‘우리나라 국민’의 학교라는 뜻이 아니다. 황국신민학교의 준말로 ‘황국의 신민’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일본은 자기 […]

세계 종교 탐구 <13> 인간 창조의 뿌리를 찾아서

세계 종교 탐구 <13> 인간 창조의 뿌리를 찾아서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인간 창조 기록의 뿌리를 찾아가 본다.

국내 한 보험사의 광고 속, 세련된 느낌의 젊은 여성이 숲속과 도심, 지하철 등을 오가며 열정적으로 춤을 추고 있다. 여성의 이름은 ‘로지’. 정교한 컴퓨터그래픽 기술로 만든 ‘가상 인간’이다.<자료1> 이 광고로 유튜브 동영상 조회수 1000만을 기록한 그녀는 사진 공유 SNS 팔로워(follower)도 11만 명에 달해, 국내 가상 인간 중 가장 많은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가상 인간은 사람보다 더 […]

세계 종교 탐구<12> 유일신(唯一神)을 만든 과정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12> 유일신(唯一神)을 만든 과정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12>

지난해 12월 14일, 황량한 땅 위에 기린 6마리가 뒤엉킨 채 말라 죽어있는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자료1> 영국 가디언지는 이 사진을 실으며 “6마리의 죽은 기린들, 케냐 가뭄의 공포가 사진 한 장에 담겼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최근 케냐는 2011년 이후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다. 목초지와 물이 사라져 가축은 말라 죽어 가고 농부들은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 목축업자 아흐메드 […]

세계 종교 탐구 <11> 악마를 쫓아내는 의식의 뿌리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11> 악마를 쫓아내는 의식의 뿌리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11>

생채기투성이의 소녀는 침대에 손발이 묶인 채 몸부림을 치고 있고, 옆에는 한 사제가 성경책을 펼친 채 주문을 읊고 있다.<자료1> “전능하신 예수의 명령이다! 신의 종에게서 떠나라!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내치노라!” 소녀는 더욱더 무서운 얼굴로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다. 사제는 소녀에게 성수를 뿌리기도 하고 손으로 십자가를 그려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구마 의식을 하고 있는 영화「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이다. 「엑소시스트」는 1949년 8월 […]

세계 종교 탐구 <10> 피의 제사와 성경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10> 피의 제사와 성경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10>

남미의 가톨릭 국가 페루에서는 해마다 ‘기적의 주님’이라는 행진이 벌어진다. 화려하게 치장한 예수상을 앞세운 행렬이 지나갈 때 구경하는 사람들은 꽃잎을 뿌리고 사제들은 향을 피워 구름처럼 연기가 피어오르게 한다. 이 예수상은 라스 나자레나스 성당에 있는 벽화를 모사한 것으로, 신도들은 예수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면 병이 완치되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기적의 주님’이라 부르고 있다. 병을 치유하고 위험에서 보호해 […]

세계 종교 탐구 <9> 길가메시 서사시와 성경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9> 길가메시 서사시와 성경에 대하여

전 세계 개봉을 앞둔 헐리우드 영화 ‘이터널스’에는 ‘길가메시’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 10명이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데, 그중에서 길가메시는 맨손으로 괴수를 때려눕히는 전사이자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는 실존 인물이었던 길가메시가 거대한 체구에 강력한 힘을 가졌던 데서 착안해 영화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낸 것이다. 특히 길가메시 역에 우리나라 배우가 캐스팅되면서 국내 팬들의 주목을 받고 […]

세계 종교 탐구 <8> 고고학적인 발견과 성경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8> 고고학적인 발견과 성경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8>

흔히 고고학자라고 하면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주인공처럼 흥미진진한 모험과 고대 세계의 탐험에 몸을 던지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자료1> 전설적인 유물을 찾아내고 미지의 문자를 해독하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 스토리는 고고학이 가진 매력과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고고학 태동기라 할 수 있는 1800년대 유럽에서는 모험심에 불타는 고고학자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값진 유물을 찾아내면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이것은 학자들 간의 불꽃 […]

세계 종교 탐구 <7> 바빌론과 성경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7> 바빌론과 성경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7>

지금부터 90여 년 전인 1930년,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아치형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문이 전시되었다. 성문 벽을 쌓아 올린 푸른색 벽돌은 화려하게 반짝였으며, 벽면에는 포효하는 사자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생생하게 돋을새김 되어 있었다.<자료1,2,3> 그러나 관람객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성문이 발굴된 장소였다. 이 성문은 바빌론의 성곽에 설치되었던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관람객들은 성경에 기록된 도시 바빌론의 유물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