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살인자로 단죄하다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살인자로 단죄하다

1910년 3월 9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있었던 고해성사에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사형 집행을 앞둔 한국인 사형수가 가톨릭 신부를 만나 고해하는 자리였는데, 이 자리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사형수가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義士)였기 때문이다. <자료1> ◈ 독립운동가에게 찍어준 살인자 낙인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주권을 침탈당하고 격렬하게 항거하던 때로, 안중근 의사가 식민 지배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은 일본과 중국은 물론 이탈리아에도 보도될 만큼 국내외 이목을 집중시켰다.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대, 지배받는 식민지의 국민이 지배국의 최고위 정치가를 사살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일본 재판부와 법 규정에 따라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안 의사에게 살인죄를 적용했으나, 안 의사는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을 뿐”이라고 당당하게 항변했다. 사형을 앞둔 안 의사가 고해성사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언론의 관심은 ‘안중근이 고해할 때 살인죄를 인정할 것인가?’에 집중됐다. 안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해 준 가톨릭 신부는 프랑스인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1860년~1938년) 신부였는데 그는 안중근을 만나기 위해 뤼순으로 향한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베푸는 이유는, 이토 처단이 하늘에 사무치는 죄이기 때문에 잘못됐다고 참회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순천시보, 1910.3.15.) 이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했던 한국인의 판단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빌렘 신부의 상관이었던 명동성당 주교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1854년 ~ 1933년) 또한 안중근의 의거를 ‘증오할 만한 살인 행위’라고 정면으로 비난했다. <자료2>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한국의 주권을 빼앗은 원수 중의 원수였으나, 뮈텔 주교는 이토가 한국에 가져다준 공적과 이익을 생각할 때 그의 죽음은 슬프고 불행한 일이라며 장례식을 찾아가 조화를 바치고 애도했다. 뮈텔은 안중근이 살인 행위를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해야만 한다고 했지만 안중근은 자신의 의거를 살인죄라 생각지 않았고, 사형을 당하는 순간까지 이토를 사살한 것은 식민 지배의 원흉을 제거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1909.12.22. 안중근 10회 신문조서) 결과적으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살인죄를 범했음을 자인하고 회개하게 만들겠다는 가톨릭 신부들의 시도는 실패한 셈이었다. 당시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일본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이자 범죄자’로 낙인찍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가톨릭도 안중근에 대해 ‘살인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안중근이 사형 집행을 당한 후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는 그의 친척을 삼엄하게 감시했는데, 이는 안중근이라는 살인자 집안에 대한 당연한 처사였으며 일본의 구미에 맞는 조치였다. 가톨릭은 일본과 같은 입장을 견지한 덕분에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됐다. ◈ 고해의 비밀과 맞바꾼 명동성당 진입로 1911년 1월 11일 수요일, 폭설이 쏟아지는 겨울이었다. 명동성당에서 편지를 읽던 뮈텔 주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빌렘 신부가 보내 온 편지에 놀랄 만한 1급 첩보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뮈텔 주교의 손에 들어간 첩보는 안중근의 사촌 동생이자 그만큼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안명근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일본의 총독부에 대항할 계획에 착수했으며 안명근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첩보였는데, 이를 얻은 경로는 다름 아닌 고해성사였다.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안명근은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고, 빌렘은 고해성사에서 얻은 정보를 뮈텔 주교에게 편지로 알린 것이었다. <자료3> 편지를 손에 넣은 뮈텔은 그길로 눈발을 헤치며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1864년~1919년)를 찾아갔다. 독립운동 감시와 말살에 주력하던 아카시 총감에게 안명근은 요주의 인물이었는데 때마침 뮈텔 주교가 그의 활동 정보를 밀고한 것이었다. 뮈텔은 정보의 효용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시 명동성당의 진입로가 일본 상인들 때문에 가로막혀 길을 뚫는 것이 숙원이던 뮈텔 주교는 “이 기회를 이용해” 통로를 뚫어 달라고 당당히 요청했다. 아카시 총감은 그 자리에서 헌병대 중위를 불러 진입로를 열어 놓도록 명령하는 한편, 정보를 알려 준 뮈텔 주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뮈텔이 밀고한 정보는 총독부의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귀에까지 들어갔다. 데라우치 총독이 자신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할 것을 명했기 때문에 그 명을 받들어 아카시 총감은 명동성당으로 뮈텔 주교를 찾아가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조선을 통치하는 최고위직인 데라우치 총독까지 나서서 뮈텔에게 감사를 표했던 것은 그만큼 가톨릭의 밀고가 일본에게 더없이 유용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이 효용 가치를 알아보고 즉각 고해 내용을 알린 빌렘 신부와 그 내용을 받자마자 총독부에 밀고한 뮈텔 주교의 선견지명으로 명동성당은 숙원 사업을 이뤄서 넓고 환한 진입로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자료4> ◈ 뮈텔이 불러일으킨 나비효과 가톨릭의 밀고를 받은 일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당시 안명근은 학교 설립을 위해 모금 운동을 벌였는데, 일본 헌병대는 이 자금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이라 조작하고, 안명근과 함께 계몽 운동을 벌였던 지도자들에게 ‘총독 암살 미수죄’라는 혐의를 씌워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때 김구를 비롯한 황해도 안악군의 독립운동가 160명이 검거됐기 때문에 이를 ‘안악 사건’이라고 한다. <자료5> 안악 사건은 일본이 날조한 사건이었다. 조선의 계몽 운동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일본은 특히 교육 증진에 앞장서는 황해도 지역에 경계를 기울였는데, 때마침 가톨릭이 밀고한 안명근의 활동 덕분에 황해도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종신형과 징역형, 제주도 유배 등으로 궤멸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큰 규모의 탄압으로 확대했다. 안악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하는 또 다른 비밀 단체 ‘신민회’를 포착했다며 그 회원 600명을 검거한 것이다. 이중 105명에게 유죄를 선고했기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황해도와 평안도의 독립운동가를 절멸시킨 사건이었다. <자료6> 105인 사건의 핵심은 대규모 조직인 신민회가 총독 암살을 모의하고 실행했다는 것이었는데, 이 내용대로 자백할 때까지 일본은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 105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증거는 오직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뿐이었다. 이는 로마 가톨릭이 마녀재판에서 고문을 통해 허위 자백을 받아 내던 것과 동일한 방식이었다. 실제로 일본군이 독립운동가들을 천장에 매달아 잡아당기거나 가죽 채찍으로 온몸을 갈기는 고문, 배가 불룩해지도록 코로 물을 부어 넣는 고문은 가톨릭이 행한 마녀재판과 유사했다. <자료7> 72종에 달하는 악랄한 고문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아카시 총감이었다. 아카시 총감은 뮈텔 주교에게 밀고를 받은 후로 독립운동가들을 구속시켜 끔찍한 고문으로 짓지도 않은 죄목을 뒤집어씌우는 데 능수능란했다. 105인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들은 대부분 지식인이나 사업가, 교육가였는데 이중 두 명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도 불구가 되었다. 105인 사건 이후 3.1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10년간 국내 항일 운동이 말살되다시피 한 것은 안명근의 고해 내용이 일본 손에 들어간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안명근은 가톨릭 신부가 자신의 고해 내용을 밀고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30대의 젊은 지식인이었던 안명근은 일본의 고문으로 한쪽 눈을 잃었고 감옥살이로 쇠약해진 끝에 48세의 이른 나이에 숨을 거뒀다. ◈ 가톨릭식 신성불가침의 비밀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고해성사할 때 고해신부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으로서”(“non ut homo sed ut Deus”,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신자의 고백을 듣는다고 한다. 신으로서 고백을 듣기 때문에 고해신부는 신자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고 고해의 비밀을 신성불가침으로 보호해 준다고 한다. <자료8> 안명근에게 잘못이 있다면 이 교리대로 고해신부를 신뢰했다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어떤 경우에도 공개되지 않고 절대 비밀로 보호받는다.’는 교리를 믿은 것이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안중근에게 잘못이 있다면 고해신부가 원하는 대로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중근의 고해를 들었던 빌렘 신부는 살인자 안중근이 회개하기를 원했으나,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안중근은 가톨릭 세계에서 용서받지 못한 살인자가 되었다. 그런데 가톨릭의 신이 느닷없이 살인자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풀기 시작한 듯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을 때 뮈텔 주교는 살인죄를 저지른 자는 가톨릭 신도가 아니라고 정면으로 부정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1999년 가톨릭이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가톨릭 인물’에 안중근이 포함되었다. 2010년에는 ‘안중근 의사 100주기’를 맞아 슬그머니 신자 자격을 복권시키더니, 안중근 기념 사업회를 조직해 그 업적을 알리겠다고 나섰다. 이로써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자랑스러운 가톨릭 신도로 안중근을 각인시킬 뿐 아니라, 올해부터는 빌렘 신부까지 ‘안중근의 영적 아버지’로 이미지 세탁에 나서고 있다. 만약 안중근이 자신의 ‘영적 아버지’가 고해성사 내용을 밀고해 사촌동생 안명근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씨를 말려 버린 것을 알게 된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과거 일본과 똑같은 입장에서 망언을 일삼던 집단이 이제 완벽한 거짓말을 시도하고 있지만 때로는 망언보다 거짓말이 더 역겹다. 최근 가톨릭의 프란치스코까지 앞장서서 로마 교황청이 발표한 공지를 보면, 고해성사의 비밀 엄수는 신성불가침이며 어떤 국가의 법이나 정치 행위로도 거스를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고해실의 신부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으로서’ 고해성사를 듣는다는 교리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도 전 세계 고해실에서는 가톨릭의 신이 고해성사를 들을 것이다. 성당 진입로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신. 추잡한 성추행으로 영혼을 지옥으로 빠뜨리는 데 쾌락을 느끼는 신. 어쩌면 가톨릭이 결사적으로 봉인해야 할 비밀은 다름 아닌 이 신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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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악랄한 범죄자인가, 용서의 구원자인가?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악랄한 범죄자인가, 용서의 구원자인가?

◈ 일본 학자 눈에 비친 고해성사 1620년, 일본 학자 후칸사이 하비안(1565년~1621년)은 로마 가톨릭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저서를 집필했다.<자료1> 제목부터 ‘가톨릭의 신을 파괴하다.’라는 뜻의 『하데우스(破提宇子)』인 이 저서는 가톨릭의 가장 큰 문제가 고해성사라고 지적했다. <자료2> ‘고해성사는 말로 고백만 하면 죄가 소멸된다는 것으로 이는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살인과 같은 중범죄도 가톨릭 신부에게 말만 하면 죄가 소멸된다니 가톨릭 신부는 살인범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후칸사이 하비안, 『하데우스』 – 야마모토 시치헤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재인용) 이처럼 고해성사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은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한다. 일본인 중에서 처음으로 가톨릭 신도가 된 야지로(彌次郞)라는 인물은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었고, 그의 스승은 가톨릭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1506년~1552년)였다. 야지로가 가톨릭을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서였다.<자료3> ◈ 양심을 마비시키는 마음의 평안 1546년, 가고시마의 상인(또는 사무라이)이었던 야지로는 살인을 저지르고 쫓기다가 체포 직전에 야미카와항 부근에 내항해 있던 포르투갈 무역선에 올라탔다. 사람을 죽인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야지로는 무역선 선장이자 가톨릭 신도였던 조지 알바레스에게 심경을 털어 놓았고, 알바레스는 야지로를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로 도피시켜 주면서 거기서 활동 중인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면 면죄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야지로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1547년 12월 야지로는 말라카 언덕에 있는 성모성당에서 하비에르를 만나자마자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매달렸다. 하비에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하나이다.”라는 말을 읊어 주고 죄를 모두 용서했다고 선언하자 야지로는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이는 고해성사의 작용이었다. 가톨릭에 따르면, 이제 야지로는 우주 만물을 심판하는 절대자에게 용서를 받았으니 사람을 죽였어도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야지로는 마음의 평안을 찾게 해 준 가톨릭을 용서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일본인 최초의 가톨릭 신도가 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고해성사가 행해진 것은 1593년 임진왜란 때였다. 스페인 출신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1551년~1611년)가 경상남도 진해에서 2,000명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는데 그들은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이었다. 세스페데스는 일본의 종군 신부로서 조선에 온 것이었다.<자료4> 세스페데스가 속한 제1군은 잔혹한 살상 능력으로 악명 높았다. 임진왜란의 선봉에 섰던 제1군은 부산진성에서 평양성까지 진격하는 동안 조선 사람 수만 명을 난도질하며 개와 고양이까지 모조리 베어 버린 군대였다. 제1군을 지휘한 장수들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해 열렬한 기리시탄(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종군 신부에게 고해성사하는 것을 거룩하게 여겼다. 고해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사함 받은 기리시탄 일본군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었고, 전쟁에 짓밟힌 조선인들이 절규하며 일본군을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괴로울 것이 없었다. 서두에 소개한 하비안의 지적대로, 말만 하면 손쉽게 용서받는다는 개념은 사람들에게 어떤 죄를 저질러도 괴롭지 않은 상태, 즉 죄책감과 양심이 마비된 상태를 가져다주었다. 지금도 전 세계 가톨릭 신부들은 고해성사를 베풀어 무슨 죄든지 용서해 주고 있다. 고해성사는 지금부터 1700년 전, 가톨릭 역사의 초기부터 등장한 이래로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 ◈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가? 처음 고해성사가 등장한 계기는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이 질문은 종말론과 연관이 있는데,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지탄을 받는 종말론은 사실 예수와 가톨릭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예수 자신이 당대에 재림할 것이라 분명하게 선언하고 그때가 세상의 종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가톨릭은 세례만 받으면 모든 죄가 해결되고 곧 세상이 끝나 천국에 갈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신도들은 죄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박했다던 예수의 재림이 계속 지연되고 아무리 기다려도 세상의 종말이 도래하지 않자 신도들 사이에 여러 가지 의심과 질문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세례 받은 후에 지은 죄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였다. 궁지에 몰린 가톨릭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했고, 가톨릭 학자 암브로시우스(340년~397년)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사제가 나를 용서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할 수 있다.’는 방법을 처음으로 제시했다.(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자료5> 이후 고해성사 이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파리 학파 출신 페트루스 롬바르두스(1096년경 ~1160년)였다.<자료6> 그는 죄를 고백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명제를 확립했고 고해성사의 기본 개념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했다. 이러한 이론은 아우구스티누스(354년~430년)의 논문을 근거로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 교리의 기초를 세운 유명한 신학자이자 최고 권위자였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고해성사의 근거라고 제시했던 아우구스티누스 논문이 사실은 위조된 허위 논문이라는 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 동안 한 번도 고해성사를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논문은 완벽한 위조이자 허위였다. 이를 근거로 만든 날조된 이론이었지만 고해성사는 12세기부터 가톨릭의 교리로 정착되어 갔다. ◈ 신도들을 옭아매는 감시와 규제 뿐만 아니라 121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고해성사에 높은 권위를 부여했다. 고해성사를 모든 가톨릭 신도의 의무로 강제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교회 출입을 금지한다고 강력하게 규정한 것이다.<자료7> 고해성사가 강제되면서 가톨릭 신부는 모든 신도의 내밀한 사생활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가톨릭이 정한 규율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죄’로 고백해야 하는데 당시 가톨릭은 신도의 세세한 생활 양식까지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하면 사생활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료8> 예를 들어 가톨릭은 부부간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날과 허용하는 날을 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를 어긴 경우는 고해성사를 해야 했고, 고해 신부는 어긴 이유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며 갖가지 질문을 던졌다. 13세기 고해 신부들의 질문이 총망라된 『고해 신부 대전(Summae Confessorum)』이라는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성(性) 문제’에 대한 질문이다.<자료9> 가톨릭이 정한 절차와 규율이 그만큼 까다롭고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해성사에 대해 독일 학자 에두아르트 푹스(1870~1940)는 통렬한 묘사를 남겼다. “호색적인 고해 신부들은 아리따운 여인의 성생활을 꼬치꼬치 캐물으며 내밀한 자백을 듣는 재미에 탐닉했다. 그러나 고백석에서 즐긴 것은 단지 공상만이 아니었다. 고해성사에서 여자들이 육체의 정조를 잃었고, 고해 신부는 자신의 육욕의 희생자들에게 죄악도 미덕이 될 수 있다고 속였다.”(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 생각을 지배하는 간악한 힘 죄악을 미덕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가톨릭이 고해 신부에게 부여한 막강한 권한이었다. 고해성사 이론에 따르면, 고해 신부는 가톨릭의 신과 같은 위치에서 인간의 죄를 사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간악한 힘이 되었다. 일례로 1960년대 미국 볼티모어에서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된 범죄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근래 발생한 볼티모어 사건을 통해 범죄자의 의식 구조를 알 수 있다. 볼티모어는 미국 건국 당시인 1700년대 미국 최초의 대교구와 대성당이 설립된 곳으로, 모든 동네에 가톨릭 교구가 설치된 철저한 가톨릭 도시였다. 볼티모어 가톨릭 교구가 설립한 키어 고등학교에서 고해성사로 촉발된 사건이 있었다. <자료10> 키어 고등학교는 학교에 고해소가 설치되어 고해 신부가 상주하는 곳이었다. 1967년 1학년 여학생 진 하르개던 웨넌은 고해소에 들어가 어린 시절 당했던 성 학대 사실을 신부에게 털어놓았다.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던 진은 죄를 용서받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고백할 용기를 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고해 신부 닐 매그너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둘 사이에 가려진 칸막이를 열어 진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자위를 했다. 자위는 가톨릭에서 죄로 규정한 것인데 신부가 왜 그런 행위를 했을까. 2주 후 고해 신부가 진을 다시 불렀을 때 비로소 그가 가진 생각이 드러났다. 고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용서 받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너를 성령으로 채울 수 있고 내 정액은 성령이니 삼켜야 한다.” 그의 생각은 자신이 죄악을 미덕으로 바꿀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는 성령을 베푸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여기에 상담 신부 조셉 메스켈이 가담하면서 그들은 거침없는 언동으로 자신들의 의식 구조를 명확히 드러냈다. 메스켈 신부는 진을 강간할 때 라틴어로 “성령을 받으라”고 기도했고, “예수께서 내 몸에 흐르는 성령을 네가 받길 원하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시간이 끝나고 돌아가는 진을 문까지 배웅하며 축복을 내리거나, 때로는 “네가 빨리 정화되지 않아 내가 몹시 힘들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자료11> 진은 구역질 나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끝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했다. 신부가 가톨릭의 신을 대리해 죄를 용서해 준다는 생각은 어릴 적부터 세뇌당한 것이었고 진은 여전히 그 의식에 지배당했다. 매번 그 시간이 끝날 때마다 진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로부터 53년이 지난 지금, 70대 할머니가 된 진은 가해 집단에 용기 있게 맞서서 소송을 하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가톨릭 볼티모어 교구 측은 진이 2~3년간 상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진은 “가톨릭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진은 지금도 가톨릭 건물 근처에 가는 것이 역겹고 힘들다고 한다. 가해 집단은 악랄한 범죄자와 용서의 구원자라는 1인 2역을 능수능란하게 병행해 왔다. 그러나 용기 있는 피해자들의 발언으로 그 집단의 민낯과 의식 구조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이 결여된 반사회적 인격장애, 한마디로 사이코패스 범죄 집단이라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섬뜩한 것은 오늘도 전 세계에서 계속되는 고해성사다. 고통에 찬 피해자가 절규해도 가해자는 고해성사로 깨끗하게 용서받고 세상 앞에 당당해지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고해성사를 하고 나면 자유롭고 당당”해진다고 했다.<자료12> 고해성사가 계속되는 한 그 집단의 당당함도 여전할 것이다.

특집
일본에게 노예 무역과 잔인한 폭력을 교사(敎唆)하다 … 반인류 범죄의 뿌리를 찾아서

일본에게 노예 무역과 잔인한 폭력을 교사(敎唆)하다 … 반인류 범죄의 뿌리를 찾아서

■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톨릭 금지령을 내리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인 1612년, 일본의 쇼군(しょうぐん, 将軍)으로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 금지령’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에 가톨릭이 광범위하게 퍼져 신도가 60만 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가톨릭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톨릭을 금지한 첫 번째 이유는 가톨릭이 순교자를 찬미하는 행태에 대한 강한 반발 내지 혐오 때문이었다. ‘가톨릭 금지령’ 제1조는 ‘가톨릭은 죽음을 두려워 않는다. 몸을 베고 피를 내어 죽는 것을 구원으로 여긴다.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자료1,2> 그전까지 일본인은 가톨릭 신도를 뜻하는 ‘크리스천’을 吉利支丹(기리시탄)이라고 표기했는데, 이에야스가 발표한 가톨릭 금지령에는 한자를 바꾸어 切支丹(기리시탄)이라고 했다. 한자대로 보면, 몸을 베어(切) 붉은(丹) 피를 내는 것으로 유지(支)되는 사람이 가톨릭 신도라는 뜻이다. ■ 순교자들의 죽음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 이런 표현은 그때까지 1500년 넘게 이어진 가톨릭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었다. 가톨릭의 기초를 세운 교부 테르툴리아누스(155년경~ 240년경)가 “순교자들의 피는 가톨릭 신도의 씨앗(sanguis martyrum semen christianorum)”이라고 천명할 정도로, 죽음으로 흘린 피를 숭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가톨릭 신앙의 중요한 토대이기 때문이다. <자료3> 가톨릭 금지령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발표한 ‘가톨릭 선교사 추방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가톨릭 선교사는 의가 없고 선을 파괴한다. 순교자를 보면 기뻐하며 달려가 절을 한다. 이것을 종교의 본질이라 여기는데 사법(邪法 = 사교)이 아니고 무엇인가.’(伴天連追放之文 … 残義損善、見有刑人、載欣載奔、自拝自礼、以是爲宗之本懐、非邪法何哉) ■ 일본 민중이 바라본 ‘기리시탄(鬼利支丹)’ 일본 정부가 죽음을 지향하는 가톨릭의 본질을 사악한 종교라고 했다면, 일본 민중은 가톨릭의 행태를 보고 귀신의 종교라고 여겼다. 일례로 1614년 가톨릭 선교사와 신도들이 나가사키에서 행진을 벌였는데, 이 행진은 십자가 형틀에 묶인 예수상을 선두에 세우고 그 뒤를 따르면서 각자 자신의 가슴을 돌로 쳐서 피를 흘리거나 갈라진 대나무로 등을 때리는 등 각양각색의 자해를 보여 주었다. 이 섬뜩한 행진의 의미는 순교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일본 민중은 희한한 단체가 가톨릭 선교사의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순교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귀신의 행렬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위를 두고 ‘鬼利支丹(기리시탄) 행렬’이라고 했는데 한자대로 보면 ‘귀신(鬼)을 이용해(利) 붉은(丹) 피를 내는 것으로 유지(支)되는 사람들의 행렬’이라는 뜻이었다. 일본 민중은 가톨릭 신도들의 순교 행진을 백귀야행(百鬼夜行)처럼 보았고, 죽음을 지향하고 찬양하는 행위에 불쾌감을 느꼈다.(야먀모토 시치에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페이퍼로드, 2014) ■ 노예 무역에 대한 일본인의 반감 이 같은 순교에 대한 혐오감 못지않게 일본인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가톨릭의 행태가 또 있었는데 바로 노예 무역이었다. 당시 일본에도 노예는 있었지만 사람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해서 대량으로 운송하는 소위 ‘노예 무역’은 없었다. 그러나 가톨릭 세계에서는 1455년 로마 가톨릭 교황 니콜라오 5세가 교서(로마누스 폰티펙스)를 통해 노예 매매를 공인해 주었기 때문에,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이 일본과 교역하며 일본인을 노예로 매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위였다.<자료4> 포르투갈 선박의 일본 입항과 거래는 반드시 가톨릭 예수회의 승인 아래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예수회가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도록 포르투갈 국왕의 허가를 받아 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 예수회의 승인 아래 노예 매매가 이루어지자 노예 매매에 대한 일본인의 반감은 그대로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16세기 일본 정부의 문서 비서관 격이었던 오무라 유코(?~1596)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자료5> “포르투갈 상인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일본인 수백 명을 사들여 수족을 쇠사슬로 묶어 배 밑바닥에 처넣었고, 일본인은 지옥 같은 학대를 받았다. <자료6> 가톨릭 선교사들은 많은 보물을 산처럼 쌓고 종교 번창의 계략을 세웠다. 그것을 본 일본인들이 그대로 배워서 아이를 팔고 아내를 판다. 이 종교를 허용한다면 일본은 머지않아 타락하고 말 것이다.”(야먀모토 시치에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페이퍼로드, 2014) ■ 노예 무역에 앞장선 기리시탄 다이묘들 일본의 지식인이었던 오무라 유코는 노예의 참상에 충격을 받았지만, 포르투갈 상인과 가톨릭 선교사들은 노예를 학대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들에게 노예 무역은 비인간적인 행태가 아니라 천문학적인 이익을 보장하는 유망한 사업일 뿐이었다. 일본의 노예 무역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일본의 지배 계층이 총과 화약이라는 최첨단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노예 매매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는 다이묘(だいみょう, 大名)들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가톨릭을 믿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이었다. 일본은 노예 무역 초기의 거부감과 지식인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리시탄 다이묘를 필두로 하여 노예 무역 우등생으로 발돋움했다. 일본의 자료를 보면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전쟁에 필요한 화약을 수입하기 위해 자기 영지의 일본 여자들을 짐승처럼 묶어 팔아 치웠다. … 유럽은 가는 곳마다 일본 여성이 눈에 띄었고, 일본인 노예가 유럽 전역을 통틀어 50만 명이라고 한다. 또 포르투갈 가톨릭 선교사들이 일본의 젊은 처녀들을 인도와 아프리카로 팔아 치웠다.”(도쿠도미 소호, 『근세일본국민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다이묘들은 왜 노예를 팔면서까지 총과 화약을 수입했을까. 당시 일본은 총과 화약을 자체 생산할 수 있었으나 대규모 전쟁을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무기가 필요했고, 노예 매매로 대량 무기를 확보했던 것이다. 무기를 손에 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일본은 이미 노예 무역을 통해 일확천금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조선 사람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 조선 사람을 유린한 노예 사냥 조선인 노예의 규모는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조선인 노예 가격이 형편없는 헐값이었던 것을 보면 조선인 노예 숫자가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스쿠도(scudo·포르투갈 옛 화폐단위), 페루 노예가 400스쿠도인 것에 반해 조선인 노예는 2.4스쿠도에 불과했다.(카를레티, 『동방여행기』) 조선에서 노예 매매와 납치를 목격한 일본 종군 승려 게이넨(慶念)은 이렇게 적었다. “노예상들은 조선인을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 부모는 자식을 찾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울부짖는 그 광경은 ‘지옥도’에서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비참한 것이었다. 오늘도 조선 사람의 아이를 빼앗아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한 병사는 손을 모아 애원하는 조선인 부모를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 버리고 아이는 끌고 갔다.” 1990년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가미가토 겐이치 교수는 “일본 상인들은 포르투갈인이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행위를 배워 조선인 포로를 노예로 매매했다.”고 밝힌 바 있다. 노예 무역을 일본에 가르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서 노예 사냥으로 악명 높았고, 그 반인류적 범죄가 아프리카를 넘어 아시아로,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까지 전파된 셈이었다. 그로부터 140여 년 전, 노예 무역을 허가한 가톨릭 교황의 교서가 전지구적인 악영향을 미친 것은 역사적 사실로 특기할 만하다. ■ 조선에서 저지른 또 다른 만행, ‘코 베기’ 노예 사냥과 더불어 일본이 조선에서 저지른 만행이 있는데, 바로 ‘코 베기’였다. 일본에서 전쟁을 지휘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에게 “조선인의 목 대신 코를 베서 보내라. 병졸 한 명에 코 한 되씩 소금에 절여 보내라.” (강항, 『간양록(看羊錄)』, 1656)는 명령서를 내렸고, 히데요시가 잘린 코를 전공으로 기록하고 감사장을 보내 주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조선인의 코를 자르는 데 혈안이 되었다.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도 이와 똑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1502년, 그리스도 기사단의 일원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바스코 다 가마도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적군 800명의 코를 잘라 버렸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바스코 다 가마는 ‘코 베기’ 외에도 공통점이 많았다. 바스코 다 가마는 가톨릭 전파의 기치를 높이 올리고 인도를 정복하기 위해 항해에 나선 바다의 십자군이었고,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중국(명나라)을 정복해 가톨릭 국가를 만들겠다고 천명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이었다.<자료7> 바스코 다 가마가 무자비한 폭력과 살육을 자행해 그의 함선이 정박하는 해안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던 것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코 베기 명령을 내린 후 조선의 들판은 코가 잘린 시체로 뒤덮였다. ■ 기리시탄 다이묘, 가장 잔혹한 전공을 올리다 1597년 전라도 남원성 전투에서 조선인 4,000명을 모조리 학살한 일본군은 앞다퉈 승전 보고서를 작성하고 조선인의 코를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냈다.<자료8,9,10,11> 당시 이 전투에 참전한 병사 오우가우지 히데모도의 기록(朝鮮物語)에 의하면 일본군 22개 부대가 총 3,726개의 코를 잘랐는데, 그중에서 기리시탄 다이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879개의 코를 잘라 가장 잔혹하고도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항상 몸에 십자가를 지니고 다녔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후에 그 시체를 가톨릭이 인계하고 전 세계 예수회 교회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미사가 열렸으며, 교황청은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고 있다.(도리즈 료지, 『재검증 고니시 유키나가』, / 조중화, 『다시쓰는 임진왜란사』, 학민사, 1996.) ■ 일본군 정신에 새겨진 정복 야욕 일본군은 살아 있든 죽었든 상관없이 조선 사람만 보면 코를 베었으므로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난 후까지 조선 거리에 코 없는 사람이 많았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함께 끝이 났지만 그들 정신에 새겨진 정복 야욕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정복의 망령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300년 뒤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으로 대두되었다. 정한론자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추종하고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으로 달성하지 못했던 ‘조선 정복의 위업’을 완성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그들의 야욕대로 조선의 국권을 침탈당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코를 베는 행위처럼 야만적인 폭력을 배운 것보다 정복과 침탈의 정신을 학습한 것이 더욱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 인류에 대한 범죄, 그 뿌리는… 현재 로마 가톨릭 교황 프란치스코가 ‘인신매매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며 근절할 것을 전 세계에 호소하고 나섰다. 다른 국가들이 범죄를 뿌리 뽑는 선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집단이 전파한 반인류 범죄는 이미 뿌리를 깊게 내린 지 오래다. 헐값에 인신매매 당한 조선인들은 십자가 깃발을 높이 세운 포르투갈 선박에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노예가 되었고, 독실한 기리시탄 다이묘의 칼에 코가 잘린 조선인들은 생지옥 같은 전쟁의 참상을 뼈에 새겼다. 그러나 반인류 범죄보다 더욱 섬뜩한 것은 자신의 죄와 악을 모르는 그 집단의 지적 장애일지도 모른다. 극악한 전범(戰犯)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악의 뿌리가 타인에게 선한 행동을 촉구한다면 그것은 자기분열적인 망상일까, 아니면 치밀하게 계산된 위선일까.

1955년 9월 16일 인천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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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잠실 야구 경기장 보다 큰 규모 수만 명 모여 은혜의 창파 이뤄 1955년 9월 16일, 인천 시민 심령 대부흥회가 열렸다. 일명 ‘동산운동장 집회’라 불리는 하나님의 천막집회였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동산중학교 운동장에 운집했다. 당시 동산중학교 운동장은 인천에서 가장 넓은 공터였다. 1957년 정비된 동산중학교 운동장의 넓이는 10,760평이다. 동대문 야구경기장이 5,449평, 잠실 야구경기장이 […]

전쟁의 기술과 야욕은 어디서 오는가? 임진왜란을 촉발한 숨은 범죄 집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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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세계사<7>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는 세계를 향해 무기 개발을 멈추고 그 돈으로 감염병 연구를 하라고 촉구했다.<자료1> 무기 만들 돈으로 사람 살리는 연구를 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지적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 무기를 개발하고 구입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계속돼 온 일이다. 지금부터 480여 년 전 일본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 […]

모두를 속인 사기범은 누구인가? … 코로나 바이러스가 남긴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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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다시 보는 뉴스>

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사회에 두 가지 미스터리를 던져 주었다 누가 31번 확진자를 감염시켜 엄청난 확산을 일으켰는가? 누가 진짜 사기 전도로 대중을 기만하고 있는가?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던 금년 4월 11일, 이탈리아 가톨릭교회는 토리노 수의(壽衣)를 공개했다. 토리노 성당에서 보관하는 이 수의는 예수가 죽은 뒤 시신을 감쌌다고 주장하는 세마포 천으로, 가톨릭에서는 이 천이 병을 낫게 하는 등 기적을 […]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수은 중독과 매독, 탐욕이 부른 질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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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빈자의 날”을 제정해 해마다 빈곤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때마다 노숙자와 실업자를 베드로 성당에 초대해 함께 식사하는 교황의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었다. 작년 11월 빈자의 날에 교황은 베드로 성당 미사에서 “소수의 탐욕으로 다수가 빈곤해진다.”며 탐욕의 세력 때문에 다수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강조했다.<자료1> 탐욕이 수많은 사람을 빈곤에 빠뜨리는 일은 역사에서 반복되어 왔다. 스페인에게 […]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식민 지배의 신호탄과 전염병 생물학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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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류와 문화를 케이크에 비유해 설명한 적이 있다. “인류와 문화는 케이크처럼 조각조각 자를 수 없다. 케이크를 잘라 반은 네가 갖고, 반은 내가 갖는 식의 협상으로 갈등이 종결되지 않는다. 함께 대화하고 건설해야 한다.” 세계 역사에서 케이크를 나누는 식의 협상은 여러 번 있었다. 각 나라의 인류와 문화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경계를 나눠 버린 최초의 […]

증오의 씨앗을 뿌린 범죄 집단과 그들의 이중 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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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을 찾아서

지난 1월 9일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의 발언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대립하고 있는 국가들을 향해서 분쟁을 대화로 해결해야 된다고 종용했다. 서로 증오심을 자제하고 대화하라는 교황의 발언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권유하는 당사자가 극심한 대립과 증오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라면 어떨까.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양심에 거리껴 공공연하게 대화를 권유하기가 망설여질 것이다. 그러나 이중 어법을 […]

다른 문화와 종교를 ‘이단’으로 말살한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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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을 찾아서...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사건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전무후무한 재앙이었다. 콜럼버스는 유럽에 있는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공할 수 있도록 바닷길을 열어 주었고 그 길을 따라 일확천금의 탐욕을 품은 침입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콜럼버스의 후예들은 탐험이라는 미명 하에 아메리카 곳곳을 누비며 약탈과 노략질을 계속했다. 이 탐험대가 원주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탐욕과 무력 때문만은 […]

아프리카 원주민은 왜 좀비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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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를 만든 노예 사냥과 죽음의 노동

살아 있는 시체를 뜻하는 ‘좀비’는 원래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혼을 말살당해 자신의 의지와 생각 없이 주인의 명령만을 따르는 좀비, 죽을 만큼 혹사당하지만 이미 시체이기 때문에 다시 죽을 수도 없는 좀비는 끔찍한 괴물이기 이전에 비참한 노예였다. 좀비는 아프리카 콩고의 “은잠비(Nzambi)”라는 단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영혼 없는 노예’라는 이야기는 아이티섬에서 유래했다. 아프리카에서 사용하던 단어가 망망한 대서양 건너편의 […]

가톨릭이 세운 나라, 세계 정복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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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어떻게 세계화 되었는가?

지금부터 600년 전인 1419년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해였다. 포르투갈이 항해를 위한 기반 시설을 세우고 대항해시대라는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 돛을 올린 그들의 항해는 세계사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폐해를 남겼다. 이번 기획 기사에서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포르투갈은 12세기 가톨릭 십자군이 세운 나라였다. 초대 군주인 아폰수 1세는 십자군이었고 이슬람 세력과 수백 년 전쟁을 […]

로마 교황청의 신묘한 경제 능력, 가톨릭의 특출한 수입 창출과 위기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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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은 2,000년간 존재해 온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집단이라 불린다. 또한 인류가 갈망하는 ‘구원’에 일정한 금액을 붙여 판매한 최초의 기업이며, 지배 계층을 움직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엘리트 집단이다. 이처럼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가톨릭이 최근 위기에 처했다는 더 타임즈의 보도가 있었다. 가톨릭 본부인 교황청의 수입이 감소하면서 4천 4백만 유로(약 571억 원)의 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청은 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