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려”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려”

저는 1941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교회에 다녔는데, 학교 친구가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같이 가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처음 다녔던 교회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 곳이었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교인들은 목사파와 장로파로 나뉘어져 말 그대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습니다. 급기야 예배 중이던 목사를 단에서 끌어내리고 장로가 대신 예배를 인도하거나, 몸싸움 끝에 목사가 부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가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어른들의 싸움을 보는 것이 너무 싫었던 저는 결국 다른 교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을 깊이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교회를 계속 다닌 이유는 커가면서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와 같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그 답을 교회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밤새워 기도하며 울어도, 여러 종류의 책을 읽어 봐도 좀처럼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저는 친구네 집에서 저녁을 먹고 함께 시험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친구 집까지 가려면 큰길을 한참 돌아가야 했지만,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인적이 드문 논길을 가로지르기로 했습니다. 고요한 논둑을 걸으며 선선한 바람과 밝은 달빛 속에서 찬송이 절로 흘러나왔고, 혼자 찬송을 부르며 평온하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뒷목이 서늘해지며 오싹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바로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돈을 내놓으라고 했고, 제가 없다고 하자마자 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없이 맞으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람들이 달려왔고 남자는 황급히 도망쳤습니다. 사람들은 쓰러진 저를 부축해 주며 “학생, 큰일 날 뻔했어. 우리는 항상 큰길로 다니는데 오늘따라 논길로 가고 싶더라고. 그런데 논길을 가다 보니 어디선가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서 급히 달려온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친구네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친구 집에 도착한 저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눈을 떠 보니 입술이 터져 피딱지가 앉아 있고, 옷은 찢어져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그렇게 절실히 느낀 적은 없었는데, 그날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감사헌금을 드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집에 돌아가 제가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금액을 모아 교회에 정성껏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헌금을 한 이후부터 원래 다니던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그때부터는 교회에 가지 않고 집 앞에 헛간에서 혼자 찬송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헛간에서 간절히 기도를 드리면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악종 찬송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종소리에 맞춰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하는 찬송을 부르면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혼자 기도를 드린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학교를 가는데 어디선가 혼자 기도할 때 들었던 음악종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 언덕 위에 지어진 진주전도관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쉬지도 않고 언덕을 올라갔는데 놀랍게도 전도관은 아직 건물을 짓기 전이라 임시로 천막만 쳐놓은 상태였고, 당연히 음악종도 없었습니다. 그 신기한 경험에 이끌려 저는 그 주 일요일부터 전도관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58년이었습니다. 진주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저는 전도사님을 따라 심방도 다니고, 반사활동도 시작했습니다. 특히 전도사님이 들려주시는 교인들의 은혜 체험담이 너무 재미있고 신기했는데, 어느 날 저도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처럼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코 끝에서 너무 맛있는 냄새가 맡아졌습니다. 얼마나 좋은 냄새던지 마치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듯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교회와 가까운 식당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는데, 조금 지나자 이번에는 백합꽃 향기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배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가 교회 주변에 식당이나 꽃밭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근처에 식당은커녕 변변한 가게도 없었고, 꽃밭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제가 맡은 것이 전도사님이 말씀하셨던 향취 은혜임을 깨달았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마음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전도사님의 아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기가 무척 귀여워서 저도 많이 예뻐했었는데 1년도 채 살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전도사님은 아기가 하나님의 은혜로 잘 피었으니 제단에 와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가보니 아이가 있는 방에는 백합꽃 향기 같은 향취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아기는 천사처럼 고운 모습으로 누워있었고, 죽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얼굴은 뽀얗고 입술은 장밋빛을 띄고 있었습니다. 감은 두눈은 생긋이 웃고 있어서 도저히 죽었다고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이를 안아 올리려고 하자 전도사님은 죽은 아기이니 안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니예요. 이렇게 웃고 있는데요?”라고 말했지만 전도사님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아이의 얼굴에 이슬방울이 맺히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사님께서는 그것이 이슬 같은 은혜라고 하셨고, 수건으로 닦아도 이슬방울은 계속 맺혔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아기의 모습을 본 어떤 분이 “저는 평생 부처님을 모시고 절까지 지을 만큼 열심히 불교를 믿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합니다. 저 역시 큰 감동을 받았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입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 번은 방과 후 교회에 갔더니 전도사님이 나갈 채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권사님 한 분이 긴 병환 끝에 돌아가셔서 가봐야 한다고 하시길래 입관예배가 궁금했던 저는 얼른 따라나섰습니다. 도착해보니 전도관 교인들이 미리 와 있었고, 전도사님이 입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권사님이 계신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지독한 썩은 내가 훅 풍기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그만 “악!” 소리를 내며 코를 움켜쥐었습니다. 전에 아름답게 피어났던 어린 아기의 시신밖에 본 적이 없었던 저는 사람이 죽으면 그토록 심한 악취가 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어른들은 어린 제가 놀랐을까봐 걱정하며 나중에 들어오라고 하셨지만, 저는 시신이 변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서 두려움을 억누르고 예배에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돌아가신 권사님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 정말 무서웠습니다. 병으로 한 달 넘게 아무것도 드시지 못해 뼈만 남은 몸은 해골처럼 앙상했고, 눈은 움푹 들어가고 입술마저 창백했습니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은 생명이 다했음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전도사님은 권사님 입에 생명물을 넣어드리고, 생명물을 묻힌 수건으로 몸을 정성껏 닦으셨습니다. 교인들은 고인을 위해 방 안에 둘러 앉아 찬송을 부르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방안의 공기가 바뀌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코를 찌르던 썩은 내가 사라지고 백합꽃의 진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고개를 들어 권사님을 보니 뼈만 남았던 얼굴에 살이 오르고, 입술도 붉게 물들어서 처음의 무서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잠든 듯 편안히 누워 계시는 권사님을 보니 제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권능이 이곳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후로 새벽예배도 꾸준히 참석하며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전도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부산 광안전도관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친구들은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평소 멀미가 심했던 저는 버스를 타는 것이 걱정됐지만, 하나님을 뵙고 싶다는 마음은 그보다 더 컸기에 용기 내어 차에 올랐습니다. 광안전도관에 가니 하나님께서는 진주에서 학생 반사들이 왔다고 특별히 안찰도 해주셨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눈 안찰을 받는데 눈알이 빠지는 것 같았고, 배 안찰을 받을 때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은 아픔이 몰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손만 살짝 갖다 대시는 것 같은데 왜 그리 아픈지 의문이었습니다. 아픔이 서서히 가실 때 쯤 하나님께서 “일 열심히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찰을 받고 나니 마음이 너무나 편안해졌습니다.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도 의자에 앉아있는 게 아니라 하늘에 둥둥 떠있는 것 같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내내 “주 하나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니”하는 찬송이 입에서 계속 흘러나왔고,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세상 모든 것이 얼마나 조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던지 마음의 천국을 이뤘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토록 심했던 멀미가 사라진 것입니다. 부산에 갈 때까지만 해도 멀미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서 버스 타는 것이 고생스러웠는데 집에 갈 때는 버스에서 노래까지 흥얼거릴 정도로 속이 편안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평생 멀미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신앙체험기
“은혜로 가르쳐주신 구원의 길,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은혜로 가르쳐주신 구원의 길,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1944년 전라남도 영광군 단주리에서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저는 12살이 됐을 무렵 처음으로 전도관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네의 큰 도로가에 오막살이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머물고 있는 그곳에서는 주일마다 찬송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곳은 영광전도관의 전신이었습니다. 아직 영광에 전도관이 생기기 전이라 전도활동 차원에서 임시로 집을 빌려 대학생 반사가 와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저와 친구들은 주말마다 찬송소리가 들리는 그 집 마당에서 줄넘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놀았습니다. 가끔씩은 방 앞까지 가서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찬송하는 모습을 몰래 보며 킬킬대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웃는 소리를 듣고 반사 선생님이 문을 활짝 열고 나와 저희에게 같이 찬송을 부르자고 하면, 저희는 ‘와-’ 하며 멀리 도망갔다가 다시 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짓궂은 장난에도 화 한번 내지 않던 선생님에게 저와 친구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저의 첫째 오빠가 오막살이 전도관에 다니면서부터 저희도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몇 없던 전도관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 수십 명이 되면서 영광읍에도 전도사님이 정식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교인들은 뜻을 모아 오막살이 대신 제대로 된 전도관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교인들은 건축 자금을 마련하고자 땅을 빌려 수박을 심어서 팔았습니다. 정성껏 키운 수박들의 크기가 유달리 커서 시장에 가면 좋은 값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수박을 키우는 한편으로는 공사에 쓰일 흙벽돌을 만들었습니다. 진흙과 볏짚을 잘 반죽하여 만들면 단단한 벽돌이 되었고, 나중에 그 벽돌을 사용해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교인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작지만 뜻 깊은 영광전도관이 완성되었습니다. 한 번은 저희 어머니께서 엄지손가락을 다치신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는지 병원에도 가지 않으시고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 결국 상처가 덧나 심각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뒤늦게 병원에 가보니 의사가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라며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전도사님은 매일같이 저희집에 찾아와 어머니의 손가락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캐러멜을 녹여서 발라주고, 축복솜으로 환부를 감싸주셨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 어머니의 손가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히 나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어머니의 손가락은 상처가 심해 쉽게 나을 것 같지 않았는데 축복 캐러멜과 솜으로 깨끗하게 회복되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신기한 일이라며 무척 고마워하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같은 동네에 살던 절친한 언니(故조연주 권사, 신앙체험기 335회)가 한 명 있었는데, 기성교회에서 성가대를 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저는 언니를 전도하고 싶었지만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던 언니는 쉽사리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냇가에서 같이 빨래를 하다가 제가 전도관이 참 길이라고 말하면, 언니는 장로교회가 진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회가 진짜라며 펄쩍 뛰던 연주언니도 전도관에서 사람들이 체험한 은혜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언니는 좀처럼 전도관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그렇게 빨래는 안하고 토론만 하는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저는 안 되겠다 싶어 언니에게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마침 광주전도관에서 집회가 열린다고 하여 언니를 설득해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집회장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예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헐레벌떡 예배실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는데 옆을 보니 언니가 고개를 숙이고 계속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배가 끝나면 박 장로님께서 떠나실 것이 걱정되어서 “연주언니, 잠깐만 고개 들고 박 장로님 좀 봐봐” 하면서 말을 거는데 그 순간 향취가 제 코를 스쳐 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진하고 좋은 향이어서 언니도 향기를 맡았냐고 묻자 연주언니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언니도 향취 은혜를 받았다는 말에 “거봐! 하나님께서 전도관이 참 길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신다니까!” 하고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연주언니는 집회에서 깨달음을 얻었는지 그날 이후로 장로교회에 완전히 발길을 끊고 소사와 덕소신앙촌을 거쳐 기장신앙촌까지 입주하며 흔들림 없는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친한 언니와 함께 광주전도관 집회에 찾아간 날 너무나 진한 향취를 맡게 돼 돌아가신 첫째 오빠가 생명물로 아름답게 피어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라 오빠의 장례식 이후 전도관에 다니게 된 사람도 있어 하나님께 안찰을 받고 나오니 얼굴이 배꽃같이 하얘지고 몸이 하늘로 둥둥 뜨는 듯 해 은혜로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 그 후 광주로 이사 간 저는 광주전도관에 다녔습니다. 광주에서는 백화점 총책임자로 일하는 큰오빠의 일을 도와주며 틈틈이 신앙촌 간장을 팔았습니다. 나무로 만든 커다란 간장통을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팔러 다녔는데, 맛 좋은 신앙촌간장은 그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때 단골이 된 손님들이 지금까지도 신앙촌상회에서 간장을 구입하며 소중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1974년에는 큰 오빠가 물에 빠져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전남 여수로 야유회를 간 오빠는 오동도로 가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비가 많이 내려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 다리를 건너기 어렵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직 다리를 건너지 않은 직원들은 안전한 육지로 대피했고, 이미 다리를 건너는 중이던 직원들은 다시 육지로 되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책임자였던 오빠는 거친 비바람 속에서 직원들을 한 명 한 명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모든 직원들이 안전하게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집채만 한 파도가 오빠를 덮쳤고, 직원들을 데리고 오느라 힘이 빠진 오빠는 결국 파도에 휩쓸려 변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궂은 날씨 때문에 오빠를 바로 건질 수 없는 상황이어서 하루가 지나서야 오빠의 시신이 인양되었습니다. 비보를 듣고 급하게 달려간 장례식장에서 보게 된 오빠는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준비해 간 생명물을 수건에 묻혀 오빠의 이마를 닦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계속 흐르던 피가 곧바로 멈췄습니다. 이어 광주전도관 전도사님이 입관예배를 진행해 주셨는데 예배가 끝나고 나니 오빠가 어찌나 환하고 편안해 보이던지 꼭 단잠을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환하게 핀 오빠의 모습에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특히 기성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앞으로는 저집 식구들이 다니는 전도관을 다녀야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오빠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 몇몇은 생명물의 권능에 감화되어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기장신앙촌에서 하나님께 안찰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안찰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이 참 곱구나”하고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안찰을 받고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몸이 둥둥 뜨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땅을 딛고 걷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공중을 걷는 듯했습니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걸어 나오는데, 저를 본 사람들이 ‘어머!’ 하면서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리둥절해하니 주변 사람들이 말하길 제 얼굴이 배꽃처럼 너무나 하얗고 예쁘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얼굴이 피어나 예뻐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나 같은 죄인에게도 은혜를 주셨구나’ 하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은 유수와도 같아서 처음 전도관에 다니며 하나님을 깨달은 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영광전도관에 다니던 시절 눈이 많이 오면 혹여나 넘어질세라 등에 업고 다니던 어린 동생(주미자 권사, 서동교회)은 장성하여 소비조합원이자 든든한 신앙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은혜로 보호하시며 진리의 등대가 되어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죄 짓지 말고 그 세계에 꼭 같이 가자’ 하셨던 말씀대로 맑고 선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오늘도 온 마음을 다해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