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60>노예무역의 주범이  배상 책임의 주체여야 한다②

세계 종교 탐구 <60>노예무역의 주범이 배상 책임의 주체여야 한다②

▣ 노예화의 허가자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수혜자였다 수많은 가톨릭 국가들이 토착민들을 노예화하고 그들을 매매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에 직접적인 수혜로 이어졌다. 가톨릭은 정복지와 그에 따른 노예가 많아질수록, 동시에 교구·성당·성직자·세례받은 인구와 교회의 재정 기반도 확대되는 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칙서를 내려 신학적·법적·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해주면, 가톨릭 국가들은 원주민 대륙을 침탈할 때마다 성직자를 동행하여 토착민들을 개종시켰다. 이는 곧 가톨릭교회의 교세 확장과 부의 축적으로 이어진다. 1501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칙서「엑시미에 데보티오니스(Eximiae devotionis)」는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탈할 때 합법적으로 십일조를 거두게 했고, 그 십일조를 새 교회를 설립과 재정 지원에 사용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가톨릭 신앙을 널리 전파하려는 경건한 열망에 따라, 최근 상당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아메리카 제도와 그 지역들을 점령하고 회복하기 위해 더욱 힘쓰고 있습니다. 이는 그 땅에서 잘못된 믿음이 존재하는 곳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숭배와 경배를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계자들이 앞서 말한 제도들을 획득하고 회복한 뒤 그곳의 주민과 거주자들에게서 십일조를 자유롭고 합법적으로 받아 징수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그곳에 교구가 설치된 뒤에는 충분한 재원을 마련하여 교회들을 설립해야 합니다. 그 재원은 해당 교회의 성직자와 관리자들이 적절히 생계를 유지하고, 교회에 필요한 업무를 수행하며, 전능하신 하느님께 합당한 예배를 거행하고, 교구에 필요한 모든 의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교황이 칙서로 길을 열어주면, 교회는 열렬한 가톨릭 국가들이 가져다주는 개종자와 재정적 이익을 그대로 누릴 수 있던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또한 직접 노예를 소유하고 노동력을 이용하며 경제적 이익을 얻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 예수회는 아메리카 대륙의 최대급 토지·노예 소유 기관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1766년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약 2,630명의 예수회원이 있었고, 멕시코에서만 농장 41곳, 대학 27곳과 다수의 교회를 소유했다. 칠레의 예수회 재산은 현금·물품·노예·가축·부동산 등을 합쳐 196만 1,148페소로 당시 식민지 정부의 1년 예산보다 많았다. 또 예수회 농장과 노예 노동에서 발생한 수입은 학교와 선교 사업을 유지하는 재원이 되었다. 이처럼 노예화와 노예무역은 가톨릭교회의 교세 확장과 부의 축적을 견인한 핵심 기반 가운데 하나였다. 케이티 제네바 캐넌의 논문『기독교 제국주의와 대서양 노예무역』에서 는 15세기 유럽 선교·정복의 구조를 세 단계로 설명했다. 먼저 현지 왕이나 추장을 만나고, 그다음 기독교에 복종하도록 요구하고, 만약 토착민이 자기 종교를 버리기를 거부하면 살해·굶주림·강간·질병·육체적 혹사·영구 노예화까지 “신이 승인한 종교적 의무”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논리가 형성됐다. 캐넌은 “God, glory, and gold”, 즉 “신, 영광, 황금”이 하나의 신적 섭리처럼 묶였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많이 개종시킬수록 구원을 얻는다는 사고와, 영토·노동력·자원을 확보하려는 현실적 욕망이 결합됐다는 뜻이었다. 종교 조직이 세속 권력 및 경제적 이익과 결탁했을 때, 그 조직은 어떤 폭력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구조를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종교가 없는 경우보다 더 잔혹한 폭력이 가능해진다. 신의 이름이 붙은 폭력은 죄책감도, 한계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이 구조를 칙서와 교서 등을 통해 수백 년에 걸쳐 완성했고, 노예무역은 이 구조가 실증적으로 드러난 사례다. 종교와 세속 권력이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 결탁하는 구조는 더욱 교묘하게 진화하여 오늘날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남의 토지를 무단으로 침범하고, 대중을 선동해 이를 정당화하거나 부추기며, 각종 편법으로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수탈하는 행위 등이 그것이다. 권력의 이런 몰염치한 행태는 갈수록 교묘해져서 법과 정의마저 자신들의 발 아래 두려는 횡포로 이어진다. 이러한 비상식적인 권력 행사의 배후에는 초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종교가 자리하고 있다. 종교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범죄를 가중시켰다는 점에서, 교황청의 책임은 더욱 막중하다. 그런데 사실 가톨릭교회를 비롯해 대부분의 가해국들은 자신들이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태도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잘못을 시인하고 심지어 노예무역을 비판하면서도 배상에 대한 약속은 외면한다는 것이다. ▣ 배상적 정의를 거부하다 2026년 3월 25일 미국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는 “아프리카인 노예 매매 및 인종적 차별에 기반한 아프리카인 노예화는 인류에 대한 가장 중대한 범죄임을 선언함”이라는 결의안(A/RES/80/250)이 찬성 123개국, 반대 3개국, 기권 52개국으로 채택되었다. 채택은 되었지만 미국의 반대표를 비롯해 대서양 노예무역의 주요 가해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의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기권을 택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들을 노예로 사고팔았던 일본도 기권국에 이름을 올렸다.<자료7> 전문가들은 이들이 찬성하지 않은 배경으로 이번 결의안이 과거의 책임을 오늘날의 구체적인 배상 문제로 연결한 점을 지적한다. 바티칸은 UN 회원국이 아니라 이번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5월 15일 발표한 교황의 회칙에서 배상에 대한 태도를 가늠할 수 있다. 레오 14세는 노예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구조적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 선언까지 했음에도 배상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2022년 바티칸에 배상 청원서를 제출하고 변화를 기대했던 배상·치유 국제 연대는 이에 유감을 표했다. 배상에 대한 책임을 논할 때, 이를 거부하는 주요 논거 중 하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과거 조상들의 범죄에 대해 책임질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배상·치유 국제 연대의 청원서는 노예무역의 피해는 과거에 끝난 것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지속되고 있기에, 이는 오늘날에도 배상해야 할 채무임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6세기 이상, 30세대에 걸쳐 대서양 양안에서 아프리카계 후손들의 노동력과 지식을 약탈하고, 그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적해 왔습니다. 이러한 착취는 아프리카계 후손들이 벌어들인 소득과 부를 유럽계 후손들에게 대서양 양안에서 대대로 물려주어, 전자에게는 대대로 이어지는 빈곤을, 후자에게는 대대로 이어지는 부와 특권을 안겨주었습니다. 숫자적인 통계는 수 세기 동안 잃어버린 희망, 잃어버린 꿈, 그리고 잃어버린 생명의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흑인의 생명을 그토록 심각하게 경시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깊은 정신적 고통을 이 통계는 조금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프리카와 그 국민들에게 저지른 죄와 잘못에 대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정신적 배상을 포함한 완전한 배상의 형태로 막대한 도덕적, 재정적 빚을 지고 있습니다.” 배상은 아직 청산되지 않은 빚이다. 과거의 착취를 통해 축적된 부와 이익은 오늘날까지 계승하면서, 그 과정에서 발생한 책임과 채무는 과거의 일로 떠넘기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며 양립할 수 없기에, 어떠한 논리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6월 18일, 가나에서 열린 ‘Next Steps’ 컨퍼런스의 고위급 회의에서 가나의 존 드라마니 마하마 대통령은 “역사는 죄책감을 물려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물려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라고 연설했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이익과 제도를 계승한 주체에게, 아직 청산되지 않은 책임을 묻자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피해를 입은 후손들의 목소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조상의 땅에서 쫓겨났고, 우리 고유의 영성은 그들의 종교로 대체되었습니다. 사과는 됐으니, 도덕적으로 우리에게 빚진 것을 돌려주고, 그와 함께 보상도 하십시오.” 지금까지 사과를 해온 가해자들은 많다. 그러나 사과는 채무의 존재를 인정하는 말이지, 채무를 갚았다는 영수증이 아니다. 가톨릭교회와 가톨릭 국가들이 당시 발생한 부와 특권을 오늘날까지 물려받아 누리고 있는 이상, 아직 갚지 않은 책임도 함께 물려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배상을 거부하는 또 하나의 주요 논거가 있다. 당시에는 노예제가 불법이 아니었으므로, 후대의 법과 도덕적 기준을 과거에 소급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미국이 UN 결의안에 반대표를 행사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주목할 것은 교황 레오 14세 역시 이번 회칙 176항에서 “과거의 사건을, 시간이 흐르면서 성숙해진 도덕적 기준이 마치 당시에도 존재했던 것처럼 시대적 맥락을 무시하고 판단할 수 없긴 하다”라고 전제하며, 책임을 인정하기에 앞서 시대적 한계를 먼저 내세웠다. 그러나 같은 방어 논리를 주장하더라도 세속 국가인 미국과 종교 수장인 레오 14세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진리를 아는 종교라면 시대를 불문하는 보편적인 도덕과 죄의 기준을 제시했었어야 한다. 그러나 노예무역을 통제하는 법이 없던 시절, 가톨릭교회에서 제시한 것은 노예제의 허가와 축복이었다. 심지어 수백 년 뒤 노예무역을 멈춰 세운 것 역시 교회의 자성이나 선도가 아니라, 뼈아픈 실패를 딛고 깨어난 세상의 양심과 여론이었다. 그동안 진리의 길을 자처해 온 교회가 세속 국가와 똑같은 논리로 책임 감면을 유도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명백한 모순이다. 종교를 자처해온 조직에게 이는 감면 사유가 아닌 오히려 배상의 무게를 더욱 가중할 뿐이다. ▣ 산정 불가 규모의 부당이득, 배상은 인간의 도리 2023년 경제·금융 컨설팅 업체 브래틀 그룹은 노예제 당시와 폐지 이후까지 이어진 피해를 합산해 대서양 노예제 배상액을 약 131조 달러(2023년 기준 약 17경 1,186조 원)로 추산하였다.<자료8> 많은 금액으로 보이지만, 이는 금전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피해만을 산출한 결과에 불과하다. 앞서 배상·치유국제 연대가 지적했듯 숫자적인 통계는 수 세기에 걸쳐 잃어버린 생명과 희망, 꿈,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이어진 정신적 고통까지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애초에 수백 년 이어진 강제 이주와 강제 노동, 끊어진 혈통과 사라진 언어, 조상의 땅에서 뿌리 뽑힌 정체성, 그리고 대를 이어 물려받은 빈곤과 차별 등의 이 모든 상실을 화폐 가치로 정확히 환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131조 달러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참혹한 범죄의 대가를 그나마 최소한으로 가늠해 본 수치일 뿐이다. 또한 이 환산조차 어려운 천문학적인 금액은 그만큼 축적된 죄악과 피해의 규모가 막대하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 빼앗은 것을 돌려주는 것은 거창한 도덕이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오래되고 단순한 정의이며 원칙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의 재산이나 노동으로 이익을 얻고, 그로 인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은 ‘부당이득(unjust enrichment)’이라 하며, 그 이익은 그 가치만큼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피해자들은 아무 잘못도 이유도 없이 하루아침에 인간적 존엄과 미래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명백한 잘못과 이유가 있는 배상조차 외면하는 이들이 감히 도덕과 선, 구원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 적절한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쌓아 올린 화려한 성당과 예술품, 역사와 권위는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 이교도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민족의 삶과 영혼, 미래를 파괴하고도 끝내 그 빚을 갚기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배상은 정의 실현을 위해 뒤늦게라도 이행해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책임이다. 인류에 돌이킬 수 없는 죄악과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도 배상마저 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가톨릭교회를 반인륜적 범죄의 책임을 외면한 파렴치한으로 기록할 것이다.

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①

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①

“수백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검은 배에 사들여, 수족을 쇠사슬로 묶고 배 밑바닥에 몰아넣으니, 지옥의 형벌보다 더하였다.” 이 광경은 마치 지난 호에서 살펴본 노예선의 참상, 아프리카 흑인들이 짐짝처럼 실려 갔던 그 죽음의 항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의 배경은 아프리카가 아니다. 이는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기관 오무라 유코가 남긴『규슈 원정기(九州御動座記)』의 기록으로,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포르투갈 무역선에 짐승처럼 묶여 팔려나가던 상황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가톨릭이 축복한 노예무역의 영향은 대서양에만 머물지 않고, 일본을 비롯해 명나라, 그리고 우리나라 조선의 역사 속에도 깊이 파고들었다. 이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가톨릭 국가들의 노예무역이 동아시아 국가들에 어떻게 확산되었으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실제 사료와 연구 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예수회, 총·화약과 노예매매로 일본에 세력을 넓히다 1543년, 일본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 해안에 배 한 척이 도착한다. 배에서 내린 이들은 낯선 외모를 하고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었다. 유럽인을 처음 본 일본인들은 그들을 남쪽에서 온 오랑캐라 하여 ‘남만인(南蠻人)’이라 불렀고, 남만인들이 타고 온 배는 남만선(南蠻船)이라 불렀다. 남만선에는 일본의 운명을 바꾸게 되는 물건이 실려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조총과 화약이었다. 당시 일본은 천황(天皇,てんのう)과 무로마치 막부 등의 중앙 권력이 무너지고, 전국 각지의 다이묘(영주)들이 영토와 패권을 놓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전국(戰國)시대였다. 각 다이묘들은 사실상 독립된 군주처럼 군대를 거느렸는데,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은 곧 조총의 군사적 가치를 알아보았고, 다네가시마에서 들여온 조총과 총포 제작 기술은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남만 무역망을 따라 일본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예수회 가톨릭 선교사들은 다이묘들의 최우선 관심사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조총과 화약’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에 선교사들은 포르투갈 상인과 일본 다이묘들 사이에서 통역과 중재를 맡는 무역 브로커 역할을 하며, 다이묘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것을 포교 수단으로 삼았다. 다이묘들 역시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군사 물품과 해외 물자를 구하는 데 유리했기에, 선교를 허용하거나 교회·신학교·사제관·서양식 병원의 건립과 국제무역항의 조성을 지원하며 선교사들을 도왔다. 덕분에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바탕을 효과적으로 조성할 수 있었다.<자료1> 이 시기, 가톨릭 선교사 세력과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손을 잡은 인물은 바로 오와리의 영주 오다 노부나가였다. 노부나가는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들과 그들을 돕고 있던 상인들을 통해 서양의 대포를 알게 되는데, 그는 곧 그것이 전투에서 매우 유용할 것임을 깨닫고 다른 다이묘들보다 앞서 철포부대를 조직하고 전술을 개발했다. 그가 만든 철포부대는 전국시대 전투 양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노부나가는 마침내 교토를 장악하며 천하 통일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선교사들은 노부나가의 강력한 비호 아래 신학교를 세우는 등 일본 중심부에서 교세를 폭발적으로 늘려나갔고, 노부나가는 계속해서 서양 무기와 화약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훗날 파우스트적인 거래로 평가받는다. 거래의 대가로 자국민들을 팔아넘기는 반인륜적 범죄가 자행됐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 사이에서는 교황의 허가 아래 노예무역이 횡행하고 있었다. 16~17세기 동양인 노예매매는 극히 수익성 높은 사업이었고, 포르투갈은 이미 명나라와 교역을 시작한 바 있다. 명나라 관리들은 허가 없이 무단으로 거래하려는 포르투갈인들을 ‘바다의 악마’라 부르며 분노했지만, 가톨릭 국가였던 포르투갈은 그들 신의 대리인인 교황에게 이교도의 땅과 재산을 매매할 권한을 받았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포르투갈은 중국에서 많은 노예를 사들였는데, 그중 상당수는 어린이였다. 부모는 자식을 팔고, 남의 자식을 납치해 팔기도 하는 등 많은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갔고, 이에 중국의 공식 역사서《명사(明史)》에는 포르투갈인들이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잡아먹었다(掠小兒為食)”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일본 다이묘들이 유럽 국가의 방식을 따라 노예무역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노예매매의 비극이 일본에까지 번지게 된다. 짐짝처럼 팔려 간 일본인들은 포르투갈의 아시아 거점이었던 마카오를 비롯해 인도, 필리핀은 물론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와 유럽 본토까지 전 세계로 끌려갔다. 16세기 말 포르투갈 리스본에 거주했던 이탈리아 상인 필리포 사세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리스본의 거대한 노예촌에는 아프리카 흑인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중국인 노예도 다수 존재했다. 심지어 포르투갈인의 노예를 넘어 흑인 노예의 하수인으로 부리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수많은 어린 소녀들이 성노예로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1555년 포르투갈 교회의 기록에는 일본인 소녀들을 매입해 창녀로 부릴 목적으로 유럽까지 데려갔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포르투갈의 역사학자 루시우 드 소우자의 저서『포르투갈의 근세 일본 노예무역: 상인, 예수회, 그리고 일본인·중국인·조선인 노예들』에 따르면, 이 노예무역에서 예수회는 노예 협상, 구매, 합법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례로 예수회는 인신매매를 합법화해 주는 ‘허가증 발급 시스템’을 직접 운영했다. 상인들이 노예를 데려와 세례를 받게 하면 거래를 승인해 주었는데, 이는 도덕적으로 논란이 있는 매매 상황에서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은 ‘노예에게 행해지는 선행’이기 때문에 합법이 된다는 논리였다. 나아가 예수회 스스로도 많은 노예를 거느린 노예 소유주였다. 그들은 문서를 작성할 때 ‘포로(cativo)’나 ‘노예(escravo)’라는 단어 대신 ‘사역 청년(moço)’이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노예 소유 사실을 은폐하려 했지만, 사역 청년은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들이 거느리던 노예는 수백 명에 달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한동안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수많은 일본인 남녀가 짐승처럼 쇠사슬에 묶여 포르투갈 무역선에 팔려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심각성을 인지하게 된다. 히데요시의 서기관 오무라 유코가 규슈 원정에 동행하며 남긴『규슈 원정기』에는 당시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여 더욱더 그 종교를 번성시킬 계략을 꾸몄다. 이미 고토, 히라도, 나가사키 등지에서는 포르투갈 무역선이 들어올 때마다 영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일본에 자리 잡고 있던 여러 종교를 자기들의 사악한 법(邪法, 사악한 가르침)으로 개종시켰다. 그뿐 아니라 일본인 수백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검은 배에 사들여, 수족을 쇠사슬로 묶고 배 밑바닥에 몰아넣으니, 지옥의 형벌보다 더하였다. (…) 지금 이 세상에서 이미 축생도(짐승의 세계)의 참상이 눈앞에 펼쳐진 것과 다름없었다. 이를 보고 따라 배운 그 근처의 일본인들 모두 그 모습을 본받아, 자식을 팔고 부모를 팔고 아내를 판다고 하니, 이를 전해 들으시고 깊이 헤아리셨다. 이 종교를 그대로 허용한다면 순식간에 일본이 외도(外道, 그릇된 길)에 빠질 것이 자명했다. 그리되면 기존 종교와 국가 질서가 모두 무너질 것이라 탄식하시며, 선교사들을 일본에서 추방하라는 명을 내리셨다.(今度伴天連等能き時分と思候て、いよいよ一宗繁盛の計略を廻らして、すでに五島、平戸、長崎などにて、南蛮舟つきごとに完備して、その国の国主を傾け、諸宗をわが邪法に引き入れ、それのみならず日本人を数百男女によらず、黒船へ買取、手足に鎖を付け、船底へ追入れ、地獄の呵責にもすぐれ、(…) ただ今世より畜生道の有様、目前之様に相聞候。見るを見まねに、その近所の日本人、いずれもその姿を学び、子を売り親を売り妻女を売り候よし、つくづく聞しめし及ばれ、右之一宗御許容あらば、忽日本外道之法に成る可き事、案の中に候。然らば仏法も王法も、相捨つる可き事を歎思召され、即伴天連の坊主、本朝追払之由仰出候。)” 위와 같은 이유로 히데요시는 1587년, 일본 전역에 ‘바테렌(伴天連, 포르투갈어 신부 padre의 음차 표기, 즉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지만, 기이(奇異)하게도 포르투갈과의 무역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자국민이 노예무역으로 받는 고통을 알면서도, 이제 포르투갈이 공급하는 초석과 총포는 포기할 수 없는 자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추방령에 포르투갈 상선은 무역을 위한 것이니 외국 상인들은 계속 일본에 드나들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두었다. 그러나 이는 곧 선교사들의 잔류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겠다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선교사를 전면 추방하면 상인들까지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추방령을 엄격하게 집행하지 않았다. 대다수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 남았지만, 무역을 지속하고 싶었던 히데요시는 이를 묵인했다. 연구자들은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령은 선교사를 추방하려는 목적보다는 포르투갈 무역은 유지하면서 선교사와 기리시탄 다이묘들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 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그런 히데요시를 바라보는 예수회의 시선은 뜻밖이었다. 예수회의 기록들을 보면, 히데요시를 가톨릭의 의인(義人)이자 그들 신의 성스러운 검(聖劍)이라 칭송하고 있었다. 어째서 히데요시는 그런 평가를 당한 것일까? ▣ 예수회, “임진왜란으로 조선인들이 구원받았다”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정복하고자 조선 침략을 강행하기 전이었던 1586년 5월 4일, 재일본예수회 준관구장 가스팔 코엘료 신부 일행 30여 명이 도요토미와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중무장한 포르투갈선 2척의 구입과 항해사 고용을 주선해 달라고 코엘료 신부에게 요청한다. 이에 코엘료 신부는 환영하며 요청받은 포르투갈 선박 두 척뿐 아니라, 히데요시가 요구하지도 않은 추가적인 포르투갈 군사 지원까지 제안했고,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을 히데요시 편으로 결집시켜 적대 세력이었던 시마즈 가문과 싸우게 하겠다고도 약속했다. 코엘료 신부가 전쟁 지원에 이토록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히데요시가 중국을 정복하면 중국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교에 귀의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예수회는 이런 히데요시를 의인으로 묘사했다. 예수회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가 1592년에 작성한 보고서에는 히데요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하여 조선부터 정복에 착수했다. … 그리고 포교에 종사하고 있는 사제, 그 밖의 성직자의 수와 신용은 크게 증대하였으며 자기 자신이 복음의 포교 활동을 위하여 한층 적합한 손발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한편 도요토미는 많은 가톨릭교도를 중요한 영주로 중용하고, 우리 성스러운 가르침을 확대하기 위한 방향에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 주 하느님은 그것이 조선과 명나라에서 포교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도록 뜻하신 것이리라.” 다른 논문에서는 이를 보다 간략하게 “히데요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은 그를 조선에도 복음의 문을 여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고 정리했다. 또한 일본에서 30여 년간 활동한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도 일본 선교의 역사를 정리한 저서『일본사』에서 “우리 주 하느님은 이 사람, 곧 관백 히데요시를 일본에 있어서의 성스러운 검과 채찍으로 선택하셨던 것이다.”라며 히데요시를 하느님의 성검(聖劍)으로 묘사했다. 이것이 한반도를 초토화하고 수많은 조선인의 목숨을 앗아간 침략전쟁의 총책임자를 바라보는 예수회의 시선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예수회는 조선 전쟁을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열어준 선교의 기회로 여겼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회가 기독교인의 모든 희망이 달려있다고 한 인물이 또 있다. 임진왜란 왜장들 중 가장 잔인했다고 알려진 인물, 전쟁의 선봉에 서서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학살하고 관청과 민가에 불을 지른 기리시탄 다이묘 ‘아우구스티누스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전쟁터에 나가는 부대 깃발에 항상 십자가를 새겼으며, 임진왜란 당시 자신과 기리시탄 장병들의 미사와 고해성사를 위해 종군 신부를 요청해 세스페데스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게 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원정을 가기 전 천주교도들은 가능하면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성체를 받고서 나서려 했다.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고 성사를 담당할 사제를 파견해 줄 것을 일본의 부관구장에게 청원했다. 이들 천주교 신자 전원이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 모이게 된 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섭리이며, 고니시 유키나가의 간청에 답하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으로 특파되었다. 세스페데스는 조선에서 고해를 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는 천주교도 수가 점차 늘어났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주요 기리시탄 다이묘들도 자신을 찾아왔으며, 자신이 고해성사를 해 줌으로써 천주교도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하느님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국립진주박물관,『프로이스의「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서출판 부키, 2003.) 프로이스를 비롯해 유럽 선교사들은 섭리주의(攝理主義, Providentialism), 즉 일본 기독교인들의 운명이 신의 섭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믿음을 유키나가와 연관지었다. 일본사 연구자 유르기스 엘리소나스에 따르면,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조선 침략의 전면에 나서면서 이 전쟁은 일본과 그리스도교 세력이 결합한 기묘한 십자군 원정의 분위기를 띠었는데,(the prominence of Christian daimyo gave an air of somewhat strange crusades to the Japanese-Christian enterprise in Korea) 이때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 유키나가가 조선 선교의 문을 열어줄 것이란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1599년 포르투갈어로 작성된 예수회의 조선전쟁 보고서는 “이 모든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고니시 유키나가의 세례명)와 함께 있던 기독교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가장 자비로운 섭리 덕분이었다.(o que não foi sem a piedosíssima providência de Deus que quis salvar aqueles tonos cristãos que estavam com Agustinho)”라고 임진왜란을 기록했다. 또한 유키나가 덕분에 기독교인들은 아시아, 특히 조선에서 기독교 전파의 새로운 길이 열렸다며, “전쟁으로 인한 두 번째 이익은 많은 조선인들이 구원(救援)받았다는 것이었다.(O segundo bem e proveito que Nosso Senhor tirou de estos males da guerra foi o grande número de coreias que por esta via se salvou.)”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가톨릭 선교사들의 상상대로 신의 섭리가 인도한 성스러운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은 조선인을 구원했을까?

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②

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②

▣ 임진왜란, 한반도를 지옥의 참상에 몰아넣다 1592년 임진년에 발발하여 1598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한다. 이 가운데 1597년 정유년에 일어난 재침략 전쟁이자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쟁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따로 명명한다. 그런데 이 정유재란 시기에 왜군을 따라 조선에 건너와 전쟁의 참상을 모두 목격한 종군 승려가 있었다. 일본의 종군 승려 게이넨(慶念)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라는 일기에 자세히 기록했는데, 그의 기록은 정유재란 당시의 참혹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8월 6일, 산도 들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사람을 보면 무참하게 칼로 베어버리고는 쇠줄과 대나무로 목을 묶어 끌고 간다. 묶인 부모는 어린 자식을 걱정하며 울부짖고, 자식은 어버이를 찾아 울며 헤맨다. 이렇게 비참한 모습은 난생처음으로 보았다. (野も山も、城ハ申におよはす皆々やきたて、人をうちきり、くさり竹の筒にてくひをしハり、おやハ子をなけき子ハ親をたつね、あわれ成る體、はしめてミ侍る也。) 8월 8일, 고려(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베어 죽여 갈라 놓으니,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된다. 서로 울부짖는 그 탄식은, 마치 지옥의 옥졸에게 형벌을 받는 것과 같았다. (かうらい人子供をハからめとり、おやはうちきり、二たひとみせす。たかひのなけきハさなから獄卒のせめ成りと也。) 8월 16일, 성안의 사람들은 남녀 모두 남김없이 죽여서 생포한 사람이 없다. (城の内の人數男女殘りなくうちすて、いけ取物ハなし。) 8월 18일, 날이 밝아 성 밖을 보니, 길바닥에 죽은 자들이 모래알처럼 널려 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다. (夜明て城の外を見て侍れハ、道のほとりの死人いさこのことし。めもあてられぬ氣色也。) 8월 28일, 가는 도중에 길가에서도 산야에서도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베어 죽인 모습이 차마 다시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가는 길마다 베여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여…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는 이가 없구나. (道すから、路地も山野も男女のきらいなくきりすてたるハ、二目共見るへきやうハなき也。道すからきられてしする人のさま五體につゝくところなきかな) 11월 19일, 일본으로부터 갖가지 상인들이 일본군을 따라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인신매매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서 달아나지 못하게 밧줄로 목을 묶고 끌고 다닌다. 잘 걷지 못하면 몽둥이로 몰아세우고 마구 두들겨 패는 모습이 마치 지옥의 하수인인 아방나찰(阿傍羅刹)이 죄인을 고문하는 것이 이런 모습일까 하고 생각되었다.(日本よりもよろつのあき人もきたりしなかに、人あきないせる物來り、奥陣ヨリあとにつきあるき、男女老若かい取て、なわにてくひをくゝりあつめ、さきへおひたて、あゆひ候ハねハあとよりつへにておつたて、うちはしらかすの有様ハ、さなからあほうらせつの罪人をせめけるもかくやとおもひ侍る。) <참고자료3>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서 일어난 노예매매의 참상 – 자료화면 출처: KBS <역사스페셜> 임진왜란 2편, 일본승려 정유재란 종군기 “산도 들도 불타고 있었다” / KBS <역사추리> 34회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이었다’ 1부 그의 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선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비인간적인 노예매매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는 불과 10년 전, 오무라 유코가『규슈 원정기』에 기록했던 일본에서의 그 참상과 흡사하다. 1998년 12월 11일자 부산일보 기사〈임란 조선인의 수난현장-8 노예시장〉에서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가미가이토 겐이치 교수의 저서『공허한 출병』을 인용해 “일본 상인들은 포르투갈인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행위를 배워 조선인 포로를 노예로 매매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전비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왜군 지휘부는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거나 군수물자와 교환하는 방식을 학습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1996년 9월 6일 7시 30분에 방영된 KBS <역사추리> 34회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이었다’에서는 임진왜란이 영토침략전쟁이 아니라 사실상 노예전쟁이었음을 입증하기도 했다. 해외로 팔려나간 조선인 노예의 수는 정확히 집계하기 어려웠다. 전쟁 통에 작성된 포로 명부가 체계적으로 남아있지 않고, 포르투갈 무역망을 따라 마카오·인도·유럽 등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을 수 있는 자는 누구든 일본으로 잡아가 경작을 대신 하게 했다”는 선조실록의 기록, “조선의 남자 포로가 3~4만이다. 늙은이와 여자를 합치면 그 곱절은 될 것이다”라는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의 기록, “사쓰마(現 가고시마)주에 3만 7백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다.”는 광해군 일기의 기록,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스쿠도(scudo·이탈리아 옛 화폐단위), 페루 노예가 400스쿠도인 것에 반해 조선인 노예는 2.4스쿠도에 불과했다는 카를레티의 동방여행기(Viaggi di Francesco Carletti) 등.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여러 사료들을 종합하여, 학계에서는 임진왜란 7년 동안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수를 약 20만 명의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임란 당시 조선인들의 비극은 노예로 팔려간 데서 그치지 않았다. 학살의 잔학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에도 학살은 있었다. 그러나 2차 침략인 1597년 정유재란에 이르러 그 성격은 차원이 달라진다. 이전의 학살이 전투 과정에서 벌어진 개인적인 약탈과 살인이었다면, 정유재란의 학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가 차원에서 내린 조직적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서 억류 생활을 했던 조선의 문신 강항이 남긴『간양록(看羊錄)』에는 히데요시의 명령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마다 귀는 둘이요, 코는 하나다. 목을 베는 대신에 조선 놈의 코를 베어올려라. 병졸 하나에 코 한 되씩, 모조리 소금으로 절여서 보내도록 하라. (人有兩耳,鼻則一也。宜割朝鮮人鼻,以代首馘。一卒各一升。沈之以鹽,送于賊魁。)” 코의 숫자는 곧 왜군들의 전공(戰功)이 되었고, 왜군들은 자신들의 전공을 높이기 위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코를 베어 보냈다. 실제로 한 왜군 부자(父子)는 “남녀와 갓난아이까지 남김없이 베어 죽이고, 코를 베어 그날그날 소금에 절였다.”며 이를 자신들의 전공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코 베기 현장을 직접 목격한『난중잡록(亂中雜錄)』의 저자 조경남은 “사람만 보면 죽이든 안 죽이든 코를 베었으므로 그 뒤 수십 년간 조선의 길에서는 코 없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기록했고, 정유재란을 직접 겪은 실학자 이수광도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 사전『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이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코는 베어 없어도 목숨은 건져 코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썼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도 이 참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소중한 것을 빼앗긴다는 뜻으로 쓰이는 ‘눈 뜨고 코 베어 간다’는 표현, 그리고 아이들에게 조심하라며 겁을 줄 때 쓰는 ‘에비!’라는 표현이 코와 귀를 베어 가던 일본군, 즉 ‘이비(耳鼻)야가 온다’는 경고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널리 회자된다. 한반도 전선에서 벤 코를 히데요시의 코 수집관에게 인도할 때 일본군 부대장은 반드시 코 영수증을 받아두었고, 코가 일본에 도착하면 히데요시는 그 수를 확인한 뒤 부대장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오늘날 일본 각지에 남아있는 코 영수증과 감사장을 살펴보면, 남원성 전투가 있었던 1597년 8월 15일부터 약 1개월간에 걸쳐 코 베기가 자행되었는데, 왜군 무사 오코치 히데모토가 기록한『조선물어(朝鮮物語)』에 따르면, 이 짧은 기간 동안 무려 214,752개의 코가 일본으로 보내졌다. 또한『조선물어』는 교토 동쪽 대불전 부근에 코들을 쌓아 묻고 석탑을 세워 누구나 볼 수 있게 전공을 기렸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코 무덤(鼻塚)은 현재까지도 교토에 남아 그 참상이 실제로 벌어진 역사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렇게 조선 전역을 피로 물들인 정유재란은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철수하며 비로소 끝을 맺는다. ▣ 가톨릭이 남긴 동아시아의 상흔과 배상 논의의 빈자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뒤, 일본과 조선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전쟁의 상처를 기억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두 나라 모두 가톨릭을 국가의 미래를 무너뜨릴 사교(邪敎)로 뇌리에 깊이 새겼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조선 전쟁과 인신매매는 기리시탄 세력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키웠는데, 그 결과가 바로 도쿠가와 막부의 금교 정책이다. 히데요시 사후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2년 막부 직할령에 기독교 금지 조치를 내렸고, 이어 1613년 말에는 ‘선교사 추방문’을 통해 선교사 추방과 금교 조치를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했다. 선교사 추방문에 의하면 기독교를 금지시킨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리시탄의 무리가 마침내 일본에 들어왔다. 그들은 단지 상선(商船)을 타고 와서 재물을 교역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함부로 사악한 법을 널리 퍼뜨려 바른 법을 미혹하게 하고, 나라의 정치를 바꾸어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 이는 큰 재앙의 싹이니 금하지 않을 수 없다. (…) 저 선교사의 무리는 의를 해치고 선을 파괴한다. 처형자(순교자)를 보면 기뻐하며 달려가 절을 한다. 이것을 종교의 본질이라 여기는데, 사악한 가르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둘러 금하지 않으면 후세에 반드시 국가의 우환이 될 것이다. (爰吉利支丹之徒党、適来於日本。非啻渡商船而通資材、叨欲弘邪法、惑正宗、以改域中之政号、作己有。是大禍之萌也、不可不制矣。(…) 彼伴天連徒党、皆反件政令、嫌疑神道、誹謗正法、残義損善。見有刑人、載欣載奔、自拝自礼、以是為宗之本懐。非邪法何哉。実神敵仏敵也。急不禁、後世必有国家之患。)” 조선 조정도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시간이 흘러 왜와의 국교를 재개하고서도, 가톨릭에 대해서만큼은 극도의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정조실록에 기록된 1795년 박장설의 상소문에 의하면, 박장설은 천주교가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가정과 제사로 이어지는 조선 사회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고, 집안과 나라에 해를 끼친다고 보았다. 또한 이 서양의 가르침이 명나라 때 중국에 들어온 뒤 여러 지역으로 퍼졌고, 끝내 일본의 기리시탄 세력에게까지 전해져 나라를 어지럽히는 혼란과 재앙의 씨앗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이후로도 조선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고 규정하며 천주교를 자신을 낳아준 부모도 공경하지 않으려 하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 인륜을 저버린 금수(禽獸)의 무리, 통화통색(通貨通色)하는, 곧 신앙을 돈으로 매수하고 남녀가 집단 혼음(混淫)하는 패륜아들의 집단이라 비판하며 경계해왔다. 이러한 기록들은 노예매매와 잔혹한 전쟁의 경험이 일본과 조선 모두에게 얼마나 막대한 피해와 공포, 거대한 트라우마로 남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 시작은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이 교회의 축복을 등에 업고 확장한 노예무역망이 대서양을 넘어 동아시아까지 번져 나가면서부터였다. 동아시아에서 노예무역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통로가 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전쟁은 조선과 일본 양국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조선은 전쟁 이후 여러 세대를 거치고도 인구와 토지, 경제력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일본 역시 외세에 대한 공포로 인해 쇄국 정책의 길로 들어서면서, 약 이백 년간 세계와의 교류에서 크게 후퇴해야 했다. 이처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학살되거나 끌려간 이들, 그 후손들이 겪은 차별과 빈곤, 전쟁이 남긴 정치·문화적 후유증까지 감안한다면, 노예무역은 두 국가의 미래를 파괴한 범죄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노예무역과 전쟁이 아니었다면, 동아시아의 근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재 국제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예무역 피해 배상 논의는 아프리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이 논의의 범주는 마땅히 동아시아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가톨릭이 축복한 노예무역과 전쟁의 여파가 동아시아에 남긴 깊은 상흔은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도, 배상 논의의 대상으로 다뤄지지도 않고 있다. 역사의 책임은 흔히 시대와 여론의 흐름을 타고 그 잘못이 크게 조명된 범위에서만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명받지 못한 피해까지 양심 있게 성찰하는 것이 마땅한 책임의 자세일 것이다. 노예무역으로 인간의 존엄을 유린하고 다른 나라의 미래를 파괴해 부와 세력을 쌓아올린 자들의 행보를 역사는 계속 지켜볼 것이다. <참고자료4> 현재까지 남아 있는 코 베기 학살의 증거들 ■ 코 베기의 증거, 역사에 남다 코를 베어오라는 간양록의 기록 정유재란 때는 국가 차원의 조직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직접 조선인의 코를 베어 보내도록 명령했고, 코의 숫자는 곧 왜군의 전공이 되었다. 이에 왜군은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이거나 산 사람의 코까지 베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선의 길에서는 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 각지에는 실제로 코의 수량을 확인하는 ‘코 영수증’과 코를 수령하고 장수들의 공을 칭찬하는 ‘코 감사장’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교토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는 코를 묻었던 무덤이 남아있다.

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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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4세가 과거 노예제도에 직접 관여했던 가톨릭교회의 과오를 인정했다. 지난달 25일 발표한 새 회칙 ‘마니피카 후마니타스 (Magnifica Humanitas, 위대한 인간성)’에서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교회 기관들조차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이 여러 차례 개입하여 유럽 군주들의 인간 예속을 정당화해 주었고, 특정 시기에는 이교도들을 노예로 삼을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다”며 교황청의 역사적 책임을 시인한 것이다. 외신들은 이를 […]

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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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들의 칙서로 노예제를 축복하다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이러한 잔혹 행위와 대학살의 가해자는 지금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가톨릭 왕과 군주들(Catholic kings and princes), 그리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 다른 주요 유럽 기독교 국가 정부로만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도덕적 권위를 지녔어야 할 교회와 교황이 오히려 이러한 잔혹 행위를 […]

세계 종교 탐구 <57>성수의 성스러움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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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으로 부패를 막으며 성스러움을 연출해오다 우선 현행하는 성수 예식에서 성수를 어떤 식으로 축복하는지 살펴본다. 가톨릭교회의 미사 공식 전례서인 『로마 미사 경본』의 ‘성수 예식’에 따르면, 사제는 성수를 만들 때 축성할 물이 담겨 있는 그릇을 앞에 놓고, 신자들을 바라보며 기도문을 낭송한다. 이때 다음과 같이 죄 사함과 병 치유를 구하는 구절이 낭송된다. “믿음으로 이 성수를 사용하는 저희의 […]

세계 종교 탐구 <57>성수의 성스러움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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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프랑스 코르시카 섬을 방문했다. 교황이 코르시카를 찾은 것은 가톨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당일 아침 거리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바티칸 공보실에 따르면, 교황은 교황 전용차 포프모빌을 타고 군중 사이를 천천히 이동하다가 성 요한 세례당에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는 포프모빌 위에서 군중을 향해 성수라며 가져온 물을 뿌렸다. 성수채 끝에서 물방울이 […]

세계 종교 탐구 <56>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사기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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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겨왔던 위조 사기, 과학의 발달로 발각되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교회는 수의의 진위 검증에 대해 과학계와 언론의 거센 압박을 받게 된다. 연대 측정 분야에서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며 아주 작은 표본만으로도 정확한 연대 측정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가장 확실한 과학적 검증 방법인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왜 허가하지 않느냐”, “가짜인 것이 들킬까봐 숨기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1980년대 […]

세계 종교 탐구 <56>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사기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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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는 예수의 처형 사건에 대한 1세기 역사 기록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들을 살펴보았다. 1세기 초, 성경의 주장대로 추종자들을 대거 거느렸던 영향력 있는 신흥 종교 지도자가 반역죄 판결을 받고 공개 처형되었다면, 이는 분명 특기(特記)되었어야 할 사건이다. 그러나 반란 사건을 비롯해 일개 범죄자의 재판과 처형까지 기록으로 남겼던 당시 로마 당국, 역사가, 저술가들의 기록에서, 예수의 기록은 찾아볼 수 […]

세계 종교 탐구 <55>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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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십자가형을 기록했다는 문헌은 조작이었다 1세기 유대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 중 가장 방대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AD 37 ~ AD 100)다. 요세푸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창세기부터 서기 66년까지 유대 민족의 역사를 집대성한『유대 고대사』인데, 유대 고대사에는 여러 정치적 사건들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자료7> 예를 들어『유대 고대사』19권에는 서기 41년 칼리굴라 황제의 암살 사건을 다뤘는데, 칼리굴라가 누구에게 […]

세계 종교 탐구 <55>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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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아르헨티나 산후안 대성당은 수십 년 동안 분실되었던 한 성유물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못박혔던 십자가 파편’이라 주장하며 ‘성십자가’라 부르는 유물이었다. 산후안 대성당이 보관하던 것은 두 조각의 작은 나무 파편이었는데, 1944년 지진으로 행방불명 되었다가 최근 근처 학교의 예배당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자료1> 대성당 측은 이를 성당으로 다시 가져오며, 그 이유를 “시민들과 매일 성당을 찾는 […]

세계 종교 탐구 <54>과학과 종교는 우주 너머의 진실에  얼마나 도달했는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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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뱅 이론 파괴자’들이 관측되다 2021년, 인류의 새로운 눈이 우주를 향해 열렸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성공적으로 발사된 것이다. 적외선 관측에 특화된 제임스 웹 망원경은 가시광선 중심의 허블 우주망원경이 보여주지 못했던 영역을 포착하며, 먼지에 가려져 있던 별의 탄생 현장, 우주 초창기의 희미한 빛까지 담아냈다. 그런데 2023년 2월 22일 과학저널 ‘네이처’에 따르면,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현재의 표준 […]

세계 종교 탐구 <54>과학과 종교는 우주 너머의 진실에  얼마나 도달했는가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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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의 역사는 멀어지는 지평선의 역사다.(The history of astronomy is a history of receding horizons.)” 이는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이 남긴 말이다. 천문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한계, 우주의 끝이라고 생각한 지점은 늘 더 먼 우주로 확장되어 왔다. 눈으로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던 인류는 망원경을 개발해 직접 별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더 선명하고 정확하게 우주를 관찰할수록 기존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