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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촌 건설의 신화(6) 전기, 수도시설

공장 · 가정용 전기는 자가발전으로
발행일 발행호수 2092

◇ 여러 사람이 상수도용 폴리에틸렌 파이프가 길게 생산돼 나오는 것을 돕고 있는 광경

`큰 물탱크 두 곳에서 꾸민 식수를 공급, 공장·가정용 전기도 자가발전으로`

신앙촌 건설은 생활에 필수적인 전기와 수도도 자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61년 7월 31일자 신앙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신앙촌 건설의 3대 이념이라 하면 ‘자립경제’‘진실한 양심’‘신앙 혁신’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무려 1만 여 명이 살고 있는 300여동 주택 건물과 50여동의 공장을 외원(外援)이나 도움은 한 푼도 받음이 없이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다.

생산공장을 움직이는 전력도 이러한 자립정신에 입각하여 자가발전을 통해 얻었다.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공장에는 그 공장 소요 전력에 적합한 발전기를 가지고 있으며, 주택의 전등을 위한 전력은 1, 2구 두 발전소에서 공급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5만제단과 가로등은 따로 5만제단 발전실에서 보내준다.

1구 발전소는 동력 300㎾로서 1구 전부와 각 공장 등에 송전하고 있으며 2구 발전소는 금년 6월 신설된 것인데 동력은 100㎾이고 2구 3구와 계수리 등의 주택에 송전하고 있다.

1957년 15㎾의 조그마한 발전기를 처음으로 구입하여 신앙촌 건설 초창기에 동력으로 사용하였는데 금년 들어 디젤엔진으로 대체하고 계속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이 발전기들의 고동소리야말로 날로 전진하는 신앙촌의 맥박 소리와도 같다.”

당시 우리나라의 전력사정은 매우 나빠서 인근 소사 지역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상태였는데 소사 신앙촌에는 자가발전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어 충분한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전기 공급 사정을 잘 알려주는 일화로, 상공부 장관이 소사 신앙촌을 방문하여 타 지역으로 전기를 공급하자는 제안을 했을 정도였다.

식수는 공업용 수로와 2개의 물탱크를 신앙촌 주민의 식수로 사용하였다. 1960년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었던 폴리에틸렌 파이프를 사용하여 상수도를 가설하는 획기적인 공사를 하였다.

다시 당시의 건설 상황을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 본다.

“저는 1958년 초에 신앙촌으로 왔습니다. 그때 신앙촌 건설이 한창이어서 손이 모자랐기 때문에 장세호 건설대장이 저를 그날부터 일을 시켰습니다. 맨 처음에 한 일이 시멘트 하역 작업이었습니다. 몇 시간 하역을 하다보면 먼지로 두 눈만 반짝이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기쁨은 넘쳤고 힘드는 줄 몰랐습니다.

새벽예배가 끝나고 밤 12시까지 일을 해도 피곤함이 없는 것이 신기하였습니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집이 몇 동씩 지어졌습니다. 그 후 건설대원이 A, B반으로 나뉘어 A반은 주로 주택, B반은 제단건축과 학교를 짓는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저는 그후 건설대 서무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사무실은 오만제단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넘치는 은혜를 받았으므로 아무리 힘든 일을 하여도 힘든 줄을 몰랐고 피로함을 전연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힘들고 무거운 일은 서로 자기가 하려고 나서다 보니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났으며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선생’이라고 호칭할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남이 나보다 신앙적으로 앞섰다는 존경의 뜻이었습니다.” (조응화, 71. 한일물산(주) 대표이사)

“하나님께 안수를 받고 나면 힘든 것이 사라지고 몸이 가벼워지면서 기쁨이 넘쳐나니 사람들은 서로 한 번이라도 안수를 더 받으려고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저희들 입에서는 항상 찬송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니 어떤 일을 해도 힘들지 않았고, 기쁜 마음으로 즐겁고 신나게 일하던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손수희 집사, 80. 기장신앙촌)

“당시 하나님께서는 종일 건설현장을 두루 살피시며 일하는 대원들의 머리 위에 일일이 안수해 주시고 때로는 직접 불러 안찰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입에서는 늘 찬송이 터져 나왔고 일하는 기쁨에 세월의 흐름도 잊을 정도였습니다. 밖에선 힘들고 어려운 일은 서로 피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신앙촌에서는 남의 일이 아니고 자신의 구원을 위한 성업임을 깨닫게 되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피곤한 줄 모르고 힘든 일일수록 일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쌓아 가는 일의 실적이 나의 공로가 되어 구원과 직결된다는 생각이 들수록 일에 대한 욕망이 더해졌습니다.” (김춘옥 권사, 66. 기장신앙촌)

“소사신앙촌에 입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염색공장 근처에 우물을 크게 팠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물 파는 현장에 먼저 가 계시다가 저희들이 돌을 가져다 놓으면 한 사람 한 사람 빠짐없이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그때쯤 어느 날 며칠 동안 아무 이유 없이 어깨가 뻐근하고 아파서, 저는 새벽예배를 마치고 우물에 쌓을 돌을 이고 내려오면서 하나님께 아픈 어깨를 축복해 주십사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돌을 이고 와 우물 파는 곳에 놓은 후 안수를 받으려고 하나님 앞에 섰는데, 하나님께서는 제 머리에 안수를 해 주시더니 제가 미처 말씀을 드리기도 전에 제 어깨를 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어깨는 언제 아팠었나 생각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고 아프기 전보다 어깨가 더 가볍고 가뿐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음속 생각까지도 속속들이 들여다보시며 은혜를 부어주셨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강대선 권사, 79. 덕소신앙촌)

또 다른 사람의 증언. “하나님께서는 건설 당시 직접 삽질을 하셨고, 일하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흙발이라도 손수 벗기시고 뺨을 대시며 축복하시는 모습을 보고, 인간에게는 볼 수 없는 사랑의 역사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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