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향취에 몸이 시원해지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해”

“향취에 몸이 시원해지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해”

꿈에서 뵌 분을 광주공원 집회에서 만나 안수 받는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은혜를 체험해 지산 전도관에서 집회 30분 전 향취 맡고 앉아 있는지 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워 은혜 체험 거듭되며 마음속에 분명한 확신 자리 잡아 저는 1937년 전남 순천시 주암면 광천리에서 3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제 어린 시절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이 맞물린 격변의 시대라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혹시 모를 위급 상황에 대비해 고흥의 한 섬에 미리 거처와 식량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저희 가족은 그 섬으로 피란을 떠났고, 아버지의 준비 덕분에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큰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란살이가 길어지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고, 어린 마음으로도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저는 배울 기회를 찾아 시내로 나가야겠다는 뜻을 아버지께 여러 차례 말씀드렸고, 고심 끝에 아버지는 제 뜻을 받아들여 다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시내로 나왔지만 형편은 여전히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이대로는 학업을 이어 가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저는 열아홉 살 되던 해, 홀로 광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당시 양장 기술을 배우면 스스로 가게를 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촌 오빠 집에 머물며 양재 학원에 다니기 위해서였습니다. 낮에는 기술을 배우고 저녁에는 공부하며 제 힘으로 앞날을 열어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느 날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시내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제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이 오십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전단을 나눠주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 전단에는 며칠 뒤 광주공원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교회를 다녀본 적은 없었지만, 평소 교회 옆을 지날 때마다 들리던 찬송가 소리에 마음이 끌려 이번 기회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저는 광주 지리에 밝은 사촌 오빠에게 집회 장소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고, 며칠 뒤 집회 날이 되어 오빠와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집회 장소에 다다르자, 이미 아래쪽에서부터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지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언덕 위에 넓게 세워진 천막을 보며 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까 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가다 보니 어느새 강대상 근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앞자리에는 몸이 불편한 분들이 모여 있었는데, 제 옆에 앉아 있던 다리가 불편한 분은 박 장로님이 오시면 이쪽이 잘 보인다며 제게 자리를 조금 내주었습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사람들은 ‘속죄함’ 가사가 담긴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찬송이 잦아들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니,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대체 어떤 분이 오시기에 저토록 마음을 다해 기도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잠시 후 머리 위로 “마음 문 여세요” 하시는 쟁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단상을 바라본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단상 위에 서 계신 박 장로님의 모습이 무척 환해 보였고, 그 주변으로 밝은 빛이 감돌았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옳다, 찾았다!” 하는 소리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실 1~2년 전 꿈속에서 똑같은 분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꿈에서 그분은 환한 빛에 둘러싸인 채 저희 집을 한참 바라보시고 떠나셨는데, 그 모습이 내내 기억에 남아 언젠가 꼭 한 번만이라도 뵙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을 이곳에서 드디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놀라움에 한동안 단상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예배에 집중했습니다. 박 장로님의 인도로 한참 동안 찬송이 이어졌고, 저도 어느새 찬송을 따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놀라운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예배 중 박 장로님께서 쉭쉭 축복하시며 “병자들은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곁에 있던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벙어리 아가씨가 앞으로 나가 찬송을 불렀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을 잃고 있는데, 예배를 마친 박 장로님께서 단상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를 하며 지나가시던 장로님께서는 제게 세 번이나 안수를 해주셨습니다. 그 손길이 닿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기함과 경건함에 사로잡혀 그 순간 장로님의 얼굴은 감히 제대로 뵐 수 없었지만,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니 와이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금 전 단상 위에서 뵙던 환한 모습과는 달리, 그 헌신적인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져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날, 집회가 끝났지만 돌아서기 아쉬운 마음이 들어 저는 하루 더 그곳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밤새 철야 기도에도 참여했습니다. 다음 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저는 지프차를 타고 떠나시는 박 장로님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멀어져 가는 지프차를 바라보며 이분을 다시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곁에 계시던 다른 장로님께 여쭈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서울에 계신다는 대답을 듣자 마음속에는 당장이라도 따라가 뵙고 싶은 간절함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에 아쉬운 마음만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온 저는 한동안 양재 학원에서 디자인 공부를 이어가면서도 머릿속에는 늘 그날의 기억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가을이었습니다. 큰오빠가 전단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집 근처 지산동에 전도관이 세워졌고 그곳에서 박 장로님의 집회가 열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뵙기를 간절히 바랐던 제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집회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루하루가 더디게 느껴질 만큼 제 마음은 온통 집회를 향해 있었습니다. 저는 큰오빠에게 지난번 집회에서 뵌 분이 보통 분이 아니셨으며, 그분의 말씀은 땅의 말이 아니라 하늘의 말씀처럼 느껴졌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직접 가서 확인하고, 오빠들에게도 이 놀라운 사실을 꼭 알려주겠노라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되어 저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지산동 집회로 향했습니다. 오후 6시부터 맨 앞자리 단상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예배를 기다리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난번 집회에서 뵀던 그분을 다시 뵈러 왔으니, 결코 헛된 걸음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간절한 마음 하나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박 장로님이 오시기 약 30분 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창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향기가 코끝을 스쳤습니다. 처음 맡아보는 신기한 향이었습니다. 혹시 누가 머리에 포마드를 발랐나 싶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잠시 후 몸이 시원해지더니,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마치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놀랍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그때 박 장로님께서 단에 오르시더니 지난번처럼 “마음 문을 여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은혜는 마음 문을 연 사람에게는 폭포수같이 임하지만, 마음 문을 닫은 사람은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시며 다시 한번 마음 문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이어 찬송을 인도하시는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부족한 저를 이 자리로 이끌어 주셨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라 한동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뒤 박 장로님께서는 “내가 여기 오기 30분 전에 은혜를 부어주었는데, 그때 향취를 맡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세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저요!” 하고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자 박 장로님께서는 저를 바라보시며 일어나 말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30분 전쯤 몸이 아주 시원해지면서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신 박 장로님께서는 저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셨습니다. 장로님께서는 다시 한번 30분 전에 향취를 맡은 사람이 또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차례로 단상으로 올라가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의 체험담을 들으며 저는 제가 받은 은혜가 결코 우연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수요일마다 지산동에서의 집회는 계속되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오시는 날이면 안수를 해주시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시원함과 향취가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체험들이 쌓여가면서 제 마음에는 분명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기에 훗날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라고 하셨을 때도, 제가 겪은 일들을 떠올리며 그 말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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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으로 끝까지 구원의 길 가길 소망해”

“기쁨으로 끝까지 구원의 길 가길 소망해”

저는 1952년 부산 동대신동에서 2남 6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메리야스와 여성복, 군복 등을 만드는 의류 공장 세 곳을 운영하며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직접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머니(故 김용달 권사)로부터 여러 차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제가 3~4살 무렵, 어머니는 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할 만큼 몸이 쇠약해져 부산도립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가셨는데, 위와 갈비뼈 쪽에 암덩어리가 보인다며 석 달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먹고,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다 가보라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둘째 언니와 함께 장로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께서는 잠결에 무척 아름다운 찬송가 음악종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평소 장로교회에서 듣던 종소리와는 전혀 달랐고, 스무 날이 넘도록 계속 반복해서 들리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새벽, 장로교회로 가는 길에 꿈에서만 듣던 바로 그 음악종 소리가 실제로 들려왔고,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 그곳이 바로 동대신동 전도관이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전도관에서 새벽 기도를 드리던 날, 어머니는 무릎을 꿇자마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릴 때 남의 밭에서 오이를 따 먹었던 일부터 미처 죄라고 여기지 못했던 일들까지 하나하나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장로교회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었기에 어머니는 그날 이후 장로교회에는 발길을 끊고 전도관으로 예배를 드리러 다니게 되셨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서울에 출장을 간 친척에게서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께서 한강모래사장에서 집회를 여셨는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꼽추의 등이 펴지는 등 병자들의 병이 낫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곧 부산에서도 집회가 열리니 꼭 가보라는 말에 어머니는 부산 집회에 참석하셨고, 그곳에서 안찰도 받게 되셨습니다. 줄을 서서 안찰을 기다리다가 어머니 차례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다 나았습니까?” 하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아픈 곳을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아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순간 몸이 가뿐해지며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어 본인도 모르게 “네, 다 나았습니다”하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방긋 웃으셨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물 한 모금 넘기기 힘들었던 어머니는 밥 한 그릇을 드실 수 있을 만큼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습니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 병원을 다시 찾아 검사를 받았더니, 의사는 암덩어리가 사라졌다며 깜짝 놀라더랍니다. 어머니는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고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에 힘쓰셨고, 저희 가족 모두 부산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어머니가 하나님께 안찰 받은 뒤 병이 깨끗이 나아 얼마 후 하나님께서 부산에 내려오셨을 때, 어머니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식사를 대접하셨고, 가족 모두 안찰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운영하던 공장 세 곳도 직접 둘러보시며 축복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후 저희 가족은 경북 김천으로 이사해 견사공업주식회사를 운영했습니다. 공장 한쪽에는 제단을 마련해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왔고, 종업원들은 아침마다 찬송을 부르며 하루 일을 시작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다 1958년 소사신앙촌 건설이 한창일 때, 저희 가족은 첫 입주자가 되었습니다. 아직 전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던 시절이었지만, 신앙촌 안에는 양옥과 공장들이 반듯하게 줄지어 들어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촌의 모습에 관심을 가진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신앙촌을 찾았고, 저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분들을 안내하시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곤 했는데, 저 역시 그 중 하나였습니다. 학교가 세워지기 전 임시학교를 다닐 때는 등하굣길이나 오디나무 아래에서 오디를 따 먹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귀엽다 하시며 코를 살짝 잡아 주시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제 코를 잡아 주셨던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얼마 뒤 신앙촌 안에 학교를 짓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학교를 짓는다는 생각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 저도 어른들을 따라 조그만 돌을 옮겼습니다. 주먹만 한 돌을 들고 가 내려놓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안수해 주셨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기쁘고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습니다. 소사신앙촌에서 초등학교 3학년 초까지 지내다가, 저희 가족은 다시 김천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먼저 내려오고 외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짐을 챙겨 오시게 되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할머니를 특별히 부르셔서 유리병 하나를 축복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병에 물을 담으면 생명물이 된다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그 병에 물을 담아 아침마다 저희에게 한 컵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열 번 정도 마신 뒤 문득 제 마음에 의심이 들었습니다. ‘물을 하나님께서 직접 축복해 주신 것도 아닌데, 이 물이 정말 생명물일까?’ 그래서 저는 집에 있던 두 개의 병에 각각 물을 담아 한 병에는 ‘생명물’, 다른 한 병에는 ‘물’이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약 1년쯤 지난 뒤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두 병의 상태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물’이라고 적은 병의 물 색은 누렇게 변하고 이끼가 낀 듯했으며, 뚜껑을 여는 순간 썩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반면 ‘생명물’이라고 적은 병의 물은 처음 그대로 맑은 상태였습니다. 그제야 저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병에 담긴 물이 정말 생명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병에 물을 담아 두었더니 생명물이 되었고 1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맑아 1년 후, 저희 가족은 다시 소사신앙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여러 차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제단 한쪽에 이슬처럼 동글동글한 물방울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이곤 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만져 보려 하면,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지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제가 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어머니께 보여 드렸더니, 그것이 바로 이슬성신이라고 하셔서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또 한 번은 예배 중에 꽃향기 같은 향긋한 냄새가 계속 나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 여쭤보니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향취 은혜라고 하셨고, 그때 저는 ‘아,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하나님께서는 전국을 다니시며 전도 집회를 여셨습니다. 학교를 쉬는 날이면 저도 그 길을 함께 따라나섰습니다. 집회 장소에 먼저 도착한 특전대 관악부가 찬송가 96장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를 연주하며 “지금 불의 사자 감람나무께서 오시니 모두 가십시다”라고 외치면,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어른들의 등을 밀어 드리며 언덕 위 교회까지 안내했는데, 그렇게 오르내리다 보면 어느새 예배실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저희는 예배실 밖에 서서 창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 시간은 제게 무엇보다 기쁘고 가슴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스무 살 무렵,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기장신앙촌에 입사해 약 8년 동안 수출 봉제 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이후 신앙촌상회에서 잠시 일하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도 LA 제단에 다니기는 했지만, 여러 사업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신앙에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문득 삶이 부질없게 느껴졌고, 그럴수록 신앙촌이 더욱 그리워졌습니다. 결국 저는 15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다시 기장교회를 다니며 소비조합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는데, 신기하게도 제 귓가에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라는 찬송가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그 찬송은 미국에 머무는 동안은 물론,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계시는 동안 어머니는 호흡기 장애로 숨 쉬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는데, 그때 어머니 귀에 “걱정하지 마. 기장까지 내가 데려다줄게”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 그대로 저희는 무사히 기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이어오시던 어머니께서는 1999년, 80세를 일기로 운명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는 기장신앙촌 장례반 권사님들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평소 간경화를 앓고 계셨지만, 입관할 때 생명물로 씻겨 드리고 입에도 넣어 드리자 얼굴이 환하게 피었고, 굳어 있던 몸도 부드럽게 움직여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신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를 평안히 보내드릴 수 있어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30년 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생명물로 온몸을 씻겨 드리자 얼굴이 환하게 피며 평안해 보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생명물로 환하게 피어 가신 모습을 직접 보며, 저는 하나님과 생명물의 권능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신앙촌 여러 부서를 거쳐 다시 기장신앙촌 소비조합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신앙촌 간장 선물세트 영업으로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누군가 제 등을 살짝 밀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 더욱 힘을 내어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하나님께서 곁에 함께 계시는 듯 등을 살짝 밀어주셔 소비조합원으로 일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저희에게 기쁨을 주시고 일할 힘과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면서도 더럽고 추한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 그 모든 것을 희생하셨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건강을 허락해 주신 이 시간 동안, 기장신앙촌 소비조합원으로서 맡겨진 사명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다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오늘도 은혜를 전하며, 죄 씻음 받아 천국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눈물로 기도드릴 때 맡아지던 향취 은혜,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신앙체험기 519회> 충주교회 김순득 권사

저는 강원도 원주시 귀례면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이사하시면서 세 살 무렵부터 충청북도 충주에서 자랐습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 스물세 살에 첫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가 백일이 되기도 전에 남편이 군대에 갔습니다.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홀로 남겨진 저는 먹고 살기 위해 아이를 업고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해야했습니다. 시장에서 사과도 […]

은혜 안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일할 때 가장 큰 기쁨 느껴

<신앙체험기 518회> 서대구교회 구수웅 권사편

저는 1942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우(牛)시장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마을 장터에서 나물을 팔며 살림을 꾸려가셨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52년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면서 저희 남매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살길이 막막해진 저와 형제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

“은혜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려”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당시 저는 전도관에 있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해서 예배시간이 되기도 전에 예배실에 가 있었습니다. 예배실에 가면 저처럼 먼저 온 사람들끼리 모여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는 예배실 안에 이슬비 또는 소낙비처럼 이슬성신이 내렸습니다. 분명 비처럼 보이는데 바닥은 물론 옷도 전혀 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슬성신이 내리고 얼마 뒤에는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

이슬 같은 은혜를 받으니 그 은혜를 계속 간구하게 돼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1편

예배실에서 기도드리던 중 백합꽃 향기 같으면서도 산뜻하고 시원한 향 맡아져 향취 은혜임을 깨닫게 돼 노구산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할 정도로 이슬 같은 은혜가 집회장에 자욱이 퍼져 반사 활동 당시 예배실에 들어갔는데 박하사탕처럼 시원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고 가슴 속이 시원해지며 처음 맛 보는 기쁨이 솟아나 저는 1941년생으로 경기도 오산에서 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살던 집 바로 옆에는 앞마당이 유난히 넓은 […]

큰 위기가 올 때마다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뉴욕교회 안음전 승사

제가 처음 하나님을 따라 나오게 된 동기는 잊을 수 없는 감사한 기억 때문입니다. 1950년 당시 저희 가족은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살고 있었고 남편은 트럭 2대에 직원 4명을 두고 자그마한 운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6․25 전쟁이 발발했고 저희 가족은 일가친척이 있는 양평에 얼마 동안 피신해 있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살아보려던 중에, 또다시 인민군이 […]

Grateful to God Who Has Protected Me in Every Great Crisis

Ahn Eum-jeon, Seungsa

The reason I first came to follow God was because of an unforgettable and precious experience of gratitude. In 1950, my family lived in Palpan-dong, Jongno-gu, Seoul. My husband owned a small transport business with two trucks and four employees. That year, the Korean War broke out, and our family fled to Yangpyong where relatives […]

“기도하고 찬송하며 간절한 마음이 될 때 은혜를 허락해 주셔”

<신앙체험기 516회> 소사제2교회 백종찬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전도관에 다닌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전도사님께서 저와 김정범 씨에게 이제 전도사로 나가야 하지 않겠냐며 교육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처자식이 마음에 걸려 고민이 되었지만, 이 귀한 은혜의 진리를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전도사 교육을 받으러 김정범 씨와 함께 돈암동 전도관에 갔습니다. 거기서 오전에는 체계 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

“전도관에서 성신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니 새로운 세상이 열려”

<신앙체험기 516회> 소사제2교회 백종찬 권사 1편

무더운 여름날 고인을 모신 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계속 관 주변으로 불어와 성신의 바람으로 고인을 지켜주셔 김천 전도관에 다니며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를 맡게 돼 그것이 향취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의 기도 드려 저는 1942년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농가의 외아들이었던 저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보리, 벼, 감자, 수박, 참외 등을 키우셨고, 풍년이 든 해에는 장터에 나가 작물을 판매하기도 […]

Grateful for the Unchanging Presence through the Holy Dew Spirit

Lee Kyo-sun, Senior Deaconess (2)

Though I was overwhelmed with vague fear and anxiety due to the Pacific War and the Korean War, meeting and following God has allowed me to live joyfully. After hearing about life in the village of faith, my father, who had initially opposed my attending the Chunbukyo Church, began supporting everything I did. I am grateful for God creation of a […]

이슬성신 은혜로 변함없이 함께해 주심에 감사 드려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이교선 권사님 (2)

태평양전쟁과 6·25전쟁으로 막연한 두려움과 근심 싸였지만 하나님을 뵙고 따르며 일생을 기쁘게 지내 유교적인 부모님 반대 심했지만, 은혜의 가치를 알고 굳건히 나아가 신앙촌의 생활상을 들으신 후에 아버지께서 모든 것 후원해 주셔 진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귀한 터전을 일구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1958년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처음으로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안찰을 받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