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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촌 건설의 신화(1) 현대 홈타운①

반세기 전의 아름다웠던 소사신앙촌, 범박동 현대 홈타운으로 변모
발행일 발행호수 2085

소사 신앙촌이 있었던 부천시 소사구 범박동 일대에는 현재 신앙촌 현대 홈타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1950년대 후반에 신앙촌이 건설된 이후 50년 가까이 이 지역은 자연녹지로 묶여 있는 바람에 재건축이 불가능하여 주거 환경이 많이 열악해져 있었다. 한국 천부교에서는 신앙촌 신도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이 지역의 재건축을 계획하였다. 시온학원 등 교단 소유 약 70,000여평과 기타 개인부지 약 30,000여평 도합 약 100,000여평의 부지위에 사업규모 5,540세대 약 7,600억원에 달하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 건축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천부교에서는 1991년 12월 주민협의회를 발족시켜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아파트를 공급하기 위한 계획안을 마련하고 1993년 12월 동 지역을 자연녹지에서 주거지로 용도변경을 한 후 1996년 시행사(施行社)를 선정하고 2000년 3월 시공사(施工社)를 현대건설로 선정하여 본격적인 건축 공사에 들어갔다.
천부교 교단에서는 신앙촌 신도 1600여 세대가 최대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이들은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는 면적의 약 5배에 해당하는 아파트를 무상으로 제공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보상은 아파트 재건축 사업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유례없는 대단위 아파트촌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권을 노리는 불순 세력이 침투하여 여러모로 재건축을 방해하기도 하였으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앙촌 현대 홈 타운 아파트 단지가 완공을 목전에 두게 되고 일부는 입주가 이루어져 일찍이 신앙촌에 입주하여 아직까지 그곳에 살고 있던 천부교 교인들에게는 막대한 개발이익이 돌아가게 되었다.

온갖 방해 속에도 재개발 성공해  신앙촌 주민에 개발이익 환원약속 지켜
이번에 현대 홈 타운 아파트에 입주한 신앙촌 교인 몇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전정남 권사(61)는 아파트 45 평 널찍한 거실에 앉아서 딸 노기자씨(41)와 손녀 허윤화양(14)과 웃음꽃을 피우면서 이것이 꿈이 아닌가 하고 몇 번이나 생각하였다. 전정남 권사가 1976년 신앙촌에 입주하면서 긁어 모아 준비한 돈은 단돈 14만원. 그녀는 이 돈으로  신앙촌 D동을 사서 신앙촌에 들어왔는데 재건축시에 그것의 5배 평수를 무상으로 받고 조금 더 보태 오늘날 3억 5000만원 짜리 아파트에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꿈인가 생신가 할 만도 하였다.
전남 영암 독천전도관에서 은혜를 받아 천부교 신자가 된 전권사는 무던히도 고생을 많이 했다. 남편이 혈우병이라는 중병을 앓으면서 엄청난 남편의 병원비에다가 생활비와 1남2녀 교육비까지 모두 그녀가 안아 맡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전정남 권사는 ‘먹고 살기 위해’ 소비조합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신앙촌 생명물 간장을 조금씩 팔았다. 처음에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 새댁은 수줍어 남의 집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정남 권사는 간절히 하나님께 의지하고 꾸준하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소비조합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가 아닌 고객의 입장에서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지켜 나갔다. 드디어 사업은 날이 갈수록 길이 열리기 시작하여 인천시 주안 일대는 그녀의 단골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고 고객을 있는 정성을 다 하여 받드는 전정남 권사의 ‘고객 관리’ 비법은 많은 사람들을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열렬한 전정남 권사 ‘팬‘으로 만들었다. 전정남 권사의 ‘팬‘중의 한 사람은 매장을 내라고 자기 건물을 내 주어 시골 새댁 전정남 권사는 이제 시온쇼핑 주안2동 매장의 어엿한 사장이 되었다.
건물 주인은 ‘전정남 권사에 반해서’ 10년째 보증금도 월세도 받지 않는다. ‘월세’로는 매달 몇 십만 원어치의 신앙촌 물건을 가져가는 것으로 대신한다. 건물 주인은 전정남 권사를 따라 소사신앙촌 교회에까지 나오는 반 교인이 되었다.
전정남 권사가 필요하다면 통장이고 인감 증명이고 그냥 내주는 고객이 수두룩하다. 그녀의 대쪽 같은 양심을 추호도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고객들의 이와 같은 기대에 부응하여 전정남 권사는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했다. “내가 돈을 떼이면 차라리 마음이 편해도, 남에게 단돈 1원이라도 갚을 것이 있으면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소비조합 35년에 그녀는 남에게 빚진 것이 일절 없다.
전정남 권사는 고객들이 “신앙촌을 몰랐다면 이 좋은 것, 이 귀한 신앙촌 물건을 어디 가서 만날 수 있었겠는가?”라고 신앙촌 물건을 두 손에 쥐고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을 보면 말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 그녀는 이제 생계의 수단이 아닌 전도의 수단으로 소비조합을 한다고 했다.
“신앙촌에 입주한 이후 5 식구의 생계뿐만 아니라 자녀교육, 남편의 병 수발까지 넉넉히 해결할 수 있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고 이제는 이와 같은 ‘고대광실’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게까지 해 주셨으니 그 감사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전정남 권사는 말하였다. 전정남 권사의 가족에 대한 희생과 헌신은 그녀의 가족들까지 깊이 감동시켰다. 어머니의 고생으로 고려대 대학원까지 졸업한 장남을 비롯하여 은행원에서 최근 명퇴한 장녀 노기자씨, 손녀 허윤화양, 그리고 전정남 권사의 신앙으로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은 남편과 사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정남 권사를 존경한다. 그들은 모두 전권사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정남 권사가 믿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어머니가 믿는 천부교를 부인하지 못한다.
노기자씨는 지난 봄 양재부 패션쇼의 모델까지 나가는 등 교회활동에 활발하며 “할머니의 모든 것이 다 좋아요.”라고 말하는 허윤화양은 제단에서 또래 중에 제일 열심이고 믿지 않는 사위까지도 전정남 권사의 일이라면 전적으로 돕는다. 맨손으로 신앙촌에 들어와 영육간에 큰 축복을 받은 전정남 권사 가족.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오직 감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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