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눈물로 기도드릴 때 맡아지던 향취 은혜, 지금도 잊을 수 없어”

“눈물로 기도드릴 때 맡아지던 향취 은혜,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저는 강원도 원주시 귀례면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이사하시면서 세 살 무렵부터 충청북도 충주에서 자랐습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 스물세 살에 첫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가 백일이 되기도 전에 남편이 군대에 갔습니다.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홀로 남겨진 저는 먹고 살기 위해 아이를 업고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해야했습니다. 시장에서 사과도 팔고, 빗·실·성냥·비누 같은 잡화도 팔아봤지만, 경험도 없고 서툴다 보니 수익이 나지 않아 돈을 손에 쥐는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와중에 기침이 심해지고 피까지 토하길래 병원에 가보니 결핵 진단을 받았습니다. 결핵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면서, 그나마 생계를 이어주던 장사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 소식을 들은 남편이 보건소에서 약을 지어주겠다고 하여 당분간 남편의 군부대와 가까운 가평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핵약을 먹어도 별다른 차도 없이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평에서 지내던 어느 날, 반찬이 없어 밥만 먹으려니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 않아 간장이라도 사 와야겠다는 생각에 시장에 나갔습니다. 마침 커다란 항아리에서 간장을 담아 가는 사람들이 보여 그들을 따라 줄을 섰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간장을 받으려는데, 간장을 담아 주시던 분이 “동네에서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서 오셨어요?” 하고 친근하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원래 충주에 살았는데 몸이 아파 남편이 근무하는 가평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병색이 짙은 제 얼굴을 보시곤 사정이 딱해 보인다며 간장값은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전도관에 다니고 있는데, 전도관에서 병을 고친 사람이 많다며 한 번 와 보라고 권하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따뜻한 호의를 받은 저는 감사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아 찾아가게 된 전도관 그 주 일요일이 되자 저는 전도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간장을 무료로 주셔서 고맙기도 했지만, 전도관에서 병을 고친 사람이 많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가평 현리에 있는 전도관을 찾아갔습니다. 교회에 다녀본 적은 없었지만, 기도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예배실에 앉아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저는 하나님께 저 좀 살려 달라고, 제가 없으면 아이는 어떻게 하냐고, 제발 살려달라고 정말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렇게 울며 기도를 드리는데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좋은 냄새가 났지만, 그때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 줄도 모르고 ‘어디서 이런 좋은 향기가 나지?’ 하고 잠시 궁금해하다 말았습니다. 그것이 향취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날 무렵 사람들이 헌금을 드리는데, 저는 하나님께 드릴 헌금을 가져오지 못해 마음이 무척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는 생활비를 아껴 10원을 겨우 마련해 갔습니다. 적은 금액을 드리는 것이 송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제 모든 사정을 아실 것이라 믿고 정성껏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실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순간 제 목에서 작은 핏덩어리가 툭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워서 급히 바닥을 닦고, 예배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보건소에 약을 타러 갔는데, 진찰을 마친 의사가 말하기를 몸이 많이 좋아져서 약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핵에 걸려 약을 먹어도 낫지 않던 몸이 갑자기 호전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꽤 오랫동안 약을 먹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도관을 다녀온 뒤로 기침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 다음 날부터 바로 새벽예배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울며 기도드리는데 향취를 맡게 되었고 전도관에 다닌 이후로 고쳐지지 않던 결핵 완치돼 그 뒤로 향취 은혜를 자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향긋한 냄새가 확 느껴졌는데, 백합꽃 향기보다도 더 은은하고 기분 좋은 향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게 좋은 향기가 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향취를 맡고 나면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면서 기쁨이 샘솟았기에, 그 향기가 향취 은혜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던 중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것이 가슴 속으로 확 들어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온몸이 후끈하게 뜨거워졌다가 점점 시원해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른 권사님들께 말씀드리니, 그것은 불성신을 받은 것이라 하여 더욱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도관에 다니며 저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드릴 때 은혜를 허락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향취 은혜를 맡거나 불성신을 받았던 날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드렸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다시 충주로 내려와 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충주에도 전도관이 있어 신앙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로 기억하는데, 한 번은 하나님께서 안찰을 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장신앙촌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안찰을 받았고, 마침내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안찰해 주시며 “열심히 따라와. 어려워도 끝까지 따라와야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릅니다. 그날 들은 말씀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제 마음에 남아 신앙생활을 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안찰받던 날 “끝까지 따라와야 해” 하시던 말씀 깊이 새기며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끝까지 따라가고 싶어 2018년 축복일에도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신앙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지금 매립지 쪽에 축복이 내리고 있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저는 벌떡 일어나 매립지 쪽으로 달려갔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선명한 빛기둥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그렇게 크고 환한 빛이 하늘에 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그날 저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참 동안 그 빛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2020년에는 교회에서 친하게 지내던 장한희 권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장 권사님은 평소에도 늘 부지런하셨고, 교회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시며 항상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몸이 많이 쇠약해지셔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살이 빠져 볼이 홀쭉하게 패인 모습이어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장례반 권사님들이 고인의 몸을 생명물로 깨끗이 닦아 드리고, 입에도 생명물을 넣어드렸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모여 함께 찬송을 불렀는데, 어느 순간 권사님 얼굴을 보니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는 것이었습니다. 뼈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얼굴이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피부는 뽀얗게 피어나 얼마나 편안하고 고와 보였는지 모릅니다. 권사님의 아드님은 “어머니 얼굴이 예뻐지셨어요”라며 매우 놀라워하셨고, 그 자리에 있던 교인들 또한 잠든 듯 평안해 보이는 권사님의 모습에 하나님의 은혜로 아름답게 피어나셨다며 감탄했습니다. 2023년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천부교인이 아니었지만 남자 청주교회 관장님께 부탁을 드려 천부교식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남자 교인들이 오셔서 생명물로 남편을 씻겨드리고 정성껏 예배를 드리셨는데, 입관예배를 마치고 본 남편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남편은 생전에 검버섯과 점이 많은 편이었는데, 입관 예배를 드리고 나니 그 많던 점과 검버섯이 거의 사라지고 얼굴이 한결 하얘 보였습니다. 저보다 늦게 남편의 얼굴을 본 딸들도 “아버지 얼굴이 너무 깨끗해요” 하며 무척 기뻐했습니다. 입관예배에서 생명물의 권능으로 시신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습 보고 놀라움 금치 못해 지나온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니 제 삶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가득했음을 느끼게 됩니다. 병으로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살 길이 막막하기만 했던 시절, 펑펑 울며 기도드리던 제게 귀한 은혜를 허락하시어 다시 살아갈 힘을 주셨습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순간에도 하늘의 권능으로 함께해 주시며 슬픔을 거두어가시니 마음에는 평안함과 감사가 남았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도 그 은혜를 간직하며 더욱 밝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말씀대로 맑고 성결하게 살아서 마지막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신앙체험기
은혜 안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일할 때 가장 큰 기쁨 느껴

은혜 안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일할 때 가장 큰 기쁨 느껴

저는 1942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우(牛)시장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마을 장터에서 나물을 팔며 살림을 꾸려가셨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52년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면서 저희 남매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살길이 막막해진 저와 형제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7촌 아저씨 댁에서 일손을 거들었는데, 일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돈은 모이지 않았고 앞날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저는 가진 거 하나 없이 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도 마땅히 지낼 곳이 없어서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운 좋게 소사신앙촌 근처의 새끼줄 만드는 공장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새끼줄 공장 사장님은 신앙촌 교인이었습니다. 사장님의 여동생이 가장 먼저 하나님 집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았고, 아버지의 입관예배를 전도관식으로 드린 뒤 아버지가 생명물로 아름답게 피어난 모습을 보고 가족 모두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사장님을 포함해 가족 모두 소사신앙촌 아파트에 입주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도관이나 신앙촌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사장님 덕분에 자연스레 전도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신앙촌의 모습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러다 사장님을 따라 신앙촌에도 몇 번 가보고, 예배에도 참석해 보았지만 그저 구경 삼아 바라만 봤을 뿐 신앙생활에는 뜻이 없었습니다. 이후 새끼줄 공장에 일감이 줄어들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데, 마침 오리 농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농장 주인을 찾아가 면담하던 중 전에 일했던 곳 사장님이 신앙촌 분이셨고, 소사신앙촌에도 몇 번 가 본 적 있다고 하자 몹시 기뻐하며 즉시 저를 채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촌 사람들의 정직함과 성실함이 사회에서 신뢰받는 것을 보니, 저도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마침 하나님께서 집회를 여신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오만제단을 찾아갔습니다. 일단 예배실에 들어가 앉았지만 찬송을 몰라 그저 손뼉만 따라 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갑자기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향기는 스쳤다가 사라지고, 잠시 뒤 다시 은은하게 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더니 마음에 기쁨이 점점 차올라, 앉은 자리에서 몸이 하늘로 둥둥 뜨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몸이 가벼워져서 하늘로 뜨는 것 같은 신기한 체험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예배실을 가득 메운 이슬성신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던 중 어느 순간 예배실 안에 안개처럼 뽀얀 것이 가득 차올라 단상에 계신 하나님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건물 안에 안개가 끼는 것이 이상해 뒤를 돌아보니 창밖은 아주 맑고 청명한 날씨였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날 코끝에 맡아졌던 향기와 예배실 안에 가득했던 뽀얀 것이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새벽예배에도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는데도 피곤하다거나 멀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발걸음이 땅을 딛는 것 같지 않게 가벼워서 그 먼 거리를 날아갔다 왔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가끔 너무 일찍 도착하는 날에는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맡으며 오만제단 앞에서 기다리다가 창가에 불이 켜지면 반가운 마음으로 예배실에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1962년 덕소신앙촌 건설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강공장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제강공장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현장을 찾으셔서 작업을 살펴보시고, 직원들에게 안수도 해주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눈안찰을 받았는데, 처음 하나님의 손이 닿았을 때는 눈이 빠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런데 자주 안찰을 받을수록 눈이 맑고 시원해지는 것을 느껴서 계속 안찰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찰을 다 받고 나면 가슴속까지 시원해지고 몸이 둥둥 뜨는 것처럼 가벼워졌고, 마음에 기쁨을 가득 안은 채 일하러 가곤 했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 가장 신기했던 일은 하나님께서 공장에 오실 때면 향취가 강하게 맡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향은 세상의 어떤 꽃향기로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좋았고, 가슴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스며드는 향기였습니다. 일하다가 향취가 진동하기 시작하면 ‘아, 하나님께서 공장에 오셨구나’ 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덕소에서 참 많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제강공장에서는 뜨거운 쇳물을 다루기 때문에 자칫 방심하면 화상을 입기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생명물을 바르면 흔적도 없이 낫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또 한 번은 예배실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목에서부터 뱃속까지 불에 타는 듯 뜨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속이 시원해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그것이 불성신이라고 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심이 너무도 고마워 오래도록 머리를 숙여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1970년대에는 기장신앙촌으로 옮겨 메리야스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생산된 ‘엑스란 내의’는 “안 입어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큰 인기를 얻어 국내는 물론 해외로도 많이 수출되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지낸 시절이었지만, 거기서 얻은 보람과 자부심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1974년에는 첫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의 입술이 바싹 마르고 심하게 열이 나서 급히 의무실에 데리고 갔는데, 아이는 그 잠깐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슬픔을 잠시 뒤로하고 저는 생명물을 가져와 직접 아이의 몸을 깨끗이 닦아주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예쁘게 피어난 아이의 얼굴을 보며 생명물의 놀라운 권능에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짧은 생을 마친 아이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제 슬픔까지 거두어 주신 것만 같았습니다. 생명물의 권능을 다시 느낀 때는 1998년, 아내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습니다. 아내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출장 중이라 조금 늦게 신앙촌에 도착했고, 장례반에서 미리 생명물을 입에 넣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입관예배가 시작되기 전 아내를 확인하러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얼굴이 환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5년 가까운 투병으로 살이 많이 빠져 거의 뼈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날 제가 본 아내의 얼굴은 뽀얗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와 있었고, 입술도 분홍빛으로 물들어 참으로 고운 모습이었습니다. 아들도 “엄마가 살아 있는 것 같다”며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입관예배를 드리고 나니 아내의 얼굴에는 이슬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너무나 평안한 모습이어서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예배 시간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마음에는 기쁨이 넘치도록 샘솟아 어느 순간 예배실 안에 안개처럼 뽀얀 은혜가 가득 차올라 하나님 단상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할 정도. 세상을 떠난 아이와 아내가 생명물로 환하게 피어난 모습을 보며 이슬성신 은혜의 권능을 다시금 느끼게 돼 2000년에 저는 고향인 경북 상주로 내려가 서대구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서대구교회가 신축하게 되었고, 저는 무언가 보탬이 되고 싶어 틈나는 대로 교회에 와서 청소와 뒷정리를 도왔습니다. 당시 허리 통증이 있었지만 봉사를 하니 일상의 활력소가 되고 몸도 더욱 건강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신축의 마지막 단계였던 비둘기 종각이 세워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2014년 마침내 간절히 염원하던 신축예배를 드리던 날, 전국 각지에서 교인들이 찾아와 함께 기쁨을 나누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다음날, 신기하게도 저를 괴롭히던 허리통증이 씻은 듯 사라지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과거 하나님께 은혜받고 몸이 가벼워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신 되뇌었습니다. 기장신앙촌에서 살던 시절, 밤하늘에 축복이 내리는 장면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밝은 빛줄기가 하늘에서 쏟아지듯 내리던 그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없이 부어주신 은혜의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젊은 시절 은혜 안에서 기쁘게 일했고, 또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주어진 일에 마음과 정성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많은 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교회 청소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닦는 심정으로 성전을 깨끗이 하며, 더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아와 은혜받기를 기도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남은 시간 또한 기쁨과 감사의 기도로 채워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은혜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려”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당시 저는 전도관에 있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해서 예배시간이 되기도 전에 예배실에 가 있었습니다. 예배실에 가면 저처럼 먼저 온 사람들끼리 모여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는 예배실 안에 이슬비 또는 소낙비처럼 이슬성신이 내렸습니다. 분명 비처럼 보이는데 바닥은 물론 옷도 전혀 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슬성신이 내리고 얼마 뒤에는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

이슬 같은 은혜를 받으니 그 은혜를 계속 간구하게 돼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1편

예배실에서 기도드리던 중 백합꽃 향기 같으면서도 산뜻하고 시원한 향 맡아져 향취 은혜임을 깨닫게 돼 노구산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할 정도로 이슬 같은 은혜가 집회장에 자욱이 퍼져 반사 활동 당시 예배실에 들어갔는데 박하사탕처럼 시원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고 가슴 속이 시원해지며 처음 맛 보는 기쁨이 솟아나 저는 1941년생으로 경기도 오산에서 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살던 집 바로 옆에는 앞마당이 유난히 넓은 […]

큰 위기가 올 때마다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뉴욕교회 안음전 승사

제가 처음 하나님을 따라 나오게 된 동기는 잊을 수 없는 감사한 기억 때문입니다. 1950년 당시 저희 가족은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살고 있었고 남편은 트럭 2대에 직원 4명을 두고 자그마한 운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6․25 전쟁이 발발했고 저희 가족은 일가친척이 있는 양평에 얼마 동안 피신해 있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살아보려던 중에, 또다시 인민군이 […]

Grateful to God Who Has Protected Me in Every Great Crisis

Ahn Eum-jeon, Seungsa

The reason I first came to follow God was because of an unforgettable and precious experience of gratitude. In 1950, my family lived in Palpan-dong, Jongno-gu, Seoul. My husband owned a small transport business with two trucks and four employees. That year, the Korean War broke out, and our family fled to Yangpyong where relatives […]

“기도하고 찬송하며 간절한 마음이 될 때 은혜를 허락해 주셔”

<신앙체험기 516회> 소사제2교회 백종찬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전도관에 다닌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전도사님께서 저와 김정범 씨에게 이제 전도사로 나가야 하지 않겠냐며 교육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처자식이 마음에 걸려 고민이 되었지만, 이 귀한 은혜의 진리를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전도사 교육을 받으러 김정범 씨와 함께 돈암동 전도관에 갔습니다. 거기서 오전에는 체계 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

“전도관에서 성신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니 새로운 세상이 열려”

<신앙체험기 516회> 소사제2교회 백종찬 권사 1편

무더운 여름날 고인을 모신 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계속 관 주변으로 불어와 성신의 바람으로 고인을 지켜주셔 김천 전도관에 다니며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를 맡게 돼 그것이 향취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의 기도 드려 저는 1942년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농가의 외아들이었던 저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보리, 벼, 감자, 수박, 참외 등을 키우셨고, 풍년이 든 해에는 장터에 나가 작물을 판매하기도 […]

Grateful for the Unchanging Presence through the Holy Dew Spirit

Lee Kyo-sun, Senior Deaconess (2)

Though I was overwhelmed with vague fear and anxiety due to the Pacific War and the Korean War, meeting and following God has allowed me to live joyfully. After hearing about life in the village of faith, my father, who had initially opposed my attending the Chunbukyo Church, began supporting everything I did. I am grateful for God creation of a […]

이슬성신 은혜로 변함없이 함께해 주심에 감사 드려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이교선 권사님 (2)

태평양전쟁과 6·25전쟁으로 막연한 두려움과 근심 싸였지만 하나님을 뵙고 따르며 일생을 기쁘게 지내 유교적인 부모님 반대 심했지만, 은혜의 가치를 알고 굳건히 나아가 신앙촌의 생활상을 들으신 후에 아버지께서 모든 것 후원해 주셔 진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귀한 터전을 일구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1958년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처음으로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안찰을 받는 […]

Joy and Delight Overflowed in My Heart After Receiving Grace

Lee Kyo-sun, Senior Deaconess (1)

I was born in 1936 in Bogae-myeon, Anseong-gun, Gyeonggi Province, as the eldest daughter in a family of one son and three daughters. Our family ran a large pharmacy and general store on a main road, and we lived in prosperity as we gradually expanded our farmland year after year. My father, a self-made man, […]

은혜를 받고나니 마음속엔 기쁨과 즐거움만 샘솟아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이교선 권사님 (1)

저는 1936년 경기도 안성군 보개면에서 1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대로변에서 큰 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했던 저희 집은 해마다 농토를 늘려가면서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자수성가하신 아버지는 근면하게 일하시며 모든 면에 존절하고 깨끗하게 생활하셨고, 저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세상을 바르고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 지역의 학생들이 안성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