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 보는 신앙체험기
성신의 역사 속에서 깨달은 은혜와 확신

성신의 역사 속에서 깨달은 은혜와 확신

저는 1936년 전북 전주시 우아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장로교회에 나가다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출판에 관계되는 일을 보면서 여러 부흥집회에 다녀봤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굳은 확신이 서지 않아 늘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때 교계에서는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를 통해 성신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저는 귀가 번쩍 뜨이면서, 장로님을 직접 만나 뵈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으며 서둘러 서울로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수소문 끝에 원효로에 큰 집회 장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원효로에 가보니 바닥이 마루로 된 큼직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원효로 구제단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안찰부터 받으라 하셨습니다. 눈 안찰 후 배 안찰을 받을 때 하나님의 손이 배에 닿는 순간 뱃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시원한 물이 뱃속에서 계속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희한한 체험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음은 한없이 편안해졌으며 기쁨은 물밀듯 넘쳤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성신의 역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곳을 떠나면 안 되겠다고 생각되어 전주로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계속 서울에 있으면서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신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소문 듣고 찾아간 곳 원효로 전도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용산구 청암동에 이만제단 건립 하나님께 처음 안찰 받은 후 그 자리에서 성신의 역사 확신해 당시 예배 시간에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몰려왔던지 제단 안에는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어서 밖에서 예배 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안 되겠구나. 우리도 더욱 큰 제단을 짓자.’ 그렇게 해서 용산구 청암동,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새로 이만제단을 짓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로 하고 생수빵(생명물로 만든 빵)을 공급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힘든 줄 몰랐으며 입에서는 하루 종일 찬송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 힘이 솟고 또 솟았습니다. 이만제단이 완공되는 시점에 저는 주일학교 반사와 특별전도대원으로 있으면서 전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따라 ‘무더기 심방’도 하고 북을 치며 노방전도도 하였습니다. 당시 이만제단에는 어찌나 많은 사람이 모였던지 일요일 대예배 때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전도관’ 하면 서울에 사는 사람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붕에는 ‘서울중앙전도관’이라는 대형 간판이 밤새 번쩍였으며,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형 음악종이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습니다. 새벽이면 강 건너 영등포 구로동까지, 강북에서는 북악산까지 들리는 정도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음악 소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감동을 주었는데, 심지어 한강에 자살하러 나왔던 사람이 그 종소리를 듣고 마음을 돌이킨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1957년 11월 3일, 저는 경북 경산에 개척 전도사로 발령받았습니다. 당시 개척 전도사라고 하면 교인 한 사람도 없는 곳에 발령받기가 일쑤였습니다. 의지할 곳도 기댈 데도 없는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 믿고 움직이다 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제단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경산 역시 제단 건물이 없고 임시로 천막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제단에 하나님께서 한 달에 한 번씩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 중에는 난치병인 나병으로 고생하던 과수원집 남매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임시로 지은 제단에 나와 은혜를 받고 부산 대신동 집회, 밀양제단 집회 등을 따라다니며 하나님께 안수와 안찰을 받은 후, 나병이 완전히 나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신기한 기적을 본 마을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제단으로 몰려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자초지종을 묻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제단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경산 장로교회 김무생 목사와 그의 딸 김신희(초등학교 교사), 그리고 그녀의 친구 이은경 선생은 제단에 열심히 나오는 분이었습니다. 김 목사의 딸과 이은경 선생은 당시 폐결핵 3기였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순회집회 때 안찰을 받고 씻은 듯이 나아 온 동네가 다시 한번 떠들썩했습니다. 이런 기적이 잇따르자 70평 되는 천막 제단이 좁을 정도로 사람들이 불어났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경산에도 새 제단이 번듯하게 지어졌습니다. 개척 전도사 시절 하나님만 믿고 움직였을 때 신기한 일 체험 나병, 폐질환 환자 안찰 받고 완치되어 많은 사람 전도돼 당시 이런 기적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따르는 수가 수백만도 넘었습니다. 생명물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안수 한 번이라도 받은 사람들까지 수를 헤아리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제단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다 보니 사람들의 화제는 온통 ‘전도관’이었고, 심지어 기성교회 교인들이 다니고 있던 교회에는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전도관으로 몰려오자 그들은 교인이 없어 할 수 없이 교회 문을 닫는 일도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전도관,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관 사람들, 세상은 온통 전도관 천지인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소사신앙촌이 건설되어 전국 각지에서 은혜받은 사람들이 속속 입주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기성교회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이단이라고 매도하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일을 연결시켜 모략과 중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문과 방송들도 사실에 대한 확인도 없이 일방적인 보도만 계속했습니다. 화제의 중심은 온통 ‘전도관’ 기성교회 발길 끊고 전도관으로 모여들자 모략중상 이어져 일이 이렇게 되자 기성교단과 밀착되어 있던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급기야 하나님을 영어의 몸이 되게 하였습니다. (1997. 8. 17. 신앙신보 게재)

신앙체험기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려”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려”

(지난 호에 이어) 그 후로 저는 하나님께서 “일 열심히 해”라고 하셨던 말씀을 잊지 않고 반사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진주전도관에는 주일학생이 무척 많아서 100명이 훌쩍 넘었는데, 그중에는 태주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태주는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서 어머니의 풀빵 장사로 겨우 입에 풀칠만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태주가 보이지 않아서 걱정하던 차에 태주 어머니가 교회를 찾아오셨습니다. 어머니가 울먹거리며 말씀하시기를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태주를 고아원에 보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태주가 병에 걸려 죽어가니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저는 주일학생 두 명과 함께 생명물을 가지고 고아원을 찾아갔습니다. 고아원 측에서 태주는 살 가망이 없고 곧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허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본 태주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창백한 얼굴의 태주는 뼈만 남은 작은 몸으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듯했습니다. “태주야. 우리가 왔어” 이름을 불러봤지만 태주는 대답할 힘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태주의 입에 생명물을 넣어주고 같이 온 주일학생들과 함께 간절히 찬송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친 뒤 저는 태주의 머리맡에 생명물을 두고 “태주야. 남은 생명물을 두고 갈 테니 일어나서 꼭 다 마셔야 해”라고 간곡히 부탁한 후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어느 수요일이었습니다. 예배를 앞두고 평소처럼 아이들을 챙기느라 분주히 움직이는데 누군가 예배실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바로 태주였습니다. 곧 죽을 거라 했던 태주가 살아서 고아원 친구들까지 데리고 교회에 온 것이었습니다. 순간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태주에게 달려가 반갑게 맞이하고 아이들을 예배실로 안내했습니다. 곧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어느 때보다도 진한 백합꽃 향기가 예배실 가득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온종일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1964년 3월 21일, 저는 소사신앙촌에 들어가 제과부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소사에서는 ‘늘 부지런해야 한다’는 하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자 했습니다. 빵 포장하는 담당이었던 저는 어떻게 하면 더 부지런해질 수 있을까 늘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과부는 2교대로 일을 했고, 저의 근무시간은 저녁이었기에 잠을 조금 줄이고 낮에는 밖에 나가 신앙촌제품을 판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과부 근무가 끝나면 신앙촌 간장과 카스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는데, 신앙촌 간장과 카스텔라는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 있어 고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품이 금세 팔려나가고 신앙촌으로 돌아올 때면 보람 가득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러 덕소신앙촌에 방문했는데 그 후로 덕소신앙촌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덕소에서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덕소신앙촌 건설대 추가 모집 소식이 들려와서 저는 망설임 없이 건설대에 지원하여 꿈에 그리던 덕소신앙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하나님을 자주 뵐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건설대 일은 처음이라 삽을 익숙하게 다루지 못해 다리에 상처를 입는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현장에 계신 하나님께 뛰어가 다친 다리에 축복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쉭쉭’ 축복해 주시면 흐르던 피가 바로 멎고 상처도 금세 나았습니다. 또 일을 하다가 말할 수 없이 진한 향취가 맡아지면, 어김없이 하나님 차가 주변을 지나가고 있어서 매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건설대 초반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자갈을 캐서 나르는 중이었는데 자갈 싣는 트럭의 위치를 약간만 바꾸면 더 효율적일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운전 기사님께 트럭을 조금만 옆으로 옮겨달라고 부탁드렸는데, 트럭이 움직이자 그것이 거슬렸는지 책임자였던 토목 장로님이 큰소리로 “야! 그 차가 니 차도 아닌데 왜 마음대로 옮겨?”하고 삿대질까지 하며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장로님께 사과드렸지만 무안하고 당혹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저는 새벽예배 때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고 울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주 일요일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한 명이라도 떨어뜨리면 안 돼요. 책임자들 일할 때 특히 주의하세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꼭 저를 두고 하시는 말인 것만 같았는데, 예배가 끝난 뒤 제게 화를 냈던 토목 장로님이 저를 불러서 “순자야 그땐 내가 미안했어”라고 사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의 사과를 받으니 서러웠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고,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모두 듣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건설대에서 일하다가 결혼을 한 후 양재부를 거쳐 본격적으로 소비조합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품을 판매하고 싶어도 아는 사람도 없고, 서울 지리도 익숙하지 않아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용기내어 그 일대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집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집주인은 신앙촌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무척 반가워하더니 마침 카펫이 필요했다면서 고급 카펫을 두 장이나 구입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자신감을 갖고 곳곳을 다니며 신나게 신앙촌 제품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983년도에 가족이 함께 인천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덕소신앙촌을 떠나는 것이 아쉬웠지만 아이들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여겼습니다. 인천에서는 아이들 교육비를 마련하려고 가사도우미, 식당 종업원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교회와도 멀어진 채 24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자라 사회에 자리 잡았고 저도 스스로를 돌아 볼 여유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은 아이들을 키우느라 옷 한 벌도 제대로 사지 못했던 것이 떠올라 좋은 옷을 한 벌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문득 동네에 있는 신앙촌상회가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교회에 가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상회 앞을 지나치기만 했었는데, 이번에는 상회에 들어가 겨울 코트와 재킷을 골라서 사 왔습니다. 그런데 옷을 산 이후로 신앙촌이 너무나 그리운 것이었습니다. 결국 용기를 내어 양재부 시절 친하게 지내던 박청자 권사(소사교회)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박 권사는 반가워하며 요즘 교회에서 천부교 50년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데, 하나님 모습도 나오고 같이 일하던 양재부 건물도 나온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마음에 기쁨이 차오르면서 다시 교회에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주 일요일, 떨리는 마음으로 소사교회에 갔는데 예배가 시작되기 전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습니다. 화면 속에 하나님 모습을 보는 순간 너무나 그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다큐멘터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눈물을 흘린 저는 새로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그때부터 매주 소사로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새벽예배에도 나가고 싶어서 집과 가까운 인천교회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2007년에 교회에 다시 나오면서 추수감사절 예배에도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날 신앙촌에 도착해 친한 권사님과 함께 새마을금고 앞을 지나 숙소로 가는데, 어디선가 말도 못하게 진한 백합꽃 향기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향은 예전에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마다 맡았던 향취와 똑같았습니다. 옆에 있던 권사님도 “어디서 백합꽃 향기 나지 않아요?”라며 놀라워했습니다. 향취는 새마을금고 앞에서부터 생명물 받는 곳까지 이어졌고, 저희는 그 길을 걸으며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계속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2015년쯤에도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드릴 때 향취를 맡았습니다. 하나님 찬송이 시작될 때부터 맡아지던 향취가 예배를 마치고 기도를 드릴 때까지 지속되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요즘 천부교 경전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제가 지금껏 따라온 분이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은혜로 함께 해 주실 때 은은히 퍼지던 백합꽃 향기의 기억은 여전히 제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귀한 은혜를 생각할수록 오랜 세월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지난날이 깊이 뉘우쳐집니다. 이제는 앞으로의 시간을 하나님께 모두 드리고 성결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구원의 길을 밝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모든 시험을 이겨내고 끝까지 이 길을 따라갈 것을 굳게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The Grace and Conviction Realized in the Work of the Holy Spirit

Jang Il-cheon, Retired Minster(1)

I was born in 1936 in Uah-dong, Jeonju, North Jeolla Province. From a young age, I attended a Presbyterian church and later worked with the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 in the United States. I was involved in publishing-related work there and attended various revival meetings. However, I struggled to find a firm conviction in my faith, […]

“매일 눈물로 기도하며 애타게 찾았던 하나님을 뵙게 돼”

<신앙체험기 513회> 화곡교회 이선구 권사 1편

저는 1937년 경기도 이천에서 6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저희 집은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힘겹게 농작물을 수확해도 대부분을 공출(일제강점기 시절 농민들이 생산한 농작물의 일정량을 국가에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제도)로 바쳐야 했기에 가족들이 먹을 양식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남들처럼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처지가 슬퍼서 어린 나이에도 혼자서 자주 울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

죄를 밝혀주시고 씻어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

구원을 얻으려면 자유율법을 지키고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시기, 질투, 미움과 같은 죄를 끊어내야만 참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초창기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을 안찰하시면서 각 사람의 죄의 소재와 그 형태를 지적하시고, 그 죄를 이슬성신으로 씻어 주셨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일지라도 혈기, 고집, 욕심 등의 죄가 드러날 때 그것을 […]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던 은혜의 순간

가덕도 집회 1950년대 하나님께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시며 진리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1956년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가덕도에서 열린 집회는 많은 순회 집회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지금은 다리가 연결되었지만, 당시 가덕도는 배로만 접근할 수 있는 섬이었습니다. 1956년 8월 28일 자 신앙신보에는 가덕도 집회의 소식을 전하며, 『이 땅의 방방곡곡에 전도관의 건립과 함께 기도처가 도처에 세워지는가 하면, 그 은혜의 […]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마세요”

이번 신앙체험기 특집에서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자유율법을 지키며 삶의 변화를 체험한 분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자유율법은 양심의 법이자 죄와 죄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는 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양심의 주인이심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양심의 의미와 성결한 마음으로 살기 위한 노력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기준을 자유율법에 두시며, 그 법을 지켜야만 구원에 […]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려”

<신앙체험기 512회> 인천교회 배순자 권사 1편

저는 1941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교회에 다녔는데, 학교 친구가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같이 가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처음 다녔던 교회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 곳이었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교인들은 목사파와 장로파로 나뉘어져 말 그대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습니다. 급기야 예배 중이던 목사를 단에서 끌어내리고 장로가 대신 예배를 인도하거나, 몸싸움 […]

하나님의 귀한 말씀 기도의 제목이 되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아뢰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의(義)를 위하여 간절히 구하고 기도할 때, 그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하늘의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가 드리는 기도의 제목은 다르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고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와 관련된 체험기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기도 속에 담긴 간절한 […]

“은혜로 가르쳐주신 구원의 길,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신앙체험기 511회> 서동교회 주민대 권사

1944년 전라남도 영광군 단주리에서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저는 12살이 됐을 무렵 처음으로 전도관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네의 큰 도로가에 오막살이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머물고 있는 그곳에서는 주일마다 찬송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곳은 영광전도관의 전신이었습니다. 아직 영광에 전도관이 생기기 전이라 전도활동 차원에서 임시로 집을 빌려 대학생 반사가 와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저와 친구들은 주말마다 찬송소리가 들리는 […]

Through God’s power, I have gained joy and peace in my heart

Sunwoo Hye-guk, Seungsa

My sincere desire to truly believe in God originated from my search to find joy in my heart. Born in Jeongju, Pyeonganbuk-do, my family had been Christians since the first missionaries arrived in Korea. Baptized while still in my mother’s womb, I grew up attending a Presbyterian church. At the age of 23, I got […]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마음의 기쁨과 평안 얻어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선우혜국 승사

제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마음에 기쁨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저는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처음 들어온 당시부터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양가가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세례를 받고 태어나 장로교회에 다녔습니다. 23세 되던 해에 결혼을 하였고, 1947년에는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내려와 6․25 전쟁을 겪게 되면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