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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촌 건설의 신화(9) 만나가 내리는 땅③

죄 씻음과 마음의 성결함을 얻어
발행일 발행호수 2095

1957년 12월 16일자 신앙신보에는 신앙촌과 신앙생활에 관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게재되어 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전에는 희미하고 막막하고 답답한 가운데서 살면서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이 무엇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은혜를 받아 좀 알게 되고 좀 이루어져서 받은 것이 있게 되니 이제는 희미하지 않고 확실하며 앞길이 환하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깨끗해지고 죄 씻음을 받아 이루어져서 준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간 시간마다 말하였다.

그러면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지로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는 그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조건을 만들기 위해 신앙촌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엔 은혜 받은 식구끼리만 모여서 부락을 이루고 도시를 이루어서 살게 되므로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신앙촌에서의 은혜생활에 관하여 강명수 승사(86, 기장신앙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57년도에 소사신앙촌 건설을 시작하셨는데 노구산, ‘이슬을 구하고 내리는 산’ 그곳에 하나님께서 제단을 세우시고 이슬은혜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식욕(食慾)죄, 음란죄, 도둑죄를 짓지 마세요! 길가에 떨어진 못 한 개라도 주어다 자기 집에 박지 마세요. 큰 것만이 도둑이 아닙니다.’라고 말씀 하셨지요.

하나님께서 매일 단에 서시는데 앞자리는 은혜 받는데 최고인지라 ‘금자리’라고 불렀는데 서로 앞자리에 앉으려고 잠잘 시간도 별로 없었습니다.

낮에는 하나님께서 건설 현장에서 안수도 하시고, 벽돌도 지워 주셨고 특히 오만제단에서 새벽예배 마치고 각기 돌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내려오면, 돌 하나에 안수 한 번씩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돌을 미리 가져와 많이 숨겨 놓았다가 하나씩 이고 가서 여러 번 안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고초는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을 한 것이지요. 이루어지지도 못하면서 열의만은 대단했었다고 할까요.

이와같이 새벽제단 끝나고 공장에 출근하기 전까지는 은혜 받는 작업을 했습니다. 땀에 흠뻑 젖도록 했건만 힘이 드는 것도 몰랐고, 그저 한없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이슬성신의) 향취가 나고, 성령의 비가 살 속에 스며들곤 했기 때문입니다. 매일 하나님께서 안찰을 해 주셨는데, 각 공장 인원과 건설대원 등 순서를 짜서 해 주셨습니다.

신앙촌 주택은 빨간 벽돌집으로 지었는데, 그에 맞는 가구와 주방이 구비된 최신식 문화주택이었습니다. 6·25 전쟁 후 어수선하고 폐허가 된 우리 한국에선 소사신앙촌이 온통 화젯거리가 되어 관광객이 줄을 이었습니다.”

당시에 처음 신앙촌을 방문했던 이혜승 관장(62. 부흥협회 간사장)의 방문기를 들어 본다.

“서울여대에 진학하여 사회학을 전공하였던 저는 4학년 때 ‘소수(小數)집단’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경기도 부천에 있는 소사신앙촌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전도관을 이단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쁜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견학 차 신앙촌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신앙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저는 위축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앙촌 입구에 있는 안내원들은 너무나도 겸손하고 정중하게 인사 하면서 안내를 해 주겠다고 하는데, 안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잔뜩 하고 왔던 저는 그 친절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안내를 안 받겠다고 거절하며 혼자서 신앙촌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신앙촌의 전경은 너무나도 인상적이라 어떻게 표현해야 적합할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깨끗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반듯반듯 서 있는 주택들은 마치 외국의 별장을 보는 듯 했고, 중앙에 있는 산업박물관, 계단식 꽃밭, 그리고 거리를 다니는 신앙촌 사람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던 근면함과 성실함 등등 하나하나를 접할 때마다, 제가 생각하던 것과 맞지 않는 현실의 모습으로 인하여 심한 갈등과 복잡한 마음을 지닌 채 아름다운 신앙촌을 등 뒤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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