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은혜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려”

“은혜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려”

(지난호에 이어) 당시 저는 전도관에 있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해서 예배시간이 되기도 전에 예배실에 가 있었습니다. 예배실에 가면 저처럼 먼저 온 사람들끼리 모여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는 예배실 안에 이슬비 또는 소낙비처럼 이슬성신이 내렸습니다. 분명 비처럼 보이는데 바닥은 물론 옷도 전혀 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슬성신이 내리고 얼마 뒤에는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예배실로 들어오셨기에, 저는 이슬성신이 내리면 ‘하나님께서 오실 시간이 됐나보다’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에 저는 결혼을 하고 서울 봉천동으로 이사를 갔고, 아이를 낳으면서 두 해쯤 교회를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어디 전도관에 다니시느냐고 여쭈니 봉천전도관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전도관의 위치를 물었고, 그 길로 봉전전도관을 찾아가 다시 신앙생활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1976년에는 친정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어머니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이제 내가 늙어서 죽을 텐데 무서워서 어떡하니?”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라고 말씀드리며 교회에 함께 가보자고 권했습니다. 어머니는 알겠다 하시며 몇 달간 저와 함께 전도관에 다니다가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입관예배 때 전도관 식구들이 하나님께 축복받은 비누를 가져오셨고, 비누를 물에 풀어서 어머니를 깨끗이 씻어드렸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다시 뵌 어머니는 얼굴이 뽀얗게 피어 주무시는 듯 편안해 보였습니다. 친척 오빠는 어머니의 얼굴이 너무나 보기 좋다며 여러 번 감탄하며 이야기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저는 안양으로 이사하였고, 그때부터 신앙촌 제품을 판매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밍크 이불과 빨랫비누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욕은 있었지만 제품을 판매해본 경험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도 되었습니다. 그때 신기하게도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이 잇따랐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제가 빨랫비누를 유달리 많이 가져온 날이 있었는데, 그걸 보신 옆집 아저씨가 선뜻 나서서 대신 판매해 주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는 리어카에 비누를 싣고 가시더니 그 많은 비누를 모두 판매해 주셨습니다. 얼마 뒤에는 앞집 아기 엄마가 비누에 흥미를 보이더니 바구니에 비누를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모두 판매해 준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신앙촌 제품에 관심을 갖고 도와주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큰 힘을 얻었고, 연이어 완판되는 비누를 보며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소비조합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소비조합으로 활동하는 동안 좋은 품질의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꼈고, 신앙촌을 신뢰해 주시는 고객을 만나면 그렇게 기쁘고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일하는 매 순간이 보람되고 감사함으로 가득했던 시간이었습니다. 1980년 4월 5일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는 구원을 줄 수 없는 존재임을 밝히셨고, 1981년 1월 3일에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의문이 단번에 풀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성경 속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두 딸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은 롯이 어떻게 의인이라 불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와 성경의 거짓을 밝히시니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했습니다. 또한 전도관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이 놀라운 은혜의 권능을 체험하고 증거했기에, 은혜를 내리시는 분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기장신앙촌에 안수를 받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안수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고, 저 역시 한참을 기다린 끝에 안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안수를 받으니 진한 향취가 맡아지기 시작했고,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도 향취가 가득했습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계속 이어지는 향취를 맡으면서 저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가슴에 깊이 새길 수 있었습니다. 1983년 무렵, 하나님께서 소사신앙촌을 방문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첫째 딸과 둘째 딸을 데리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실 맨 앞자리에 아이들을 앉혀놓고 저는 뒤편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아이들이 저한테 와서 하는 말이 “엄마, 하나님께서 비를 맞고 계신데 어떻게 아무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뜻을 알 수 없어 다시 물어보니, 아이들이 말하길 천장에서 물이 새는지 소낙비가 계속 쏟아져서 예배드리는 내내 하나님께서 비를 맞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같이 예배를 드렸지만 예배실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단상 주변을 둘러봐도 바닥에 물이 고인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아이들이 본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너희가 본 것이 바로 이슬성신이란다.” 하고 알려주자, 두 아이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자신들이 은혜를 받은 것을 알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예배실 가득 내리시던 하나님의 이슬 같은 은혜 소낙비처럼 쏟아져도 옷도 바닥도 젖지 않아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한 두 딸아이도 체험하게 돼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저의 첫째 딸은 일곱 살에 신장염에 걸린 뒤로 몸이 계속 아파서 입퇴원을 반복하느라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은 복수까지 차오르는 모습을 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이를 데리고 축복을 받으러 기장신앙촌에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딸에게 쉭쉭 축복을 해주시는데, 손에서 뽀얀 것이 나와 딸에게 향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무척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아이는 안수를 받은 이후로 차츰 건강을 회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토록 걱정하던 큰딸의 건강이 좋아지자 저는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낙원에 가신 뒤의 일입니다. 소사신앙촌에 사시는 권사님께서 안양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하시길, 남동생이 안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입관예배를 드려줄 수 없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남동생이 천부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우리식으로 입관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하셔서 저희가 입관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영안실에서 본 고인의 모습은 피부색이 검게 변해있고, 몸도 뻣뻣하게 굳어있어서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잠시 후 남자 장례반 권사님들이 오셔서 고인을 씻겨드리는 동안 저희는 밖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입관 예배를 마치고 나니 고인의 얼굴이 좀 전과 달리 뽀얗게 피어 무척 편안해 보였습니다. 장례반 권사님들 말로는 축복 비누를 물에 풀고, 그 물을 수건에 묻혀 고인의 다리부터 닦아드렸는데, 수건이 지나간 자리의 피부가 하얗게 변했다고 했습니다. 마치 검은 도화지에 흰 물감을 묻힌 붓이 지나간 것처럼 확연히 차이가 나서 너무나 놀라웠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렇게 뻣뻣하던 고인의 몸이 부드러워져서 앉힌 채로 수의를 입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례반 권사님들 옆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본 영안실 직원도 매우 놀라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이외에도 입관예배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권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얼굴에 가루분을 바른 것처럼 뽀얗게 피어났고, 또 어떤 분은 콧등에 이슬이 송골송골 맺히기도 했습니다. 저는 입관예배에서 경험하는 성신의 역사 앞에서 매번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부교 식으로 입관예배를 드린 후 뽀얗게 피어나는 고인의 모습 볼 때마다 놀라우신 성신의 역사에 경이로움 느껴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지금까지 이 길을 따라왔지만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니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사는 자유가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알기에 앞으로도 자유율법을 지키며 은혜를 간직하기 위해 힘쓰고자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 말씀대로 저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이 길을 따라갈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신앙체험기
이슬 같은 은혜를 받으니 그 은혜를 계속 간구하게 돼

이슬 같은 은혜를 받으니 그 은혜를 계속 간구하게 돼

예배실에서 기도드리던 중 백합꽃 향기 같으면서도 산뜻하고 시원한 향 맡아져 향취 은혜임을 깨닫게 돼 노구산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할 정도로 이슬 같은 은혜가 집회장에 자욱이 퍼져 반사 활동 당시 예배실에 들어갔는데 박하사탕처럼 시원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고 가슴 속이 시원해지며 처음 맛 보는 기쁨이 솟아나 저는 1941년생으로 경기도 오산에서 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살던 집 바로 옆에는 앞마당이 유난히 넓은 감리교회가 있었고, 저는 그 마당을 놀이터 삼아 하루가 멀다하고 뛰어놀았습니다. 매일 앞마당에서 노는 저를 본 교회 선생님이 1년 동안 일요일 예배에 빠지지 않으면 연필과 노트를 준다고 하셔서 그 말에 혹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는 제 또래가 많이 있었고, 친구들을 사귀고 어울려 노는 재미에 푹 빠져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다 열 살 무렵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홀로 생계를 책임지시던 어머니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제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저희 남매를 데리고 서울 영등포로 이사하셨습니다. 이제 막 군에서 제대한 큰오빠도 어머니를 도와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지만,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입이었기에 저는 등록금 문제로 학교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게 되니 새로 이사한 낯선 동네에서 친구도 없이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찬송을 부르며 지나가는 언니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저도 그 찬송가 알아요. 언니들은 어느 교회에 다니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언니들은 박태선 장로님이 세우신 전도관에 다니고 있다며, 이만 명이 들어가는 큰 제단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전도관이라는 이름은 낯설었지만, 교회에 다닐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저는 언니들에게 교회에 꼭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서 그 주 일요일에 이만제단에 가게 되었습니다. 전차를 타고 노량진역에서 내린 뒤 한강 다리를 건너 도착한 이만제단의 풍경은 무척 놀라웠습니다. 이만제단에 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고, 건물 안에 들어가니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무척 넓은 공간이었음에도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뒷사람의 무릎을 깔고 앉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예배에서 저는 처음으로 “죄를 씻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리교회에 꽤 오래 다녔지만 죄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기에 그 말씀이 매우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단순히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여겨온 저는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씻어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만제단에 다녀온 뒤로 저는 집과 가까운 영등포 갑구 전도관을 찾아갔고, 얼마 뒤에는 새벽예배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기도를 드렸는데, 제 기도의 제목은 언제나 ‘저의 죄를 씻어주세요’였습니다. 그렇게 매일 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 예배를 드리던 중 코끝에 향기로운 냄새가 맡아졌습니다. 백합꽃 향기 같으면서도 더 진하고, 동시에 산뜻하고 시원해서 말로 다할 수 없이 좋은 냄새였습니다. 계속 그 향기를 맡으니 몸이 매우 가벼워져서 몸의 무게가 아예 사라진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은혜 받은 것이라 했는데 생전 처음 겪어보는 신기한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평일과 새벽에는 영등포 전도관에서, 주말에는 이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이만제단에는 하나님께 안찰을 받고 병을 고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병자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한명 한명 빠짐없이 안수해주셨고, 안수를 마치신 후 병이 나은 사람들은 일어나라고 외치시면,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자신의 병이 나았다고 증거했습니다. 이만제단에 다니며 또 한 가지 신기했던 것은 예배실에 사람들과 병자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있어도 구린내는커녕 향취가 진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머리카락 타는 듯한 냄새가 맡아지기도 했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제가 무언가 타는 냄새가 난다고 말하니 주변에서 그것이 바로 죄가 타는 냄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루는 이유도 없이 이가 몹시 아픈 것이었습니다. 치통은 며칠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져서 밤잠을 못 이룰 정도였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병원에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전도관에 같이 다니던 친구에게 이 사실을 말하니, 구역장을 맡고 계신 권사님 댁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권사님은 갑자기 찾아온 저희를 따뜻하게 반겨주셨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생명물 한 컵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생명물을 마시는 순간 참을 수 없던 치통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다시는 이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권능을 직접 겪어보니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1957년 말에는 소사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는 교인 오만명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일명 오만제단이 지어질 예정이었고, 그 신축 부지가 있던 노구산에서 집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저도 노구산 집회에 참석했었는데 그날 이슬 같은 은혜가 구름처럼 집회장에 자욱이 깔렸던 기억이 납니다. 어찌나 은혜가 많이 내렸던지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할 정도였습니다. 오만제단의 신축 공사가 시작됐을 때 저와 친구들은 공사를 돕고 싶은 마음에 시간만 있으면 소사로 가서 질통에 흙을 퍼담아 나르며 기쁘게 일손을 거들었습니다. 완공된 뒤에는 집에서 거리가 멀었음에도 일부러 오만제단까지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소사신앙촌은 걸어 다니기만 해도 백합꽃 향기 같은 진한 향취가 맡아졌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오만제단에서 하나님께 안수를 받았는데, 입안에서 참기름처럼 고소한 것이 목으로 꿀꺽꿀꺽 넘어갔습니다. 누가 제 코앞에서 참기름 병을 연 것도 아니고, 참기름을 입에 넣어준 것도 아닌데 고소한 맛이 나니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심지어 모든 예배가 끝나고 친구와 밥을 먹을 때까지도 계속 고소함이 느껴져서 “목으로 고소한 것이 넘어가지 않니?”하고 물으니, 친구도 깜짝 놀라며 본인도 그렇다며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은혜를 받을 때 고소한 향을 느끼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직접 체험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하나님께 더 많이 안수를 받고 싶었습니다. 마침 주일학교 반사들은 하나님께서 안찰을 해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곧장 반사에 지원했습니다. 반사가 된 뒤에는 아이들을 챙기고 말씀 공부를 가르치느라 하루가 더욱 바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 먼저 예배실에 들여보내고 가장 마지막으로 예배실에 들어갔는데, 그 순간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아주 시원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시원함과 그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은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예배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