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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 노력해야 자라는 거야’ (제자들이 만난 박용한 승사)

제자들이 만난 박용한 승사
발행일 발행호수 2259

박용한 승사(가운데)와 대담중인 제자 손수영 부장(왼쪽)과 김기승 계장.

눈부시게 밝은 초록빛 물결이 가득찬 오후, 기장신앙촌 우편물 취급소장직과 택배 소장직을 겸하고 있는 박용한(83세) 승사를 제자인 손수영 부장과 김기승 계장(부흥협회)이 찾았다.

박용한 승사는 처음에 목사가 되려고 경남초등교원 양성소를 졸업하고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가정형편상 휴학을 하고 교편을 잡았다.

1955년 5월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 집회에 참석하신 모친이 “이제는 인학을 하는 목사들을 따를 게 아니라 박장로님께 직접 성신을 받아 신학을 몸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친의 권유가 싫어 근무지 학교까지 옮긴 그는 어느 날 모친의 눈물 자국이 서려있는 편지를 한 통 받고서 모친을 따라 천부교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박 승사는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면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 덕소 제2초등학교장으로 시무하면서 선생님들도 인근에 교회를 개척하라는 말씀이 있어 박 승사는 하남시의 신장지역을 목표로 정하고 야학을 열어 젊은이들을 전도했다.

어느 해 겨울 밤 10시에 수업을 마치고 신앙촌으로 되돌아오던 중, 칠흑 같은 밤에 얼어붙은 한강을 중간쯤 건너자 얼음이 ‘뿌직’하고 깨어지면서 앞발이 물속으로 빠졌다. 겁이 난 박 승사는 무의식 중에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면서 뒷발에 힘을 주고 겨우 빠져나와 다시 되돌아오던 길로 돌아갔다. 박 승사는 이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감한 끝에 너무나 감사하여 사재를 털어 신장 전도관을 지었다.

또 한 번은 서울성동교회에 시무하던 중에 연탄가스를 마셔 사경을 헤맸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연탄가스로 죽는 사람이 허다할 때였다. 그런데 하늘에서 자그마한 하얀 점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커지더니 그 빛이 그의 얼굴에 닿는 순간 ‘아’하고 숨을 내 쉬며 의식이 깨어났다. 옆에서 애타게 지켜보던 교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박 승사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를 살려주셨다고 확신했다.

제자들은 박 승사에게 요즈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가 물어보았다. 그는 새벽 3시 경이면 일어나 샤워를 하고 제단 문이 열리자마자 제단에 가서 기도문을 시작한다. 하루에 박 승사는 기도문을 5천번 한다. 특히 ‘자녀들이 나태하지 않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순종하면서 끝까지 이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한다고 한다.

박 승사는 잘못하면 평생 인학을 하는 목사가 될 뻔 했는데 하나님을 만나 교역자 생활을 한 것과 시온학원에서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고 그들과 지금도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인생 일대의 보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축복받은 신앙촌에서 산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복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제자들이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청하자, 박 승사는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학생관장들이 청년 가운데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뭇 심령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서는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게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둘째, 스스로 믿음이 자라도록 새벽예배를 빠지지 말아야 한다. 장례가 나면 무조건 달려가 시신 피는 광경을 목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 신앙촌에 하나님의 성사업을 할 많은 젊은이들이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모든 일에 모범적인 박 승사지만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좀 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를 걸’하는 아쉬움이 간절하다고 했다. 그리고 기도문을 더 열심히 하여 영적인 호흡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한다. 박 승사는 매주 장년들을 상대로 찬송가 지도를 하고 있는데 이 시간이 가장 기다려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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