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려”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려”

(지난 호에 이어) 그 후로 저는 하나님께서 “일 열심히 해”라고 하셨던 말씀을 잊지 않고 반사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진주전도관에는 주일학생이 무척 많아서 100명이 훌쩍 넘었는데, 그중에는 태주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태주는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서 어머니의 풀빵 장사로 겨우 입에 풀칠만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태주가 보이지 않아서 걱정하던 차에 태주 어머니가 교회를 찾아오셨습니다. 어머니가 울먹거리며 말씀하시기를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태주를 고아원에 보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태주가 병에 걸려 죽어가니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저는 주일학생 두 명과 함께 생명물을 가지고 고아원을 찾아갔습니다. 고아원 측에서 태주는 살 가망이 없고 곧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허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본 태주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창백한 얼굴의 태주는 뼈만 남은 작은 몸으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듯했습니다. “태주야. 우리가 왔어” 이름을 불러봤지만 태주는 대답할 힘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태주의 입에 생명물을 넣어주고 같이 온 주일학생들과 함께 간절히 찬송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친 뒤 저는 태주의 머리맡에 생명물을 두고 “태주야. 남은 생명물을 두고 갈 테니 일어나서 꼭 다 마셔야 해”라고 간곡히 부탁한 후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어느 수요일이었습니다. 예배를 앞두고 평소처럼 아이들을 챙기느라 분주히 움직이는데 누군가 예배실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바로 태주였습니다. 곧 죽을 거라 했던 태주가 살아서 고아원 친구들까지 데리고 교회에 온 것이었습니다. 순간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태주에게 달려가 반갑게 맞이하고 아이들을 예배실로 안내했습니다. 곧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어느 때보다도 진한 백합꽃 향기가 예배실 가득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온종일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1964년 3월 21일, 저는 소사신앙촌에 들어가 제과부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소사에서는 ‘늘 부지런해야 한다’는 하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자 했습니다. 빵 포장하는 담당이었던 저는 어떻게 하면 더 부지런해질 수 있을까 늘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과부는 2교대로 일을 했고, 저의 근무시간은 저녁이었기에 잠을 조금 줄이고 낮에는 밖에 나가 신앙촌제품을 판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과부 근무가 끝나면 신앙촌 간장과 카스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는데, 신앙촌 간장과 카스텔라는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 있어 고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품이 금세 팔려나가고 신앙촌으로 돌아올 때면 보람 가득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러 덕소신앙촌에 방문했는데 그 후로 덕소신앙촌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덕소에서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덕소신앙촌 건설대 추가 모집 소식이 들려와서 저는 망설임 없이 건설대에 지원하여 꿈에 그리던 덕소신앙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하나님을 자주 뵐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건설대 일은 처음이라 삽을 익숙하게 다루지 못해 다리에 상처를 입는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현장에 계신 하나님께 뛰어가 다친 다리에 축복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쉭쉭’ 축복해 주시면 흐르던 피가 바로 멎고 상처도 금세 나았습니다. 또 일을 하다가 말할 수 없이 진한 향취가 맡아지면, 어김없이 하나님 차가 주변을 지나가고 있어서 매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건설대 초반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자갈을 캐서 나르는 중이었는데 자갈 싣는 트럭의 위치를 약간만 바꾸면 더 효율적일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운전 기사님께 트럭을 조금만 옆으로 옮겨달라고 부탁드렸는데, 트럭이 움직이자 그것이 거슬렸는지 책임자였던 토목 장로님이 큰소리로 “야! 그 차가 니 차도 아닌데 왜 마음대로 옮겨?”하고 삿대질까지 하며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장로님께 사과드렸지만 무안하고 당혹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저는 새벽예배 때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고 울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주 일요일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한 명이라도 떨어뜨리면 안 돼요. 책임자들 일할 때 특히 주의하세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꼭 저를 두고 하시는 말인 것만 같았는데, 예배가 끝난 뒤 제게 화를 냈던 토목 장로님이 저를 불러서 “순자야 그땐 내가 미안했어”라고 사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의 사과를 받으니 서러웠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고,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모두 듣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건설대에서 일하다가 결혼을 한 후 양재부를 거쳐 본격적으로 소비조합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품을 판매하고 싶어도 아는 사람도 없고, 서울 지리도 익숙하지 않아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용기내어 그 일대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집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집주인은 신앙촌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무척 반가워하더니 마침 카펫이 필요했다면서 고급 카펫을 두 장이나 구입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자신감을 갖고 곳곳을 다니며 신나게 신앙촌 제품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983년도에 가족이 함께 인천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덕소신앙촌을 떠나는 것이 아쉬웠지만 아이들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여겼습니다. 인천에서는 아이들 교육비를 마련하려고 가사도우미, 식당 종업원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교회와도 멀어진 채 24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자라 사회에 자리 잡았고 저도 스스로를 돌아 볼 여유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은 아이들을 키우느라 옷 한 벌도 제대로 사지 못했던 것이 떠올라 좋은 옷을 한 벌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문득 동네에 있는 신앙촌상회가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교회에 가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상회 앞을 지나치기만 했었는데, 이번에는 상회에 들어가 겨울 코트와 재킷을 골라서 사 왔습니다. 그런데 옷을 산 이후로 신앙촌이 너무나 그리운 것이었습니다. 결국 용기를 내어 양재부 시절 친하게 지내던 박청자 권사(소사교회)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박 권사는 반가워하며 요즘 교회에서 천부교 50년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데, 하나님 모습도 나오고 같이 일하던 양재부 건물도 나온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마음에 기쁨이 차오르면서 다시 교회에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주 일요일, 떨리는 마음으로 소사교회에 갔는데 예배가 시작되기 전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습니다. 화면 속에 하나님 모습을 보는 순간 너무나 그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다큐멘터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눈물을 흘린 저는 새로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그때부터 매주 소사로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새벽예배에도 나가고 싶어서 집과 가까운 인천교회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2007년에 교회에 다시 나오면서 추수감사절 예배에도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날 신앙촌에 도착해 친한 권사님과 함께 새마을금고 앞을 지나 숙소로 가는데, 어디선가 말도 못하게 진한 백합꽃 향기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향은 예전에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마다 맡았던 향취와 똑같았습니다. 옆에 있던 권사님도 “어디서 백합꽃 향기 나지 않아요?”라며 놀라워했습니다. 향취는 새마을금고 앞에서부터 생명물 받는 곳까지 이어졌고, 저희는 그 길을 걸으며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계속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2015년쯤에도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드릴 때 향취를 맡았습니다. 하나님 찬송이 시작될 때부터 맡아지던 향취가 예배를 마치고 기도를 드릴 때까지 지속되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요즘 천부교 경전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제가 지금껏 따라온 분이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은혜로 함께 해 주실 때 은은히 퍼지던 백합꽃 향기의 기억은 여전히 제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귀한 은혜를 생각할수록 오랜 세월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지난날이 깊이 뉘우쳐집니다. 이제는 앞으로의 시간을 하나님께 모두 드리고 성결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구원의 길을 밝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모든 시험을 이겨내고 끝까지 이 길을 따라갈 것을 굳게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신앙체험기
“은혜로 가르쳐주신 구원의 길,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은혜로 가르쳐주신 구원의 길,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1944년 전라남도 영광군 단주리에서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저는 12살이 됐을 무렵 처음으로 전도관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네의 큰 도로가에 오막살이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머물고 있는 그곳에서는 주일마다 찬송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곳은 영광전도관의 전신이었습니다. 아직 영광에 전도관이 생기기 전이라 전도활동 차원에서 임시로 집을 빌려 대학생 반사가 와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저와 친구들은 주말마다 찬송소리가 들리는 그 집 마당에서 줄넘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놀았습니다. 가끔씩은 방 앞까지 가서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찬송하는 모습을 몰래 보며 킬킬대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웃는 소리를 듣고 반사 선생님이 문을 활짝 열고 나와 저희에게 같이 찬송을 부르자고 하면, 저희는 ‘와-’ 하며 멀리 도망갔다가 다시 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짓궂은 장난에도 화 한번 내지 않던 선생님에게 저와 친구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저의 첫째 오빠가 오막살이 전도관에 다니면서부터 저희도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몇 없던 전도관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 수십 명이 되면서 영광읍에도 전도사님이 정식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교인들은 뜻을 모아 오막살이 대신 제대로 된 전도관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교인들은 건축 자금을 마련하고자 땅을 빌려 수박을 심어서 팔았습니다. 정성껏 키운 수박들의 크기가 유달리 커서 시장에 가면 좋은 값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수박을 키우는 한편으로는 공사에 쓰일 흙벽돌을 만들었습니다. 진흙과 볏짚을 잘 반죽하여 만들면 단단한 벽돌이 되었고, 나중에 그 벽돌을 사용해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교인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작지만 뜻 깊은 영광전도관이 완성되었습니다. 한 번은 저희 어머니께서 엄지손가락을 다치신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는지 병원에도 가지 않으시고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 결국 상처가 덧나 심각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뒤늦게 병원에 가보니 의사가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라며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전도사님은 매일같이 저희집에 찾아와 어머니의 손가락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캐러멜을 녹여서 발라주고, 축복솜으로 환부를 감싸주셨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 어머니의 손가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히 나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어머니의 손가락은 상처가 심해 쉽게 나을 것 같지 않았는데 축복 캐러멜과 솜으로 깨끗하게 회복되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신기한 일이라며 무척 고마워하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같은 동네에 살던 절친한 언니(故조연주 권사, 신앙체험기 335회)가 한 명 있었는데, 기성교회에서 성가대를 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저는 언니를 전도하고 싶었지만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던 언니는 쉽사리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냇가에서 같이 빨래를 하다가 제가 전도관이 참 길이라고 말하면, 언니는 장로교회가 진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회가 진짜라며 펄쩍 뛰던 연주언니도 전도관에서 사람들이 체험한 은혜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언니는 좀처럼 전도관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그렇게 빨래는 안하고 토론만 하는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저는 안 되겠다 싶어 언니에게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마침 광주전도관에서 집회가 열린다고 하여 언니를 설득해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집회장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예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헐레벌떡 예배실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는데 옆을 보니 언니가 고개를 숙이고 계속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배가 끝나면 박 장로님께서 떠나실 것이 걱정되어서 “연주언니, 잠깐만 고개 들고 박 장로님 좀 봐봐” 하면서 말을 거는데 그 순간 향취가 제 코를 스쳐 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진하고 좋은 향이어서 언니도 향기를 맡았냐고 묻자 연주언니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언니도 향취 은혜를 받았다는 말에 “거봐! 하나님께서 전도관이 참 길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신다니까!” 하고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연주언니는 집회에서 깨달음을 얻었는지 그날 이후로 장로교회에 완전히 발길을 끊고 소사와 덕소신앙촌을 거쳐 기장신앙촌까지 입주하며 흔들림 없는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친한 언니와 함께 광주전도관 집회에 찾아간 날 너무나 진한 향취를 맡게 돼 돌아가신 첫째 오빠가 생명물로 아름답게 피어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라 오빠의 장례식 이후 전도관에 다니게 된 사람도 있어 하나님께 안찰을 받고 나오니 얼굴이 배꽃같이 하얘지고 몸이 하늘로 둥둥 뜨는 듯 해 은혜로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 그 후 광주로 이사 간 저는 광주전도관에 다녔습니다. 광주에서는 백화점 총책임자로 일하는 큰오빠의 일을 도와주며 틈틈이 신앙촌 간장을 팔았습니다. 나무로 만든 커다란 간장통을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팔러 다녔는데, 맛 좋은 신앙촌간장은 그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때 단골이 된 손님들이 지금까지도 신앙촌상회에서 간장을 구입하며 소중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1974년에는 큰 오빠가 물에 빠져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전남 여수로 야유회를 간 오빠는 오동도로 가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비가 많이 내려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 다리를 건너기 어렵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직 다리를 건너지 않은 직원들은 안전한 육지로 대피했고, 이미 다리를 건너는 중이던 직원들은 다시 육지로 되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책임자였던 오빠는 거친 비바람 속에서 직원들을 한 명 한 명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모든 직원들이 안전하게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집채만 한 파도가 오빠를 덮쳤고, 직원들을 데리고 오느라 힘이 빠진 오빠는 결국 파도에 휩쓸려 변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궂은 날씨 때문에 오빠를 바로 건질 수 없는 상황이어서 하루가 지나서야 오빠의 시신이 인양되었습니다. 비보를 듣고 급하게 달려간 장례식장에서 보게 된 오빠는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준비해 간 생명물을 수건에 묻혀 오빠의 이마를 닦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계속 흐르던 피가 곧바로 멈췄습니다. 이어 광주전도관 전도사님이 입관예배를 진행해 주셨는데 예배가 끝나고 나니 오빠가 어찌나 환하고 편안해 보이던지 꼭 단잠을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환하게 핀 오빠의 모습에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특히 기성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앞으로는 저집 식구들이 다니는 전도관을 다녀야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오빠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 몇몇은 생명물의 권능에 감화되어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기장신앙촌에서 하나님께 안찰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안찰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이 참 곱구나”하고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안찰을 받고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몸이 둥둥 뜨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땅을 딛고 걷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공중을 걷는 듯했습니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걸어 나오는데, 저를 본 사람들이 ‘어머!’ 하면서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리둥절해하니 주변 사람들이 말하길 제 얼굴이 배꽃처럼 너무나 하얗고 예쁘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얼굴이 피어나 예뻐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나 같은 죄인에게도 은혜를 주셨구나’ 하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은 유수와도 같아서 처음 전도관에 다니며 하나님을 깨달은 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영광전도관에 다니던 시절 눈이 많이 오면 혹여나 넘어질세라 등에 업고 다니던 어린 동생(주미자 권사, 서동교회)은 장성하여 소비조합원이자 든든한 신앙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은혜로 보호하시며 진리의 등대가 되어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죄 짓지 말고 그 세계에 꼭 같이 가자’ 하셨던 말씀대로 맑고 선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오늘도 온 마음을 다해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던 은혜의 순간

가덕도 집회 1950년대 하나님께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시며 진리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1956년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가덕도에서 열린 집회는 많은 순회 집회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지금은 다리가 연결되었지만, 당시 가덕도는 배로만 접근할 수 있는 섬이었습니다. 1956년 8월 28일 자 신앙신보에는 가덕도 집회의 소식을 전하며, 『이 땅의 방방곡곡에 전도관의 건립과 함께 기도처가 도처에 세워지는가 하면, 그 은혜의 […]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마세요”

이번 신앙체험기 특집에서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자유율법을 지키며 삶의 변화를 체험한 분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자유율법은 양심의 법이자 죄와 죄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는 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양심의 주인이심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양심의 의미와 성결한 마음으로 살기 위한 노력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기준을 자유율법에 두시며, 그 법을 지켜야만 구원에 […]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려”

<신앙체험기 512회> 인천교회 배순자 권사 1편

저는 1941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교회에 다녔는데, 학교 친구가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같이 가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처음 다녔던 교회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 곳이었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교인들은 목사파와 장로파로 나뉘어져 말 그대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습니다. 급기야 예배 중이던 목사를 단에서 끌어내리고 장로가 대신 예배를 인도하거나, 몸싸움 […]

하나님의 귀한 말씀 기도의 제목이 되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아뢰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의(義)를 위하여 간절히 구하고 기도할 때, 그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하늘의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가 드리는 기도의 제목은 다르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고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와 관련된 체험기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기도 속에 담긴 간절한 […]

Through God’s power, I have gained joy and peace in my heart

Sunwoo Hye-guk, Seungsa

My sincere desire to truly believe in God originated from my search to find joy in my heart. Born in Jeongju, Pyeonganbuk-do, my family had been Christians since the first missionaries arrived in Korea. Baptized while still in my mother’s womb, I grew up attending a Presbyterian church. At the age of 23, I got […]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마음의 기쁨과 평안 얻어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선우혜국 승사

제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마음에 기쁨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저는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처음 들어온 당시부터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양가가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세례를 받고 태어나 장로교회에 다녔습니다. 23세 되던 해에 결혼을 하였고, 1947년에는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내려와 6․25 전쟁을 겪게 되면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

“성신과 악신의 역사를 분명하게 구분지어 주신 하나님”

<신앙체험기 510회> 영덕교회 김숙자 권사

1940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에서 태어난 저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관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영해면에는 전도관이 없었는데 가까운 영덕전도관 사람들이 찾아와 전도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중에는 서울에서 전도관을 다니던 영해면 출신 김차정 언니(現소사교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덕 전도사님과 반사들, 그리고 차정언니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앞으로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리자 했고, 그 자리에 있던 저와 친구들은 흥미가 […]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는 은혜는 변함이 없어”

<신앙체험기 509회> 장위교회 황정자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10년 가까이 전도관에 가지 못하니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서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다시 신앙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은 저는 서울로 상경해 동대문구 이문동에 정착하여 1970년도 후반부터 이문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문전도관에 다니면서 저는 삶의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은 것이 너무나 죄송하고 마음에 걸려서 이제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하루하루 기쁘고 감사한 […]

하나님의 은혜가 담긴 생명물의 권능

돌아가신 분을 생명물로 닦아 드리면 굳어있던 몸이 부드럽게 변하고 혈색이 감돌며 은혜의 살이 돋아 아름답게 피어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사후 경직이 일어나 온몸이 굳고 피부색이 어둡게 변하지만, 생명물에는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담겨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권능을 깨달아 천부교인이 된 사람이 많은 중에 몇 […]

여수집회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따르게 돼

<신앙체험기 509회> 장위교회 황정자 권사 1편

저는 1940년생으로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7살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는데,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그 이후로 저는 자주 토하고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아직 어렸던 저희 4남매를 위해 재혼을 하셨습니다. 새어머니께서 마르고 병약한 저를 많이 걱정하셔서 약을 쓰고, 굿도 해보았지만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제 상태가 도무지 나아지지 않자 어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