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다른 문화와 종교를 ‘이단’으로 말살한 범죄

다른 문화와 종교를 ‘이단’으로 말살한 범죄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사건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전무후무한 재앙이었다. 콜럼버스는 유럽에 있는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공할 수 있도록 바닷길을 열어 주었고 그 길을 따라 일확천금의 탐욕을 품은 침입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콜럼버스의 후예들은 탐험이라는 미명 하에 아메리카 곳곳을 누비며 약탈과 노략질을 계속했다. 이 탐험대가 원주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탐욕과 무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십자가를 높이 세운 탐험대는 원주민의 종교가 곧 악마 숭배이기 때문에 이를 파괴하고 예수를 믿게 해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종교 집단은 원주민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일상과 생각을 감시하며 예수 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낌새가 발각되면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어 무참히 살해하는 파국을 가져왔다. 지금부터 500년 전인 1519년, 가톨릭 탐험대가 아메리카 원주민 통치자를 만나는 사건이 있었다. 탐험대의 우두머리는 스페인 출신의 코르테스였고, 원주민 통치자는 아스텍을 다스리는 목테수마 2세였다. 아스텍은 호수 위에 도시를 건설할 만큼 수준 높은 문명 국가였으며 도시의 중심부에는 전통 신을 섬기는 거대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자료1> 아스텍 원주민들은 종교와 삶을 하나로 이해했기 때문에 종교는 그 자체로 뿌리 깊은 생활 규범이었다. 아스텍의 왕 목테수마는 코르테스 일행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높이 50미터에 달하는 피라미드 신전에 데리고 올라가 신전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코르테스는 이 설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에게 가톨릭 이외의 종교는 무엇이든 악마 숭배였고 아스텍 신전은 끔찍한 악마의 소굴일 뿐이었다. 코르테스는 이 신전에 십자가와 마리아 상을 세우고 악마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목테수마는 자신의 종교를 모독하는 발언에 “우리가 섬기는 신도 좋은 신이고 당신이 섬기는 신도 좋은 신입니다.”라며 점잖게 응수했다. 그는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을 베풀었으나 코르테스는 자신의 종교를 폭력으로 관철시켜 나갔다. <자료2> 코르테스는 스페인에서 병력을 지원받아 목테수마를 무참히 살해했으며 아스텍 제국을 강탈하자마자 제일 먼저 원주민의 신전을 파괴했다. 그리고 군사적 정복에 이어 원주민의 영혼과 정신을 정복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가톨릭 수도사들을 불러들였다. 1524년 열두 명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예수의 열두 제자를 떠올리게 하는 의도적인 숫자였다.<자료3> 그들은 원주민의 면전에 대고 “우리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는 진리요, 당신들이 섬기는 신들은 악마의 사신이오.”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파괴된 아스텍 신전을 지키던 원주민 제사장들은 정중한 어조로 “우리가 오래 전부터 신을 섬겨온 방식은 존중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항변했지만 가톨릭 수도사에게 먹혀들 리가 만무했다. 그들은 원주민 땅에서 악마를 쓸어 버리고 가톨릭의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도사들은 아스텍 원주민의 종교를 철저히 말살하는 작업에 나섰다. 원주민의 정신적 뿌리이자 생활 규범인 종교를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가톨릭 수도사들은 잔인한 효율성으로 성공시켜 나갔다. 그 핵심은 강제 개종과 이단 심문이라는 양면 작전이었다. 수도사들은 한 번에 수천 명씩 세례를 주며 원주민을 집단적으로 개종시킨 후 원주민이 우이칠로포치틀리(아스텍의 수호신)나 틀랄록(물과 비의 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낌새가 발각되면 곧장 이단 심문소로 끌고 와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 예수 외의 다른 신을 섬겼다는 이유로 이단이라는 죄목을 덮어씌운 것이었다. 이단 심문소는 공개 화형도 불사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불에 태우는 것은 아스텍 원주민들이 일찍이 보지 못한 잔혹한 살해 행위였고, 이에 경악한 아스텍의 예언자 마르틴 오셀로틀은 가톨릭 수도사들이야말로 말세에 찾아온 악마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전통 신을 숭배하는 것은 원주민의 생활 곳곳에 스며 있는 문화였기 때문에 이런 ‘이단 행위’를 색출해 내기 위해 가톨릭은 원주민을 철저히 감시했다. 또 원주민 자녀들을 교육시켜 물샐 틈 없는 감시망을 구축해 나갔다. 수도사들은 원주민 자녀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교육시킨다는 명분 아래 철저한 가톨릭 교리를 주입시켰다. 너희 조상이 악마를 숭배한 죗값으로 활활 타는 지옥 불에서 고통 당한다고 세뇌하면서 만약 부모가 이단 행위를 저지르면 즉각 고발하도록 부추겼다. 실제로 크리스토발이라는 아스텍 원주민 아이가 전통 신을 숭배하던 아버지를 이단으로 고발하고 아버지는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 끝내 숨을 거두었다. 원주민 가정 내에서 이단 행위를 색출하면서 부모와 자녀 세대는 분열과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상형 문자로 기록된 원주민의 종교 서적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모조리 불태우면서 전통 문화는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폐허가 된 전통 신전 자리에 십자가를 높이 올린 성당이 새롭게 건립되자 가톨릭 수도사들은 감격에 벅차 예수에게 감사를 올렸다. 그들이 염원하던 이단 박멸이 완성된 것이었다.<자료4> 이단을 박멸하는 것은 가톨릭 2,000년 역사의 숙원 사업이었다. 자신과 다른 것은 모조리 ‘이단’으로 낙인 찍어 남김없이 숙청하는 것은 가톨릭 역사에서 무한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 역사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가톨릭도 태생부터 이단이었다는 점이었다. 가톨릭은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유대교 경전을 구약 성경으로 사용했으나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를 구세주로 믿음으로써 유대교로부터 이단으로 낙인 찍혔다. 서기 85년경 유대교 회당은 “이단인 나사렛 사람들(가톨릭 교인들)이 신속하게 파괴되고 제거되기를 기도하나이다.”라는 문구를 걸고 이단 가톨릭을 철저하게 배척했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 내부에서도 서로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저속한 욕설이 난무했다. 누가 정통인지 누가 이단인지 확립되지 않은 채로 서로가 서로를 악마라고 저주를 퍼붓는 혼란이 200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 후 3세기 후반에 이른바 정통 교리가 확립되자 가톨릭은 이단과의 전면전에 나섰다. 이단을 완전히 말살해 버리는 가톨릭의 잔혹사,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이단 박멸 사례는 12세기 알비파를 짓밟은 사건이었다. 알비파(Albi-派)는 프랑스 남부의 알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가톨릭의 한 종파를 뜻했다. <자료5> 예수가 신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알비파는 가톨릭 사제들의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난하며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179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알비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알비파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을 지시했고, 120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한층 더 강화된 이단 박멸을 위해 십자군에게 알비파를 숙청하라고 명령했다. 십자군은 알비파의 주 근거지였던 남프랑스의 도시를 차례차례 점령하며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했다. 알비파의 거점인 베지에를 점령할 당시 한 병사가 무고한 사람까지 죽일 것을 염려해 “어떻게 알비파를 알아봅니까?”하고 물었을 때 교황 특사인 아르노 아모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 죽여라. 예수께서 가려내실 것이다.(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이단이든 아니든 모두 죽이고 나면 그 판별은 저 세상에서 예수가 해 준다는 말이었고, 그 명령에 충성스러운 십자군들은 베지에의 주민 2만 명을 남김없이 도륙했다. <자료6> 십자군은 알비파의 마지막 거점인 몽세귀르의 요새를 탈환했을 때 알비파 200명을 전부 산 채로 불태워 버렸다.<자료7> 살 타는 냄새와 비명 소리가 지옥을 방불케 했고 풍요롭던 마을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다. 이처럼 100년이 넘는 혈전을 치르고 1330년 이후에는 더 이상 이단 심문소에 알비파가 잡혀 오지 않게 되었다. 이단 알비파가 프랑스에서 완전히 박멸된 것이었다. 프랑스가 알비파를 숙청한 후에는 스페인이 이단 집단인 유대인을 대대적으로 섬멸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이단 심문소는 악랄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2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 중에서 유대인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자료8> 일찍이 유대인들로부터 이단이라고 배척당했던 가톨릭이 다시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유대인을 죽였으니 결국 ‘이단’이란 상대방이 멸절할 때까지 무한 반복되는 아이러니였다. <자료9> 가톨릭은 이단 심문소를 통해 신속하게 반대파를 숙청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이 잔인한 기술은 유럽을 정복한 다음 아메리카까지 전파되었다. 예수를 알지도 못했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어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정신까지 말살해 버렸으니 한층 업그레이드 된 악이 세계로 전파된 셈이었다. 이처럼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범죄 집단은 다른 문화뿐 아니라 무고한 생명도 가만두지 않았다. 다음 기획기사에서는 이 집단이 아메리카에서 벌였던 종족 학살(프런티어 제노사이드)에 대해 알아본다.

특집
아프리카 원주민은 왜 좀비가 됐을까?

아프리카 원주민은 왜 좀비가 됐을까?

살아 있는 시체를 뜻하는 ‘좀비’는 원래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혼을 말살당해 자신의 의지와 생각 없이 주인의 명령만을 따르는 좀비, 죽을 만큼 혹사당하지만 이미 시체이기 때문에 다시 죽을 수도 없는 좀비는 끔찍한 괴물이기 이전에 비참한 노예였다. 좀비는 아프리카 콩고의 “은잠비(Nzambi)”라는 단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영혼 없는 노예’라는 이야기는 아이티섬에서 유래했다. 아프리카에서 사용하던 단어가 망망한 대서양 건너편의 아이티섬에 전해져서 영혼 없이 혹사당하는 비참한 노예 실화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역사적 배경에는 십자가 돛을 높이 세운 배들이 있었다. 1492년 항해가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신대륙을 찾기 위한 항해에 나섰다. 스페인의 이사벨 1세와 페르디난도 2세는 ‘가톨릭 부부 왕’이라 불릴 정도로 신앙에 철저한 군주였고, 그들이 신대륙 항해를 지원한 것도 가톨릭 전파에 대한 광적인 집착 때문이었다. 이사벨 1세는 “단 한 명의 원주민을 구원할 수 있다면 신대륙 항해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에서 볼 수 있듯 원주민에게 예수를 전파하는 것이 곧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는 원주민의 의사와 문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광신분자다운 생각이었다. 콜럼버스 또한 가톨릭 부부 왕이 선택할 만큼 광신분자였기 때문에 항해록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제목을 붙이고 자신의 항해가 예수의 뜻이라고 기록해 놓았다.(자료1) 신대륙 원주민들에게 콜럼버스의 도착은 곧 재앙의 시작이었다. 콜럼버스의 십자가 배가 도착했을 당시 아이티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푸른 숲이 펼쳐진 아름다운 섬이었다. 원주민 타이노족은 처음 보는 백인들을 환대하며 음식과 물자를 아낌없이 베풀었지만 콜럼버스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건장한 체격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남녀 원주민을 보고 노동과 성적 착취를 위한 노예로 부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다.(자료2)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을 노예화하는 것은 천인공노할 범죄이지만 가톨릭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의 대리인 교황이 원주민의 노예화를 허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허가는 1455년 교황 니콜라오 5세가 내린 ‘로마누스 폰티펙스(Romanus Pontifex)’라는 교서를 통해서였다. 당시는 포르투갈이 아프리카를 침략하고 있었는데, 교황은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에게 비(非) 가톨릭 지역인 아프리카를 침략해 노예로 만든 원주민을 사고파는 거래가 정당하고 합법적이라고 허가해 주었다. 이는 스페인과 프랑스 등 가톨릭 국가들이 수백 년간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만들고 1,500만 명 이상을 노예 시장에서 거래하는 근거가 되었다.(자료3) 신대륙 침략과 노예 거래를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허가해 준 교황의 교서는 가톨릭 국가들이 아프리카인 1,500만 명 이상을 노예로 잡아 매매하는 근거가 돼 이 같은 교황의 노예 허가는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나기 40년 전에 있었고 따라서 콜럼버스에게 원주민 노예화는 당연한 일이었다. 콜럼버스는 유순한 원주민들을 순식간에 폭력으로 제압하고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다. 특히 콜럼버스는 신대륙에서 황금을 캐낼 것이라는 망상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에 원주민 노예들에게 집요하게 황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이티섬에는 콜럼버스의 야욕을 채울 만한 금광이 없었고 황금을 찾아 헤매던 원주민들은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격분한 콜럼버스가 원주민의 코와 손목을 자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자료4) 원주민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가톨릭 세계의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들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예수를 알지 못하는 신대륙의 원주민은 사람 이하의 존재이기 때문에 원주민의 재산과 천연 자원, 생명을 강탈해도 전혀 죄가 되지 않았다.(1550년 스페인의 가톨릭 신학자 히네스 데 세풀베다의 주장) 따라서 살아 있는 원주민을 개 먹이로 던져 주거나 검술 시합용으로 쓰는 만행은 가톨릭 항해가들의 일상이었다. 콜럼버스 이후에 들이닥친 스페인 침략자들이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아름다운 섬 아이티는 유령섬이 되어 갔다. 콜럼버스가 도착할 당시만 해도 30만 명이던 원주민이 50년간 계속된 학살과 침략자들이 전염시킨 병에 시달린 후에는 200명에 불과했다. 사람 그림자를 찾기 힘들어진 아이티에서 침략자들은 무단으로 땅을 빼앗아 수익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열대성 기후에 고온다습한 아이티섬은 열대성 식물인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데 최적의 조건이었고, 당시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침략자들은 아이티에 사탕수수 농장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천연자원뿐 아니라 노동 인력까지 강탈했다. 인구가 줄어든 아이티에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침략자들은 자신들이 죽여 버린 아이티 원주민 대신에 새로운 노예를 찾아서 아프리카로 향했다.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해 아이티까지 강제 이주 시켜서 노예로 부린 것이었다. 가톨릭 국가들의 노예 사냥은 새벽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전문적인 사냥꾼들은 동트기 전 새벽 안개에 둘러싸인 원주민 마을에 총을 난사했다. 땅을 뒤흔드는 폭음에 원주민들이 놀라 뛰쳐나오면 사냥꾼들은 본보기로 몇 명을 죽인 후 미처 사람이 빠져나오지 못한 집에 불을 질렀고, 순식간에 생지옥에 빠진 원주민들은 겁에 질려 달아나지도 못했다. 기세등등해진 사냥꾼들은 원주민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운 후 십자가 깃발을 높이 세운 배로 끌고 갔다.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한 아프리카인들은 보통 600명씩 한 배에 실렸다.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깜깜한 배 밑창에서 6명씩 사슬에 묶여 있는 그들에게 십자가 배는 곧 지옥선이었다.(자료5) 한 사람당 너비 40센티 공간에서 절인 생선처럼 차곡차곡 쌓인 채로 대소변을 배설하니 전염병이 창궐할 수밖에 없었고, 병든 원주민은 즉시 바다에 버렸기 때문에 식인 상어가 항상 노예선을 따라다녔다.(자료6) 노예선이 향하는 곳은 아메리카의 사탕수수와 커피, 목화 농장이었지만 아프리카인들은 왜 잡혀 왔는지, 어디로 끌려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백인 납치범들은 최소한의 물과 식량,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목적지도 모른 채 수개월 간 망망대해를 건너며 원주민의 20% 이상이 굶주림과 전염병, 가혹 행위로 죽어 나가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원주민들은 패닉에 빠졌고, 노예선의 붉은 십자가 깃발이 원주민들의 피로 물들였을지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현실은 망상보다 더욱 비참했다. 가혹한 노동으로 착취하면서도 ‘예수의 은총’을 내린다고 주장한 가톨릭은 착취 끝에 죽어 나가는 노예들을 ‘순교자’라 불러 노예 시장에서 흥정이 끝나면 노예의 벌거벗은 몸에는 그들을 구입한 회사의 낙인이 선명하게 찍혔다. 노예 노동의 참상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포르투갈의 예수회 수도사 안토니오 비에이라의 강론을 읽어야 한다. 1663년 그는 브라질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당하는 고통은 예수께서 당한 고통과 같다. 예수께서 하루 종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너희들의 수난도 낮이나 밤이나 계속되리라. 예수께서 벌거벗으셨으니 너희도 벌거벗었다. 너희들은 굶주리고 고문당하고 모욕을 당한다. 이로써 너희들은 예수를 따르고 있다. 너희는 순교자들이다.”(안토니오 비에이라, 『전집』, 총 4권 중 3권 30쪽) 이 포르투갈 수도사의 강론은 확신에 차 있었으나 포르투갈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노예들에게는 공허할 뿐이었다. 예수처럼 벌거벗으라는 수도사의 가르침은 준엄했으나 자신은 수도복을 벗지 않았고, 예수처럼 고통당하라는 목소리는 널리 울렸으나 자신은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았다.(자료7) 수도사의 강론 중에 자신이 실행한 것은 하나도 없었으나 그의 예언만은 적중했다. 가혹한 노동을 이기지 못한 노예들이 평균 7년 안에 죽어 나가며 수도사의 예언대로 ‘순교자’가 된 것이었다. 15세기 십자가 배를 타고 아프리카를 침략했던 포르투갈은 그것을 “가톨릭 신앙의 선교”로 기념하고 있다. 아프리카 노예들을 실어 날랐던 배 이름 중에 “좋은 배 예수”가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항해가 그들의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자료8) 죽음보다 더한 노동에 시달린 아프리카인들은 “영혼 잃은 노예” 좀비 실화의 주인공이자 지금도 세계 최빈국으로 가난에 허덕이고 있어 아프리카 원시림의 풍부한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은 “좋은 배 예수”를 타고 생지옥과 같은 아메리카 농장으로 끌려갔다. 그중 아이티 농장에서 죽음보다 더한 노동 착취를 당한 사람들이 “영혼 잃은 노예”라는 좀비 실화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아이티를 비롯해 십자가 배가 닻을 내렸던 국가들 중에는 수백 년의 경제적 착취를 이기지 못하고 지금도 세계 최빈국으로 허덕이는 나라가 있다. 다음 번 기획기사에서는 신대륙이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말살당한 실상을 자세히 살펴본다.

특집
로마 교황청의 신묘한 경제 능력, 가톨릭의 특출한 수입 창출과 위기 관리

로마 교황청의 신묘한 경제 능력, 가톨릭의 특출한 수입 창출과 위기 관리

가톨릭은 2,000년간 존재해 온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집단이라 불린다. 또한 인류가 갈망하는 ‘구원’에 일정한 금액을 붙여 판매한 최초의 기업이며, 지배 계층을 움직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엘리트 집단이다. 이처럼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가톨릭이 최근 위기에 처했다는 더 타임즈의 보도가 있었다. 가톨릭 본부인 교황청의 수입이 감소하면서 4천 4백만 유로(약 571억 원)의 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청은 이를 돌파하고도 남을 저력이 있다.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교황청이 보여준 신묘한 경제 감각과 수입 창출 능력을 살펴본다. 면죄부란 죄가 사면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교황 이름으로 발행한 증명서를 말한다. 교황이 책정한 금액을 지불하면 누구든지 면죄부를 구입하고 무슨 죄든지 사면받을 수 있었다. 11세기부터 판매된 면죄부는 여러 면에서 획기적인 상품이었다. 첫째로 종교적인 문제였던 ‘죄와 구원’을 경제적인 논리로 해결하는 발상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상품을 구매하듯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는 묘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둘째로 면죄부는 수많은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훌륭한 상품이었다. 예수의 대리인이라는 교황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천국행을 보장해 준다고 했기 때문에 사후 세계를 두려워하는 고객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셋째로 투자 없이 무한대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품이었다. 면죄부가 진짜 천국에 보내 줄 수 있는지는 증명할 수 없었고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가톨릭의 신이 천국에 보내 준다는 믿음을 이용하면 면죄부는 아무런 투자 없이 계속해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면죄부는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예수 구원론의 파생 상품이었다. 12세기 들어 교황은 죄의 종류에 따라 면죄부를 세분화해서 판매했다. 이것은 소비자와 판매자가 모두 윈윈하는 방식이었다. 소비자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그에 맞는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간편하게 결백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것은 다음번 범죄를 촉진시키고 면죄부 구입을 손쉽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교황은 면죄부 정가표를 발행해 “문서 위조죄 7그로시, 살인죄 5그로시, 낙태죄 5그로시, 강간죄 6그로시” 등으로 명시했다. 또 각 죄목은 세부 항목으로 나눠져서 일일이 면죄 금액이 책정되었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죄는 면죄부 정가표에 있었고, 면죄부로 해결하지 못할 죄는 없었다. 가톨릭 성직자가 자주 구입하는 면죄부는 축첩죄 면죄부였다. 성직자들은 첩이 생길 때마다 구입했기 때문에 축첩죄 면죄부의 최대 고객으로 떠올랐다. 면죄부로 교황청은 수익을 얻고 성직자는 순결을 얻게 되니 이보다 적절한 상부상조가 없었다. 무엇보다 교황은 면죄부를 통해 죄의식 없는 향락의 길을 열어 주었다. 교황은 면죄부를 직접 발행할 뿐 아니라 발행 권리를 교구에 허가해 주기도 했다. 면죄부 판매 이익의 1/3을 교황청에 지불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해 준 것이었다. 교황에게 허가권을 받은 교구는 면죄부 판매로 이익을 얻게 되면서 거대하고 사치스런 성당을 짓는 데 혈안이 되었다. 13세기 세인트폴 성당의 건축 장부를 보면, 800개의 면죄부를 판매해 성가대석을 화려하게 보수했다고 기록돼 있다. 범죄가 들끓는 도시일수록 면죄부 판매는 높은 수익을 올렸고 가톨릭 성당은 더욱 크고 화려해졌다. 면죄부 수익으로 건축 자금을 이용한 성당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16세기에 재건된 베드로 대성당이었다. 베드로 대성당은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에 위치하며 그 자체로 가톨릭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쥐들이 활보하던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하는 자금은 면죄부에서 왔다. 특히 교황청은 가톨릭의 전통인 ‘희년(禧年)’을 교묘히 이용해 더욱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희년이란 25년마다 한 번씩 교황이 대대적으로 죄를 사면해 주는 해로, 이해에 로마에서는 희년 축제가 열려 베드로 성당을 찾아온 순례객들에게 면죄부를 판매했다. 희년 축제란 곧 면죄부 판매 축제라 할 수 있었다. 뜻깊은 희년에 로마를 찾아오는 순례객들이 넘쳐나면서 면죄부 수익 또한 최고치를 달렸다. 경제 감각이 뛰어났던 교황 레오 10세(1475~1521)는 1525년에 돌아올 희년 축제를 10년이나 앞당겨서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했다. 희년에 판매할 면죄부를 ‘희년 사상 가장 거룩한 면죄부’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사전 판매했던 것이었다. 또 교황 레오 10세는 면죄부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두 명의 인물을 영입했다. 한 명은 독일의 전설적인 사업가 야코프 푸거로, 교황은 면죄부의 판매권을 푸거에게 허가해 주었다. 수익률을 극대화시키는 사업가 손에서 면죄부는 전략적인 히트 상품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푸거는 면죄부의 사면 효과를 8년으로 한정시켰던 것이다. 이는 8년마다 면죄부의 새로운 수요를 창출했고 이익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또 다른 한 명은 수도사인 요한 테첼이었다. 교황은 그에게 ‘사면관’(pardoners)이라는 직함을 주어 면죄부 판매와 수금을 총괄하게 했다. 그 자신이 간음죄를 범했던 테첼은 “면죄부로 사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면죄부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합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면죄부 수익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1506년 면죄부 판매로 재건축이 시작된 베드로 대성당은 1626년 완공되었고, 공사 기간이 100년이 넘기 때문에 전체 건축 비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건축비가 54억~84억 달러(6조 3천억 원~9조8천억 원)로 추정된다니 그중 면죄부로 조달한 비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교황청이 오랫동안 면죄부를 발행한 것은 경제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면죄부는 교황청만 발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고, 면죄부를 발행하면 무지한 대중이 몰려와 금고를 채워 주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정치 세력과의 협상이었다. 1933년 교황청 대표인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그는 바로 다음번 교황인 비오 12세로 선출되었다.)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제국종교협약(Reichskonkordat)’을 맺었다. 교황청이 나치 정당에 정치적인 지원을 해 주는 대가로 히틀러는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수입을 교황청에 제공했다. 그것은 독일 국민들이 납부하는 ‘교회세(Kirchensteuer)’였다. 독일 국민은 태어나자마자 소속 교회가 기록되고 소득이 생기는 순간부터 소득세의 8~9%를 차지하는 교회세가 국고로 들어갔다가 독일의 가톨릭교회로 보내지는데, 히틀러와 교황청이 협약을 맺은 후로 거액의 교회세가 교황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에만 약 1억 달러의 교회세가 교황청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개명천지한 세상에서 면죄부는 더 이상 판매할 수 없지만 교회세는 지금도 독일 국민의 월급에서 징수되고 있다. 악명 높았던 히틀러와 나치 정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교회세는 지금도 가톨릭의 금고를 살찌우고 있다. 2019년 9월과 10월에 <월스트리트저널>과 <더 타임즈>에는 뜻밖의 기사가 실렸다. 교황청의 재정 위기가 심각한 수준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유력지들이 구체적인 수치를 근거로 교황청의 재정 위기를 보도했으나 기사를 접한 네티즌은 “면죄부 팔면 되겠네.(sjmu****)” “예수님 돈 좀 만들어 주세요.(matt****)” 하며 교황청의 위기를 전혀 우려하지 않고 있다. 신묘한 경제 비법으로 위기를 돌파해 온 그들의 능력을 전 세계인들이 신뢰하는 듯하다. 승자와 패자가 수없이 뒤바뀌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도 변함없이 이익을 취하는 자가 진정한 경제의 승자라면 가톨릭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집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간 어떤 변수 속에서도 이익을 취해 온 그들이 이번에는 어떠한 묘책으로 재정 위기를 넘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가톨릭이 세운 나라, 세계 정복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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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어떻게 세계화 되었는가?

지금부터 600년 전인 1419년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해였다. 포르투갈이 항해를 위한 기반 시설을 세우고 대항해시대라는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 돛을 올린 그들의 항해는 세계사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폐해를 남겼다. 이번 기획 기사에서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포르투갈은 12세기 가톨릭 십자군이 세운 나라였다. 초대 군주인 아폰수 1세는 십자군이었고 이슬람 세력과 수백 년 전쟁을 […]

이것은 재앙인가 범죄인가, 화마(火魔)에 무너져 내린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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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성당 화재 사건

2019년 4월 15일 오후 6시 50분경(현지 시간) 노트르담 성당에 시커먼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엄청난 화재로 노트르담 성당은 처참한 몰골이 됐고 예수의 분신과도 같은 십자가 첨탑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러나 사건 발생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대규모 화재가 원인이나 범인을 찾지 못하는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노트르담 성당은 850년간 프랑스 […]

거대한 성범죄 조직에 맞서 싸운 사람들

거대한 성범죄 조직에 맞서 싸운 사람들

해외 아동성추행 사건 <2편> 미국 보스턴·펜실베이니아 사건

2002년과 2018년은 미국의 아동성범죄 처벌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해였다. 2002년은 언론사가 성범죄 조직의 실체를 폭로했고 2018년은 법적인 기관인 대배심이 성범죄 조직에 관한 방대하고 자세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두 사건은 미국 전 지역에서 아동성범죄 처벌이 확대되고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성범죄 조직이 법망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미국을 장악한 범죄 조직과 그에 맞서 싸운 언론과 […]

“신의 은총으로” 프랑스가 분노했다

“신의 은총으로” 프랑스가 분노했다

해외 아동성추행 사건 <1편> 프레나 신부 사건

2019년 2월 20일 프랑스에서 개봉한 영화 “신의 은총으로(Grâce à Dieu)”는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하고 있다. 프랑스의 ‘생트 포이 레 리옹’이라는 도시에서 보이스카웃을 담당한 베르나르 프레나 신부가 1970년대~80년대 70여 명의 보이스카웃 단원을 성폭행한 사건이다. 영화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인 은곰상을 수상하며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프랑수와 오종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이 영화는 아동 성학대에 대한 은폐를 멈추려는 시도”라고 […]

건강한 도전, 함께 뛰는 기쁨이 시작되다

건강한 도전, 함께 뛰는 기쁨이 시작되다

천부교 체육대회는 1998년 이후 3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천부교인들의 건강 축제다. 본지는 그동안 체육대회를 통해 건강을 되찾거나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어왔다. 그 중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 체육대회로 건강 찾아 2004년 어깨 통증이 너무 심해 한의원을 찾았습니다. 머리로 올라가는 혈관이 막힐 수 있으니 빨리 치료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2004 […]

교황이 지배하는 도시, 영토 강탈로 시작해 완전 범죄로 이어지다

교황이 지배하는 도시, 영토 강탈로 시작해 완전 범죄로 이어지다

심층취재 <3, 끝> 완전 범죄의 도시, 그 시작과 현재

바티칸 암매장 사건은 36년 전 실종된 소녀(엠마누엘라 오를란디, 실종 당시 15세)가 바티칸 교황청 내부에 암매장됐다는 의혹을 말한다. 본지는 피해자 시신도 찾지 못한 채 미궁을 헤매는 사건을 연재하면서 사건의 경과를 2편에 걸쳐 실었다. 완결편인 이번 호에서는 실종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와 완전 범죄를 꾀하는 세력이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까지 왔는지 짚어 본다. 2013년 3월 19일, 새로운 교황 프란치스코의 […]

고통에 찬 실종자 가족, 그들 눈으로 보는 혐의자

고통에 찬 실종자 가족, 그들 눈으로 보는 혐의자

심층취재 <2> 검은 도시에서 파멸된 영혼

지난 7월 11일 이탈리아 바티칸에서 한 중년 남성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36년 전 사라진 엠마누엘라 오를란디(실종 당시 15세)의 오빠 피에트로 오를란디였다. 그날은 여동생이 묻혀 있을 거라고 추정됐던 바티칸 무덤을 발굴하는 날이었고 피에트로는 그 현장을 직접 참관했다. 동생의 유골이라도 찾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무덤은 완전히 비어 있었고, 피에트로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은 […]

실종소녀는 바티칸에 묻혀 있다?

실종소녀는 바티칸에 묻혀 있다?

심층취재 <1> 성스러운 바티칸의 지하 묘지

이탈리아 최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암매장 묘지를 발굴하는 작업이 지난 7월 11일 로마에서 있었다. 이 작업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암매장 의혹을 받는 묘지가 바티칸에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다스리는 가톨릭의 성지 바티칸은 암매장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 특급 미스터리는 1983년 15세 소녀가 로마 한복판에서 사라진 실종 사건에서 시작됐다. 40년 가까이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미궁을 […]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

신앙신보 1966년 2월 14일

‘소년한국합창단’ 지휘자 음악 박사 장수철 씨 신앙신보는 1966년 2월 14일자 제422호에는 내가 본 신앙촌, ‘소년한국합창단’ 지휘자 음악박사 장수철 씨 인터뷰가 실렸다. “전도관에 대한 왜곡(歪曲)된 관념은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와전(訛傳)과 아울러 교계의 몇몇 이해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의 그릇된 가르침에서 조성되어진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교회 음악의 권위자요 공로자인 음악박사 장수철(張秀徹) 씨의 신앙촌 관람 소감담이다. 장 박사는 […]

초창기 천막집회와 생명물의 권능

초창기 천막집회와 생명물의 권능

2019 이슬성신절 말씀 해설

이슬성신절에 방영된 하나님 말씀은 초창기 천부교 역사와 함께 천부교 교리의 핵심인 이슬성신과 생명물을 통해 구원의 길을 밝히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하나님 말씀을 처음 보시는 분들을 위해 초창기 집회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과 더불어 직접 생명물의 은혜를 체험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 편집자 주 1955년 천부교 역사와 함께 시작하신 전국 순회 부흥집회 1년 동안 연 500만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