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신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쁨의 은혜를 주시는구나!”
<신앙체험기 500회> 천안교회 김순모 권사(지난호에 이어)
기성교인들의 횡포는 끝이 없었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정확한 지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전주에서 멀지 않은 시골 마을에도 하나님께 은혜받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기에 주일예배를 마치고 그곳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 장소는 전형적인 시골 가정집이었는데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모여 이제 막 예배를 드리려던 찰나 마을에 전도관이 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장로교회 사람들이 마당에 들이닥쳐 고함을 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폭력적이고 못되게 굴었는지 집에서 농사 짓던 호박을 모조리 따버려 못쓰게 만들고, 새끼를 밴 어미 돼지를 발로 차는 바람에 뱃속에 새끼가 죽게 되었습니다.
장로교인들이 마당을 엉망으로 만들며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방 안에 모인 전도관 교인들은 저런 몹쓸 짓에 반응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드리자고 하였습니다. 다 함께 간절히 기도드리며 눈물을 흘리는데 어느 순간부터 방앗간에서 기름을 짜는 것처럼 고소한 냄새가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방안을 가득 메우며 진동하는 고소한 향에 ‘장로교인들이 참기름병을 던져 깨뜨렸나’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얼마 뒤 제풀에 지친 장로교인들이 돌아간 후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고소한 냄새가 나지 않았을뿐더러 깨진 참기름병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향취가 고소한 향으로도 맡아진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호해 주셨음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1958년에는 소사신앙촌에 들어가 건설대 사무실에서 일했습니다. 전주에 있던 두 아이도 소사신앙촌으로 데려와 키웠는데 당시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던 둘째 아들이 시도 때도 없이 코피를 흘려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밤에 자다가 코피가 나면 베개가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자주 생겨서 저는 결국 둘째를 데리고 하나님께 안찰을 받으러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마를 탁 쳐주셨는데 그때 아주 강한 향취가 진동했습니다. 안찰을 받고 나니 그렇게 자주 쏟아지던 아이의 코피가 거짓말처럼 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후 소비조합으로 전향한 저는 메리야스, 간장 등 품질 좋기로 입소문 난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그때 동아일보 사건이 터졌습니다. 동아일보는 그전부터 계속해서 전도관과 신앙촌을 터무니없이 비방하는 기사를 내고 있었는데, 급기야 이슬성신이 찍힌 사진이 조작되었다는 허위 보도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고 체험한 은혜를 조작된 것이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이에 많은 전도관 교인들이 기사 정정을 요구하기 위해 1960년 12월 10일 동아일보사를 찾아가게 되었고, 동아일보사 앞에서 허위 보도를 정정하라는 구호를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밀어대는 사람들로 인해 맨 앞줄 사람들이 동아일보사 정문 안까지 떠밀려 들어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동아일보사 주변과 사내에 미리 배치되어 있던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거칠게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곤봉에 맞아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발생했으며, 3층 높이 창문 밖으로 내던져져서 크게 다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태가 진정되고 경찰서에서 조사받게 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경찰에게 “직접 보고 체험한 은혜를 거짓이라고 하니 억울하여 기사를 정정해달라고 한 것뿐인데 어떻게 저희에게 이러십니까?” 하며 조목조목 반박하였고, 경찰은 “자네는 취조를 받는 사람인가, 취조를 하는 사람인가?” 하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러나 결국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투옥되었고, 저도 약 4개월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저의 수감 소식을 알고 화가 난 시부모님은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말라며 심하게 반대하셨고, 저는 하는 수 없이 천안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생계유지를 위해 과거 바느질 배웠던 솜씨를 살려 양재학원을 운영하며 신앙과는 점점 멀어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시장에 고무신을 사러 가게에 들어갔는데 그곳에 신앙신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신문을 펴서 하나님 말씀, 전도관과 신앙촌의 소식을 읽으며 기뻐했고, 가게 주인에게 물어 천안에도 전도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오래 쉬면 다시 못 다니는 줄로만 알았던 저는 교회에 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전도관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하나님이 오셔서 다른 사람들은 다 안수해주시고 저만 안 해주시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천안전도관 새벽예배 때 몰래 갔다가 누가 볼세라 얼른 도망을 오기도 했습니다. 결국 저는 일곱 살 난 막내아들이라도 교회에 다녔으면 해서 천안전도관에 보내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은 전도사님이 집에 찾아와 저도 교회에 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오래 쉬어서 갈 자격이 없다고 말씀드리니 괜찮으니까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바다가 보였습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 생각하며 바다를 바라보던 중 어디선가 진한 향취가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는데 눈을 떴음에도 코에서는 향취가 계속해서 맡아지고 있었습니다. 방 안 가득 진동하는 향취 은혜에 저는 눈물을 흘리며 천안전도관에 다닐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때가 1975년이었습니다.
천안전도관에 다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서울 노량진 전도관에 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예배를 인도해 주시기 위해 예배실에 들어오시던 하나님 모습을 뵈니 너무나 죄송스럽고 또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단에 서시자 하나님 머리 위에 광채가 나면서 얼굴이 아주 환하고 빛이 나셔서 너무나 귀하고 아름답게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장로교인들의 횡포에도 방 안에 모여서 기도드리자 고소한 향이 맡아져
안찰 받기 위해 기다리는 데 말도 못 할 기쁨 흘러넘치고 하나님과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어 주셔
축복일에 숙소 안에서 안개처럼 뽀얀 이슬성신 내려 많은 은혜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
그 후로 꾸준히 하나님을 따르며 축복일에 안찰도 많이 받았는데 그중 1985년 4월 29일에 기장신앙촌에 가서 안찰을 받은 일은 너무도 신기하여 기록까지 해놓았습니다. 하나님께 안찰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그사이 향취가 진동하며 가슴속에 기쁨이 말도 못 하게 흘러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심장 쪽에서 물이 막 끓어 넘치는 것처럼 기쁨이 넘치던 중에 하나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하나님께서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그때 “아! 하나님은 기쁨의 신이라 하셨는데 나에게 기쁨의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교인들을 안찰해 주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손가락을 걸고 “그 세계 꼭 같이 가자”하고 말씀해 주셨는데, 저는 그때의 다정하신 음성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천안에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는 장례가 날 때마다 시신을 씻기는 일을 많이 맡아서 했습니다. 환하게 피어난 고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저희와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렸습니다. 시신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습은 수없이 많이 봤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때는 맨 처음 시신이 핀 모습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제가 전주전도관의 구역장으로서 장례를 담당하던 때였는데, 부모 없이 조부모 밑에서 자라던 어린 소녀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찬송을 부르는 동안 저는 축복솜에 생명물을 묻혀 아이의 몸을 닦고, 수저로 생명물을 떠서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아이는 뽀얗게 피어났고 방안에는 향취가 가득하였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감탄했고 너무나 예쁘게 피어난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아이의 가족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할아버지가 들어와 아이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쳐다보고 나갔는데 갑자기 아이의 얼굴빛이 어두워지면서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교인들은 할아버지를 멀리 가시라고 한 뒤 다시 생명물로 닦이고 찬송을 불러서 다시 피어나게 했습니다. 아이의 할아버지는 전도관에 다니지 않는 분이었고 장례식장에서 연이어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교인들은 혹여나 아이의 모습이 변하지 않도록 장례식 내내 곁을 지키고, 장지에 가서 매장할 때도 동행하여 아이를 운구하여 묻어주었습니다. 매장을 위해 땅을 파 내려가는 와중에도 향취가 진동하였고, 그 자리에 있던 교인들은 은혜로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그 뒤로도 하나님 은혜가 변함없이 함께해 주신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 적이 있었는데 몇 해 전 여성회 축복일이었습니다. 축복일을 맞아 신앙촌에 가서 숙소 3호 방에 자리를 잡고 짐을 푼 뒤 잠시 쉬기 위해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방 입구 쪽에 안개와 같이 뽀얀 이슬성신이 내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혹시 안개가 아닐까도 생각해 봤지만, 숙소 안은 실내일뿐더러 그 위치에만 안개가 있는 것을 보고 이슬 은혜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안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숙소 안을 돌아다녔고, 저는 축복일에 많은 은혜를 부어주신다고 하셨던 하나님 말씀이 떠올라 깊이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인생에서 두 번의 전쟁과 숱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기구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기쁨과 소망을 알게 되었고, 한없이 내려주신 은혜로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많습니다. 어둡고 험한 세상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어 제 삶의 등대가 되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