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은혜 안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일할 때 가장 큰 기쁨 느껴

은혜 안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일할 때 가장 큰 기쁨 느껴

저는 1942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우(牛)시장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마을 장터에서 나물을 팔며 살림을 꾸려가셨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52년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면서 저희 남매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살길이 막막해진 저와 형제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7촌 아저씨 댁에서 일손을 거들었는데, 일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돈은 모이지 않았고 앞날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저는 가진 거 하나 없이 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도 마땅히 지낼 곳이 없어서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운 좋게 소사신앙촌 근처의 새끼줄 만드는 공장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새끼줄 공장 사장님은 신앙촌 교인이었습니다. 사장님의 여동생이 가장 먼저 하나님 집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았고, 아버지의 입관예배를 전도관식으로 드린 뒤 아버지가 생명물로 아름답게 피어난 모습을 보고 가족 모두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사장님을 포함해 가족 모두 소사신앙촌 아파트에 입주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도관이나 신앙촌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사장님 덕분에 자연스레 전도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신앙촌의 모습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러다 사장님을 따라 신앙촌에도 몇 번 가보고, 예배에도 참석해 보았지만 그저 구경 삼아 바라만 봤을 뿐 신앙생활에는 뜻이 없었습니다. 이후 새끼줄 공장에 일감이 줄어들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데, 마침 오리 농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농장 주인을 찾아가 면담하던 중 전에 일했던 곳 사장님이 신앙촌 분이셨고, 소사신앙촌에도 몇 번 가 본 적 있다고 하자 몹시 기뻐하며 즉시 저를 채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촌 사람들의 정직함과 성실함이 사회에서 신뢰받는 것을 보니, 저도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마침 하나님께서 집회를 여신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오만제단을 찾아갔습니다. 일단 예배실에 들어가 앉았지만 찬송을 몰라 그저 손뼉만 따라 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갑자기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향기는 스쳤다가 사라지고, 잠시 뒤 다시 은은하게 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더니 마음에 기쁨이 점점 차올라, 앉은 자리에서 몸이 하늘로 둥둥 뜨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몸이 가벼워져서 하늘로 뜨는 것 같은 신기한 체험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예배실을 가득 메운 이슬성신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던 중 어느 순간 예배실 안에 안개처럼 뽀얀 것이 가득 차올라 단상에 계신 하나님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건물 안에 안개가 끼는 것이 이상해 뒤를 돌아보니 창밖은 아주 맑고 청명한 날씨였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날 코끝에 맡아졌던 향기와 예배실 안에 가득했던 뽀얀 것이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새벽예배에도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는데도 피곤하다거나 멀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발걸음이 땅을 딛는 것 같지 않게 가벼워서 그 먼 거리를 날아갔다 왔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가끔 너무 일찍 도착하는 날에는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맡으며 오만제단 앞에서 기다리다가 창가에 불이 켜지면 반가운 마음으로 예배실에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1962년 덕소신앙촌 건설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강공장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제강공장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현장을 찾으셔서 작업을 살펴보시고, 직원들에게 안수도 해주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눈안찰을 받았는데, 처음 하나님의 손이 닿았을 때는 눈이 빠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런데 자주 안찰을 받을수록 눈이 맑고 시원해지는 것을 느껴서 계속 안찰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찰을 다 받고 나면 가슴속까지 시원해지고 몸이 둥둥 뜨는 것처럼 가벼워졌고, 마음에 기쁨을 가득 안은 채 일하러 가곤 했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 가장 신기했던 일은 하나님께서 공장에 오실 때면 향취가 강하게 맡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향은 세상의 어떤 꽃향기로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좋았고, 가슴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스며드는 향기였습니다. 일하다가 향취가 진동하기 시작하면 ‘아, 하나님께서 공장에 오셨구나’ 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덕소에서 참 많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제강공장에서는 뜨거운 쇳물을 다루기 때문에 자칫 방심하면 화상을 입기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생명물을 바르면 흔적도 없이 낫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또 한 번은 예배실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목에서부터 뱃속까지 불에 타는 듯 뜨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속이 시원해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그것이 불성신이라고 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심이 너무도 고마워 오래도록 머리를 숙여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1970년대에는 기장신앙촌으로 옮겨 메리야스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생산된 ‘엑스란 내의’는 “안 입어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큰 인기를 얻어 국내는 물론 해외로도 많이 수출되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지낸 시절이었지만, 거기서 얻은 보람과 자부심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1974년에는 첫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의 입술이 바싹 마르고 심하게 열이 나서 급히 의무실에 데리고 갔는데, 아이는 그 잠깐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슬픔을 잠시 뒤로하고 저는 생명물을 가져와 직접 아이의 몸을 깨끗이 닦아주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예쁘게 피어난 아이의 얼굴을 보며 생명물의 놀라운 권능에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짧은 생을 마친 아이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제 슬픔까지 거두어 주신 것만 같았습니다. 생명물의 권능을 다시 느낀 때는 1998년, 아내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습니다. 아내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출장 중이라 조금 늦게 신앙촌에 도착했고, 장례반에서 미리 생명물을 입에 넣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입관예배가 시작되기 전 아내를 확인하러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얼굴이 환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5년 가까운 투병으로 살이 많이 빠져 거의 뼈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날 제가 본 아내의 얼굴은 뽀얗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와 있었고, 입술도 분홍빛으로 물들어 참으로 고운 모습이었습니다. 아들도 “엄마가 살아 있는 것 같다”며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입관예배를 드리고 나니 아내의 얼굴에는 이슬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너무나 평안한 모습이어서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예배 시간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마음에는 기쁨이 넘치도록 샘솟아 어느 순간 예배실 안에 안개처럼 뽀얀 은혜가 가득 차올라 하나님 단상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할 정도. 세상을 떠난 아이와 아내가 생명물로 환하게 피어난 모습을 보며 이슬성신 은혜의 권능을 다시금 느끼게 돼 2000년에 저는 고향인 경북 상주로 내려가 서대구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서대구교회가 신축하게 되었고, 저는 무언가 보탬이 되고 싶어 틈나는 대로 교회에 와서 청소와 뒷정리를 도왔습니다. 당시 허리 통증이 있었지만 봉사를 하니 일상의 활력소가 되고 몸도 더욱 건강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신축의 마지막 단계였던 비둘기 종각이 세워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2014년 마침내 간절히 염원하던 신축예배를 드리던 날, 전국 각지에서 교인들이 찾아와 함께 기쁨을 나누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다음날, 신기하게도 저를 괴롭히던 허리통증이 씻은 듯 사라지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과거 하나님께 은혜받고 몸이 가벼워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신 되뇌었습니다. 기장신앙촌에서 살던 시절, 밤하늘에 축복이 내리는 장면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밝은 빛줄기가 하늘에서 쏟아지듯 내리던 그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없이 부어주신 은혜의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젊은 시절 은혜 안에서 기쁘게 일했고, 또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주어진 일에 마음과 정성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많은 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교회 청소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닦는 심정으로 성전을 깨끗이 하며, 더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아와 은혜받기를 기도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남은 시간 또한 기쁨과 감사의 기도로 채워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앙체험기
“은혜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려”

“은혜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려”

(지난호에 이어) 당시 저는 전도관에 있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해서 예배시간이 되기도 전에 예배실에 가 있었습니다. 예배실에 가면 저처럼 먼저 온 사람들끼리 모여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는 예배실 안에 이슬비 또는 소낙비처럼 이슬성신이 내렸습니다. 분명 비처럼 보이는데 바닥은 물론 옷도 전혀 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슬성신이 내리고 얼마 뒤에는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예배실로 들어오셨기에, 저는 이슬성신이 내리면 ‘하나님께서 오실 시간이 됐나보다’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에 저는 결혼을 하고 서울 봉천동으로 이사를 갔고, 아이를 낳으면서 두 해쯤 교회를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어디 전도관에 다니시느냐고 여쭈니 봉천전도관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전도관의 위치를 물었고, 그 길로 봉전전도관을 찾아가 다시 신앙생활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1976년에는 친정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어머니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이제 내가 늙어서 죽을 텐데 무서워서 어떡하니?”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라고 말씀드리며 교회에 함께 가보자고 권했습니다. 어머니는 알겠다 하시며 몇 달간 저와 함께 전도관에 다니다가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입관예배 때 전도관 식구들이 하나님께 축복받은 비누를 가져오셨고, 비누를 물에 풀어서 어머니를 깨끗이 씻어드렸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다시 뵌 어머니는 얼굴이 뽀얗게 피어 주무시는 듯 편안해 보였습니다. 친척 오빠는 어머니의 얼굴이 너무나 보기 좋다며 여러 번 감탄하며 이야기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저는 안양으로 이사하였고, 그때부터 신앙촌 제품을 판매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밍크 이불과 빨랫비누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욕은 있었지만 제품을 판매해본 경험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도 되었습니다. 그때 신기하게도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이 잇따랐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제가 빨랫비누를 유달리 많이 가져온 날이 있었는데, 그걸 보신 옆집 아저씨가 선뜻 나서서 대신 판매해 주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는 리어카에 비누를 싣고 가시더니 그 많은 비누를 모두 판매해 주셨습니다. 얼마 뒤에는 앞집 아기 엄마가 비누에 흥미를 보이더니 바구니에 비누를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모두 판매해 준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신앙촌 제품에 관심을 갖고 도와주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큰 힘을 얻었고, 연이어 완판되는 비누를 보며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소비조합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소비조합으로 활동하는 동안 좋은 품질의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꼈고, 신앙촌을 신뢰해 주시는 고객을 만나면 그렇게 기쁘고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일하는 매 순간이 보람되고 감사함으로 가득했던 시간이었습니다. 1980년 4월 5일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는 구원을 줄 수 없는 존재임을 밝히셨고, 1981년 1월 3일에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의문이 단번에 풀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성경 속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두 딸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은 롯이 어떻게 의인이라 불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와 성경의 거짓을 밝히시니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했습니다. 또한 전도관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이 놀라운 은혜의 권능을 체험하고 증거했기에, 은혜를 내리시는 분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기장신앙촌에 안수를 받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안수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고, 저 역시 한참을 기다린 끝에 안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안수를 받으니 진한 향취가 맡아지기 시작했고,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도 향취가 가득했습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계속 이어지는 향취를 맡으면서 저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가슴에 깊이 새길 수 있었습니다. 1983년 무렵, 하나님께서 소사신앙촌을 방문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첫째 딸과 둘째 딸을 데리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실 맨 앞자리에 아이들을 앉혀놓고 저는 뒤편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아이들이 저한테 와서 하는 말이 “엄마, 하나님께서 비를 맞고 계신데 어떻게 아무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뜻을 알 수 없어 다시 물어보니, 아이들이 말하길 천장에서 물이 새는지 소낙비가 계속 쏟아져서 예배드리는 내내 하나님께서 비를 맞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같이 예배를 드렸지만 예배실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단상 주변을 둘러봐도 바닥에 물이 고인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아이들이 본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너희가 본 것이 바로 이슬성신이란다.” 하고 알려주자, 두 아이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자신들이 은혜를 받은 것을 알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예배실 가득 내리시던 하나님의 이슬 같은 은혜 소낙비처럼 쏟아져도 옷도 바닥도 젖지 않아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한 두 딸아이도 체험하게 돼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저의 첫째 딸은 일곱 살에 신장염에 걸린 뒤로 몸이 계속 아파서 입퇴원을 반복하느라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은 복수까지 차오르는 모습을 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이를 데리고 축복을 받으러 기장신앙촌에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딸에게 쉭쉭 축복을 해주시는데, 손에서 뽀얀 것이 나와 딸에게 향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무척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아이는 안수를 받은 이후로 차츰 건강을 회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토록 걱정하던 큰딸의 건강이 좋아지자 저는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낙원에 가신 뒤의 일입니다. 소사신앙촌에 사시는 권사님께서 안양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하시길, 남동생이 안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입관예배를 드려줄 수 없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남동생이 천부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우리식으로 입관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하셔서 저희가 입관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영안실에서 본 고인의 모습은 피부색이 검게 변해있고, 몸도 뻣뻣하게 굳어있어서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잠시 후 남자 장례반 권사님들이 오셔서 고인을 씻겨드리는 동안 저희는 밖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입관 예배를 마치고 나니 고인의 얼굴이 좀 전과 달리 뽀얗게 피어 무척 편안해 보였습니다. 장례반 권사님들 말로는 축복 비누를 물에 풀고, 그 물을 수건에 묻혀 고인의 다리부터 닦아드렸는데, 수건이 지나간 자리의 피부가 하얗게 변했다고 했습니다. 마치 검은 도화지에 흰 물감을 묻힌 붓이 지나간 것처럼 확연히 차이가 나서 너무나 놀라웠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렇게 뻣뻣하던 고인의 몸이 부드러워져서 앉힌 채로 수의를 입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례반 권사님들 옆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본 영안실 직원도 매우 놀라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이외에도 입관예배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권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얼굴에 가루분을 바른 것처럼 뽀얗게 피어났고, 또 어떤 분은 콧등에 이슬이 송골송골 맺히기도 했습니다. 저는 입관예배에서 경험하는 성신의 역사 앞에서 매번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부교 식으로 입관예배를 드린 후 뽀얗게 피어나는 고인의 모습 볼 때마다 놀라우신 성신의 역사에 경이로움 느껴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지금까지 이 길을 따라왔지만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니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사는 자유가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알기에 앞으로도 자유율법을 지키며 은혜를 간직하기 위해 힘쓰고자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 말씀대로 저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이 길을 따라갈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이슬 같은 은혜를 받으니 그 은혜를 계속 간구하게 돼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1편

예배실에서 기도드리던 중 백합꽃 향기 같으면서도 산뜻하고 시원한 향 맡아져 향취 은혜임을 깨닫게 돼 노구산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할 정도로 이슬 같은 은혜가 집회장에 자욱이 퍼져 반사 활동 당시 예배실에 들어갔는데 박하사탕처럼 시원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고 가슴 속이 시원해지며 처음 맛 보는 기쁨이 솟아나 저는 1941년생으로 경기도 오산에서 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살던 집 바로 옆에는 앞마당이 유난히 넓은 […]

큰 위기가 올 때마다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뉴욕교회 안음전 승사

제가 처음 하나님을 따라 나오게 된 동기는 잊을 수 없는 감사한 기억 때문입니다. 1950년 당시 저희 가족은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살고 있었고 남편은 트럭 2대에 직원 4명을 두고 자그마한 운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6․25 전쟁이 발발했고 저희 가족은 일가친척이 있는 양평에 얼마 동안 피신해 있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살아보려던 중에, 또다시 인민군이 […]

Grateful to God Who Has Protected Me in Every Great Crisis

Ahn Eum-jeon, Seungsa

The reason I first came to follow God was because of an unforgettable and precious experience of gratitude. In 1950, my family lived in Palpan-dong, Jongno-gu, Seoul. My husband owned a small transport business with two trucks and four employees. That year, the Korean War broke out, and our family fled to Yangpyong where relatives […]

“기도하고 찬송하며 간절한 마음이 될 때 은혜를 허락해 주셔”

<신앙체험기 516회> 소사제2교회 백종찬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전도관에 다닌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전도사님께서 저와 김정범 씨에게 이제 전도사로 나가야 하지 않겠냐며 교육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처자식이 마음에 걸려 고민이 되었지만, 이 귀한 은혜의 진리를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전도사 교육을 받으러 김정범 씨와 함께 돈암동 전도관에 갔습니다. 거기서 오전에는 체계 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

“전도관에서 성신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니 새로운 세상이 열려”

<신앙체험기 516회> 소사제2교회 백종찬 권사 1편

무더운 여름날 고인을 모신 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계속 관 주변으로 불어와 성신의 바람으로 고인을 지켜주셔 김천 전도관에 다니며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를 맡게 돼 그것이 향취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의 기도 드려 저는 1942년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농가의 외아들이었던 저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보리, 벼, 감자, 수박, 참외 등을 키우셨고, 풍년이 든 해에는 장터에 나가 작물을 판매하기도 […]

Grateful for the Unchanging Presence through the Holy Dew Spirit

Lee Kyo-sun, Senior Deaconess (2)

Though I was overwhelmed with vague fear and anxiety due to the Pacific War and the Korean War, meeting and following God has allowed me to live joyfully. After hearing about life in the village of faith, my father, who had initially opposed my attending the Chunbukyo Church, began supporting everything I did. I am grateful for God creation of a […]

이슬성신 은혜로 변함없이 함께해 주심에 감사 드려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이교선 권사님 (2)

태평양전쟁과 6·25전쟁으로 막연한 두려움과 근심 싸였지만 하나님을 뵙고 따르며 일생을 기쁘게 지내 유교적인 부모님 반대 심했지만, 은혜의 가치를 알고 굳건히 나아가 신앙촌의 생활상을 들으신 후에 아버지께서 모든 것 후원해 주셔 진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귀한 터전을 일구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1958년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처음으로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안찰을 받는 […]

Joy and Delight Overflowed in My Heart After Receiving Grace

Lee Kyo-sun, Senior Deaconess (1)

I was born in 1936 in Bogae-myeon, Anseong-gun, Gyeonggi Province, as the eldest daughter in a family of one son and three daughters. Our family ran a large pharmacy and general store on a main road, and we lived in prosperity as we gradually expanded our farmland year after year. My father, a self-made man, […]

은혜를 받고나니 마음속엔 기쁨과 즐거움만 샘솟아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이교선 권사님 (1)

저는 1936년 경기도 안성군 보개면에서 1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대로변에서 큰 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했던 저희 집은 해마다 농토를 늘려가면서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자수성가하신 아버지는 근면하게 일하시며 모든 면에 존절하고 깨끗하게 생활하셨고, 저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세상을 바르고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 지역의 학생들이 안성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

“죄짓지 말라 하신 말씀을 새기며 올바르게 살아가고 싶어”

<신앙체험기 515회> 충무교회 정봉남 권사 2편

돌아가신 어머니 입에 생명물을 넣어드리고 생명물을 묻힌 수건으로 몸과 얼굴을 닦아드리니 어두웠던 얼굴이 환하게 피어 70세 노인이 30대처럼 보여 주변에서도 무척 놀라워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두 달간 의식이 없었는데 관장님이 병실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크림을 가슴에 발라주시니 기적적으로 의식이 돌아와 귀한 은혜로 지켜주신 하나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려 (지난 호에 이어) 얼마 뒤 저는 친한 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