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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촌 건설의 신화(10) 언론의 신앙촌 보도①

신중하겠다면서 편견 못 버려
발행일 발행호수 2096

“피뢰침은 왜 달았나?” 엉뚱한 시비 벌이고 신중하겠다면서 편견 못 버려

하나님과 신앙촌에 대한 언론의 왜곡보도가 봇물을 이루고 있던 1958년, 『신태양』이라는 월간지 11월 호에 오소백(83) 기자의 ‘신앙촌 르포’가 실려 있다. 오소백 기자는 조선일보 기자, 한국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등의 사회부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기자였다. 그러나 그는 김경래, 정을병 등과 함께 신앙촌에 대한 악의적 기사를 많이 쓴 사람으로 유명하였다. 다른 언론의 보도는 시온의 경제를 다룰 때 보도록 하고 우선 오소백 기자의 르포를 살펴 보기로 한다.

당시에 한국사회를 진동시켰던 신앙촌에 대한 기사를 쓰는 것은 곧 그 신문이나 잡지를 불티나게 팔리게 하는 것이었다. 신태양사는 오소백 기자의 글을 실으면서, “이번 호에는 박태선 장로의 신앙촌 르포를 선택하였다. 문제도 간단치 않고 신문의 일방적인 비난도 감정에 치우친 감도 없지 않아 있어 본지에서는 신중을 기하는 동시에 오소백씨 자신도 최대의 성의를 기울이고 집필하였다. 연 7일을 탐방하여 다각도로 취재한 결과를 독자에게 보고하는 바이다.

‘르포 기사는 오소백’ 이라고 정평이 있는 동씨가 완벽을 기한 야심 르포이니만큼 독자의 반응을 기다리겠다.”라고 ‘편집 후기’에서 밝힐 정도로 ‘신앙촌 르포’를 중요기사로 다루었다. 신태양사는 당시 언론의 이성을 잃은 신앙촌 보도태도가 너무했다고 느꼈던지, ‘일방적이고도 감정에 치우친 감이 있어 신중을 기해 취재하겠다’라고 하면서 대단한 의욕을 보였지만 오소백 기자의 공정하지 못한 선입견과 취재태도는 이른바 ‘특별 르포’의 제목을 ‘신앙촌과 종교주식회사’라고 붙인데서 곧바로 드러났다.

신앙촌운동의 본질은 제쳐두고 신앙촌의 경제활동에 부정적인 포커스를 맞추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르포 기사 첫마디에서, “백만 신도에 수십 억대의 돈을 번 신앙촌의 이름은 삼척 동자들까지도 알고 있다. 종교라는 이름의 간판을 걸고 그들은 지능적인 대기업을 하고 있다. 무질서한 사회 현실과 기성 기독교의 부패–이런 것도 이런 집단을 낳게 한 원인이 될 수 있다.”라고 자기의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선입견으로 가득 찬 오소백 기자의 글이지만 1958년 당시의 이만제단 모습이나 신앙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부분도 있어 살펴보고자 한다.

오소백 기자는 1958년 9월, 2주에 걸쳐서 서울중앙전도관을 찾아 취재에 들어갔다.

“중앙전도관은 원효로 버스 종점 한강에 면한 언덕 위에 우뚝 자리 잡고 있다. 이화대학교 강당과 맞먹을 정도로 굉장히 큰 건물이다.

중앙전도관은 밤이 깊도록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일일 신자가 되어 조용한 마음으로 발을 옮겼다. 스피커를 통해서 찬송가 소리가 변두리 일대를 뒤흔든다.”

그러다가 오소백 기자는 느닷없이 종탑 위에 보이는 피뢰침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

“종탑위에 높이 피뢰침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신과 통하고 있다는 전도관에서도 역시 벼락은 무서워하는 모양이다… 운운.” 건물과 사람의 안전을 위해 설치된 피뢰침을 가지고 ‘벼락이 무서운 모양’이라고 하는 오소백 기자의 사시(斜視)에 그저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된다. 오소백 기자의 눈에는 다른 곳의 피뢰침은 당연한 것이고 전도관의 피뢰침은 문제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의 취재는 계속된다.

“아침 아홉시, 벌써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전도관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안내라는 완장을 두른 여학생들이 십여 명 양쪽에 나란히 서서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다.

늙은이나 병자들이 나타나면 뒤를 떠밀기도 하고 부축하기도 하여 예배당 앞까지 안내한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박수와 찬송가의 도가니 속에서 정신을 차려 신도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모두 얼굴은 ‘홍당무’같이 되었고 ‘한증막’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온도’가 있어 보인다. 사실상 체열도 오를 것이다. 박수라는 것이 일종의 ‘운동’인 이상… 자칫하면 나도 손바닥을 칠 뻔한 것을 몇 번이나 억제했다.

둘러보니 남자보다 여자가 절대 다수이다. 여자가 다섯이면 남자는 둘 정도의 비례로 나간다. 어떤 종교든지 남자보다 여자가 많지만 전도관의 경우는 더욱 그것이 뚜렷하다. 마이크만 해도 두 개가 준비되어 있고 스피커만 해도 100여개 가까이 기둥과 벽에 설치되어 있다. 전국 어느 성당이나 어느 예배당이 이렇게 치밀하게 ‘장치’되어 있을 것인가. 아무리 구석에 앉은 사람일지라도 박장로의 설교는 일언일구 놓치지 않고 스피커를 통해 전달된다. 성가대는 2 층 오른편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흰 가운을 입은 남녀들은 성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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