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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교 2000년대의 발자취

천부교 2000년대의 발자취

2000년대 천부교는 안팎으로 성장과 도약의 시기였다. 성전이 국내외 곳곳에 세워지고, 천부교를 알리는 다큐멘터리와 홈페이지가 제작되었으며, 아름다운 신앙촌이 조성되어 신앙과 조화를 이루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진실을 바로 세운 ‘MBC 사건’ 승소 2000년대의 시작은 천부교단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999년 6월, MBC가 기획 시리즈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를 방영하며 교단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을 내보냈다. 이에 천부교단은 법적 대응에 나섰고, 2000년 10월 27일 서울지법은 MBC의 잘못을 인정하고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이 판결은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언론의 왜곡 보도에 맞서 교단이 공식적으로 진실을 바로 세운 사건이었다. 이는 천부교를 올바르게 알리는 이정표가 되었다. 국내외에 세워진 신‧개축 천부교회 2000년대 들어 천부교는 전국 각지에서 새 제단을 세우거나 개축하며 신앙의 터전을 새롭게 다져 나갔다. 부산 광안교회, 제주 일도교회, 인천 숭의교회를 시작으로 울산, 동두천, 원주 등지에 성전이 세워졌고, 2001년 12월 23일에는 미국 뉴욕 퀸즈 지역의 뉴욕교회가 개축되었다. 1978년 뉴욕전도관으로 개관한 뉴욕교회는 개축을 통해 아름다운 성전을 마련하며, 한국을 떠나 생활하는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신축의 열기가 이어져 기장, 전농, 가야, 영주, 청평, 순창, 서마산교회 등에서도 새 제단이 완공되었다. 2008년 10월,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해외에서 전해졌다. 푸른 잔디 위에 자리해 마치 노아의 방주를 떠올리게 하는 미국 워싱턴교회가 오랜 기다림 끝에 신축예배를 드렸다. 국내외에서 새롭게 단장한 성전들은 각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널리 전하며, 진리의 빛을 밝히는 등대가 되었다. 천부교를 알리는 홈페이지 개설 2004년 4월 20일, 천부교 공식 홈페이지가 문을 열었다. 홈페이지는 천부교와 신앙촌에 대한 소개와 정보, 천부교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역사관, 예배와 문화 콘텐츠를 제공하는 시온방송국, 어린이를 위해 재미있고 유익하게 구성된 어린이 코너 등 다양한 채널로 구성됐다. 이를 통해 일반인들도 천부교의 역사와 문화를 접할 수 있었으며, 어린이 코너는 학습과 교육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2018년에는 홈페이지를 전면 개편해 커뮤니티와 신앙신보 코너를 추가하고 소통과 접근성을 한층 강화했으며,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하나님 말씀과 천부교 행사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로써 천부교 홈페이지는 천부교를 알리는 중요한 창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구원의 역사, 천부교 50년’ 다큐멘터리 상영 2005년 추수감사절 전야 샘터공원에서 천부교 50년 역사의 발자취를 담은 다큐멘터리 <구원의 역사, 천부교 50년>이 상영되었다. 이 영상은 하나님께서 집회를 인도하시고 생명물을 축복하시는 모습, 전국으로 확산된 부흥 집회, 그리고 수많은 인파가 은혜를 받는 장면을 생생히 담아내 큰 감동을 주었다. 영상은 또한 정치·종교계와 언론의 핍박 속에서도 신앙촌 건설을 진두지휘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조명하며, “사람들은 기적이라 했지만 하나님의 땀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신앙촌은 은혜받은 사람들이 모여 죄 안 짓고 깨끗이 생활하며 신앙을 키우기 위해 세워진 신앙인의 마을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다큐에는 유엔 한국 재건단 콜터 단장이 소사신앙촌을 방문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며 위대한 힘에 의한 창조”라고 감탄한 증언도 담겼다. 또한 1998년 9월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있었던 천부교인의 장례식에서 생명물로 시신이 아름답게 피는 것을 본 카르멘 코토 여사의 증언도 수록되었다. 코토 여사는 “장의사로 8년 반을 일했지만, 천부교 장례식에서 고인의 손과 몸이 제 살보다 더 부드럽게 변한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놀랐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미국 코닥사의 축복 사진 감정서도 영상에 포함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 역사로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연출을 맡았던 이경태 감독은 “천부교인들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전달하고 싶었다”며, ‘정말 하나님이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사람이라면 인생이겠지만, 하나님이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신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3년마다 이어진 천부교 체육대회 1998년 소비조합 체육대회를 기점으로 3년마다 열리는 대규모 체육대회가 자리 잡았다. 2001년 10월 7일, 신앙촌 제강운동장에서 ‘건강한 시온인 달리는 시온인’이라는 슬로건 아래 중부와 남부지역이 청‧백군으로 나뉘어 경기가 진행됐다. 이날 5km 건강 마라톤에서는 10대에서 70대까지 참가자들이 함께 뛰며 서로를 응원해 활기를 더했고, 각 팀이 준비한 화려한 응원전은 단결과 화합을 보여주며 축제의 장을 만들었다. 2004년 10월 3일에는 ‘희망찬 도전, 아름다운 화합’을 주제로 또 한 번의 체육대회가 열렸고, 2007년 10월 7일 신앙촌 대운동장에서는 ‘힘찬 도약, 함께 뛰는 시온인’을 슬로건으로 대회가 진행됐다. 이날 500여 명의 선수들이 그림과 글씨, 다양한 동작으로 ‘신앙촌’을 표현하는 테마 응원전을 선보여 관중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지금도 천부교 체육대회에서는 경기를 통해 인내와 협동심을 기르고, 응원을 통해 하나 된 기쁨을 나누는 자리로 이어지고 있다.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신앙촌 조성 2006년 신앙촌에 대규모의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조화롭게 어우러진 군락지와 식당 앞 분수대가 조성되었다. 사원들의 휴식처이자 축복일에는 교인들의 산책길로, 견학생들에게는 자연의 놀이터로 활용되는 두 공간은 신앙촌의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2007년 5월에는 이슬성신절을 맞아 신앙촌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다. 옛 건물을 리모델링해 새롭게 단장한 레스토랑은 깔끔하고 현대적인 분위기로 눈길을 끌며, 사원과 교인 모두의 휴식 공간으로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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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변함없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지금도 변함없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1996년 추수감사절 전야, 신앙촌 밤하늘에 내린 전례 없는 규모의 이슬성신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하고, KODAK 공식 감정을 통해 확인된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걸어오신 길은 오직 하나, 인간에게 구원의 자격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1980년대까지는 바로 그 구원의 토대를 마련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친히 준비하시고 이끄신 시기였다. 이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정체를 밝히시며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다. 이어 이슬성신절을 정해 주시며, 오직 이슬성신으로만 죄를 씻고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고, 실제로 그 권능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셨다. 또한 죄와 상관없는 자격만 갖춘다면 누구에게든 구원의 은혜를 베풀 수 있음을 알려 주시며, 더 많은 사람이 그 은혜를 받고 의의 길을 걷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성전을 세우시고, 신앙생활 속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신앙촌 제품 생산의 기반도 마련해 주셨다. 전국을 순회하시며 집회를 여시고, 직접 말씀을 전해 주셨으며, 합창과 운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전도의 문을 열어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앙 안에서 자라나도록 이끌어 주셨다. 이렇게 마련된 신앙의 터전과 은혜의 역사 위에서, 1990년대는 새로운 전환과 성장을 이루는 시기였다. 기쁨과 은혜를 구하는 기도문 1990년대 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고 하시며 기쁨과 즐거움, 은혜를 구하는 기도문을 주셨다. “한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은혜와 미소를 주시옵소서.” 이 기도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로, 기도할수록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진심으로 구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연결된다고 말씀하셨다. 성전 신축과 재정비 한편, 1990년대는 전국 각지에서 성전의 신개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1955년 12월 원효로에 첫 전도관이 세워진 이래 전국에 제단이 건립됐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며 성전의 재정비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1993년 한 해 동안만 해도 마산, 김해, 여수, 나주, 서부, 경주, 소사동 등 7곳에서 성전이 새롭게 단장되었고,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성전 건축이 이어졌다. 특히 1996년 6월 23일에는 미국 워싱턴에 교회가 신축되며, LA와 뉴욕에 이어 해외에 또 하나의 진리의 등대가 세워졌다. 하나님의 신, 이슬성신 그리고 그해 11월, 신앙촌에서는 특별한 은혜의 현장이 펼쳐졌다. 1996년 11월 16일, 추수감사절 전날 밤 9시에서 10시 사이, 신앙촌 상공에 전례 없는 규모의 이슬성신이 임한 것이다. 당시 샘터공원에서는 국내외 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추수감사절 예배를 준비하며 축하 음악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바로 그때 동쪽 하늘에 찬란한 빛기둥 수십 개가 나타나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날 목격된 이슬성신은 수많은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했을 뿐 아니라 여러 대의 카메라로 생생히 촬영되었다. 당시 상황을 카메라에 담았던 장일천 관장은 “저를 포함한 촬영팀 4명이 함께 그 놀라운 광경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현장에는 신앙촌 주민은 물론,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국내외 교인들이 그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사진을 현상해 보니,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기둥 빛줄기와 더불어 각양각색의 이슬성신이 찍혀 있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신앙신보사 심광수 사장은 당시 상황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했다. “그간의 이슬성신은 주로 실내에서 목격되었지만, 그날은 야외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나타났습니다. 남녀노소, 교인과 비교인을 막론하고 모두의 눈앞에서 이슬성신의 최대 향연이 펼쳐진 것입니다. 야경 사진 촬영을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붉은 기둥이 빛을 내며 마구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우측의 죽성리에서 좌측의 학리 쪽으로도 이슬성신의 기둥들이 내리고 있었고, 제가 직접 세어본 것만 해도 70여 개에 달했습니다. 그날 밤,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신앙촌을 축복하고 계십니다’라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날 밤하늘에 임한 이슬성신을 직접 보고, 사진으로 담은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임을 실감하며 가슴 벅찬 감동을 나누었다. KODAK의 공식 감정 이렇게 기록된 사진은 보다 명확한 검증을 위해, 당시 워싱턴교회 김동훈 관장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사진 전문 기업 코닥사에 감정을 의뢰했다. 사진과 관련 자료를 접한 코닥사의 Art/Design Director인 Michael Stack은 깊은 관심을 보이며, 필름의 종류, 카메라 종류 및 렌즈 규격, 노출 시간, 촬영 방식, 촬영 환경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요청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 1월 중순, 코닥사 최고 책임자인 조지 피셔(George M.C. Fisher) 회장의 서명이 담긴 감정서가 도착했다. 피셔 회장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귀 교회가 제시한 사진은 매우 특이합니다. 정밀히 검토한 결과, 이 사진은 진실한 것으로 판단되며, 세심하게 기록된 제반 상황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카메라의 조작이 없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특히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사진은 매우 선명하고 아름답습니다.” 이어 “사진에 나타난 빛의 원인이나 근원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실히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평선 너머의 빛이 대기 중에 반사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 현상이 사실이며,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손길이 이곳에 임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라고 전했다. 편지 끝에는 다음과 같은 인사가 덧붙여졌다. “이 빛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저희가 판단할 수 없으며, 이는 그것을 직접 목격한 여러분이 스스로 결정하셔야 할 일입니다. 귀 교회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이슬성신이 세계적으로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해 과학적으로 검토되었고, 그 진위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슬성신의 은혜 이슬성신은 곧 하나님의 신을 말하며, 초창기부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집회마다 뽀얀 안개처럼, 이슬비처럼, 때로는 불덩이처럼 임해 많은 사람들이 직접 그 은혜를 체험해 왔다. 하나님께서 이슬성신으로 함께하실 때, 은혜를 받은 사람은 기쁨과 평안을 느끼며 하늘세계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고, 죄악된 삶에서 벗어나 의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밤하늘에 불기둥이 신앙촌에 내리는 것을 누구든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불기둥은 하나님의 빛이 임하는 것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만백성 앞에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셨다. 1996년 추수감사절 전야를 기점으로 신앙촌 곳곳에서 이슬성신이 자주 목격되고 촬영되었으며, 지금도 그 은혜는 계속되고 있다. 문화와 전도의 도약 1996년은 천부교 문화와 전도 활동 모두에서 전환점이 된 해였다. 그해 처음으로 전국 어린이 전도의 날이 개최되어, 초대장을 직접 만들어 나누어 주고 공연과 행사를 준비하며 전도의 기쁨을 체험했다. 이 행사를 계기로 매년 ‘전도의 날’을 정해 지속적인 전도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같은 해 11월에는 시온오케스트라가 창단되어, 오늘날까지 천부교의 다양한 음악 행사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생명물두부가 식품 허가를 받으면서 1980년대 생명물간장 출시 이후 신앙촌식품의 기반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러한 변화들은 1998년에도 계속되었다. 1956년 10월 16일 제1회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로 시작된 체육 활동은 1980년대까지 사원, 교역자, 부서별 대결과 농구선수 초청 경기 등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1998년 신앙촌 소비조합 체육대회를 계기로 다시 시작되었다. 이후 체육대회는 3년마다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신앙인들이 단합하여 기쁨과 건강을 나누는 천부교 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초창기부터 이어져 온 성신의 역사는 1990년대에도 하나님께서 이슬성신으로 함께하시며 이어졌고, 그 은혜 속에서 전도와 문화가 꽃피어 오늘날 신앙의 귀한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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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터전 신앙촌

구원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터전 신앙촌

신앙촌은 천부교 교인들이 함께 신앙을 이어가는 곳으로, 국내외 교인들에게 신앙의 성지가 되어왔다. 하나님께서는 1957년 11월 신앙촌을 건설하시며,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생활함으로써 선한 양심을 기르고 신앙을 키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신앙촌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은혜를 받고 죄를 멀리하며 더욱 깨끗한 마음으로 구원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터전이다. 1957년 소사신앙촌을 시작으로 1962년 덕소신앙촌, 1970년 기장신앙촌이 건설되었으며, 신앙의 실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생활과 경제의 기반이 되어왔다. 이번 천부교 역사 70년 특집에서는 신앙촌이 어떻게 건설되고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신앙촌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뜻을 되새기고자 한다. 구원을 향한 첫째 울타리 소사신앙촌(1957.11.) ‘신앙촌’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명명하신 것으로, 1950년대 당시 우리나라는 빈곤에 허덕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터전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공동체로 신앙촌을 건설하셨다. 주택과 생산 공장, 종교 시설을 세우시고, 교육을 중시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교육기관도 설립되었다. 이로써 신앙촌은 신앙과 경제, 교육과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자립 공동체로 성장해 나갔다. 소사신앙촌의 건설과 산업 1957년 11월,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現 부천시 범박동)에 첫 번째 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다. 소사신앙촌은 외부의 지원 없이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교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세운 첫 신앙인의 마을로, ‘건설대’로 불린 이들은 한 가족처럼 지내며 메마르고 황폐한 땅을 개척했다. 전기·급수 시설과 상점까지 갖춘 신앙촌은 정돈된 대규모 주거 환경으로 주목받으며 하루에도 수십 대의 관광 차량이 방문했다. 소사신앙촌에서는 간장, 연탄, 피아노, 플라스틱 제품 등 100여 종의 생활필수품을 생산하여 국민에게 생필품을 공급하고, 당시 낙후된 한국 산업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러한 제품들은 ‘신앙촌 소비조합’을 통해 판매되었는데, 정직한 신앙인의 손길로 만들어진 덕분에 소비자들 사이에서 ‘정직과 신용의 신앙촌 제품’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산업을 바탕으로 신앙촌은 외부의 도움 없이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소비조합은 현재까지도 신앙촌 제품을 전하는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소사신앙촌에서는 ‘주인 없는 상점’이 운영되었는데, 교인들은 물품을 구입한 후 계산대의 나무 상자에 자율적으로 값을 지불했다. 저녁에 계산을 맞춰 보면 1원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으며, 이는 신앙촌의 정직과 자율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70만 인파가 운집한 노구산 집회 1958년 6월 30일부터 7월 6일까지 소사신앙촌이 자리한 노구산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집회 기간 중 폭우가 쏟아졌으나 참석자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은혜의 창파를 이루며 집회는 끝까지 진행되었다. 이때 연 70만 명이 모이자 당시 정치계와 기성교단에서는 천부교의 급격한 성장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같은 해 10월,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오만제단 건설이 시작되었고, 1960년 초 완공되었다. 오만제단은 이후 덕소신앙촌이 설립되기 전까지 예배와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되며 신앙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신앙촌 신앙촌은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임병직 미국 대사는 “각계각층의 지도층 인물들이 신앙촌을 시찰하고 이곳의 자립정신과 공동체 운영 방식 등을 실천하여 우리나라도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했으며,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존 콜터 단장은 “이렇게 위대하게 건설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와서 보니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잘 되어 있다. 외부의 원조 없이 자발적으로 자급자족하며 이 정도로 이루어진 것은 여러분의 정신을 보여준다. 신앙촌은 앞으로 세계적인 모범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사신앙촌은 이후 덕소와 기장으로 이어지는 신앙촌 건설의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초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뢰로 성장한 덕소신앙촌(1962.7.20) 1962년 7월 20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덕소리(現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두 번째 신앙촌이 건설되었다. 서울에서 약 20km 떨어진 덕소신앙촌은 한강 주변으로 2층 양옥 주택이 그림처럼 들어서 있어 뛰어난 전망을 자랑했다. 그러나 건설 부지는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밭이라 공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개월 만에 주택과 아파트, 30여 개의 공장과 예배를 위한 종교 시설이 갖추어졌고, 소사신앙촌에서 시작된 경공업에 이어 제강·제철 등의 중공업으로 사업이 확대되며 더욱 활기를 띠었다. 또한 교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시온 제2초등학교와 시온 제2중·상업고등학교가 개교되었고, 음악과 체육이 장려되었다. 특히 시온 어린이합창단은 TV 출연, 각종 대회 수상, 레코드 제작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덕소신앙촌 운동장에서는 교단에서 주관하는 체육대회가 열리거나 신앙촌 주민들이 친선 경기를 개최하는 등 스포츠를 통한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덕소신앙촌의 건설과 산업 하나님께서는 매일 소사에서 덕소로 출퇴근하시며 새벽부터 밤까지 건설대와 함께 일하셨다. 공사 중 누군가 부상을 당하면 즉시 축복해 주셨고, 건설대원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진두지휘하시는 모습을 보며 힘을 얻어 찬송을 부르며 즐겁게 일했다. 덕소신앙촌에서는 메리야스, 양말, 수예, 양재, 편물, 담요, 타월, 비누, 화장품, 스테인리스 식기류, 기계, 전기 제품 등 생활필수품을 비롯해 제강·제철·화학 공업까지 아우르며 활발한 생산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남준 권사(기장신앙촌)는 1962년 12월 말, 하나님께서 제강 공장을 세우시며 “지금 한국에 제철 공장이 잠자고 있다. 우리가 시작하면 잠자던 자들도 깨어난다. 그래야 우리 한국 백성이 살지, 그렇지 않으면 못 산다”고 하신 말씀을 전했다. 박해정 승사(기장신앙촌)는 당시 하나님께서 “물건을 최고로 만들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신앙촌 제품이 소비자들에게 큰 신뢰를 얻었던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엑슬란 내복과 이불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소비조합원들이 줄을 서서 구매해야 할 정도였다. 덕소신앙촌 직조공장에서 근무했던 장명이 권사(제주교회)는 “신앙촌 이불의 인기가 높아 공장이 바쁘게 돌아가던 때, 전도관 교인들과 함께 신앙을 지키며 생활할 수 있어 행복했다”라고 하며 “마음속에서 샘물처럼 기쁨과 평안이 솟아나 웃으며 일했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국내외의 주목을 받은 신앙촌 건설 덕소신앙촌이 건설되자 국내외 저명인사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1963년 한 해 동안 7만 명 이상이 덕소신앙촌을 찾았다. 1963년 8월 12일 자 신앙신보에서 김기석 교수(건국대)는 신앙촌의 생산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신앙과 경제가 조화를 이룰 때 가장 건전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일하며, 제품이 사회의 신용을 얻은 것은 확실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신앙촌의 건설 자체가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라며 “사람들이 아름답게 건설된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천부교인의 신앙의 중심지 기장신앙촌(1970.2.28) 1970년 2월,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세 번째 신앙촌인 기장신앙촌이 건설되었다. 건설에는 덕소신앙촌 건설대와 각 공장에서 자원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했다. 기장신앙촌 부지는 하천과 논,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 갯벌이 많아 건설이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다. 누가 보아도 건축이 불가능해 보이는 곳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현장을 진두지휘하시며 축복해 주신 덕분에 대형 공장, 기숙사, 주택 등이 약 2년 4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김도삼 승사(기장신앙촌)는 “하나님께서 매일 새벽 덕소에서 기장으로 출퇴근하시며 먼지를 뒤집어쓰시고 흙투성이가 되신 채 우리와 함께하셨다”고 전했다. 이후 덕소신앙촌의 주요 공장들이 기장신앙촌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천부교단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1974년 7월 20일에는 탁아소가 개원해 유치원을 겸하여 운영되었으며, 1988년 3월 7일에는 시온실업고등학교가 개교해 현재는 SANC식품여자고등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합창단과 농구부 활동이 장려되었으며, 신앙촌 주민들은 체육대회를 통해 친목을 다졌다. 현재도 신앙촌에서는 합창과 체육대회가 꾸준히 열리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기장신앙촌의 산업과 성장 1970년대는 수출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기장신앙촌에서는 최신 기계 설비를 갖추고 7,000여 명의 종업원이 근무하며 다양한 산업을 운영했다. 특히, 시온합섬은 1971년 11월부터 1972년 10월 31일까지 1년간 미주, 유럽 등지에 모포와 섬유류를 수출해 ‘제9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석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1962년 덕소신앙촌에서 시작된 제강 산업은 1973년 3월 31일 기장신앙촌으로 확대되며 제강 및 압연 공장이 건설되었고, 이를 통해 철강 수출이 본격화되었다. 월간 약 3,000톤의 철강이 미국, 일본, 동남아 등으로 수출되었으며, 이는 국가 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기장신앙촌의 시온철강은 건설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부여 유스호스텔 공사, 경남 기장군 일광면 고리 원자력 발전소 공사 등에 참여했으며, 1980년 1월에는 기장 삼거리에서 죽성리를 거쳐 신앙촌 후문에 이르는 아스팔트 포장 공사를 신앙촌 자체 비용으로 완공했다. 신앙촌, 신앙과 삶이 어우러지는 터전 1970년대 초에 건설된 기장신앙촌은 국내외 천부교인들에게 신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해 왔다. 현재 소사신앙촌과 덕소신앙촌이 재개발됨에 따라 ‘신앙촌’이라는 명칭은 기장신앙촌을 가리킨다. 신앙촌에서는 매월 축복일뿐만 아니라 5월 이슬성신절과 11월 추수감사절이 되면 수많은 천부교인들이 신앙촌에 모여 한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되새긴다. 또한, 신앙촌에서는 침구를 비롯해 두부, 요구르트 런, 장유 등 정직한 양심으로 만든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어 고객과 견학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초창기 전국 순회 집회와 방방곡곡에 세워진 전도관을 다니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움을 이루어 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시고자 신앙촌을 세워 주셨다. 마치 작은 숯불들이 모여 거대한 불길이 되듯, 신앙촌 건설을 통해 개인은 물론 단체와 국가, 나아가 온 인류가 바른 양심을 지키고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신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20년을 달려온 요구르트 ‘런’

20년을 달려온 요구르트 ‘런’

천부교 70년 특집

70년 전통의 신앙촌식품에서 만든 런(Run), 천혜의 자연 환경과 신앙인의 양심으로 출시 이후 20년간 칼로리 낮춘 무지방 발효유로 국민 건강 지켜 2000년대 초반, 우리 사회에는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웰빙 열풍이 불었다. 당시 사회 전반에 인스턴트식품과 고지방 식단의 열풍이 불며, 안전하면서도 균형 잡힌 먹거리를 찾는 소비자의 요구 또한 커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신앙촌식품은 발효유 분야에 새로운 도전을 […]

음악을 통해 은혜 주신 하나님

음악을 통해 은혜 주신 하나님

천부교 70년 특집

1980년대 시온합창단의 발자취 하나님의 은혜 속에 울려 퍼진 대합창, 신앙의 씨앗이 되다 1980년대는 하나님께서 감람나무로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밝히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신 시기였다. 특히 그 중심에는 ‘음악’이 있었다. 초창기부터 음악을 장려하시며 전도의 장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합창을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의 길로 이끄시고자 하셨다. 그 뜻에 따라 1969년 5월 창단된 시온합창단은 […]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

천부교 70년 특집

감람나무를 증거하시기 위해 내려주신 은혜 1955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이슬 같은 은혜와 향취를 내려 주심으로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하셨다. 이 모든 은혜는 감람나무를 증거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수가 수백만에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내가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고 향기를 내리는 감람나무”라고 말씀하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제 […]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감람나무 하나님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감람나무 하나님

천부교 70년 특집

1956년부터 1957년까지 천부교는 전국적인 부흥과 함께 생명물의 권능이 나타난 시기였다. 하나님께서는 생명물을 축복해 주시며 사람들에게 직접 은혜를 체험하게 하셨고, 전국 각지의 집회 현장에서는 성신의 역사와 기적이 이어졌다. 그럴수록 기성교회의 방해는 거세졌으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더욱 굳건한 신앙을 지켜 나갔다. 그리고 1957년, 천부교 최초의 대형 교회인 이만제단이 완공되며 천부교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번 호에서는 그동안의 체험기 […]

하나님 집회에서 수백만이 은혜 입어

하나님 집회에서 수백만이 은혜 입어

천부교 70년 특집

70년 전,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과 크신 은혜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슬 같은 은혜로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며 내려주신 그 은혜는 인간에게 천국의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특집 기사에서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의 순간들을 되새기며, 그 속에서 펼쳐진 놀라운 역사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955. 1.1. 하나님 초청집회 ■ 하나님 초청집회에서 시작된 은혜 1955년 1월 1일부터 […]

성전 신축을 가능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와 영광 돌려

성전 신축을 가능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와 영광 돌려

서면교회 신축 예배

서면교회 신축을 담당한 강경민 여성회 관장은 “성전 신축을 가능하게 해주신 권능과 사랑의 하나님께 깊은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라며 감사함을 전했다. 성전 신축은 어느 곳에서나 쉽지 않지만, 서면교회 신축은 그 어느 곳보다 어려운 과정이 많았다. 여러 차례에 걸친 임시 제단 이전과 새로운 부지의 입지 문제, 처음으로 건축을 담당하게 된 상황 등 하나부터 열까지 쉽지 않은 여건이었다. 그러나 […]

전도와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

전도와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

서면교회 신축 예배

하나님 은혜 속에 성장한 부산2중앙, 새로운 성전에서 귀한 결실 맺기를 다함께 기도해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시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희망과 감동의 시간 전도와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 1980~90년대 부산2중앙에는 학생회 전도가 활발했다. 당시 서면교회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허경숙 씨(신앙촌 여청)는 친구의 전도로 부산2중앙에 오게 되었고, 중학생 시절 강경민 관장(서면교회)을 전도했다. 고등학생이던 최윤원 씨(신앙촌 여청)도 […]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 그랜드피아노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 그랜드피아노

서면교회 신축 예배

그랜드피아노 부산2중앙은 하나님께 특별한 선물을 받은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그 선물은 바로 부산2중앙 하면 떠오르는, 그랜드피아노다. “저희가 학교에 간 사이, 하나님께서 평일 낮 시간에 갑작스럽게 2중앙을 방문하셨다고 해요. 제단을 둘러보시며 축복해 주셨는데, 그때 제단에 있던 피아노가 조금 낡은 일반 피아노였어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가신 후 그랜드피아노를 2중앙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시절 그랜드피아노는 부유한 집에서나 볼 수 […]

은혜로 키워주신 제단

은혜로 키워주신 제단

서면교회 신축 예배

1959년 부산 서면에 세워진 서면전도관은 1969년 덕소교회를 모델로 한 웅장한 제단으로 새롭게 지어졌다. 일요일 예배 때마다 2층까지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청년회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전국에 많은 전도관이 생겨나면서 규모가 큰 전도관에는 본관을 중심으로 지관이 여럿 있었다. 부산에서도 몇 개의 본관이 있었는데, 그 중 제2본관을 ‘부산2중앙’이라고도 불렀다. 부산2중앙 서면교회는 1980년대에 여성회 교회로 […]

천부교 구원의 역사, 그 놀라운 은혜의 기록들

천부교 구원의 역사, 그 놀라운 은혜의 기록들

<신앙체험기 500회 리서치>

1994년 1월 ‘박혜정 승사 편’을 시작으로 신앙신보에 꾸준히 게재되어 온 ‘신앙체험기’가 어느덧 500회를 맞이하였습니다. 신앙체험기는 초창기 집회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귀한 은혜의 체험을 싣고 있습니다. 이슬처럼 내리는 성신, 향기로운 향취 은혜, 놀라운 생명물의 권능, 마음에 넘치는 은혜의 기쁨. 그 귀한 체험을 들려주신 모든 분들께 이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시간을 내어 ‘신앙체험기 500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