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따라 신앙촌에 입주했으나 적응이 쉽지 않아
이영두 승사(1) / 서마산교회저는 193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습니다.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저는 줄곧 김해에서 자랐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호국군(병역법 제정 이전에 예비 병력 확보를 위해 창설된 군)에 입대하였는데, 얼마 후 6·25 전쟁이 일어나서 바로 전장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전쟁에 나간 저는 낙동강 전선의 일부인 영천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한번은 공산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중 박격포탄 파편이 날아와 목에 박히는 큰 부상을 입게 되었는데, 곧 부산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고 다행히 건강에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도 했으니 취업도 하고 열심히 살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저곳에 일자리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제게는 ‘상이용사’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상이용사라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많은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봤을 때였고, 비록 두 손 두 발 모두 성하였지만 저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 같은 상이용사에 대한 사람들의 냉대로 인해 저는 여러 번 상심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1961년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났고, 새 정부에서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상이용사들을 위해 정책적으로 기업체와 관공서에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마산 동중학교 서무와 김해 명지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그런 정책을 추진하여도 그동안의 냉대가 하루아침에 해소되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발령을 받아서 간 두 군데 모두 다른 사람들과 이중 발령이 나서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 부조리한 모습과 세상에서 느끼는 모멸감 때문에 저는 심적인 방황을 하였고, 이런 저를 지켜보던 아내는 그만 화병을 얻어 제대로 밥을 먹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김해전도관에 다니던 장모님이 저희 내외의 딱한 모습을 보고는 제단에 같이 가자고 하여 아내는 장모님을 따라 제단에 나갔고 저도 몇 번 가 보게 되었습니다.1962년 10월 말경이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 살고 있던 처제가 신앙촌을 구경시켜 준다며 아내더러 한번 놀러 오라고 하여 아내가 다녀왔는데, 오자마자 대뜸 하는 말이 “우리가 살 곳은 여기 김해가 아니라, 바로 신앙촌이에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빈부나 귀천의 구별이 없고, 주인 없는 상점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양심적이고 깨끗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사신앙촌에 들어가서 살겠다고 하며 그곳에 가야 자기의 화병이 낫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보고도 따돌림 당하며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고 사느니 얼른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확신을 갖지는 못하였는데, 아내는 다녀온 지 보름 만에 짐을 정리하더니 자기 먼저 가 있겠다며 저도 빨리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면사무소에 사표를 내고 저도 정리를 하고 있으려니 주위에서 난리가 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공무원 자리는 하늘의 별 따기인데,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신앙촌으로 간다고 하니 형님을 비롯하여 주위에서 자꾸 말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주저하기도 했지만, 이미 아내가 소사로 간 터라 3일 후 소사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11월의 쌀쌀한 바람 속에 소사에 도착한 저는 짐을 메고 신앙촌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소사신앙촌 앞에 있는 아치를 지나려는데 좀 이상하였습니다. 아치를 지나서 들이쉬는 공기가 이전에 맡았던 여느 공기보다 맑고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몇 걸음 전에 들이쉬던 바깥의 공기는 왠지 탁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때 ‘신앙촌의 공기는 바깥하고는 다르구나. 신앙촌은 이름대로 뭔가 다르긴 다르구나.’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소사신앙촌에 입주를 하였으나, 솔직히 제가 김해에 있을 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아내를 따라 입주를 하다 보니 그곳 생활에 쉽게 적응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김해제단 출신의 양 권사님이란 분이 돌아가셔서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김해에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심한 경우에는 시신이 너무 굳어 관절의 뼈를 부러뜨리면서까지 수의를 입히는 걸 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입관하는 것은 너무나도 수월하고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냥 물과 다를 바 없이 보이는 생명물로 시신을 닦기 시작하니 뻣뻣하던 관절들이 이내 요리조리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수의를 입히는데, 허리를 숙이고 팔다리를 굽히며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듯이 하니 저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생명물의 권능을 직접 본 저는 신기하면서도 놀라웠고 그리하여 신앙촌 생활에 대한 각오를 다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반이 탄탄하지 못하였던 저의 적응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처음에 제과 공장에서 일을 하였는데, 일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꾸 바깥 생각이 나고 차라리 바깥에서 직장을 구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계속 들었습니다.<다음호에 계속>