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50> 영적 존엄을 논할 권리, 역사의 심판대에 세우다 ①
2015년 9월, 한 시리아 난민 아동의 주검 사진이 전 세계 소셜미디어와 신문 1면을 뒤덮었다. 해변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려 죽어 있는 두 살배기 아이 알란 쿠르디의 사진이다.
<자료1> 시리아 내전을 피해 지중해를 건너던 중 보트가 전복되며 익사한 시신이 튀르키예 해변까지 떠내려온 것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진은 국제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세계의 난민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고, 많은 유럽 국가들이 난민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알란 쿠르디의 사진은 난민 존엄성의 위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남았는데, 지난 9일 레오 14세 교황이 즉위 후 처음으로 발표한 권고문에서도 이 시리아 아동의 사진이 언급되었다.

<자료1> 2015년 튀르키예 해변에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아동 알란 쿠르디의 사진
튀르키예 경찰이 해변에 떠내려온 알란 쿠르디의 시신을 발견한 사진이다. 이 사진은 언론과 SNS에 퍼지며 전 세계 사람들의 연민을 자극했고, 많은 유럽 국가들이 난민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알란 쿠르디의 이 사진은 난민 존엄성의 위기를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로 언급된다.
(출처: CNN)

<자료2> 시리아 난민 아동을 언급한 레오 14세의 교황 권고문『Dilexi te』
레오 14세는 즉위 후 처음 발표한 교황 권고문에서 시리아 난민 아동 알란 쿠르디의 사진을 상기하며 “안타깝게도 일시적 분노를 제외하면 이런 유사한 사건들은 점점 무관심 속에 묻히며 주변부 뉴스로 전락하고 있다”고 적었다. 또 “우리가 도덕적·영적 존엄성을 되찾지 못하면 오물 속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출처: St Paul’s BYB)
레오 14세 교황은 “가난한 자, 이민자 등 소외층 돌보라”는 내용의 권고문「나는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의 1장 11항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자료2>
“몇 년 전, 지중해 해변에 쓰러진 채 숨을 거둔 한 아이의 사진이 세상을 뒤흔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시적인 분노에 그쳤을 뿐, 그와 비슷한 사건들은 점점 무관심 속에 묻히며 주변부 뉴스로 전락하고 있다.(A few years ago, the photo of a lifeless child lying on a Mediterranean beach caused an uproar; unfortunately, apart from some momentary outcry, similar events are becoming increasingly irrelevant and seen as marginal news items.)” 그리고 4장 95항에서는 “우리가 도덕적·영적 존엄성을 되찾지 못하면 오물 속에 빠질 것(Either we regain our moral and spiritual dignity or we fall into a cesspool.)”이라 경고했다.
존엄성이란 모든 인간이 가진 고유한 가치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고 존중받을 권리를 타고난다는 인간의 특성이다.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은 인간은 서로 감히 존엄성을 범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나아가 영적 존엄성은 인간의 기본권을 넘어 영적·정신적 가치까지 존중하는 한층 차원 높은 개념이다. 전 세계를 향해 도덕적·영적 존엄성을 촉구할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했던 역사적 사실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교황이 시리아 아동을 언급하며 도덕적·영적 존엄성을 논할 권리에 대해,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검토해 본다.
▣ 시리아에서의 식인 사건, 인간 존엄 말살의 결정판

<자료3> 아민 말루프의 책『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표지
레바논 출신 역사가 아민 말루프는 기존의 서유럽 중심 역사서와 달리, 아랍인의 시각에서 본 십자군 전쟁의 기록을 복원했다. 유럽의 ‘성전’은 아랍인의 입장에서는 ‘침략’이었다. 약탈과 학살로 점철된 십자군의 원정은, 중동 사회에 깊은 상처와 큰 불신을 남겼고, 가톨릭의 폭력과 위선에 대한 기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1부 3장에서는 ‘마라의 식인종’이라는 소제목 하에 신이 원하신다며 출정한 1차 십자군이 자행했던 식인 행위에 대해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출처: 교보문고)
1098년 시리아의 소도시 마라트 알 누만(Ma’arrat al-Numan, 이하 마라)에서는 전체 아랍인들을 전율하게 만든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레바논 출신 역사가 아민 말루프는 그 사건을 단 여섯 글자로 요약했다. 그의 저서『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1부 3장의 소제목을 ‘마라의 식인종’이라 지은 것이다.<자료3> 그는 그것이 불가피한 식인이었든 광신적인 의식이었든 어느 쪽도 비현실적이며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라고 평가했다. 식인 행위는 어떤 종교적, 민족적, 역사적 조건을 막론하고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말살하는 비도덕적 행위의 최종판이기 때문이다. 당시 시리아에서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1095년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 아래 출정한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부터 경유하는 도시들의 모든 이교도들을 하느님의 적으로 규정하고 살육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대상에는 어린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1088.3.12.~1099.7.29. 재위)는<자료4> 십자군에 참여하는 모든 병사들에게 죄를 사해줄 것과 상당한 전리품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시리아의 도시 마라에서도 몇 차례 공방전이 이어지다 1098년 12월 12일, 결국 십자군에 함락된다. 곧이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살육과 약탈이 시작되었다. 사실 살육과 약탈은 당시 십자군으로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마라의 학살이 당대에 큰 충격을 준 이유는 대규모 식인 행위를 했다는 다수의 믿을 만한 기록과 증언들 때문이었다.<자료5> 1차 십자군 이전에도 은자 피에르가 이끈 민중 십자군이 니케아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그들은 아기들을 토막 내었고, 나무 꼬챙이에 꿰어 불 위에 구웠다.”는 등의 잔혹하고 야만적인 행위가 기록된 적이 있다. 비잔틴 제국의 공주이자 역사가 안나 콤니니의 역사서《알렉시아드》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마라에서의 학살은 보다 여러 연대기 작가가 공통적으로 대규모 식인 행위를 기록했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자료4> 1095년 십자군에 참전할 것을 연설하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신이 원하신다’는 구호를 앞세워 십자군을 소집했다.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 아래 출정한 1차 십자군은 경유하는 도시들의 모든 이교도들을 살육의 대상으로 삼았다. 교황이 십자군에 참여하는 모든 병사들에게 죄를 사해줄 것과 상당한 전리품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1881년,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에서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도록 호소하고 격려함으로써 십자군 규합에 성공하였다’는 공로로 가톨릭에서 성인 다음의 지위인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데일리비스트)

<자료5> 시리아의 소도시 마라에서 자행된 가톨릭 십자군의 식인 행위를 묘사한 그림
1098년 시리아의 소도시 마라트 알 누만(Ma’arrat al-Numan, 이하 마라)에서는 전체 아랍인들을 전율하게 만든 끔찍한 식인 사건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사례로, 십자군 연대기 저자 라울 드 카엥은 “마라에서 우리들은 이교도 성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고, 아이들은 꼬챙이에 꿰어 구워 먹었다.”고 기록했고, 아길레르의 레이몬드는 식인 행위가 기근 탓이라 진술하면서도, 인육을 먹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기는커녕 ‘맛있게’ 먹었다고 덧붙였다. 논문『식인종과 십자군』의 저자 루빈스타인은 여러 연대기의 증언을 종합하여 “그 도시(마라)는 일종의 솥이 되어, 적이 하느님의 전사들에게 산 채로 요리되어 먹히는 장소가 되었다.”고 정리했다. (출처: Dickinson College Commentaries)
미국의 역사학자 제이 루빈스타인의 논문『식인종과 십자군(Cannibals and Crusaders)』에는 당시 여러 연대기 작가들의 진술과 그 충격적인 진술을 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정리되어 있다. 1099년 7월 예루살렘 함락 후 20년 내에 기록된 12개의 기독교 연대기에서 모두 식인 행위를 인정하고 있으며, 당시 인육을 먹는 것은 수치스럽고 은밀한 사건이 아니라 공개적 행위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십자군 연대기 저자 라울 드 카엥이 동방에서 만난 십자군 정착민들은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 듯 “마라에서 우리들은 이교도 성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고, 아이들은 꼬챙이에 꿰어 구워 먹었다.”는 이야기를 마치 농담하듯 즐겁게 떠들었다고 기록했다. 십자군에 직접 참전했던 연대기 저자 샤르트르 드 풀셰르는 “나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인해 미쳐서 이미 죽은 사라센인들(무슬림들)의 엉덩이에서 살을 떼어서 불에 구워서 먹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들은 채 다 익지도 않은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었다”라고 기록했다. 마라 전투에 참가했던 아길레르의 레이몬드는 식인 행위가 기근 탓이라 진술하면서도, 인육을 먹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기는커녕 ‘맛있게’ 먹었다고 덧붙였다. 논문의 저자 루빈스타인은 여러 연대기의 증언을 종합하여 “그 도시(마라)는 일종의 솥(stewpot)이 되어, 적이 하느님의 전사들에게 산 채로 요리되어 먹히는 장소가 되었다.”고 정리했다.<자료6>

<자료6> 식인 행위를 하는 유럽인을 묘사한 삽화
사람은 토막내고 꼬챙이에 꿰고 불에 구워 먹고 있다. 시리아의 도시 마라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다수의 기록이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자료7> 1차 십자군의 식인 행위를 보고받은 교황 파스칼 2세
1099년 9월, 1차 십자군의 지도부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보낸 서신에는 “당시 저희들은 심각한 기아에 직면해 사라센인들의 몸을 뜯어 먹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한 기록이 있다. 이 서신에서 주목할 점은 그들이 배고픔을 이유로 식인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서신 어디에도 도덕적·영적 존엄성에 대해 고뇌하는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을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한낱 고깃덩어리로 보는 후안무치한 변명에, 교황이 질책하거나 처벌을 내렸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출처: 위키미디어)
결정적인 자료로서 십자군의 지도부가 1099년 9월 교황 파스칼 2세(1099.8.13.~1118.1.21. 재위)에게<자료7> 보낸 서신에서 “당시 저희들은 심각한 기아에 직면해 사라센인들의 몸을 뜯어 먹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moreover, hunger so weakened us that some could scarcely refrain from eating human flesh […] and while we were delaying there, there was so great a famine in the army that the Christian people now ate the putrid bodies of the Saracens)”라고 보고한 기록이 있다. 이 서신에서 주목할 점은 그들이 배고픔을 이유로 식인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서신 어디에도 도덕적·영적 존엄성에 대해 고뇌하는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을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한낱 고깃덩어리로 보는 후안무치한 변명에, 교황이 질책하거나 처벌을 내렸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기독교 학자들은 이를 단순한 배고픔이 원인이 아닌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 이론적 정당화를 시도했다. 일례로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셸 루슈의 한 논문은 식인 풍습에 신성한 성격을 부여하며, 무슬림 시체에서 뜯어낸 살점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같은 사막을 헤매던 때 보내준 만나에 비유했다. 연대기 저자 라울 드 카엥은 성경 구절을 예로 들어 식인 행위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 해석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다.
“뭇 이방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벌을 내리겠다. 너희의 온갖 역겨운 일들 때문에,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없을 그런 일을, 내가 너희 가운데서 일으키겠다. 너희 가운데서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먹고, 자식이 아버지를 잡아먹을 것이다. (에스겔서 5장 8~10절)”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미가 3장 3절)”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 내버려둘 것이며 남은 자들이 서로 살을 뜯어먹어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스가랴 11장 9절)”
“너희는 너희 아들들의 살을 먹고 딸들의 살을 먹어야 하게 되리라.(레위기 26장 29절)”
“궁한 나머지 제 다리 사이에서 나온 자식을 태째 몰래 먹어치울 것이다. 원수가 너희 모든 성을 포위하고 몰아치면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다.(신명기 28장 57절)”
제이 루빈스타인은 그의 논문『식인종과 십자군』에서 식인 행위가 성찬식의 메타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와 언어적·상징적으로 겹쳐지는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자료8> 당시 평신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신다”는 비현실적인 신학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살과 피를 실제로 먹는’ 행위가 훨씬 익숙한 현실이었다. 식인 행위는 단지 기근 때문에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의도된 상징적 폭력이었다는 것이다.

<자료8> 성찬식 밀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의 살과 피라며 표현한 그림
미국의 역사학자 제이 루빈스타인의 논문『식인종과 십자군』에는 식인 행위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소개돼 있다. 식인 행위가 성찬식의 메타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와 언어적·상징적으로 겹치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분석이 있었다. 당시 평신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신다”는 비현실적인 신학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살과 피를 실제로 먹는’ 행위가 훨씬 익숙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성찬식이 아니어도 식인 행위가 성경에 나온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 해석할 만한 성경 구절도 많았다고 한다. (출처: acmcatholic.org)
그들이 이런 식으로 식인 행위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동안에도, 식인 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이 사건은 무슬림들에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깊은 영향을 미쳤다.『아랍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저자 아민 말루프는 “지역 시인들과 구전으로 보존되고 전승된 이러한 잔혹 행위에 대한 기억은 십자군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으며, 그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지적하며, “투르크인들(무슬림들)은 서방인들의 식인 행위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십자군 전쟁과 그것이 중동에 끼친 문화적, 심리적 영향에 대한 민감성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2022년 12월 1일, 카타르에서 열린 FIFA 월드컵에서 일부 잉글랜드 축구 팬이 복제 십자군 의상을 입고 경기장에 입장하는 것이 금지된 적이 있다.<자료9> 아랍권에서 십자군 복장은 모욕적이라는 이유였다. 카타르 보안 당국은 중동 지역의 역사적 감정을 고려해 이 같은 조치를 내린 것이며, 이는 무슬림들이 아직 십자군의 잔학 행위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로부터 불과 3년 후, 레오 14세 교황은 시리아 난민 아이 알란 쿠르디를 언급하며 난민 문제와 도덕적·영적 존엄성에 대해 논했다. 그가 스스로 면죄부를 내린 것이 아니라면, 역사는 아직 그에게 영혼의 존엄을 논할 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자료9> 카타르에서 월드컵 경기장 출입을 금지당하고 있는 십자군 복장의 축구팬
22년 카타르 월드컵 당시, 이란과 잉글랜드의 경기를 앞두고 십자가가 새겨진 검과 방패를 든 십자군 복장의 영국 축구팬 두 명이 경기장에 들어가려다 제지당했다. 카타르 경비원들은 무기때문이었다고 밝혔지만, 누가 봐도 코스프레용 무기였기 때문에 많은 언론은 두 사람이 ‘십자군’으로 분장했기 때문에 거절당한 것이라 보도했다. 이는 카타르의 무슬림 사회에 “모욕”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중세 시대 약 200년 동안 서유럽 기독교인들이 지중해 지역의 무슬림을 상대로 벌인 “십자군 전쟁”을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네티즌들은 “역사를 배우지 않은 건가?”, “중동에서 십자군처럼 옷을 입는 건 좀 멍청한 짓이다.”, “이렇게 무식한 건 유럽에서 나치 군복을 입는 것과 같다.”며 역사를 무시했던, 혹은 역사에 무지했던 그들의 행동을 비판했다. (출처: maribor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