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 보는 신앙체험기
하나님 함께하시는  은혜의 증거

하나님 함께하시는 은혜의 증거

1996년 11월 16일 추수감사절 전날 기장신앙촌 상공에 내린 이슬성신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신 일로 전국에 있던 천부교인들은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도 소사신앙촌에 올라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정신없이 헤매다가 산언덕 빙판에서 심하게 넘어져 오른쪽 무릎뼈가 깨지는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빙판에 넘어진 저는 상한 다리를 끌며 이를 악물고 기어가다가 그만 정신을 잃었습니다. 마침 주위 분들이 집으로 옮겨 무릎을 붕대로 싸매고 생명물을 붓는 등 응급조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비몽사몽간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부러진 무릎에 강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정신을 차린 후 깨진 무릎이 이상하게도 통증이 없어 붕대를 풀고 보았더니 부기가 빠지고 다리가 멀쩡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일어나서 걸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조심조심 일어났습니다. 전혀 아프지 않았습니다. 내친김에 걸었습니다. 정말 거짓말처럼 엊저녁까지만 해도 여러 조각으로 부러졌던 무릎뼈가 하나님께서 꿈에 오셔서 축복해 주신 이후로 감쪽같이 붙어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후에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저뿐만 아니라 다른 교인들에게도 은혜로 보살펴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 멀리 떨어져 계셨어도 생명물을 축복해 주셨던 일은 지금도 많은 분이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도 어느 날 기회가 있어 몇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뵈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건설대를 해산하지 말라. 지방 교인들이 흩어지지 않게 교역자들이 자신을 갖고 움직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물 축복을 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저녁 7시에 축복할 테니 각자 물통에 물을 담아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전해 들은 교인들은 말씀대로 매일 저녁 7시에 물을 받아 놓고 생명물을 마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생명물로 병도 고치고 돌아가신 분을 아름답게 피어 보내기도 했습니다. 빙판에 넘어져 여러 조각으로 부러진 다리 꿈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자 거짓말처럼 붙어 1960년 3월 26일, 그날은 하나님께서 영어에서 나오신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하나님께서 오만제단으로 가신 후 저를 부르신다고 하기에 단숨에 오만제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를 바라보시던 하나님께서는 “내가 부러진 다리를 안찰해 주었지” 하시며 꿈에 안찰해 주신 것을 확인시켜 주시면서 그 다리에 다시 안찰해 주셨습니다. 저는 너무도 놀랍고 감사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그해 저는 완쾌된 다리로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 장거리 마라톤에 출전하여 3등에 입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 나의 3등은 올림픽 마라톤 1등보다 값지다”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영어에서 나오신 날, “내가 부러진 다리를 안찰해 주었지” 하시며 다시 안찰해 주셔 그해 12월 10일은 소위 언론에서 이슬성신이 내리는 사진을 인위적으로 조작한 것이라는 허위 보도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정정을 요구하기 위해 교인들이 동아일보사에 찾아간 일도 있었습니다. (*동아일보 사건) 사실 그 이슬성신 사진은 미국 라이프사 등 권위 있는 기관의 공식적인 감정 결과, 인위적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는 판정이 난 바 있는 사진들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계기로 1957년 4월경 이만제단 개관집회 때 이슬성신이 폭포수처럼 내리는 모습이 촬영된 자료를 비롯하여, 이후 집회 때마다 직접 사진을 촬영해 이슬성신이 찍힌 사진들을 소중히 모았습니다. 그것으로 슬라이드를 만들어 순회집회 때마다 환등기로 보여주고 기록 영화도 상영해 주며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렇게 전도하기를 30년. 대전, 정미, 한진, 온양, 거창, 전주, 부산5중앙, 서울9중앙, 부산2중앙, 광주, 대구제단에서 시무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헬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보았습니다. 그 후 1990년 3월 초, 수십 년의 교역 생활을 마치고 기장신앙촌 경비 책임자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도 전에 하던 대로 기장신앙촌 발전상을 사진에 담아 앨범이나 슬라이드 마운트로(필름 보관하는 틀) 정리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96년 3월 16일 새벽 4시경 새벽예배에 가려고 밖에 나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정문과 마주 보이는 하늘에서 밝은 광채가 환하게 비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사진기를 가지고 나와 그 광경을 촬영하여 현상해 봤더니 놀랍게도 초창기 때 내린 은혜와 같은 현상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또 그해 11월 16일 밤 9시에서 10시 사이, 더욱 놀라운 광경이 기장신앙촌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그날 저녁은 추수감사절 전야였습니다. 그때 샘터공원에서는 축하 음악 행사가 한창이었는데, 갑자기 동쪽 하늘에 기둥같이 내려오는 화려한 50여 개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놀라운 광경을 신앙촌 주민은 물론,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국내외 교인들이 목격했습니다. 저는 이 신기한 광경을 촬영팀 4명과 함께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현상을 해본 결과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기둥 빛줄기와 더불어 각양각색의 이슬성신이 찍혀있었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생생한 증거이며, 신앙촌 일원에는 이슬성신이 내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은 이 빛줄기가 내리는 현상은 지난 추수감사절을 전후하여 여러 번 있었으나 그날은 유난히 맑고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줄기가 동쪽 하늘에 꽉 차도록 수십 개가 나타난 것입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하나님을 따르면서 보고 느끼고 받은 신앙적 체험은 수없이 많으나, 여기에서는 그중 몇 가지만 글로 옮겨봤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슬성신이 뽀얗게 내리고 죽은 시신이 아름답게 피어나며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저 혼자의 증언이 아닙니다. 천부교인 누구에게 물어봐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답변입니다. 이 모든 은혜를 마음에 깊이 새기며, 언제나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가겠습니다. (1997. 8. 24. 신앙신보 게재) 30년 동안 이슬성신 사진을 모아 하나님 증거해 1996년 11월 추수감사절 전야 놀라운 이슬성신 목격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증거 동아일보 사건 1955년 하나님의 역사가 불일 듯 일어나 전국으로 확대되자 기성교회와 결탁한 언론이 하나님과 전도관을 비방하기 시작했다. 특히 동아일보는 수백 차례 비방 기사를 내고, 이슬성신이 내리는 사진이 조작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1960년 12월 10일, 천부교인들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허위 보도를 규탄하며 정정을 요구했으나, 경찰의 강제진압이 이어졌다.

테마로 보는 신앙체험기
성신의 역사 속에서 깨달은 은혜와 확신

성신의 역사 속에서 깨달은 은혜와 확신

저는 1936년 전북 전주시 우아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장로교회에 나가다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출판에 관계되는 일을 보면서 여러 부흥집회에 다녀봤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굳은 확신이 서지 않아 늘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때 교계에서는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를 통해 성신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저는 귀가 번쩍 뜨이면서, 장로님을 직접 만나 뵈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으며 서둘러 서울로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수소문 끝에 원효로에 큰 집회 장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원효로에 가보니 바닥이 마루로 된 큼직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원효로 구제단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안찰부터 받으라 하셨습니다. 눈 안찰 후 배 안찰을 받을 때 하나님의 손이 배에 닿는 순간 뱃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시원한 물이 뱃속에서 계속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희한한 체험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음은 한없이 편안해졌으며 기쁨은 물밀듯 넘쳤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성신의 역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곳을 떠나면 안 되겠다고 생각되어 전주로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계속 서울에 있으면서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신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소문 듣고 찾아간 곳 원효로 전도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용산구 청암동에 이만제단 건립 하나님께 처음 안찰 받은 후 그 자리에서 성신의 역사 확신해 당시 예배 시간에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몰려왔던지 제단 안에는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어서 밖에서 예배 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안 되겠구나. 우리도 더욱 큰 제단을 짓자.’ 그렇게 해서 용산구 청암동,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새로 이만제단을 짓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로 하고 생수빵(생명물로 만든 빵)을 공급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힘든 줄 몰랐으며 입에서는 하루 종일 찬송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 힘이 솟고 또 솟았습니다. 이만제단이 완공되는 시점에 저는 주일학교 반사와 특별전도대원으로 있으면서 전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따라 ‘무더기 심방’도 하고 북을 치며 노방전도도 하였습니다. 당시 이만제단에는 어찌나 많은 사람이 모였던지 일요일 대예배 때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전도관’ 하면 서울에 사는 사람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붕에는 ‘서울중앙전도관’이라는 대형 간판이 밤새 번쩍였으며,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형 음악종이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습니다. 새벽이면 강 건너 영등포 구로동까지, 강북에서는 북악산까지 들리는 정도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음악 소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감동을 주었는데, 심지어 한강에 자살하러 나왔던 사람이 그 종소리를 듣고 마음을 돌이킨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개척 전도사 시절 하나님만 믿고 움직였을 때 신기한 일 체험 나병, 폐질환 환자 안찰 받고 완치되어 많은 사람 전도돼 1957년 11월 3일, 저는 경북 경산에 개척 전도사로 발령받았습니다. 당시 개척 전도사라고 하면 교인 한 사람도 없는 곳에 발령받기가 일쑤였습니다. 의지할 곳도 기댈 데도 없는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 믿고 움직이다 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제단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경산 역시 제단 건물이 없고 임시로 천막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제단에 하나님께서 한 달에 한 번씩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 중에는 난치병인 나병으로 고생하던 과수원집 남매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임시로 지은 제단에 나와 은혜를 받고 부산 대신동 집회, 밀양제단 집회 등을 따라다니며 하나님께 안수와 안찰을 받은 후, 나병이 완전히 나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신기한 기적을 본 마을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제단으로 몰려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자초지종을 묻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제단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경산 장로교회 김무생 목사와 그의 딸 김신희(초등학교 교사), 그리고 그녀의 친구 이은경 선생은 제단에 열심히 나오는 분이었습니다. 김 목사의 딸과 이은경 선생은 당시 폐결핵 3기였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순회집회 때 안찰을 받고 씻은 듯이 나아 온 동네가 다시 한번 떠들썩했습니다. 이런 기적이 잇따르자 70평 되는 천막 제단이 좁을 정도로 사람들이 불어났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경산에도 새 제단이 번듯하게 지어졌습니다. 화제의 중심은 온통 ‘전도관’ 기성교회 발길 끊고 전도관으로 모여들자 모략중상 이어져 당시 이런 기적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따르는 수가 수백만도 넘었습니다. 생명물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안수 한 번이라도 받은 사람들까지 수를 헤아리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제단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다 보니 사람들의 화제는 온통 ‘전도관’이었고, 심지어 기성교회 교인들이 다니고 있던 교회에는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전도관으로 몰려오자 그들은 교인이 없어 할 수 없이 교회 문을 닫는 일도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전도관,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관 사람들, 세상은 온통 전도관 천지인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소사신앙촌이 건설되어 전국 각지에서 은혜받은 사람들이 속속 입주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기성교회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이단이라고 매도하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일을 연결시켜 모략과 중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문과 방송들도 사실에 대한 확인도 없이 일방적인 보도만 계속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기성교단과 밀착되어 있던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급기야 하나님을 영어의 몸이 되게 하였습니다. (1997. 8. 17. 신앙신보 게재)

The evidence of God’s grace and presence

Jang Il-cheon, Retired Minster(2)

Because of the event where God was imprisoned, the members of the Chunbukyo Church across the country spent their days in tears. During this time, I also went up to Sosa Faith Village and, while observing the situation, experienced a severe accident where I slipped on an icy hill and fractured my right kneecap. After […]

“은혜 안에서 끝까지 이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드려”

<신앙체험기 513회> 화곡교회 이선구 권사 2편

(지난 호에 이어) 제가 이만제단에 다닐 때는 하나님께서 교인들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시며 심방하시던 때였습니다. 하루는 노량진에 있는 저희 집에도 오셔서 축복을 해주셨는데, 회색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으시며 집 안으로 들어오시던 하나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집 안으로 들어오셔서 제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안수해주셨습니다. 축복을 마치신 하나님께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시기 전에 물 떠 놓은 […]

The Grace and Conviction Realized in the Work of the Holy Spirit

Jang Il-cheon, Retired Minster(1)

I was born in 1936 in Uah-dong, Jeonju, North Jeolla Province. From a young age, I attended a Presbyterian church and later worked with the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 in the United States. I was involved in publishing-related work there and attended various revival meetings. However, I struggled to find a firm conviction in my faith, […]

“매일 눈물로 기도하며 애타게 찾았던 하나님을 뵙게 돼”

<신앙체험기 513회> 화곡교회 이선구 권사 1편

저는 1937년 경기도 이천에서 6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저희 집은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힘겹게 농작물을 수확해도 대부분을 공출(일제강점기 시절 농민들이 생산한 농작물의 일정량을 국가에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제도)로 바쳐야 했기에 가족들이 먹을 양식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남들처럼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처지가 슬퍼서 어린 나이에도 혼자서 자주 울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

죄를 밝혀주시고 씻어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

구원을 얻으려면 자유율법을 지키고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시기, 질투, 미움과 같은 죄를 끊어내야만 참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초창기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을 안찰하시면서 각 사람의 죄의 소재와 그 형태를 지적하시고, 그 죄를 이슬성신으로 씻어 주셨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일지라도 혈기, 고집, 욕심 등의 죄가 드러날 때 그것을 […]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려”

<신앙체험기 512회> 인천교회 배순자 권사 2편

(지난 호에 이어) 그 후로 저는 하나님께서 “일 열심히 해”라고 하셨던 말씀을 잊지 않고 반사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진주전도관에는 주일학생이 무척 많아서 100명이 훌쩍 넘었는데, 그중에는 태주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태주는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서 어머니의 풀빵 장사로 겨우 입에 풀칠만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태주가 보이지 않아서 걱정하던 차에 태주 어머니가 교회를 찾아오셨습니다. 어머니가 […]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던 은혜의 순간

가덕도 집회 1950년대 하나님께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시며 진리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1956년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가덕도에서 열린 집회는 많은 순회 집회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지금은 다리가 연결되었지만, 당시 가덕도는 배로만 접근할 수 있는 섬이었습니다. 1956년 8월 28일 자 신앙신보에는 가덕도 집회의 소식을 전하며, 『이 땅의 방방곡곡에 전도관의 건립과 함께 기도처가 도처에 세워지는가 하면, 그 은혜의 […]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마세요”

이번 신앙체험기 특집에서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자유율법을 지키며 삶의 변화를 체험한 분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자유율법은 양심의 법이자 죄와 죄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는 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양심의 주인이심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양심의 의미와 성결한 마음으로 살기 위한 노력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기준을 자유율법에 두시며, 그 법을 지켜야만 구원에 […]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려”

<신앙체험기 512회> 인천교회 배순자 권사 1편

저는 1941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교회에 다녔는데, 학교 친구가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같이 가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처음 다녔던 교회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 곳이었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교인들은 목사파와 장로파로 나뉘어져 말 그대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습니다. 급기야 예배 중이던 목사를 단에서 끌어내리고 장로가 대신 예배를 인도하거나, 몸싸움 […]

하나님의 귀한 말씀 기도의 제목이 되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아뢰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의(義)를 위하여 간절히 구하고 기도할 때, 그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하늘의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가 드리는 기도의 제목은 다르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고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와 관련된 체험기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기도 속에 담긴 간절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