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순교(殉敎)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죽음을 불사하는 신앙인가? 죽음을 숭배하는 사교(邪敎)인가?

순교(殉敎)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죽음을 불사하는 신앙인가? 죽음을 숭배하는 사교(邪敎)인가?

1612년 10월 8일, 일본의 통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 국왕<자료1>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가톨릭 신부들은 일본인을 가톨릭으로 끌어들인 후 종교를 빌미로 큰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톨릭의 생각대로 되는 것입니다.”(야마모토 시치헤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당시 네덜란드는 일본과 무역 거래를 하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80년 전쟁을 치른 것을 비롯해 가톨릭 광신분자들이 일으키는 테러와 학살을 직간접적으로 겪었는데, 가톨릭이 전쟁을 부추길 것이라고 일본에게 경고한 것이었다. 그때 가톨릭은 일본에서 번영을 구가했다. 이전 통치자인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톨릭 보호 정책을 펼쳐 선교사를 후대했기 때문에 가톨릭 신도는 나날이 증가해 60만 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즈음 일본 인구가 2500만 명으로 추산되니 인구의 2.4%가 가톨릭 신도였다는 것인데, 2017년 기준으로 가톨릭 신도가 인구의 0.3%에 그치는 것을 보면 당시는 일본의 가톨릭 전성시대라 할 수 있었다. 일본의 통치자 자리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 국가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 선봉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보내 전쟁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이전부터 알고 속으로 우려했으나, 신중하게 인내하며 의도를 드러내지 않았다. 마침 그때 가톨릭의 위험성을 경고한 네덜란드 국왕의 편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톨릭 금지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편지를 받은 지 두 달 후인 1612년 12월 2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격적으로 ‘가톨릭 선교사 추방문’을 발표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기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 だいみょう)라 불리던 가톨릭 영주들이 선교사를 비롯해 가톨릭 세력을 비호하고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가톨릭 유력자 148명까지 필리핀 마닐라로 추방해 버렸다. 이후 일본은 250년간 가톨릭 금지 정책을 펼쳤고 이를 통해 가톨릭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종교라는 사실이 일본인의 의식에 뿌리 깊이 박히게 되었다. 가톨릭 금지 정책을 시행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의 어떤 면을 가장 우려했을까. 그의 명령으로 반포된 ‘가톨릭 선교사 추방문’ 내용 중에 가톨릭의 핵심을 찌른 문장이 있다. “가톨릭 선교사는 모든 정책과 법령을 위반하고 정법(불교)을 비방하며 의(義)가 없고 선(善)을 파괴한다. 형인(刑人, 순교자)을 보면 기뻐하며 달려가 배례한다. 순교를 종교의 본질이라 여기는데, 사법(邪法=사교)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자료2,3,4> 다시 말해 올바른 정신이라면 참혹한 죽음을 보고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것이 마땅할 텐데, 죽음을 보고 기뻐하며 숭배하는 모습에서 사람의 정신을 기만하는 가톨릭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고, 바로 이 때문에 가톨릭이 사악한 종교라는 것이다. 이 같은 도쿠가와 시대의 정책은 『하데우스(破提宇子, 가톨릭의 신을 파괴하다.)』라는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 책의 저자인 후칸사이 하비안(1565년~1621년)은 가톨릭과 순교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 준다.<자료5,6> “순교는 가톨릭을 위해 몸과 생명을 먼지처럼 버리는 것이니 무서운 일이다. 가톨릭은 군대를 파견해 다른 나라의 탈취를 도모하는데, 천 년 후에도 가톨릭이 일본을 탈취할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우리 골수에 가톨릭의 사악함을 새겨야 한다.” 통치자 입장에서 가톨릭이 군대를 앞세워 일본을 탈취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본인이 가톨릭에 세뇌되어 영혼을 기만당하고 생명을 먼지처럼 버리는 것이었다. 보통 일본인은 ‘할복’으로 죽음을 명예롭게 여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할복은 무사 계급에 한정된 것이었고 또 할복이 명예를 담보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죽음에 이르는 형벌’이었지 순교와 같이 ‘죽음을 숭배하는 의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순교의 실체를 꿰뚫어 본 하비안은 ‘가톨릭의 사악함을 골수에 새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현실이 되었다. 1637년 시마바라(島原)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서 가톨릭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자료7> 이를 진압하기 위해 그들이 결집한 성으로 들어간 정부군은 충격에 휩싸였다. 정부군이 들이닥치자 가톨릭 신도들은 기쁨이 넘쳐 흐르는 얼굴로 죽음의 순간, 즉 순교라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순교는 집단 자살과 다르지 않았고, 다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타인이 끊게 만든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죽음을 찬미하고 집단 자살을 선택하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일본 정부는 이후 숨어 있는 가톨릭 신도들을 색출하며 더욱 철저하게 가톨릭을 금지했다. 순교(殉敎)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표준국어대사전)”이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은 순교라고 하면 ‘죽음까지 불사하며’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죽음 그 자체’를 신앙이라 여기며 숭배한다. 순교의 한자를 보면 ‘따라 죽는 것(殉)을 가르친다(敎).’는 뜻으로 가톨릭의 본질을 나타내는데, 가톨릭에서 말하는 순교란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며 “죽음을 강제하는 사고방식(종교학대사전)”이기 때문이다. 순교를 의미하는 라틴어 마르티리움(Martyrium)은 ‘증거’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마르티리온’ (μάρτυριον)에서 왔다. 이에 의하면 순교는 그 자체로 ‘증거’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고결한 ‘증거’가 되며, 바로 이 때문에 가톨릭은 끊임없이 순교자를 ‘성인(聖人)’으로 기념하고 추앙하고 있다.<자료8> 이처럼 죽음을 신앙의 증거로 숭배하고 찬미하는 사고 방식은 가톨릭의 발생 시점, 즉 예수의 십자가 처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십자가형은 예수 출생 전 로마 시대부터 집행된 사형 방식으로 이보다 더 혐오스럽고 경멸을 받는 처형은 없었다. 알몸인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려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당하고 새들이 날아와 맨살을 쪼아 먹기도 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썩어 가는 시체를 직접 보고 그 악취를 맡아 본 사람들은 십자가 형벌에 관련된 모든 것을 혐오스러워했고, 십자가라는 말 자체를 역겨워했다.<자료9> 십자가형을 받은 자들은 가장 극악한 범죄자의 본보기였으며 예수 또한 같은 이유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다. 따라서 당대의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불쾌하고 혐오스러우며 기괴한 일이었다. 특히 유대인 입장에서는 그들이 믿는 가장 높은 신(야훼)에게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십자가형을 받아 피 흘리며 죽어 갔다는 것은 극도로 경악스러운 이야기였고, 신성모독을 넘어 발광 중의 발광이었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는 가톨릭 신도조차 예수가 죽은 과정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 끔찍하고 비참한 장면을 아무도 그림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사후 시간이 흐르면서 313년 가톨릭이 공인되고 십자가형이 폐지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먼저 ‘십자가에서 처형된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가톨릭은 ‘예수와 야훼가 하나의 본체’라는 선언(325년 니케아 공의회)으로 해결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십자가형의 폐지로 그 광경을 실제로 확인할 수 없게 되자 가톨릭은 십자가형을 ‘혐오스러운 사형 방식’에서 ‘죽음에 대한 승리 방식’으로 위장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의식을 혼동시키는 계략과 술수가 집요하고 은밀하게 계속되면서 신도들은 십자가형에서 잔인한 공포를 느끼고 시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형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 계략 중의 하나가 바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세뇌시키는 ‘순교 전설’이었다. 가톨릭 교황 젤라시오 1세(Gelasio I, 492~496 재위)는 미사 중에 순교자를 기념하는 관습을 전파시켰는데, 순교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성인(聖人) 전설’이 미사 중에 낭독되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口傳)됐으며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시각적으로 묘사되었다. 또 가톨릭교회는 순교자를 기리는 축제를 열어 순교자의 수난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축제를 시작했다. 여러 형태로 반복되는 순교 이야기는 신도들에게 ‘사이코드라마’처럼 작용해 신도들이 예수나 순교자들이 겪었던 죽음을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동참하게 만들었고, 이는 곧 죽음에 대한 숭배와 갈망으로 이어졌다. “나는 나를 죽여 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나는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는 은총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천한 장소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독일의 수녀 안나 카타리나 에머리크(Anna Katharina Emmerick, 1774년~1824년)의 이야기를 보면 십자가형을 곧 은총으로 여기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을 진심으로 갈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썩어 가는 시체가 매달린 혐오스러운 형틀이 구원과 은총의 상징으로 변신에 성공한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역사 저술가인 톰 홀랜드는 “이름 없는 범죄자의 처형을 바탕으로 발흥한 종교가 어떻게 하여 이처럼 세상을 바꾸어 놓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교주로 내세운 초기 가톨릭 신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순교할 각오를 드러냈을 때, 이를 본 로마의 사법당국은 가톨릭 신자들이 괴상하고 변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골의 장소’라는 뜻을 지닌 골고다 언덕에서 이름 없는 범죄자의 처형을 바탕으로 발흥한 종교는 지난 2,000년 동안 스스로 ‘보편적(catholic)’이라고 부를 만큼 세상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 자신들의 신앙이 보편적이라는 광적인 신념 덕분에 미지의 바다를 건너 대륙을 탐험할 수 있었고, 예수를 알지도 못하는 그 대륙의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강제하고 그들의 문화와 역사와 생명까지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었다. 톰 홀랜드에 의하면 이 세상은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죽음을 정복하고 구원의 은총을 내려 줬다고 신봉하는 이 세상은 아직도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이 세상이 다시 뒤집혀 진리를 올바로 바라보게 된다면 이전의 지배자는 능수능란한 기만술로 여전히 보편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위장술이 벗겨지고 썩어 가는 악취를 풍기며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될까? ———————————————————————————————————– 80년 전쟁이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지배하에 있었던 네덜란드 지역의 17개 주가 1567년~1648년 스페인에 대항해 벌인 독립 전쟁을 말한다. 중세 이후 네덜란드 지방은 모직물공업과 중계무역으로 번영했으며 신교의 등장 이후에는 칼뱅파의 신교도가 급증했다. 1556년 스페인의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가 가톨릭의 수호자임을 내세우며 네덜란드 지방의 신교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나섰으며 1567년부터는 네덜란드에서 8000명 이상을 종교재판으로 처단했다. 이 같은 가톨릭의 탄압에 항거하는 네덜란드 지방의 저항 운동은 독립전쟁 양상으로 발전했고 80년간의 전쟁 끝에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특집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살인자로 단죄하다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살인자로 단죄하다

1910년 3월 9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있었던 고해성사에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사형 집행을 앞둔 한국인 사형수가 가톨릭 신부를 만나 고해하는 자리였는데, 이 자리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사형수가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義士)였기 때문이다. <자료1> ◈ 독립운동가에게 찍어준 살인자 낙인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주권을 침탈당하고 격렬하게 항거하던 때로, 안중근 의사가 식민 지배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은 일본과 중국은 물론 이탈리아에도 보도될 만큼 국내외 이목을 집중시켰다.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대, 지배받는 식민지의 국민이 지배국의 최고위 정치가를 사살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일본 재판부와 법 규정에 따라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안 의사에게 살인죄를 적용했으나, 안 의사는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을 뿐”이라고 당당하게 항변했다. 사형을 앞둔 안 의사가 고해성사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언론의 관심은 ‘안중근이 고해할 때 살인죄를 인정할 것인가?’에 집중됐다. 안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해 준 가톨릭 신부는 프랑스인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1860년~1938년) 신부였는데 그는 안중근을 만나기 위해 뤼순으로 향한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베푸는 이유는, 이토 처단이 하늘에 사무치는 죄이기 때문에 잘못됐다고 참회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순천시보, 1910.3.15.) 이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했던 한국인의 판단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빌렘 신부의 상관이었던 명동성당 주교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1854년 ~ 1933년) 또한 안중근의 의거를 ‘증오할 만한 살인 행위’라고 정면으로 비난했다. <자료2>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한국의 주권을 빼앗은 원수 중의 원수였으나, 뮈텔 주교는 이토가 한국에 가져다준 공적과 이익을 생각할 때 그의 죽음은 슬프고 불행한 일이라며 장례식을 찾아가 조화를 바치고 애도했다. 뮈텔은 안중근이 살인 행위를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해야만 한다고 했지만 안중근은 자신의 의거를 살인죄라 생각지 않았고, 사형을 당하는 순간까지 이토를 사살한 것은 식민 지배의 원흉을 제거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1909.12.22. 안중근 10회 신문조서) 결과적으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살인죄를 범했음을 자인하고 회개하게 만들겠다는 가톨릭 신부들의 시도는 실패한 셈이었다. 당시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일본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이자 범죄자’로 낙인찍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가톨릭도 안중근에 대해 ‘살인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안중근이 사형 집행을 당한 후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는 그의 친척을 삼엄하게 감시했는데, 이는 안중근이라는 살인자 집안에 대한 당연한 처사였으며 일본의 구미에 맞는 조치였다. 가톨릭은 일본과 같은 입장을 견지한 덕분에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됐다. ◈ 고해의 비밀과 맞바꾼 명동성당 진입로 1911년 1월 11일 수요일, 폭설이 쏟아지는 겨울이었다. 명동성당에서 편지를 읽던 뮈텔 주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빌렘 신부가 보내 온 편지에 놀랄 만한 1급 첩보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뮈텔 주교의 손에 들어간 첩보는 안중근의 사촌 동생이자 그만큼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안명근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일본의 총독부에 대항할 계획에 착수했으며 안명근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첩보였는데, 이를 얻은 경로는 다름 아닌 고해성사였다.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안명근은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고, 빌렘은 고해성사에서 얻은 정보를 뮈텔 주교에게 편지로 알린 것이었다. <자료3> 편지를 손에 넣은 뮈텔은 그길로 눈발을 헤치며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1864년~1919년)를 찾아갔다. 독립운동 감시와 말살에 주력하던 아카시 총감에게 안명근은 요주의 인물이었는데 때마침 뮈텔 주교가 그의 활동 정보를 밀고한 것이었다. 뮈텔은 정보의 효용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시 명동성당의 진입로가 일본 상인들 때문에 가로막혀 길을 뚫는 것이 숙원이던 뮈텔 주교는 “이 기회를 이용해” 통로를 뚫어 달라고 당당히 요청했다. 아카시 총감은 그 자리에서 헌병대 중위를 불러 진입로를 열어 놓도록 명령하는 한편, 정보를 알려 준 뮈텔 주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뮈텔이 밀고한 정보는 총독부의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귀에까지 들어갔다. 데라우치 총독이 자신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할 것을 명했기 때문에 그 명을 받들어 아카시 총감은 명동성당으로 뮈텔 주교를 찾아가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조선을 통치하는 최고위직인 데라우치 총독까지 나서서 뮈텔에게 감사를 표했던 것은 그만큼 가톨릭의 밀고가 일본에게 더없이 유용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이 효용 가치를 알아보고 즉각 고해 내용을 알린 빌렘 신부와 그 내용을 받자마자 총독부에 밀고한 뮈텔 주교의 선견지명으로 명동성당은 숙원 사업을 이뤄서 넓고 환한 진입로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자료4> ◈ 뮈텔이 불러일으킨 나비효과 가톨릭의 밀고를 받은 일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당시 안명근은 학교 설립을 위해 모금 운동을 벌였는데, 일본 헌병대는 이 자금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이라 조작하고, 안명근과 함께 계몽 운동을 벌였던 지도자들에게 ‘총독 암살 미수죄’라는 혐의를 씌워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때 김구를 비롯한 황해도 안악군의 독립운동가 160명이 검거됐기 때문에 이를 ‘안악 사건’이라고 한다. <자료5> 안악 사건은 일본이 날조한 사건이었다. 조선의 계몽 운동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일본은 특히 교육 증진에 앞장서는 황해도 지역에 경계를 기울였는데, 때마침 가톨릭이 밀고한 안명근의 활동 덕분에 황해도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종신형과 징역형, 제주도 유배 등으로 궤멸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큰 규모의 탄압으로 확대했다. 안악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하는 또 다른 비밀 단체 ‘신민회’를 포착했다며 그 회원 600명을 검거한 것이다. 이중 105명에게 유죄를 선고했기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황해도와 평안도의 독립운동가를 절멸시킨 사건이었다. <자료6> 105인 사건의 핵심은 대규모 조직인 신민회가 총독 암살을 모의하고 실행했다는 것이었는데, 이 내용대로 자백할 때까지 일본은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 105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증거는 오직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뿐이었다. 이는 로마 가톨릭이 마녀재판에서 고문을 통해 허위 자백을 받아 내던 것과 동일한 방식이었다. 실제로 일본군이 독립운동가들을 천장에 매달아 잡아당기거나 가죽 채찍으로 온몸을 갈기는 고문, 배가 불룩해지도록 코로 물을 부어 넣는 고문은 가톨릭이 행한 마녀재판과 유사했다. <자료7> 72종에 달하는 악랄한 고문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아카시 총감이었다. 아카시 총감은 뮈텔 주교에게 밀고를 받은 후로 독립운동가들을 구속시켜 끔찍한 고문으로 짓지도 않은 죄목을 뒤집어씌우는 데 능수능란했다. 105인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들은 대부분 지식인이나 사업가, 교육가였는데 이중 두 명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도 불구가 되었다. 105인 사건 이후 3.1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10년간 국내 항일 운동이 말살되다시피 한 것은 안명근의 고해 내용이 일본 손에 들어간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안명근은 가톨릭 신부가 자신의 고해 내용을 밀고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30대의 젊은 지식인이었던 안명근은 일본의 고문으로 한쪽 눈을 잃었고 감옥살이로 쇠약해진 끝에 48세의 이른 나이에 숨을 거뒀다. ◈ 가톨릭식 신성불가침의 비밀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고해성사할 때 고해신부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으로서”(“non ut homo sed ut Deus”,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신자의 고백을 듣는다고 한다. 신으로서 고백을 듣기 때문에 고해신부는 신자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고 고해의 비밀을 신성불가침으로 보호해 준다고 한다. <자료8> 안명근에게 잘못이 있다면 이 교리대로 고해신부를 신뢰했다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어떤 경우에도 공개되지 않고 절대 비밀로 보호받는다.’는 교리를 믿은 것이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안중근에게 잘못이 있다면 고해신부가 원하는 대로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중근의 고해를 들었던 빌렘 신부는 살인자 안중근이 회개하기를 원했으나,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안중근은 가톨릭 세계에서 용서받지 못한 살인자가 되었다. 그런데 가톨릭의 신이 느닷없이 살인자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풀기 시작한 듯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을 때 뮈텔 주교는 살인죄를 저지른 자는 가톨릭 신도가 아니라고 정면으로 부정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1999년 가톨릭이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가톨릭 인물’에 안중근이 포함되었다. 2010년에는 ‘안중근 의사 100주기’를 맞아 슬그머니 신자 자격을 복권시키더니, 안중근 기념 사업회를 조직해 그 업적을 알리겠다고 나섰다. 이로써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자랑스러운 가톨릭 신도로 안중근을 각인시킬 뿐 아니라, 올해부터는 빌렘 신부까지 ‘안중근의 영적 아버지’로 이미지 세탁에 나서고 있다. 만약 안중근이 자신의 ‘영적 아버지’가 고해성사 내용을 밀고해 사촌동생 안명근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씨를 말려 버린 것을 알게 된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과거 일본과 똑같은 입장에서 망언을 일삼던 집단이 이제 완벽한 거짓말을 시도하고 있지만 때로는 망언보다 거짓말이 더 역겹다. 최근 가톨릭의 프란치스코까지 앞장서서 로마 교황청이 발표한 공지를 보면, 고해성사의 비밀 엄수는 신성불가침이며 어떤 국가의 법이나 정치 행위로도 거스를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고해실의 신부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으로서’ 고해성사를 듣는다는 교리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도 전 세계 고해실에서는 가톨릭의 신이 고해성사를 들을 것이다. 성당 진입로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신. 추잡한 성추행으로 영혼을 지옥으로 빠뜨리는 데 쾌락을 느끼는 신. 어쩌면 가톨릭이 결사적으로 봉인해야 할 비밀은 다름 아닌 이 신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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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악랄한 범죄자인가, 용서의 구원자인가?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악랄한 범죄자인가, 용서의 구원자인가?

◈ 일본 학자 눈에 비친 고해성사 1620년, 일본 학자 후칸사이 하비안(1565년~1621년)은 로마 가톨릭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저서를 집필했다.<자료1> 제목부터 ‘가톨릭의 신을 파괴하다.’라는 뜻의 『하데우스(破提宇子)』인 이 저서는 가톨릭의 가장 큰 문제가 고해성사라고 지적했다. <자료2> ‘고해성사는 말로 고백만 하면 죄가 소멸된다는 것으로 이는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살인과 같은 중범죄도 가톨릭 신부에게 말만 하면 죄가 소멸된다니 가톨릭 신부는 살인범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후칸사이 하비안, 『하데우스』 – 야마모토 시치헤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재인용) 이처럼 고해성사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은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한다. 일본인 중에서 처음으로 가톨릭 신도가 된 야지로(彌次郞)라는 인물은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었고, 그의 스승은 가톨릭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1506년~1552년)였다. 야지로가 가톨릭을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서였다.<자료3> ◈ 양심을 마비시키는 마음의 평안 1546년, 가고시마의 상인(또는 사무라이)이었던 야지로는 살인을 저지르고 쫓기다가 체포 직전에 야미카와항 부근에 내항해 있던 포르투갈 무역선에 올라탔다. 사람을 죽인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야지로는 무역선 선장이자 가톨릭 신도였던 조지 알바레스에게 심경을 털어 놓았고, 알바레스는 야지로를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로 도피시켜 주면서 거기서 활동 중인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면 면죄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야지로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1547년 12월 야지로는 말라카 언덕에 있는 성모성당에서 하비에르를 만나자마자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매달렸다. 하비에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하나이다.”라는 말을 읊어 주고 죄를 모두 용서했다고 선언하자 야지로는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이는 고해성사의 작용이었다. 가톨릭에 따르면, 이제 야지로는 우주 만물을 심판하는 절대자에게 용서를 받았으니 사람을 죽였어도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야지로는 마음의 평안을 찾게 해 준 가톨릭을 용서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일본인 최초의 가톨릭 신도가 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고해성사가 행해진 것은 1593년 임진왜란 때였다. 스페인 출신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1551년~1611년)가 경상남도 진해에서 2,000명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는데 그들은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이었다. 세스페데스는 일본의 종군 신부로서 조선에 온 것이었다.<자료4> 세스페데스가 속한 제1군은 잔혹한 살상 능력으로 악명 높았다. 임진왜란의 선봉에 섰던 제1군은 부산진성에서 평양성까지 진격하는 동안 조선 사람 수만 명을 난도질하며 개와 고양이까지 모조리 베어 버린 군대였다. 제1군을 지휘한 장수들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해 열렬한 기리시탄(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종군 신부에게 고해성사하는 것을 거룩하게 여겼다. 고해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사함 받은 기리시탄 일본군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었고, 전쟁에 짓밟힌 조선인들이 절규하며 일본군을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괴로울 것이 없었다. 서두에 소개한 하비안의 지적대로, 말만 하면 손쉽게 용서받는다는 개념은 사람들에게 어떤 죄를 저질러도 괴롭지 않은 상태, 즉 죄책감과 양심이 마비된 상태를 가져다주었다. 지금도 전 세계 가톨릭 신부들은 고해성사를 베풀어 무슨 죄든지 용서해 주고 있다. 고해성사는 지금부터 1700년 전, 가톨릭 역사의 초기부터 등장한 이래로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 ◈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가? 처음 고해성사가 등장한 계기는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이 질문은 종말론과 연관이 있는데,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지탄을 받는 종말론은 사실 예수와 가톨릭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예수 자신이 당대에 재림할 것이라 분명하게 선언하고 그때가 세상의 종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가톨릭은 세례만 받으면 모든 죄가 해결되고 곧 세상이 끝나 천국에 갈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신도들은 죄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박했다던 예수의 재림이 계속 지연되고 아무리 기다려도 세상의 종말이 도래하지 않자 신도들 사이에 여러 가지 의심과 질문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세례 받은 후에 지은 죄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였다. 궁지에 몰린 가톨릭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했고, 가톨릭 학자 암브로시우스(340년~397년)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사제가 나를 용서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할 수 있다.’는 방법을 처음으로 제시했다.(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자료5> 이후 고해성사 이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파리 학파 출신 페트루스 롬바르두스(1096년경 ~1160년)였다.<자료6> 그는 죄를 고백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명제를 확립했고 고해성사의 기본 개념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했다. 이러한 이론은 아우구스티누스(354년~430년)의 논문을 근거로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 교리의 기초를 세운 유명한 신학자이자 최고 권위자였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고해성사의 근거라고 제시했던 아우구스티누스 논문이 사실은 위조된 허위 논문이라는 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 동안 한 번도 고해성사를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논문은 완벽한 위조이자 허위였다. 이를 근거로 만든 날조된 이론이었지만 고해성사는 12세기부터 가톨릭의 교리로 정착되어 갔다. ◈ 신도들을 옭아매는 감시와 규제 뿐만 아니라 121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고해성사에 높은 권위를 부여했다. 고해성사를 모든 가톨릭 신도의 의무로 강제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교회 출입을 금지한다고 강력하게 규정한 것이다.<자료7> 고해성사가 강제되면서 가톨릭 신부는 모든 신도의 내밀한 사생활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가톨릭이 정한 규율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죄’로 고백해야 하는데 당시 가톨릭은 신도의 세세한 생활 양식까지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하면 사생활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료8> 예를 들어 가톨릭은 부부간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날과 허용하는 날을 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를 어긴 경우는 고해성사를 해야 했고, 고해 신부는 어긴 이유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며 갖가지 질문을 던졌다. 13세기 고해 신부들의 질문이 총망라된 『고해 신부 대전(Summae Confessorum)』이라는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성(性) 문제’에 대한 질문이다.<자료9> 가톨릭이 정한 절차와 규율이 그만큼 까다롭고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해성사에 대해 독일 학자 에두아르트 푹스(1870~1940)는 통렬한 묘사를 남겼다. “호색적인 고해 신부들은 아리따운 여인의 성생활을 꼬치꼬치 캐물으며 내밀한 자백을 듣는 재미에 탐닉했다. 그러나 고백석에서 즐긴 것은 단지 공상만이 아니었다. 고해성사에서 여자들이 육체의 정조를 잃었고, 고해 신부는 자신의 육욕의 희생자들에게 죄악도 미덕이 될 수 있다고 속였다.”(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 생각을 지배하는 간악한 힘 죄악을 미덕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가톨릭이 고해 신부에게 부여한 막강한 권한이었다. 고해성사 이론에 따르면, 고해 신부는 가톨릭의 신과 같은 위치에서 인간의 죄를 사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간악한 힘이 되었다. 일례로 1960년대 미국 볼티모어에서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된 범죄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근래 발생한 볼티모어 사건을 통해 범죄자의 의식 구조를 알 수 있다. 볼티모어는 미국 건국 당시인 1700년대 미국 최초의 대교구와 대성당이 설립된 곳으로, 모든 동네에 가톨릭 교구가 설치된 철저한 가톨릭 도시였다. 볼티모어 가톨릭 교구가 설립한 키어 고등학교에서 고해성사로 촉발된 사건이 있었다. <자료10> 키어 고등학교는 학교에 고해소가 설치되어 고해 신부가 상주하는 곳이었다. 1967년 1학년 여학생 진 하르개던 웨넌은 고해소에 들어가 어린 시절 당했던 성 학대 사실을 신부에게 털어놓았다.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던 진은 죄를 용서받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고백할 용기를 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고해 신부 닐 매그너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둘 사이에 가려진 칸막이를 열어 진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자위를 했다. 자위는 가톨릭에서 죄로 규정한 것인데 신부가 왜 그런 행위를 했을까. 2주 후 고해 신부가 진을 다시 불렀을 때 비로소 그가 가진 생각이 드러났다. 고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용서 받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너를 성령으로 채울 수 있고 내 정액은 성령이니 삼켜야 한다.” 그의 생각은 자신이 죄악을 미덕으로 바꿀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는 성령을 베푸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여기에 상담 신부 조셉 메스켈이 가담하면서 그들은 거침없는 언동으로 자신들의 의식 구조를 명확히 드러냈다. 메스켈 신부는 진을 강간할 때 라틴어로 “성령을 받으라”고 기도했고, “예수께서 내 몸에 흐르는 성령을 네가 받길 원하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시간이 끝나고 돌아가는 진을 문까지 배웅하며 축복을 내리거나, 때로는 “네가 빨리 정화되지 않아 내가 몹시 힘들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자료11> 진은 구역질 나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끝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했다. 신부가 가톨릭의 신을 대리해 죄를 용서해 준다는 생각은 어릴 적부터 세뇌당한 것이었고 진은 여전히 그 의식에 지배당했다. 매번 그 시간이 끝날 때마다 진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로부터 53년이 지난 지금, 70대 할머니가 된 진은 가해 집단에 용기 있게 맞서서 소송을 하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가톨릭 볼티모어 교구 측은 진이 2~3년간 상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진은 “가톨릭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진은 지금도 가톨릭 건물 근처에 가는 것이 역겹고 힘들다고 한다. 가해 집단은 악랄한 범죄자와 용서의 구원자라는 1인 2역을 능수능란하게 병행해 왔다. 그러나 용기 있는 피해자들의 발언으로 그 집단의 민낯과 의식 구조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이 결여된 반사회적 인격장애, 한마디로 사이코패스 범죄 집단이라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섬뜩한 것은 오늘도 전 세계에서 계속되는 고해성사다. 고통에 찬 피해자가 절규해도 가해자는 고해성사로 깨끗하게 용서받고 세상 앞에 당당해지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고해성사를 하고 나면 자유롭고 당당”해진다고 했다.<자료12> 고해성사가 계속되는 한 그 집단의 당당함도 여전할 것이다.

1955년 9월 16일 인천집회

1955년 9월 16일 인천집회

이달의 역사 잠실 야구 경기장 보다 큰 규모 수만 명 모여 은혜의 창파 이뤄 1955년 9월 16일, 인천 시민 심령 대부흥회가 열렸다. 일명 ‘동산운동장 집회’라 불리는 하나님의 천막집회였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동산중학교 운동장에 운집했다. 당시 동산중학교 운동장은 인천에서 가장 넓은 공터였다. 1957년 정비된 동산중학교 운동장의 넓이는 10,760평이다. 동대문 야구경기장이 5,449평, 잠실 야구경기장이 […]

일본에게 노예 무역과 잔인한 폭력을 교사(敎唆)하다 … 반인류 범죄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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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세계사 <8>

■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톨릭 금지령을 내리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인 1612년, 일본의 쇼군(しょうぐん, 将軍)으로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 금지령’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에 가톨릭이 광범위하게 퍼져 신도가 60만 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가톨릭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톨릭을 금지한 첫 번째 이유는 가톨릭이 순교자를 찬미하는 행태에 대한 강한 반발 내지 혐오 때문이었다. […]

전쟁의 기술과 야욕은 어디서 오는가? 임진왜란을 촉발한 숨은 범죄 집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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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세계사<7>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는 세계를 향해 무기 개발을 멈추고 그 돈으로 감염병 연구를 하라고 촉구했다.<자료1> 무기 만들 돈으로 사람 살리는 연구를 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지적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 무기를 개발하고 구입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계속돼 온 일이다. 지금부터 480여 년 전 일본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 […]

모두를 속인 사기범은 누구인가? … 코로나 바이러스가 남긴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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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다시 보는 뉴스>

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사회에 두 가지 미스터리를 던져 주었다 누가 31번 확진자를 감염시켜 엄청난 확산을 일으켰는가? 누가 진짜 사기 전도로 대중을 기만하고 있는가?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던 금년 4월 11일, 이탈리아 가톨릭교회는 토리노 수의(壽衣)를 공개했다. 토리노 성당에서 보관하는 이 수의는 예수가 죽은 뒤 시신을 감쌌다고 주장하는 세마포 천으로, 가톨릭에서는 이 천이 병을 낫게 하는 등 기적을 […]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수은 중독과 매독, 탐욕이 부른 질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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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빈자의 날”을 제정해 해마다 빈곤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때마다 노숙자와 실업자를 베드로 성당에 초대해 함께 식사하는 교황의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었다. 작년 11월 빈자의 날에 교황은 베드로 성당 미사에서 “소수의 탐욕으로 다수가 빈곤해진다.”며 탐욕의 세력 때문에 다수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강조했다.<자료1> 탐욕이 수많은 사람을 빈곤에 빠뜨리는 일은 역사에서 반복되어 왔다. 스페인에게 […]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식민 지배의 신호탄과 전염병 생물학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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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류와 문화를 케이크에 비유해 설명한 적이 있다. “인류와 문화는 케이크처럼 조각조각 자를 수 없다. 케이크를 잘라 반은 네가 갖고, 반은 내가 갖는 식의 협상으로 갈등이 종결되지 않는다. 함께 대화하고 건설해야 한다.” 세계 역사에서 케이크를 나누는 식의 협상은 여러 번 있었다. 각 나라의 인류와 문화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경계를 나눠 버린 최초의 […]

증오의 씨앗을 뿌린 범죄 집단과 그들의 이중 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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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을 찾아서

지난 1월 9일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의 발언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대립하고 있는 국가들을 향해서 분쟁을 대화로 해결해야 된다고 종용했다. 서로 증오심을 자제하고 대화하라는 교황의 발언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권유하는 당사자가 극심한 대립과 증오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라면 어떨까.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양심에 거리껴 공공연하게 대화를 권유하기가 망설여질 것이다. 그러나 이중 어법을 […]

다른 문화와 종교를 ‘이단’으로 말살한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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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을 찾아서...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사건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전무후무한 재앙이었다. 콜럼버스는 유럽에 있는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공할 수 있도록 바닷길을 열어 주었고 그 길을 따라 일확천금의 탐욕을 품은 침입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콜럼버스의 후예들은 탐험이라는 미명 하에 아메리카 곳곳을 누비며 약탈과 노략질을 계속했다. 이 탐험대가 원주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탐욕과 무력 때문만은 […]

아프리카 원주민은 왜 좀비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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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를 만든 노예 사냥과 죽음의 노동

살아 있는 시체를 뜻하는 ‘좀비’는 원래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혼을 말살당해 자신의 의지와 생각 없이 주인의 명령만을 따르는 좀비, 죽을 만큼 혹사당하지만 이미 시체이기 때문에 다시 죽을 수도 없는 좀비는 끔찍한 괴물이기 이전에 비참한 노예였다. 좀비는 아프리카 콩고의 “은잠비(Nzambi)”라는 단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영혼 없는 노예’라는 이야기는 아이티섬에서 유래했다. 아프리카에서 사용하던 단어가 망망한 대서양 건너편의 […]

가톨릭이 세운 나라, 세계 정복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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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어떻게 세계화 되었는가?

지금부터 600년 전인 1419년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해였다. 포르투갈이 항해를 위한 기반 시설을 세우고 대항해시대라는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 돛을 올린 그들의 항해는 세계사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폐해를 남겼다. 이번 기획 기사에서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포르투갈은 12세기 가톨릭 십자군이 세운 나라였다. 초대 군주인 아폰수 1세는 십자군이었고 이슬람 세력과 수백 년 전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